이덕일

 


한국의 역사왜곡자유사역사학자
백지원
김대령
'''이덕일'''
이주한
김상태
문정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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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역사적 · 정치적 성향
4. 인식과 평가
4.1. 이덕일의 '고대사/조선사'에 대한 전문성
4.4. 대중적인 평가
5. 다른 학자들과의 논쟁
5.1. 법정 다툼
6. 칼럼
7. 저서
8. 그 외
9. 둘러보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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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저서 中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
충청남도 아산시 1961년 10월 7일 출생으로 대한민국숭실대학교 소속 역사학계 화제인물이다. 역사 관련 책을 저술하거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역사 관련 평론으로 많이 알려졌었다.
역사학 관련 박사 학위나 논문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문성이 없는 인물이라고 보기 어려우나, 권위를 위시한 곡학아세와도 같은 여러 가지 논란과 역사 왜곡을 일으켜 부정적인 평가가 우위로 전환된 인물이다.
이덕일에 대한 소개 및 평가글
유튜브 채널
참고로 조선시대 중기 '우국가(憂國歌)'를 지은 시인 이덕일(1561~1622)과는 동명이인이다.[1]

2. 생애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태어나 아산 온양천도국민학교-아산중학교-천안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함과 동시에 강사로 일했으며,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주의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연구 논문인 '동북항일연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사단법인 한가람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3. 역사적 · 정치적 성향


동북항일연군은 사회주의계, 즉 훗날 북한을 구성하는 독립운동단체인데, 80~90년대까지만 해도 강한 반공의식 때문에 북한 계열 독립운동 단체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동북항일연군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고 그 지원자가 중국 공산당이다.[2]
정조 독살설과 관련하여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왕 독살사건, 여인열전, 누가 조선왕을 죽였는가' 등이 있다. 독살설 관련은 조선왕 독살설 문서로.
정치적 성향은 분명하지 않다. 친민주당계 뉴스채널인 팩트TV에 길거리 특강을 가기도 했지만, 반대로 국가보안법을 운운하기도 하였고, 민족주의적인 성향도 강하면서 김일성을 연구하기도 했다. [3][4] 본인 왈 근대 독립운동사도 슬슬 다루겠다고 했으니 현대 정치에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드러날 수도 있다. 다만 원래 전문 분야가 이쪽이었으니 그나마 이쪽에는 불쏘시개를 쓰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노론의 사상이 식민주의와 연결되어 현 보수 이데올로기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노론 음모론의 신봉자인 이상 보수 우파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최소한 중도 혹은 진보 좌파일 듯.

4. 인식과 평가


역사 소설을 쓰는 환빠라는 세간의 평 때문에 김운회처럼 비전공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는 이덕일은 어쨌든 근현대사 독립운동 관련해 '''역사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전공자'''다. 문제는 근현대사 전공자가 책 팔아먹기 위해서인지 '''고조선부터 조선 후기, 근대사까지 2천 년이 넘는 시대 전반을 모두 다루고 있다'''는 것. 물론 역사학이란 박사전공 시대나 지역에 머물라는 법은 없다. 역사는 관점을 지니는 한 시대의 앞과 뒤로 연결지어 논할 수 있다. 역사학 연구에서는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근현대사에 이르는 각각의 분야는 같은 역사 연구라 해도 기본적인 연구의 접근 방법부터 필요한 언어 능력까지 완전히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단의 근대사학이 만들어 놓은 구분법이라서 이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아날학파나 심리역사학, 주제 중심의 역사학 등이 이런 근대구분법을 거부하는 편이다.
한 시대의 한 분야를 집중탐구해서 주류설을 제창한 학자의 연구성과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분석돼서 비판받고 수정되는 게 비일비재한데,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덕일이 전공자라 한들 2천 년간이 넘는 역사 전반의 영역에서 무오(無誤)한 식견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게 더 비정상적이다. 심각한건 아래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이덕일은 조선 후기 영역에선 지금 학계에서 무엇이 주류설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고대사서인 사기를 다루며 기본적인 단어인 묘예(苗裔)의 해석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화려한 수식은 없어도 다른 역사서와는 달리 비교적 무난히 잘 읽히는 글을 쓴다는 평가를 받는다.

4.1. 이덕일의 '고대사/조선사'에 대한 전문성


  • 고대사: 한문
  • 고려시대사: 한문 사륙변려체[5]
  • 조선시대사: 한문 초서[6]
  • 근대사: 일본어(일본어 근대 문어체까지), 한문[7]
  • 현대사: 영어[8]
이덕일과 그 세력들의 역사 왜곡 사례는 이덕일/비판 문서로.
이덕일이 고대사에 대한 이론들을 보면 단국대 교수인 윤내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윤내현의 이론은 고대 예맥족과 삼한의 영토를 넓게 보고 고조선 지역에 설치한 한군현은 요서 지방에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윤내현의 이론은 예맥족이나 삼한의 영역을 과대 포장하면서 정작 한군현에 대해서는 무지함에 가까우며, 평양에 발굴되는 낙랑군 유물들을 철저히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덕일은 윤내현의 이론이 참신하다 여겨,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어서 이덕일이 내놓는 고대사에 대한 이론은 대부분 윤내현의 영향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덕일이 다른 영역에 극단적으로 무지하다는 걸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임오화변이다. 이덕일은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신병처럼 됐다는 걸 근거로 노론사관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세자 당쟁희생설은 이덕일이 그에 대한 책을 쓰기 전부터 사학계에선 정설이었다. 다시 말해 '''주류사관이었다'''. 오히려 정병설 교수가 비주류설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완전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은 심지어 이은순 교수의 논문조차 몰랐다.
이덕일이 제시했다는 프레임은 1968년 발표된 이은순 현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논문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에서 처음 제기됐다. 이은순은 '사도세자의 고백'이 출간되기 30년 전에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이라는 논문에서 그런 가설을 발표했다. 그것을 발전시켜 1981년에는 한국학보에 "현륭원지 행장과 한중록의 비교 연구"라는 논문을 실었고 1988년 출간된 자신의 저서 '조선후기당쟁사연구'에 수록했다.
 
- 이은순,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사인, 1968(이화사학연구) 이화사학연구소
- 이은순, 현륭원지 행장과 한중록의 비교연구, 1981, 일지사, 이은순
- 이은순, 사도세자의 정치적 생애와 시벽의 분립,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 1988
'''책을 내기 몇십 년 전부터 이미 이은순 교수가 제기해서 "주류사학"이 된 것이 바로 사도세자 당쟁희생설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런 "주류사학" 프레임을 자기 것인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일부에선 착각이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 다시 말해 '''알면서 일부러 그랬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건 아직 증거가 없으니 섣불리 말하는 건 곤란하다.
이덕일은 심지어 사도세자 당쟁희생설을 "주류사학"으로 만든 '''이은순 교수의 논문조차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덕일이 근현대사 영역 빼고는 기본 수준조차 안 된다는 근거다. 학자로서 기본 중 기본인 선행연구 확인조차 제대로 안 했다는 것.
그 외로도 여기서 대표적인 업적(?)을 몇 가지만 쓰자면...
  • '먼 후대의 자손'이라는 뜻으로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단어인 묘예(苗裔)를 '묘족의 후예'로 착각했다. 이 착각은 뿌리가 좀 깊은데, 1990년경 2세대 환빠인 이중재가 대륙설을 주창하면서 만든 해석이었다.
  • "태묘"(즉 종묘)를 "태조의 묘"로 착각해서 완전 딴 내용을 주장했다. 광복 이후 초기라면 모를까 지금 기준에서 제대로 배웠으면 저런 걸 착각할 수는 없다. 학부생조차 아는 내용을 이덕일이 저렇게 적었단건 악의적 왜곡 이라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 자기 전공 시대 범위 안에 들어가는 근대 한국어에 대한 언어학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덕일/비판 문서에서 두음 법칙 관련 내용에 나온다.
다시 말해 근현대사 이 외에 대한 이덕일의 주장은 박사학위 수준의 전문성이 없으며, 철학과 박사학위자인 5.18 민주화운동/왜곡의 대표 유사역사학자인 김대령과 수준이 크게 다를 게 없다.

4.2. 초기엔 의도는 좋았다?


초기엔 순수(?)한 부분도 있었다. 특히 세조정도전에 대한 이덕일의 해석 및 평가는 한국 대중의 역사인식에 발전적인 영향을 준 바 있다. 이덕일이 송시열만큼 '''증오'''하고 '''혐오'''하는 인물이 바로 세조인데, 이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이덕일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세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구국의 결단을 내린 위대한 영웅'이라는 군사정권의 일방적인 칭송과 찬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록 이덕일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군부독재가 청산된 1990년대 말 이후부턴 세조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세조에 대한 이덕일의 시각은 이러하다. 정통성이 결여된 자가 왕위 찬탈[9] → 이에 반발하는 세력의 반란 → 반란을 진압하면서 또 공신책봉이란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쏟아져 나온 공신세력을 태종처럼 적절한 숙청 없이 무작정 친위세력을 키워주면서 자신의 생전에는 왕권이 강화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살아있던 공신들이 원로로서 국정을 장악하여 군약신강의 환경이 조성될 토양을 마련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10]
이덕일의 세조 증오는 이덕일 자신이 그토록 주장하는 '사악하고 강력한 신권에 맞선 왕들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된 토양이라고 주장할 건덕지가 있고 그간의 미화에 대한 반대급부가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덕일이 드라마 <왕과 비> 방영 당시 세조 미화를 비판하며 쓴 글을 보면 이게 이덕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개념글이다.
또한, 그의 서적들은 그 이전까지만 해도 역적으로 평가받았던 정도전의 재평가를 하는 데에 공헌하기도 했다. 극렬 정도전 빠이자 이방원 까인 그는 드라마 정도전의 자문이었으며 집중 강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조와 정도전 등의 시각 변화에 있어서 이덕일이 독보적이었다거나 엄청난 공헌을 했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다.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임용한 선생의 <조선국왕 이야기>에도 잘 나오듯, 세조의 찬탈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그 군사정권 시기의 미화에 대한 반동으로 90년대 많은 소장파 역사학자들이 이미 제기하고 있던 것이었고, 정도전에 대한 재평가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어찌되었건, 쉽게 말해서 자신의 전문분야인 근현대사에는 정확한 사관을 가지고 있고 (왠진 모르겠지만) 조선 초기에 대한 사관도 세종대왕과 관련한 것만 빼고는 상당히 정확한 편.

4.3. 역사 왜곡 및 비판


'''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삼국사기 수정론 식민사관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동북아역사재단 독도 누락 조작 사건
두음법칙 식민국어학설

"역사학에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어요. 뭐냐면 진실은 뭐냐 이거죠. 한사군이 실제로 어디에 있었느냐, 이걸 먼저 파헤쳐야 되는 거죠. 그렇다면 파헤치고 파헤쳐 봐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라는 결론이 나오면 어떡합니까? 초등학교 때. 그거 가르치지 말아야죠. 초등학교 때 배울 게 얼마나 많아요? 이순신 장군 배워야 되고, 을지문덕 배워야 되고, 단군 배워야 되고. 배울 게 그렇게 많은데, 우리 역사를 식민지로 시작했다 이것부터 가르쳐야 되겠어요?"

이덕일, "딴지라디오 벙커1 특강", 2014.10.28, 28:10~28:52[11]

이덕일은 역사 왜곡 뿐만 아니라 다른 학자들을 향한 마녀사냥도 자주 행한다. 자세한 비판에 대해선 '''해당 문서'''로.

"이덕일로 대표되는 사이비 역사학, 이종찬으로 대표되는 극우정치세력이 국회에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치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동아시아를 공부하는 서양학자들에게 아주 나쁜 인식을 주고 있다. 북한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터무니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좋은 학자들이 설자리를 잃고 강요당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 한국 고대사 연구실장 마크 바잉턴(Mark E. Byington) 교수#

누구나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 관점과 취향이 있다. 하지만 나와 똑같은 문구멍으로 보지 않는다고 타인을 공격하거나 남의 시각을 날조해 공격하는 폭력은 광적인 파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폐쇄적 도그마에 빠지면 이성과 감성이 마비되어 자신도 모르게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주한,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2011, 53쪽.


...매국사학자들처럼 『환단고기』를 보는 자는 다 죽여야 한다고 거품을 물 책은 아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내 생각은 추후 자세히 밝힐 것이지만 한두 가지만 미리 말하겠다. 매국사학자들은 『환단고기』가 지 에미를 잡아먹었는지, 지 애비를 잡아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극도로 저주한다. 박노자도 「한겨레 21」과 인터뷰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았다. 나는 어떤 책이든 자유롭게 보고, 자유롭게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덕일 페이스북



4.4. 대중적인 평가


그에게 많은 문제점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그가 대중 역사서로 수많은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높다는 점, 그리고 실제로 책을 써서 부와 지위를 얻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대중들은 사도세자 당쟁설을 사실처럼 믿게 되었으며, 노론/벽파=개쌍놈으로 생각하고 있다. 올바른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여 초중고교에서도 이 설을 사실처럼 말하는 역사 교사들도 많다. 역사 왜곡 드라마를 추천하는 역사 교사들도 많다.
심지어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를 까기 위해 정순왕후가 세도 정치를 시작한 안동 김씨라고 하는 일까지 있다. 그렇지만 안동 김씨는 노론 시파이며, 정순왕후의 집안 경주 김씨는 안동 김씨에게 숙청당했다. 여기에다 안동의 김씨 가문 등이 경북 안동에서 한양 조정을 원격조정한 게 세도정치인 줄 아는 일반인의 오해와 겹쳐 역사가 엉망이 되기도 한다. 아직도 한국의 청소년들은 꼭 그의 저서가 집에 한두 권은 있으며(부모나 학교, 신문의 추천으로) <조선왕 독살사건> 같은 책은 거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노론 음모론은 정치적 편향성 까지 보이기에 진보지지 성향 정치인, 지지자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대표 음모론 중에 하나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나름대로 역사학을 전공했으니 만큼 대중에게 어필하는 능력이 크지만, 그 주장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학자 겸 표퓰리즘에 영합하는 환빠 상업 작가. '''이덕일이 역사학 학위를 받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근현대사 연구 영역이었으며, 조선시대사 전공도, 삼국시대 전공도 아니다. 심지어 이덕일은 고대사의 기본적인 사료해석에서 오독을 저지른 적도 수두룩하다.''' 사학과가 아닌 국문학과 교수에게 처발린 경우까지 있을 정도.
'''그가 책에 쓰는 내용은 자신의 편집이 들어간 주장일 뿐, 학계에서 공인된 설은 아니다. 그것을 유의해야 한다.'''
2012년 10월 26일 제55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연구회, 역사학회 등 대다수 학회들의 회장, 총무이사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주최측의 입장으로 축사를 하던 KAIST 부총장이 유수의 역사학자들 앞에서 자신이 요즘 역사책을 읽고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여기까지는 역사와 거리가 먼 KAIST 부총장의 덕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이덕일의 책이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해당 부총장은 그 책을 읽고 '우리 역사 왜곡이 이렇게 심한지 처음 알았다'고 발언하였다.
어떻게 보면 '''한국시오노 나나미?'''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조차 자신의 상상을 말할 때는 "...가 아닐까."라는 식으로 개인적인 견해라는 점은 분명히 한다. 단지 그런게 자주 나온다는 점이 문제일 뿐[12], 이덕일처럼 그런 상상을 진실이라고 단정짓고 다른 역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부정, 매도하는 행각을 벌이진 않는다. 또한 아래에서 후술하지만 적어도 시오노 나나미 본인은 스스로 아마추어이며 역사학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시오노 나나미는 고증이 이상하다고 까일지언정, 현 사관을 '기독교 사관', '크리스찬들의 음모' 같은 식으로 매도하지도 않으며, 특정 사학자를 모함하지도 않는다.
이덕일이 정말로 놀라운 부분은 그가 비록 근대사를 전공했다고 하더라도 사학과를 졸업하고 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주류 학자 출신이라는 데에 있다. 즉 이덕일식 해석과 주장은 어쩌면 책을 팔아먹기 위한 고도의 전술일 수도 있다는 것. 역사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1차 사료에 접근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실수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덕일은 그런 것도 없다. 시오노 나나미보다 이덕일이 더 나쁠 수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저 역사에 관심이 있고 관련지식이 좀 있는 소설가일 뿐인데 이덕일은 학자라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소설가(시오노)의 주장과 역사학자(이덕일)의 주장은 대중적 신빙성에서 영향력이 다르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인 임승수는 페이스북에서 묘한 말로 사도세자 관련한 이덕일에 대한 비판 경향이 지나치다며 이덕일을 옹호하기도 했다. "물론 이덕일 저자가 학문적으로 부족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덕일 저자를 너무 과도하게 깐다는 느낌이 든다. 전체적으로 진보적 지향의 좋은 책을 쓰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 그 밖에도 김상태의 책을 추천하는 등 묘한 말들을 댓글에 썼다.

5. 다른 학자들과의 논쟁


이미 이덕일은 2000년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쓴 이후로 수많은 전공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충남대 교수 조종업(철학,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비판), 서울대 교수 오수창(국사학, 살아있는 한국사 비판), 한신대 교수 유봉학(국사학), 성균관대 교수 안대회(국문학, 이덕일의 정조 독살설 비판), 전주대 오항녕 교수(국사학, 십만양병설 관련 주장 비판) 등이 이덕일의 편협한 사고와 빈약한 논리에 대해 질타했다. 하지만 이덕일은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긴커녕 자신을 비판하는 학자들을 친일파, 노론 후예로 매도하더니 마침내 아래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2009년 한겨레에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라는 제목 아래 역사학계를 조선사편수회의 후예로 몰아 싸잡아 비난하는 글들을 연재하였다.
그러나 그가 쓴 내용에 남들을 납득시키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누리꾼들의 댓글에서 엄청나게 까이고 말았다. 논거로 드는 문헌 중 하나가 재야사학자의 탈을 쓴 '''문정창'''의 <고조선사연구>.
연재가 끝난 뒤에 이덕일의 조선시대사 논지를 완전히 부정하는 오항녕 고려대 강사(현 전주대 교수)가 반론글을 한겨레에 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오항녕과 이덕일의 논쟁(?)이 신문상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이 논쟁에서 오항녕으로부터 "그는 오류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논거가 무너진 것을 모르나 봅니다"라는 굴욕적인 비판까지 받았다. 사실 이 논쟁은 한겨레 측에서 제대로 불이 붙기 전에 적당히 끝내버린 것이라고 한다. 신문에 실린 반론 글
오항녕 교수는 이후 이 논쟁을 2010년 출간한 조선의 힘에 수록하며 다시 한 번 이덕일을 깠다. 조선의 힘 판매량을 보면 이덕일에게는 굴욕. 여러모로 2010년인 이덕일에게 팔자가 사나웠는지 자신이 추천평까지 써 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정확히는 경종·영조실록, 정조실록) 사도세자와 정조 사망원인에 관해서 이덕일의 주장을 대놓고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영향때문인지 작 최후반부인 고종실록, 망국편에서 이덕일의 추천사가 빠졌다.
그리고 2011년 1월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정병설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한중록을 바탕으로 한 '정병설, 권력과 인간'을 연재하던 도중 이덕일의 저작 사도세자의 고백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덕일은 즉각 한겨레를 통해 이를 비판했으나 정병설 역시 반박하였다. 참고로 정병설 교수는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 비판을 역사비평에 올려버렸고 이덕일의 유사역사학떡실신보냈다. 자세한 건 정병설 문서로.

5.1. 법정 다툼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과 관련하여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는데, 1차 공판을 앞둔 인터뷰에서 일본의 극우 야쿠자 자금이 한국 사학계로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덕일은 김현구 교수를 일본 극우파 시각에 동조했다는 허위사실을 주장했단 이유로 1심에서 명예훼손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2016년 11월 3일 2심에서는 사실 적시와 의견 표명의 사이가 애매하고 임나일본부설은 공적인 관심사이니 폭넓은 논평 자유가 필요하다는 취지 아래 원심 판결을 뒤집어버리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결국 2017년 5월 11일 3심 대법원에서도 무죄가 확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현구 임나일본부설학자 모함 사건 문서로.

6. 칼럼


  • 이덕일 사랑(舍廊) (2005~2009, 조선일보)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2006~2008, 한겨레)
  • 이덕일의 事思史(사사사): 조선 왕을 말하다 (2008~2010, 중앙SUNDAY)
  •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2009, 한겨레)
  • 이덕일의 고금통의 (2011~2012, 중앙일보)
  • 이덕일의 事思史(사사사): 근대를 말하다 (2011~2013, 중앙SUNDAY)
  • 이덕일의 칼날 위의 역사 (2014~2015 , 한겨레)
  • 이덕일의 천고사설 (2014~2015, 한국일보)
  • 이덕일의 역사의 창 (2017, 서울신문)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2018~ 서울신문)

7. 저서


  • 침묵과 왜곡 속에 숨겨진 이야기 (1996, 글동네)
  • 성학십도·동국십팔선정(이상진, 송기섭과 공저) (1996, 자유문고)
  •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1997, 석필)
  •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1997, 석필)
  • 사도세자의 고백 (1998, 푸른역사/2004/2007, 휴머니스트)
  • 누가 왕을 죽였는가(조선왕 독살사건) (1998, 푸른역사/2005/2009, 다산초당)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이희근과 공저) (1999(1~2권)/2004(3권), 김영사)[13]
  • 운부 (2000, 중앙M&B(현 알에이치코리아))
  •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 (2000, 대산출판사)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2000, 김영사)
  •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아나키스트가 된 명문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 (2001, 웅진닷컴/2009, 역사의아침)
  • 오국사기 (2002, 김영사)
  • 역사에게 길을 묻다 (2002, 이학사)
  • 한권으로 읽는 한국사 (2002, 휴머니스트)
  • 이덕일의 여인열전 (2003, 김영사)
  • 살아있는 한국사 (2003, 휴머니스트)
  • 이덕일 선생님과 함께 우리 역사의 벌판으로 달려보자 (2003, 두산동아)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004, 김영사/2012, 다산초당)
  • 교양 한국사 (2005, 휴머니스트)
  • 장군과 제왕 (2005, 웅진지식하우스)
  • 조선 최대 갑부 역관 (2006, 김영사)
  • 조선 선비 살해사건 (2006, 다산초당)
  •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김병기와 공저) (2006, 역사의아침)
  • 다산 천자문 (2006(1권)/2008(2~3권), 웅진주니어)
  • 이덕일의 영웅천하 그 위대한 전쟁 (2007, 김영사)
  • 이덕일의 역사사랑 (2007, 랜덤하우스코리아)
  • 유성룡: 설득과 통합의 리더 (2007, 역사의아침)
  •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김병기 공저) (2007, 역사의아침)
  •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2008, 고즈윈)
  •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그들 (2008, 한겨레출판)
  • 조선의 승려는 북벌을 꿈꿨다 (2008, 랜덤하우스코리아)
  • 이덕일의 세상을 바꾼 여인들 (2009, 옥당)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009, 역사의아침)
  •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2010, 옥당)
  • 조선 왕을 말하다 (2010, 역사의아침)
  • 윤휴와 침묵의 제국 (2011, 다산초당)
  •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2011, 역사의아침)
  • 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2012, 옥당)
  • 난세의 혁신리더 유성룡 (2012, 역사의아침)
  • 이덕일 역사평설 근대를 말하다 (2012, 역사의아침)
  • 산성으로 보는 5000년 한국사(김병기와 공저) (2012, 예스위캔)
  •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김성국, 강동권 등과 공저) (2013, 이학사)
  • 이덕일 역사평설 왕과 나: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2013, 역사의아침)
  •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前)사 (2013, 역사의아침)
  • 정도전과 그의 시대 (2014, 옥당)
  •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2014, 옥당)
  • 이덕일의 고금통의 (2014, 김영사)
  •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만권당)
  • 당의통략(이건창 저, 이준영과 공동 번역) (2015, 자유문고)
  •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만권당)
  • 칼날 위의 역사 (2016, 인문서원)
  • 조선이 버린 천재들 (2016, 옥당)
  • 이덕일의 당당 한국사 (2017, 아라미)
  • 조선 선비 당쟁사 (2018, 인문서원)
  • 이덕일의 한국 통사 (2019, 다산초당)


8. 그 외


  • 한국근현대사 분야도 다루겠다고 밝혔다. # 그런데 사실 이덕일의 박사학위 논문이 독립운동에 대한 것이었다. 즉, 근현대사 쪽이 원래 그의 본업으로 거기 집중하면 될 것을, 전공 밖의 내용을 가지고 대중을 호도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 아나키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 일으킨 저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집필하는 등 한국 아나키즘 역사 연구에도 이름이 알려진 연구자 중 한 명이다. 때문인지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걸 의원과 친분이 있기도 하다. '한국 아나키즘 100년'을 공저하기도 했다.
  • 2011년 여름에는 윤휴를 소재로 한 <윤휴와 침묵의 제국>이라는 책을 냈다. 사실 윤휴가 조세나 민생문제 해결에 열정적이었고 주목할 만한 대안도 많이 낸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문제도 많았던 인물이고 이덕일 본인이 제일 증오하는 송시열의 학설보다도 더 퇴보된 주장을 하기도 했던 인물인지라 무작정 옹호할 만한 인물은 아닌데 말이다.(사문난적 문서로.)
  • 책마저도 성실하게 쓰는 것 같진 않다. 예를 들어서 <조선왕 독살사건>의 정조 파트 대부분, 특히 마지막 몇 문단은 <사도세자의 고백>을 그대로 카피 페이스트했다("정조가 죽자 삼각산도 울었다."라든지, "상복 입은 벼" 이야기가 그대로 진행된다).
  • 초기 작품인 <당쟁으로 보는 조선사>(개정증보판이 바로 <조선 선비 살해사건>)에 실린 프로필 사진을 보면 아주 말랐다.
  •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이라는 책에서 갑주 그림으로 유명한 네티즌의 그림을 표지에 무단 도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들리는 소문에, 뒤늦게 소식을 들은 해당 네티즌은 출판사에 정식으로 항의를 했고 그로 인해 몇백만 원의 보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는 얘기도 있었으나 그냥 100여만원 정도만 받았다.
  • 조용헌 교수의 저서 <고수기행>에서 이덕일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자신의 꿈에서 사도세자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독살당했다며 진실을 밝혀 달라고 했다지 않나, 책 출판 전 이덕일의 책에서 적대시하는 인물이 꿈에 나타나 자기에게 침을 뱉으니 그곳에 종기가 나 고생했다지 않나...
  •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성남시장 시절 그의 저서를 즐겨 읽고 지지한다고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상기한 김현구 교수와의 법정 다툼에서 이덕일이 무죄가 선고되었을때 축하 트윗을 보내기도 했다. # 다만 이재명 지사가 환빠인지는 명확치 않다. 한번도 환국, 치우천왕, 배달 같은 말을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친일을 반대하고 다니는 이덕일의 왜곡된 '투사' 이미지에 기대서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재명 지사는 다른 유명 역사관련 학자들인 최태성, 설민석 강사나 서경덕 교수 등의 글들을 링크, 언급한 적도 있기 때문에 평소 자주 언급하던 일본 우익들을 반대하는 모습이 이런 모습으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이덕일이 주장하는 식의, 식민사관을 몰아내야 한다는 식의 말은 한 적이 있다.
  • 박유하제국의 위안부를 가히 원자 단위로 깐다. 이 책을 반박하기 위해서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 위안부의 분노를 묘사하기 위해 박유하를 일본군을 상징하는 강간범에게 성폭행 당한 여자로 예시를 드는 극단적 행보를 보인다.
  • 2016년에는 식민사학을 규탄한답시고 결성된 재야사학 단체 협의체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
  • 네이버 지식iN에 알바를 푼 모양이다. # 그의 추종자들의 비난 댓글도 볼 수 있다.

9. 둘러보기




[1] 한자도 李德一로 같아서 같은 사람이라고 혼동하기 쉽다.[2]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기도 했으며, 소련 붉은군대 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했다.#[3] 그런데 김일성은 진보적인 좌파라기보다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라 이것 자체는 좌우와 무관할 수도 있다. 애초에 김일성을 연구했다고 김일성을 좋아하리란 법은 없다. 히틀러를 연구했다고 히틀러를 좋아했다는 법도 없듯이. 실제로 북한학 전공 학자들만 봐도 극우에서 극좌까지 이념은 다양하며, 소련 연구자들 중에도 당연히 반공주의자부터 스탈린주의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4] 다만 민족주의자라 해서 반드시 우파라 규정하긴 어렵다. 본래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이념(또는 사회주의)은 상극이기는 하지만, 당장 인도, 남미의 민족주의 마오이스트 반군들을 보자. 아울러 제3세계를 비롯해 아시아 등 국가에서는 민족주의 좌파들도 많았다.[5] 4,6자를 바탕으로 대구를 이루는 한문의 문체. 고려시기까지 성행하다가 쇠퇴했다.[6]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조선시대 1차 사료들은 초서체로 쓰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깊게 들어간다면 이두까지 읽어야 한다. 초서도 초서지만 조선시대 한문은 맹자나 논어처럼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말 어순처럼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었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교열작업이 이루어지는 가장 큰 이유다.[7] 한국 근대사에서 일본이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거기에 연구하는 분야에 따라 중국어나 러시아어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8] 그나마 영어 사료는 번역이 잘 되는 편이기 때문에 의존도가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다. 물론 관련 전공자들은 잘 알고 있어야 하지만, 이덕일이 그 수준까지 파지는 않았다.[9] 이때 왕은 조선에서도 '''정통성이 만렙이었던''' 단종이었다. 단종의 정통성은 그 숙종보다도 정통성이 막강했다. 숙종이 왕세자를 거쳐 국왕으로 즉위한 거라면, 단종은 왕세손부터 시작하는 끝판왕급의 루트를 탔기 때문. 거기다 본인뿐만이 아니라 아버지 문종까지 세종의 적장자에, 본인 역시 적장자였다. 그야말로 정통성만큼은 누구보다도 앞섰던 셈.[10]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세조는 자신의 파벌을 제외하고는 조카인 단종뿐만이 아니라 동복동생이었던 안평대군을 비롯하여 금성대군 등의 종친들까지도 가차없이 숙청했기 때문에, 자기 파벌의 공신들을 제외하고는 지지기반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보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인 공신들을 키워줄 수 밖에 없었고, 끝내 공신들을 숙청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계유정난의 정치적 명분성이 약했기도 했고 세조의 정치력이 할아버지 태종만 못했던 것도 있다.[11] 보았다시피 역사학자로서의 기본 자체가 어긋난 사람이다. 역사학자의 임무는 역사를 연구하고 그 성과를 발표하는 것으로 끝이지 국민들에게 무슨 민족적 자부심을 배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자부심이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면 또 모르겠는데 사실 자체를 왜곡하여 얻는 자부심은 국가적 재앙이다.[12] 시오노 나나미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크게 실수한 경우가 있다. 칸나이 전투 문서로. 아울러 정설이 아닌 것이나 학계 소수 의견 중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과도하게 강하게 미는 경우도 있다. 콤모두스 황제 즉위 직후 전쟁 중단 결정이나 카라칼라 황제의 로마시민권 확대 등의 사례가 대표적.[13] 1,2권의 출판 이후,일반 독자들에게 괜찮은 반응을 얻자 후에 3권을 출판하였다. 1권에서는 역시나 환단고기에대한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역시나 노골적으로 위작이아니라며 헛소리를 시전해 놓았는데 사람들에게 좀 읽힌 대중역사서에 이런 헛소리를 써놓았으니... 다만 이러한 부분만 제한다면 흥미로써 역사를 접하기에는 나쁘지않다. 그리고 이희근도 이덕일에 가려져 그렇지 자기 책에서 간도는 한국령이라는 국수주의적인 입장을 내비춘 적이 있다. 다만 그런것을 빼면 기존에 잘못 알려진 역사를 수정하거나 아동용 역사서적을 쓰고 미시사,민중사를 연구하고 있다. 게다가 이덕일만큼 크게 사고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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