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주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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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두환 정권에 의해 발이 묶여있던 구 민주공화당 세력이 민주화 이후 만든 정당.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주요 뿌리 중 하나이며, 충청권 보수정당의 시초로 분류된다.
민주공화당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1980년 11월 공포된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묶여 정치 활동이 규제되다가 해금된 유신정권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중흥동지회를 결성하였고 이후 1987년 회칙을 개정, 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약칭은 역시 '공화당'.
2. 상세
김종필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신당 창당을 준비하자, 박정희 정권 시절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들이 조직했던 한국국민당 소속 국회의원 8명과 지역조직 대부분이 합류하여 세를 불렸다. 1987년 10월 창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김종필을 당총재 및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였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종필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8.1%의 득표율을 획득하여 4위를 기록하며 예상대로 부진했다. 구 한국국민당 지지층의 상당수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여파로 노태우로 쏠리는 바람에 기대했던 만큼의 득표율을 올리지 못한 것(...) 그러나 김종필의 대선 출마의 진정한 목적은 안정적인 지지세력을 규합하여 성공적으로 정치에 복귀하는 것이었고 이런 측면에서는 성공한다.[1] 대전·충남 지역에서만큼은 압도적 1위를 기록하여 전무후무 충청 지역주의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은 충남 18개 지역구 중 13석을 휩쓸었고, 서울 3석, 경기 6석, 충북 2석, 강원 1석, 경북 2석을 얻고 전국구에서는 8석을 얻었다. 총 35석을 획득하였고 민정당의 전횡과 민주-평민당 간의 여전한 분열에 실망한 충청권 유권자들을 흡수하면서 득표율도 15%를 기록, 크게 선전했다는 평을 받았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성공한 신민주공화당은 제4당으로서 여소야대 국회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원내 재적 299석 중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을 가져간 상황에서 공화당은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이후 평민, 민주당과 함께 노태우 정권을 견제했다. 그러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기는 했지만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박쥐같다는 평을 많이 받았고 양자분열로 지기는 했다만 어쨌든 민정당이 노태우 이후의 뚜렷한 차기 대권주자를 두지 못한 상황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두고 있었던 평민당과 민주당과 다르게 김종필의 경우 유력 차기 대권주자로 보기에는 지지율이 낮아 잠룡 정도의 평가를 받았던 터였기 때문에 여러모로 지지층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와중에 민정당이 내각제 개헌을 무기로 김종필과 산하 의원들을 유혹하자 합당을 위한 물밑작업에 들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모두에게 부정적이던 신민주공화당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제압하고 1990년 1월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 함께 민주자유당으로 3당 합당함으로써 자동해체되었다.
3. 정당 이미지
정당의 상징색은 김종필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색깔로 알려진 초록색이었다. 당기 바탕도 초록색이었으며 녹색 수레바퀴 형태의 무늬가 있다.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 3당 합당으로 사라졌다가 1995년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면서 초록색 정당 이미지가 부활하였다.
4. 역대 총재
5. 역대 선거결과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김종필 8.1% 낙선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35/299 15.6%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선거 뒤 김종필과 신민주공화당의 첫 공식발언은 '''당락에 관계없이 우리는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