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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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관악구 을)
선거구 분리
임철순[A]
김수한[A]

제13~17대
이해찬
[29]

제18대
김희철
대한민국 국회의원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 개편
심대평[30]
변재일[31]

제19·20대
이해찬


선거구 분리
홍성국[32]
강준현[33]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조순 시정
민선시정출범[34]

초대
이해찬


2대
최수병




대한민국 제36대 국무총리
이해찬
李海瓚 | Lee Hae-chan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출생
1952년 7월 10일 (71세)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
거주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건영3차아파트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본관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1]
현직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장
사단법인 통일맞이 고문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고문
재임기간
제38대 교육부 장관
1998년 3월 3일 ~ 1999년 5월 24일
제36대 국무총리
2004년 6월 30일 ~ 2006년 3월 15일
서명
[image]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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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부모
아버지 이인용, 어머니 박양순
형제자매
5남 2녀 중 다섯째
형 이해명 (1946년생), 이해진 (1948년생),
동생 이해만 (1957년생)
배우자
김정옥
자녀
딸 이현주 (1978년생)[35]
학력
용산고등학교 (졸업 / 22회)
서울대학교 (사회학 / 학사)
병역
면제 (수형)
신체
166cm, A형
종교
무종교[36]
소속 정당

의원 선수
7
의원 대수
13, 14, 15, 16, 17, 19, 20
약력
돌베개출판사 대표
제13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구 을 / 평화민주당)
평화민주당 원내부총무
제14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구 을 / 민주당)
민주당 당무기획실 실장
초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조순 시정)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구 을 / 새정치국민회의)
제38대 교육부장관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구 을 /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제17대 국회의원 (서울 관악구 을 / 열린우리당)
제36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제19대 국회의원 (세종특별자치시 / 민주통합당)
민주통합당 대표
제20대 국회의원 (세종특별자치시 / 무소속)
노무현재단 이사장
사단법인 통일맞이 이사장
더불어민주당 대표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약칭
HC[37]
별명
해찬들, 쿨붱[38], 해골찬

1. 개요
2. 약력
5. 여담
6. 소속 정당
7. 선거 이력
8. 어록
9. 저술 활동
9.1. 저서
9.2. 공저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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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36대 국무총리.
민주화 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20대이던 1970년대 민청학련 사태 때부터 30대 중반까지 학생 민주화 운동에 참가하였고[2] 30대 후반에 김대중의 추천을 받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한 7080 민주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당시 47세), 노무현 정부 시절 국무총리(당시 53세~55세)를 역임했고, 2012년 18대 대선안철수와의 대선 후보 단일화 때문에 금방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의 당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또 제13대~17대, 제19대~2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3대부터 17대까지는 지역구가 서울 관악구 을 지역이었고, 2008년 18대 총선 때에는 불출마했다가 2012년 19대 총선세종시의 신설된 지역구로 내려가 당선됐다. 세종시는 자신이 건설을 지휘했던 곳이며, 자신의 고향인 충남 청양군과 인접한 지역이기도 하다.
민주당계 정당의 대표적인 선거 전략가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1995년 6.27 지방선거조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선거 전략을 담당하면서 조순 후보를 당선으로 이끌어 처음 선거 기획 능력을 인정받았고, 만 43세에 정무부시장까지 지냈다. 그 후 자신이 선거 전략에 관여하면서 대통령 세 명을 배출하여 '킹 메이커'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의 요직을 지냈다.
2002년 16대 대선 때는 노무현 캠프에 참여하여 노무현 정부 탄생에 일조하였고 국무총리 시절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발적인 역할 분담으로 행정부 2인자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돼 역대 국무총리JP와 더불어 실세 총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유이한 사람이 됐다. 세종시의 설계 및 추진 또한 이해찬이 총리로 일할 때 이루어졌다.
이때의 인연으로 민주당에서 문재인과 함께 친노무현계의 인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3] 그래서 보통 언론에 '친노의 좌장'[4]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는 편이다. 문재인도 깍듯하게 형님이라 부르면서 선배로 대우한 사람이다.[5][6]
그리고 7선 국회의원인데[7] 이는 민주당 현역 의원들 중 최다선이며 20대 국회를 통틀어서는 서청원 의원(8선) 다음이다.
민주당의 최다선 현역 의원이지만, 최고령 의원은 전혀 아닌 데다가[8], 여전히 친노계친문계의 큰 어른인 거물이기에 아직은 정계 은퇴를 말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 2022년 대선에서도 만 70세의 나이이니 정치판에서는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다. [9]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지내며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진두지휘하였다. 건강과 나이 등의 문제가 있어 일찌감치 불출마했으나, 이낙연과 함께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을 맡으며 민주당 역사상 가장 큰 승리로 이끌었다. 2020년 8월 29일 당대표 임기를 마치며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사회학 기초 교과서 중 하나인 C. 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공역한 적이 있다.

2. 약력


  • 1971 용산고등학교 졸업 (22회)
  • 1972 ~ 1985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학사)
  • 1978 돌베개출판사 대표
  • 1983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 1985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
  • 1988 ~ 1992 제13대 국회의원(서울 관악 을)
  • 1988 평화민주당 원내부총무
  • 1992 ~ 1996 제14대 국회의원(서울 관악 을)
  • 1992 민주당 당무기획실 실장
  • 1995 초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 1996 새정치국민회의 총선기획단장
  • 1996 ~ 2000 제15대 국회의원(서울 관악 을)
  • 1998 ~ 1999 제38대 교육부장관
  • 2000 ~ 2004 제16대 국회의원(서울 관악 을)
  • 2000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 2003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 창당기획단장
  • 2004 ~ 2008 제17대 국회의원(서울 관악 을)
  • 2004 열린우리당 국회개혁추진단 단장
  • 2004 ~ 2006 제36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2008 제3대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 회장
  • 2009 시민주권 상임대표
  • 2011 ~ 2012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 2012 ~ 2016 제19대 국회의원(세종특별자치시)
  • 2012 민주통합당 당대표
  • 2015 ~ 2016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세종특별자치시당 위원장
  • 2016 ~ 2020 제20대 국회의원(세종특별자치시)
  • 2018 ~ 2020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 2019 ~ 더불어민주당 국회세종의사당추진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
  • 2020 ~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장

3. 생애




4. 비판 및 논란




5. 여담


  • 신림동에서 1978년부터 '광장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한 바 있다. 이 서점은 이해찬이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동생 이해만이 운영하였으며, 처음에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이었으나 이후 고시서적을 주로 취급하게 되었는데 비교적 가격이 비싼 고시서적을 할인 없이 판매해 괜찮은 수익을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유서가 깊고 규모가 큰 서점이어서, 신림동 고시서점 중 목이 좋고 가장 유명했던 '상원서적'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으나, 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되면서 여느 고시서점들과 마찬가지로 몰락하여 2012년 12월 31일 부도를 내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광장서적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북션' 서점이 들어서 있다.
  •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정치인이며, 지지자들 사이의 애칭은 '해찬들'[10], '찬들이형', 또는 '대장부엉이'라 불리며, 비토 세력들에게는 '해골'[11], '해골바가지', '해골찬'이라는 멸칭으로 불린다.
  • 같은 충남 출신 배우 최주봉과 많이 닮았다. 이투스 수리논술 강사인 오승준과도 상당히 외모가 흡사하다. 또한 묘하게 박정학 배우와 비슷하게 생겼다.
  • 당선되었을 때 캡처된 사진처럼 무표정인 모습이 많아서 포커 페이스 이미지로도 유명하다. 깐깐해 보이는 분위기까지 맞물려서 더욱 그럴싸하다.[12]
위 사진은 동료 의원인 문희상과 함께 국회에서 열린 문재인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장면이다. 문희상은 참여정부 시절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13]으로 일했던 적이 있고, 이해찬은 앞서 말했듯이 참여정부 시절 법에 보장된 권한을 마음껏 행사했던 '책임 국무총리'로 일한 적이 있어서 둘 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며, 문재인의 대선 유세를 지원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우연히 취임식 날 사진에 표정이 이렇게 찍혀서 마치 반(反)문재인 성향 의원들이 억지로 참석한 모습처럼 보인다는 유머가 존재한다.
  • 민주당 의원들 중 인상파로 분류된다고 하며 이는 문희상과도 비슷하다. 그래도 살집이 좀 있어 웃을 때 밝은 표정이 묻어나는 문희상과는 다르게 까칠함이 많이 나오는 편으로 실제 성격도 어느 정도 대치된다고 한다.[14]
  • 20대 국회의원들 중 유일하게 총리 경력이 있는 의원이었지만 이후 정세균 의장이 국무총리가 되면서 유일하지 않게 되었다.
  • 201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 시절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보이는 증상을 자주 보이고 있다. 2017년 김어준의 파파이스와 같은 공개석상에서 나온 모습을 보면 가끔씩 손을 떨거나 말이 끊기는데, 이는 젊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으로 예전에는 말을 날카롭고 빨리 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여러모로 고문 후유증이 생긴 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다. 특히 2018년 7월 20일 민주당 당대표 선거 출마 기자회견에서는 몸을 떨고 코를 훔치는 등 건강에 문제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15] 2020년 21대 총선에서도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어서 3월 27일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엔 이낙연 공동선대위원장에게 선거 관련 업무를 일임하기로 했다. 민주당과 시민당의 공동 출정식 날에는 겨우 퇴원하여 연설을 했는데, 연설 내내 입이 떨리는 모습을 보였다.
  • 모친인 박양순 여사는 2017년 10월 30일, 향년 100세에 사망했다. #
  • 2018년 6월 15일 TBS <장윤선의 이슈파이터> 와 한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개혁세력이긴 하지만 진보는 아니다. 중도우파에 가깝다고 평가했으며 한편으로는 더불어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정당들은 우리나라의 사회 구조상, 깊이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말했다.기사영상
  • 21대 총선이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이해찬 대표 역시 추미애 대표처럼 당 대표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치고 물러날 수 있게 됐다. 재야에서 시작해서 국무총리, 7선 의원까지 할 만큼 다 했으니 명예로운 정계 은퇴가 된 셈.[16]
  • 정치사를 통틀어 진보 진영에서 대통령을 제외하고 이만큼 정치력을 가졌던 정치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국민의 정부 시절 교육부장관, 참여정부 시절 실세 총리, 문재인 정부 시절 집권 여당 대표를 맡았고 지역구 선거에서 7번을 도전하여 7번 모두 당선되었다. 정치인으로 살았던 30년여 기간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위기라 하면 김종인 비대위 대표 재임시 공천을 받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마저도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이 되었고 결국 여당 대표까지 지냈다. 심지어는 정치 인생의 마지막에 다시 없을 총선 승리를 거두면서 레임덕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30년 동안 운도 많이 따랐겠지만 본인이 엄청난 실력이 없다면 이룰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대단한 정치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아무래도 지역구가 세종특별자치시라서 그런지 세종역 설치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20대 국회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국회의원은 아니기 때문에 향후에 이 대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귀추가 주목된다.
  • 역대 국무총리들 중에서 정원식과 더불어서 유이하게 아들이 없는 국무총리 중 하나다. 단, 정원식은 만 넷을 두었고, 이 이해찬은 무남독녀 외동딸만 있다. 아들이고 딸이고 자녀가 아예 없는 한덕수는 논외이다.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8 - 1991
정계 입문

1991
당명 변경

1991
탈당

1991 - 1995
입당

1995
새정치국민회의 합류를 위한 탈당

1995 - 2000
창당

2000 - 2003
합당[17]

200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03 - 2007
창당

2007 - 2008
합당[18]

2008 - 2011
탈당

2011
창당

2011 - 2013
합당[19]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5
합당[20]

2015 - 2016
당명 변경

2016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

2016 -
복당
  • 당적 변경이 13번 정도 되는데, 단순한 당명 변경 등을 제외하면 자의적인 당적 변경은 9번이다. 하지만 민주당-무소속-새정치국민회의는 김대중을 따라서 나간것이고[21], 정파를 바꾸지는 않았기에 철새는 아니다.

7.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39,950 (31.18%)
당선 (1위)
초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64,035 (44.69%)
재선[22]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54,049 (44.74%)
3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48,751 (47.48%)
4선[23]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49,673 (41.11%)
5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세종

22,192 (47.88%)
6선[24]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46,187 (43.72%)
7선[25]
  • 지역구 7전 7승이라는 대기록을 가지고 있다. 물론 민주당계 정당 지지율이 높은 서울특별시 관악구에서 5선, 본인이 국무총리 시절 수도 이전을 전면에서 지휘한 곳인 세종시에서 2선이라 유리한 점도 있지만, 거물들과의 대결에서도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3대 총선에선 민주정의당김종인, 통일민주당의 거물 김수한을 꺾고 당선되었고, 19대 총선에선 충청 지역 정치권의 거물 심대평을 상대로 완승을 거뒀다. 21대 총선에 불출마 하면서 전승 기록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가지 재밌는 점은 7승 무패를 거두면서도 득표율은 한번도 50%를 넘긴 적이 없다는 점.[26]
  • 별명이 '선거의 제왕'이며#, 농담삼아 "좀 교만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왜 선거에서 지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대 대선 선대위원장을 맡아 문재인 대통령을 만들었고, 21대 총선에서도 공동상임 선대위원장이 되어 역사적인 대승을 이루면서 별명을 다시한번 입증했다.

8. 어록


아빠는 현주가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자주 그려보곤 한단다. 엄마 아빠가 학교 다니던 때와는 달리 현주의 학교생활은 훨씬 자유롭고 재미있을 거야. 그때쯤에는 세상도 훨씬 좋아지고 자유로와질 테니 말이야.

외동딸 이현주 양의 3번째 생일 직전[27]

에 보낸 편지[28]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152석으로 과반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승리에 취했고 과반 의석을 과신해 겸손하지 못했다. 국민이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만을 밀어붙였다. 일의 선후와 경중과 완급을 따지지 않았고, 정부와 당보다는 나 자신을 내세웠다. 그 결과 우리는 17대 대선에서 패했고 뒤이은 18대 총선에서 겨우 81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20년 4월 17일,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석을 얻은 뒤. 7월 이후 정부여당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이해찬의 말이 회자되고 있다. #


9. 저술 활동



9.1. 저서


  • 청양 이 면장 댁 셋째 아들 이해찬 - 단독 집필.


9.2.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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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주 이씨 하원군 13세손, 파조 덕흥대원군 14세손, 시조 이한 43세손 '海'자 항렬이다.[2] 서울대 내부나 여러 대학교 출신들의 연합 형태의 수많은 학생 운동 단체의 간부였다.[3] 심지어 노무현 前 대통령 사후에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정계로 끌어들인 사람이 이해찬이었다.[4] 사실 이해찬도 김근태의 후배로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김근태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직접했기에 출신 정체성은 민평련계라 볼 수 있으나, 정치계에 와서 김대중 시대에는 동교동계에게 인정받고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는 친노세력에게 인정받아 주류정치를 해온 사람이라 계파정체성을 논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친노나 친문이라는 것도 그의 정치인생 중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지, 양정철이나 전해철처럼 개인적으로 본질적 소속 정치계파라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이해찬계라는 것도 딱히 없어서 확실히 애매한 정치인 중 하나다. 친노, 동교동, 민평련 등 여러 계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는 정치감각의 천재일 수도.[5] 다만 문재인은 빠른 53년생인 탓에, 52년생인 이해찬과 실제로는 동갑이다.(물론 문재인 본인이 빠른 년생임을 내세워 이해찬과 친구처럼 지내는 게 아닐 가능성도 있다.)[6] 대학 학번도 72학번으로 같은데, 두 사람 모두 재수했기 때문. 단 이해찬은 대학을 떨어진 게 아니라 전공을 바꾸기 위해 요즘말로 반수를 해서 서울대에 두 번 들어간 것이다. 첫입시 대학도 서울대고, 재수 후에도 서울대였다. 서울대 공과대학 71학번에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72학번으로 바꿨다. [7] 노무현 前 대통령과 입사동기이며, 14대 총선을 통해 입사문희상박지원보다 선배 의원이다.[8] 20대 국회 기준으로 민주당 최고령 현역 의원은 후반기 국회의장이 된 문희상 의원이다. 기준으로 78세.[9] 2018년 당대표 선거에서 경쟁한 김진표보다 어린데도 출마했을 때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이니... 이게 모두 초선을 만 35세에 한 데다가 노안이라서 그렇다.[10] 고추장 브랜드에서 따온 별명이다[11] 얼굴에 워낙 살이 없고 두개골이 드러나는 형상이라 붙은 별명이다.[12] 분명히 같은 편인데도 적군처럼 찍힌 사진 탓에 오해를 받기도 했다.[13] 마지막 청와대 비서실장이 바로 문재인이었다.[14] 문희상의 경우는 사람 좋은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해찬은 실제 성격도 까칠하다고 한다. 단 인성이 좋지는 않아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듯.애초에 진짜 나쁜 사람이라면 한 당의 대표이자 국무총리로써 리더쉽을 발휘할 수 없다.[15] 민주당 8.25 전당대회 분위기가 뜨거워 지면서 당권 경쟁자인 김진표 의원과 송영길 의원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이 건강 문제를 놓고 이해찬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당장 민주당계 정당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한나라당 측으로부터 고령을 이유로 치매 등의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루머로 공격 받은 적이 있고, 또 문재인도 대선 기간에 홍준표, 안철수 지지자들에게서 치매설 공격을 받은 적이 있던 터라 이를 보는 반응은 좋지 않다.[16] 다만, 20대 국회 임기가 만료되는 5월부터 전당대회가 있는 8월까지의 공백이 있기 때문에 3개월 동안은 잠시 원외 당대표가 될 듯 하다.[17]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8]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19]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20]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21] 당시 53명의 민주당(1991년) 의원들이 같이 탈당했다.[22] 1995년 7월 의원직 사퇴 (조순 시장하 서울시 정무부시장 임명)[23] 2003년 열린우리당으로 당적 변경[24] 첫 세종시 국회의원. 2016.3.15 더불어민주당 탈당(공천불복)[25] 본인 선거이력상 최초로 무소속으로 당선, 세종시 재선 국회의원, 2016.9.30 더불어민주당 복당[26] 선거 데이터를 보면 알겠지만 이해찬이 7전 전승을 기록했으면서도 단 1번도 득표율이 과반을 넘긴 적이 없는 이유는 그가 대부분 표 분산의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첫 선거인 13대 총선 때엔 통일민주당 김수한 후보와 표 분산이 발생해 31.18% 득표에 그쳤고 15대 총선 때에도 통합민주당 이상호 후보와 표 분산이 발생해 44.74% 득표에 그쳤다. 16대 총선 역시 민주노동당 신장식 후보와 표 분산이 발생해 47.48% 득표에 그쳤다. 17대 총선에서도 새천년민주당 유종필 후보, 민주노동당 신장식 후보와 표 분산이 발생해 41.11% 득표에 그친 것이다. 20대 총선 역시 더불어민주당 문흥수 후보와 표 분산이 발생하여 43.72% 득표율에 그친 것이다. 그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던 건 보수 표심이 민주자유당통일국민당으로 갈렸던 14대 총선 단 1번 뿐이다.[27] 1979년 12월 14일생이라 한다. 1982년 12월에 쓴 편지이다.[28] 당시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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