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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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玄菟郡. 고조선(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설치한 한사군 중의 하나인 군현이다. 중국 본토 방면으로 이동하다 고구려에 의해 완전히 쓰러진다.
최근 꾸준히 중국 측에서 고구려가 현도군에서 건국되고 확장되어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고있다. 하지만 역사를 볼때 세월이 지나고 나중에는 '''고구려가 현도군을 몰아내고 그 세력권을 전부 복속시킨다.''' 고구려가 건국되고 성장한 지역이 과거 현도군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명백히 동북공정의 일환이다.
2. 시기에 따른 이동
2.1. 제1차 현도군
고조선이 멸망하고 기원전 108년에는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이 설치되고 이듬해 (기원전 107년)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 진번군, 임둔군이 폐지되었을 때 임둔군의 군현 일부를 흡수했다고 한다.
2.2. 제2차 현도군
기원전 75년, 현도군의 치소(고구려현)가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원고구려 세력 등 토착민의 공격 때문이다. 당시 오환족을 상대하고 있던 한나라로서는 압록강 중, 상류의 지배를 강화할 수 없었고 이때를 노려 한의 압박 지배가 완화되자 토착민들이 공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으로 군치를 옮긴 현도군은 현도성을 수축하는 등 압록강 중, 상류의 이맥(夷貊, 토착민) 세력을 경계한다.
상은태현(上殷台縣), 고구려현(高句麗縣), 서개마현(西蓋馬縣)의 3현이 있었다.
2.3. 제3차 현도군
1세기 말, 후한은 갖가지 자연 재해와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된다. 성장하고 있던 고구려는 제2현도군과 요동군을 줄기차게 공격한다.
결국 내지 쪽인 무순(撫順) 지방으로 후퇴하였고, 이때 원래 있던 고구려현, 상은태현, 서개마현에 더불어 본래 요동군의 현이던 고현(高顯)현·후성(侯城)현·요양(遼陽)현 3현이 더해져 6현이 되었다.
후한 말에 요동 공손씨 정권 세력가의 지배를 받다가 위나라, 서진를 거쳐 315년에는 고구려의 침공을 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미천왕이 313년 낙랑군, 314년 대방군, 315년 현도군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본격 한사군 레이드...
2.4. 제4차 현도군
이후 요서 대릉하로 다시 이치하여 명색만 군현인 채로 전연과 후연을 거치다가 404년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공략하던 즈음 그 교두보로써 편입된 듯 싶다.
3. 위치 논란
- 옥저(함경도)
- 고구려(압록강 중상류)
- 옥저+고구려
- 요서 대릉하
4. 기타
고구려는 현도군을 축출한 이후에도 성 하나의 이름을 현도로 삼았다.
안승이 문무왕에게 고구려왕으로 봉해지면서 '현도'를 언급했다.遣沙飡須彌山,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 "維咸享元年歲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至於建産兄弟 禍起蕭墻釁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湮滅 生人波蕩 無所託心 公避危難於山野 投單身於隣國 流離辛苦 迹同晉文 更興亡國 事等衛侯 夫百姓不可以無主皇天必有以眷命 先王正嗣 唯公而已 主於祭祀非公而誰 謹遣使一吉飡金須彌山等 就披策命公爲高句麗王 公宜撫集遺民 紹興舊緖 永爲隣國 事同昆弟, 敬哉敬哉. 兼送粳米二千石, 甲具馬一匹, 綾五匹, 絹細布各十匹, 綿十五稱. 王其領之."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태조 중모왕(太祖 中牟王)[1]
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2] 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3] 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요, 역사가 8백 년이나 되었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가 일어나고 골육간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사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산과 들에서 위기와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나라에 투신하였으니, 떠돌아다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고 하겠다.무릇 백성에게는 주인이 없으면 안 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로는 오직 그대가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할 사람이 공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전하여 그대를 고구려왕으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아들이고 옛 왕업을 이어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나라로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비단 다섯 필과 명주와 가는 실로 짠 베 각 10필, 목화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또한 연남생은 당나라로 부터 현도군공(玄菟郡公)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