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명패 사건
1. 개요
1989년 12월 31일,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광주특위 및 5공특위 및 광주특위 연석회의 도중, 증인으로 출석한 전두환이 의원들의 질의에는 제대로 답변하지 않고 변명조의 일장연설만 하다가 퇴장한 이후에 명패를 팽개쳐 버린 사건이다.'''"먼저 본 의원이 명패를 본 연단을 향해서 던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그 당시는 이미 위원장께서 정회를 선포하신 뒤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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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세
사건의 배경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으로 인한 민주화 열기 및 1988년 국회의원 선거 직후 국정이 여소야대로 개편됨으로 인해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와 <제5공화국 비리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된 것이며, 이로 인해 5공화국 인사들에 대하여 증인 심문 및 청문회를 개최한 것이 명패사건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일명 5공 청문회라 불리는 이 자리에서, 전두환과 그 휘하 하나회-보안사 군관들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처가 정당한 자위권 발동이었다고 하며 일장 연설을 했고,[1] 청문에 참여한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등 야당의 질문에 대해서는 묵비권으로 일관했다. 이때, 평민당의 이철용 의원이 전두환을 향해 달려가 '''"발포 쟁점부터 밝혀!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외치다가 방호원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
이후 전두환이 끝까지 묵비권만 행사하다가 퇴장하자 당시 특위위원 중 한 명이었던 노무현은 분을 참지 못해 명패를 집어 땅에 내팽개쳤는데, 당시 청문회가 TV로 생중계되고 있었기에 이 장면 역시 전국민에게 그대로 방송되어 깊은 인상을 심어주며 '초선 의원' 노무현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전두환의 묵비권 행사로 인해 청문회에서 아무런 대답도 듣지는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청문회 직후 전두환 내외는 백담사로 들어가고 실질적 유배 상태가 된다.
인터넷이나 뜬소문으로는 '전두환에게 대놓고 명패를 던졌다'는 루머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와전된 것이며 본인의 면전에서 던지지는 않았다. 청문회 영상을 찾아보면, 전두환 퇴장 이후에 명패를 던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풀 영상에서는 명패 던지는 장면은 나오지 않고 던지는 소리가 났으며, 사태가 수습된 후 명패를 던진 사실에 대해 말함으로써 알 수 있던 것도 있다.
생전의 노무현 본인도 이런 루머가 "직접 던진 것이 아니다."라면서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기왕이면 제대로 던져 머리통을 맞출 것이지"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소신 있는 야당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부각되어 많은 지지층을 얻게 되었다. 다만, 전직 대통령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뭐라고 지적하냐?"'''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시는 이제 막 군사 독재 정권이 끝날 무렵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단순히 명패 사건이라는 돌발적인 사건만 가지고 노무현이 주목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청문회에 참석한 의원들 중에서 날카롭고 조리 있는 질문을 차분하게 던져서 일명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몇몇 의원들이 있었다. 노무현은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줬던 초선 의원이었다. 증인 및 여당 의원의 잡아 떼기 및 감싸기, 야당 의원들의 고함들이 오고 가는 난장판 속에서 이들 청문회 스타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더욱 빛났다.
그리고, 이렇게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증인들을 몰아붙이던 모습이 '''해당 청문회의 중요성 때문에 매일 전국적으로 생방송되고 있었기에''' 더더욱 눈에 띄었다. 즉, 노무현은 명패를 던져서 갑자기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5공 청문회의 질의 응답 과정 내내 보인 모습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명패 사건은 '''그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던 노무현이 열 받아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일종의 에피소드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때 스타 정치인이 된 노무현을 가장 먼저 주목하고 대통령 후보로 여긴 언론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수십년 동안 사이가 나빴던 조선일보였다. 그들의 행태야 어쨌든 당시에는 반짝 스타일 뿐이었던 노무현을 장차 대통령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잠재력을 가진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당시 노무현은 김영삼계 정치인이었고 김영삼과 조선일보의 관계가 괜찮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일보가 노무현을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2]
훗날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회 청문회가 정치공세의 수단이 되고 있다며 그 게 바로 노무현 명패사건에서 유래했다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김진태가 간과하고 있는데, 노무현은 그 침착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깨지면서 청문회 스타로 발돋움했다는 것이다. 반면 김진태는 발언 마다마다 논란이 있는 데다, 노무현을 그렇게도 싫어하던 박근혜를 따르는 골수 친박이다. 또한 김진태는 청문회에서 숱한 정치공세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발언은 김진태 본인을 셀프디스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3. 여담
이해찬: 그때 명패를 집어 던졌잖아요
김보협 기자: 나중에 들어보니까 그냥 세게 내려놓았다던데요
이해찬: 아니, 내가 옆에서 봤는데(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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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실제로 명패를 던지지 않았고, 실제로는 언론의 노무현 띄우기라는 일부 논객들의 뇌피셜이 잇따랐었는데, 김어준의 파파이스 노무현 대통령 서거 8주기 특집에 출연한 이해찬 전 총리의 말에 따르면, "그 사건 당시에 자신이 옆에 있었는데, 명패 확실히 던졌다."라고 사실 확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노무현 옆에 앉아 있다가 명패 던지는 거 보고 깜짝 놀란 사람이 바로 이해찬 총리였다.
- 이 사건 이후 노무현을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김대중이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요."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접점이 없던 노무현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었다. 자신의 심복들에게 노무현을 본받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