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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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직계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표현. 김대중이 정치인 생활을 하면서 대부분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에서 살았기에[5] 동교동계라는 이름이 붙었다. 1991년에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이기택의 민주당이 합당했을 때는 잠깐 동안 신민계로 불렸다.
동교동계나 상도동계라는 표현은 신군부(하나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김영삼, 김대중과 그 직계 정치인들을 모조리 정치활동규제로 묶어서 제도정치권에서 추방하면서 생겨난 신조어이다.[6] 졸지에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재야 세력들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나섰는데, 독재정권의 언론통제에 묶여서 김영삼, 김대중의 이름을 언론에서 직접적으로 쓰기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언론사들이 이리저리 돌려서 쓰다가 각자의 서울시 내 자택 소재지에서 따온 상도동계, 동교동계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이렇게 거주지+계 명칭은 임시방편이고 직관적이지도 않으므로 신군부 퇴진 이후에 등장한 정치세력들은 친노, 친이, 친박, 친문과 같이 친+중심적 인물의 성씨를 짓는 것이 일반화되었다.[7]
퇴임을 앞둔 2003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후 국내 정치문제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동교동계라는 말이 나와서도 안되고 동교동계라는 모임이 있어서도 안되며, 이를 이용해서도 안된다."며 사실상 동교동계의 해체를 지시했다. 기사 그럼에도 미디어에서 현재까지도 김대중과 연관이 있는 이들을 가리켜 동교동계라고 부른다. 한편, 이는 2002년 말부터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에 대한 의혹제기 및 수사요구가 있었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일 수도 있다.[8] 비슷하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도 퇴임 직후인 2009년 4월 검찰 소환조사를 앞두고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되고,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기사)고 했고, 이후 한동안 친노무현 세력은 폐족(廢族)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친노 성향의 정치인들은 친문으로 부활해 현재 민주당계 정당의 주류로 활동하고 있다.
2. 상세
김영삼이 이끄는 상도동계 및 재야민주화운동세력과 연대해서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 13대 대선을 앞두고 양김 대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상도동계와는 갈라서고 독자적으로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결국 양김 분열의 결과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고, 김영삼과 상도동계가 1990년 삼당합당에 참여하자 양 세력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된다. 김영삼이 이끄는 상도동계가 부산, 경남 이른바 PK를 지지기반으로 했다면 김대중이 이끄는 동교동계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했다. 결국 김영삼에 이어 1997년에 외환위기의 여파 속에 DJP연합으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이루어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권재창출을 위해서 각개약진하였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권노갑을 비롯한 상당수 동교동계 주류들은 이인제를 지원했고, 동교동계의 또 다른 실력자 한화갑은 스스로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9] 하지만 양쪽 다 노사모를 앞세운 노무현 바람에 나가떨어졌다.[10]
당권을 쥔 동교동계는 민주당 내 비주류였던 노무현이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갈등했다. '김영삼 시계 파동'[11] 과 2002년 지방선거 참패로 노무현의 지지율이 급하락하자, 동교동계 일부는 아예 후단협[12] 에 가담해서 대선후보 교체를 주장[13][14] 하였고 동교동계의 원로들도 이들의 행동을 방관하면서 당내분이 가속화되었다. 결국 갈등을 임시로 봉합하고 대선에 나섰지만 동교동계는 선거운동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고, 대선은 노무현 후보 캠프와 개혁당/노사모 위주로 치루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노무현의 기적적인 대선승리 직후부터 다시 불거지기 시작해서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2003년 정치개혁을 둘러싼 논의에서 대폭발한다. 천정배/신기남/정동영/이해찬 등이 주도하는 범노무현계가 신당창당 수준의 과감한 정치개혁을 주장하자, 당내 기득권을 쥐고 있던 동교동계가 강력반발하였고, 여기에 대북송금 특검 문제로[15] 기존의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과 호남 민심이 악화되자 동교동계와 범노무현계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16] 친노세력이 2003년 11월에 한나라당 개혁파들을 끌어모으고 열린우리당으로 분당해 나가자, 동교동계가 주도하던 민주당은 한나라당, 자민련과 손을 잡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가 엄청난 역풍을 맞고 17대 총선에서 대몰락했다.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얻는 동안 새천년민주당은 겨우 9석을 얻었다.
17대 총선 이후 권노갑 등 동교동계 1세대들은 정치일선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한화갑 등은 여전히 민주당을 지키다가[17] 열린우리당의 급속한 몰락으로[18] 2007년 17대 대선과 2008년 18대 총선 과정에서 친노세력과 다시 손을 잡았지만 감정의 앙금은 여전했다. 결국 계속 당내에서 충돌하다가 20대 총선을 앞두고 동교동계 중 상당수가 국민의당(2016년)에 합류했다. 일부는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는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면서 새누리당으로 입당했는데, 한광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근무했고, 김경재는 친박 관제 데모를 일삼았던 보수단체 한국자유총연맹의 회장이 되었다.
이러한 박근혜 정부까지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통해 '''대략 김대중 대통령의 퇴임과 17대 총선의 대몰락 이후로 사실상 단일한 정치세력으로서의 동교동계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워낙 오래전부터 활동하던 사람들이라 동교동계의 핵심인사들 대다수는 고령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이고, 현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도 대부분 고령의 나이. 일례로 미디어에서 동교동계의 막내로 분류하는 설훈 의원이 이미 60대 초반이다. 주로 1970~80년대 김대중을 따라서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인사들이 18대 총선 이후로 미디어를 통해 동교동계로 분류되고 있다. 한편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인사들외에도 국민의 정부 시기에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 정치에 입문한 인사들도 상당히 많지만 그들 스스로 '동교동계'로 칭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6회 지선 당시 당선되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고양시장 최성이 그 예이다.
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구 동교동계 인사들은 전보다 각 당으로 흩어지는 양상을 심하게 드러내었다. 보수정당에 있던 일부 인사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자유한국당에 잔류했다. 한편,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이후 동교동계가 가장 많이 있었던 국민의당에서는 2017년 말엽, 안철수 대표가 추진한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과 관한 심한 이견차로 결국 국민의당 내의 대다수 동교동계는 민주평화당으로 떨어져나갔다. 박주선 국회 부의장, 이동섭 의원을 포함한 일부 인사들만이 안철수 대표와 같이 통합을 찬성하며 신설합당을 통해 바른미래당에 합류했다. 그 이후에도 바른미래당이 보수계의 이탈등으로 사분오열되고, 민주평화당 또한 사분오열되며 대안신당이 창당되는 등의 과정을 거쳤다가, 다시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 민주당계 적자인 더불어민주당에 합류하지 않은 모든 이들을 모아 신당인 민생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여당의 압승으로 민생당 내의 동교동계 인사들이 전부 낙선되어 동교동계가 더이상 정치권에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2010년대의 이러한 정치격변의 결과로 현직에 활동하는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주로 더불어민주당과 민생당에 분포되어 있는데, 더불어민주당에는 문희상, 설훈, 김한정[19] , 이훈 등이, 민생당에는 박지원, 최경환 등이 있다.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두 정당의 이념이 비슷해보여 두 정당의 동교동계 인사들간의 이념 차이가 없어보이나 엄연히 차이가 존재한다.[20] 더불어민주당 내 동교동계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정하거나 친노 성향을 가진 동교동계이고, 민생당 내 동교동계는 비노, 비문 성향을 가진 동교동계이다.
어떻게 보면 과거 대한민국의 정치세력의 한계를 말년에 온몸으로 보여줬던 정치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 가신으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세우는 일등공신들이었고 김대중에게 정치적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 정부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인사들이 다수 있었다. 그렇게 끝이났다면 좋았겠지만 레임덕이 온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새롭게 떠오르는 친노와 정면으로 맞붙었고, 안방인 호남 지역을 경선과정에서 대부분 내어주며 완패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단협등 친노와 갈등이 계속되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 이후 탄핵 시도의 역풍을 정면으로 맞으며 지지 기반이 비슷했던 친노에게 동교동계의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기며 단일세력으로는 완벽하게 무너졌다. 어떻게 보면 동교동계의 몰락은 하나의 인물을 중심으로 보스정치를 하던 구시대 정치가 중심 인물이 사라지면 보여주는 한계이다. 그러한 세력의 마지막을 한국 정치사에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2.1. 민주당계 정당 내 동교동계
애초에 동교동계가 김대중 전 대통령 중심의 계파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당계의 거물이다보니 대부분의 동교동계는 민주당계 정당에 있다.
2.1.1. 더불어민주당 내 동교동계
'''더불어민주당'''에는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이후 잔류한 동교동계 인물들이 속하는데, 원로 정치인 그룹으로는 박실 전 국회 사무총장과 김원기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박성수 전 동작구의회 부의장, 이용희 전 의원[21] , 현역급 정치인으로는 '''문희상''' 전 국회의장[22] , '''설훈''' 의원[23] , 이강래 전 의원[24] ,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25] , '''이낙연''' 현 민주당 대표[26] , 김한정 의원, 이훈 전 의원, 윤호중 의원 등이 있다.[27] 김대중의 막내아들인 '''김홍걸''' 씨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있다가, 21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더불어시민당에서 당선되었다. 국토교통부에서 정책전문위원을 역임했었던 김우철 더불어민주당 대구시당 사무처장도[28] 더불어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2.1.2. 민생당 내 동교동계
민생당은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 바른미래당-민평당-대안신당의 합당 이후 비노, 비문, 비안계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속해있는 정당이다.
당 내의 동교동계 인사들은 원로 정치인 그룹에서는 동교동계의 맏형 노릇을 했던 권노갑을 비롯해[29] 정대철[30] , 김옥두[31] , 이훈평, 박양수, 윤철상, 송석찬 전 의원, 현역 정치인 중에서는 김대중 정부 시절 비서실장과 장관까지 했던 '''박지원''' 국정원장, 박준영[32] 전 전라남도지사, 최경환(1959) 전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민주평화당에 있다가 대안신당을 차리고 나갔다가 민생당이라는 신생 당을 차리는데에 합류하는 등의 행적을 보였다. 바른미래당 창당에 찬성하였던 동교동계 또한 민생당에 합류했는데, '''박주선''' 전 국회 부의장이 대표적이다.
2.2. 보수정당 내 동교동계
동교동계는 민주당계 정당의 주축이었기에 전체계파가 민주당 계열에 있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계파 해체선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등으로 동교동계는 각자의 입장과 이익에 따라 흩어지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그래서 동교동계 인물들이 보수정당에 가는 경우가 특히, 박근혜 정부 이후 두드러졌다.
2.2.1. 국민의힘 내 동교동계
''' ''', ''' ''', , 김원길, 안동선, 이윤수 전 의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친 DJ 인사였으나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하고 노무현의 대선승리 직후, 민주당계 정당의 주도권을 잃었다. 이후 친노가 중심이 된 민주통합당에 반발하여 한광옥 주도로 정통민주당을 만들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이 6명의 원로는 모두 2012년 18대 대선에서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를 지지했었으며[33] 김경재, 한광옥 전 의원은 아예 새누리당에 입당했다. 이 중 한광옥 전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다만 한화갑은 새누리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34] 전반적으로 옛 자유한국당 내에 있던 동교동계 인사들이 70세 이상의 고령이라면 바른미래당에서 탈당해 넘어온 국민의힘 내의 인사들은 그나마 젊은 50~60대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친안으로도 분류되는 김영환, 이동섭 전 의원이 이 부류에 속한다. 또한 손학규계로도 분류되었던 임재훈 전 의원은 민생당에 당적이 있으나, 국민의힘에서 활동하는 등 사실상 통합당 내의 동교동계로 분류된다.
3. 주요 인물
- 권노갑: 김대중의 최측근으로 동교동계의 좌장. 하지만 한보사태에 연루되거나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는 김근태에게 정치자금을 주는 짓을 하여 구태정치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다.
- 한화갑
- 한광옥
- 김옥두
- 이훈평
- 김영배
- 이용희
- : 다만 정대철 前 의원은 이후 당 총재선거에서 김상현과 연합하여 DJ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던터라 범 동교동계로 간주되는 일이 있다.
- : 김대중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전부터 김대중을 따랐고, 김대중이 군사정권으로부터 각종 탄압을 받아 일선에 나서지 못하는 동안 외적으로 김대중을 대리하고 동교동계의 민추협 참여를 이끌어냈다. 당시 양갑이나 김옥두는 김대중의 비서에 불과했으나 김상현은 이미 3선의원으로 위상이 한참 다른 상황이었다. 그러나 8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단독 출마를 선택하자 본인은 통일민주당에 잔류했다가 새정치국민회의에 와서야 다시 김대중에 합류했다. 이로인해 범 동교동계로 분류된다. 정계 은퇴 이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재직하다 2018년 4월 18일 작고.
- 박실 - 전직 3선 국회의원(12~14대). 이후 국회사무총장 역임. 현재 더불어민주당 동작지구당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동작구 내에서는 최고 어른이다.
- 박지원: 전직 4선 국회의원(14, 18~20대). 국민의 정부 시절에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역임
- 설훈: 다만 설훈은 민평련 계열로 많이 분류된다.
- 정균환
- 조세형
- 박양수
- 김원길: 국민의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
- 이윤수
- 이훈
- 김한정
- 이강래
- 최재승
- 문희상: 더불어민주당 출신으로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역임하였다.
- 노승환
- 송석찬
- 박광태
- 허경만
- 박준영
- 박주선: 다만 박주선은 동교동계로 분류되긴 하나 DJ 당선 이전까지는 검사로 근무한지라 동교동에 들락날락한 적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교동쪽 당내 보수세력인 한화갑과 같이 움직이면서 분류되었다. 동교동계 한화갑파로 분류된다.
- 윤철상
- 김병오
- 신순범
- 김희철
- - 전직 초선 국회의원(16대). 동교동을 드나들며 재택비서를 지냈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자 국정상황실장을 지냈다. 16대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었고 이후 구 민주계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다가 장성민의 시사탱크 진행을 기점으로 우경화되었다.
- 김경재 - 전직 재선 국회의원(15~16대). 김형욱 회고록 집필을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도운 인물로 이후 김대중에게 영입되었다. 재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16대 대선 당시에 노무현을 적극 지지했으나 이후 결별하고 구민주계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18대 총선, 제 5대 지방선거 등에서 모조리 낙선하고 새누리당에 입당하여 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내며 친박인사가 되었으나 현재는 극우 기독교계와 손을 잡고 기독자유통일당에 입당했다.
- 박상천 - 전직 5선 국회의원(13~16, 18대). 국민의 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 안동선
- 이동섭
- 김영환
- 최경환
- 정세균
- 이낙연 - 현직 5선 국회의원(16~19, 21대). 前 국무총리, 전남 도지사(민선 6기).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서 동교동을 드나들다가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던 중 김대중이 직접 데려다가 국회의원 공천을 주고 키웠다. 구민주계와 행보를 같이했지만 중도성향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기도 했으며 전반적으로 무난한 의정활동을 보여주었다. 이후 전남지사를 거쳐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이후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를 상대로 서울 종로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원내로 6년만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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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대중은 퇴임과 동시에 '''"동교동계란 말은 쓰여서는 안된다"'''라고 발언하며 사실상 동교동계의 해체를 선언한다. 이후 구심점을 잃었음에도 그럭저럭 계파로서의 형태를 유지하였지만 제17대 총선에서 소위 노풍에 의해 주요 인물들이 모조리 전멸하면서 계파로서의 동교동계는 해체된다. 이후 동교동계는 박지원계, 김한길계로 흡수되거나 아예 보수정당으로 갈아타게 된다.[2] 물론 이것은 공식적인 해체일 뿐이며 아직까지도 이 세력은 정계에서 동교동계로 칭해지고 있다. 본인들도, 다른 정치인들도, 언론들도, 국민들도 모두 동교동계라고 칭한다.[3] 평화민주당까지[4] 새정치국민회의 이후[5] 평생의 라이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상도동에서만 살았던 것과 다르게 김대중은 동교동을 떠난 적이 있다. 1995년,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귀국하는 과정에서 동교동 자택을 장남 김홍일 전 의원에게 넘기고 자택을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당시에는 일산구 일산동)으로 옮겨 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퇴임 이후 동교동으로 돌아왔고, 동교동 자택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6]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7] 성씨가 겹치는 경우 가운데 글자나 마지막 글자에서 따기도 한다.[8] 노무현 당시 당선자의 경우도 언론을 통해 대북송금의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다음 날인 26일 특검법이 통과되어 관련인들이 검찰수사를 받게 되었다. # 당시 김대중은 국익을 위한 결단이었다면서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자신이 지겠다고 말했다. # 대북송금 특검 문서 참조.[9] 애초에 야당시절부터 권노갑과 한화갑 소위 양갑 사이의 갈등은 유명했다. 다만, 그때까지는 김대중이 직접 당과 동교동계를 통제하면서 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말이 되자 정계은퇴를 앞둔 김대중이 이제 알아서들 하라며 손을 놔버리자 동교동계가 양갑을 따라서 바로 쪼개져 버린 것이다.[10] 권노갑이 김근태에게 뇌물을 준 것이 결정타였다.[11] 노무현이 후보 확정 이후 김영삼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하여 "13년전 총재님께서 주신시계를 지금도 차고 다닌다"며 YS와의 인연을 강조했고 YS는 장하다며 화답한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비판받았다.[12]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사실상 정몽준으로의 후보교체)를 요구하며 노무현 후보사퇴를 주장하던 새천년민주당 의원 그룹이다.[13] 동교동계뿐만 아니라 DJP연합과 국민의 정부 출범과정에서 유입된 구 정권 시절의 관료들, 기업인, 군 출신들 같은 당내 보수파들이 후단협으로 결집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와 민주당은 대선 승리와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 이념, 노선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있는 대로 끌어모았기 때문에 한나라당보다 더 보수적인 인사부터, 재야 출신의 급진개혁파들까지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었다.[14] 이때를 계기로 이인제, 안동선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서 자유민주연합으로 갔고, 원유철, 전용학, 강성구는 한나라당으로 갔다.[15] 이때 양갑과는 별개의 라인이었던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구속된다. 수감생활 도중에 녹내장이 악화되어 실명위기에 처했었으나, 구속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다.[16] 이 과정에서 난닝구라는 멸칭이 생긴다.[17] 김홍일과 한화갑은 2006년 말에 의원직을 상실했다.[18] 김홍업이 이 과정에서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들어갔다. 다만, 박상천은 이인제와 같이 대선을 완주하고 구 민주계의 주주가 되어 통합민주당으로 들어간다.[19] 이 사람은 DJ의 비서진 출신인지라 동교동 라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20] 이 차이는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21] 김상현 당 상임고문은 2018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특이하게도 김상현은 동교동계였음에도 김대중과의 사이가 원만치는 않았다. 오히려 권노갑 같은 동교동계가 이를 빡빡 갈았다고.[22]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에 정무수석으로 임명되었으나, 이강래와 자리를 맞바꿔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갔다.[23] 여담으로 설훈 의원은 이와 동시에 민평련 소속이다.[24]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에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문희상과 자리를 맞바꿔 정무수석으로 갔다.[25] 이해찬 의원의 경우에는 출신은 동교동계이긴 하지만, 과거 지방선거 공천문제를 두고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내부총질을 해서 김대중에게 큰 피해를 입힌 적이 있었으며,훗날 다시 머리를 숙이고 김대중의 아래로 들어올 때, 김대중이 비록 탈당에 당을 매도하고 선거에 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스스로 반성도 하고 있고 아직 젊은 사람이니 기회를 줘야 한단 입장으로 받아들였지 다른 의원들이 좋게 봐주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정치적 입장에서는 동교동계로 규정되긴 어렵다. 되려 정통 친노, 친문으로 분류하고 있다. 다만 노무현 정권 시기에 국무총리를 하면서 골프로 논란을 빚기도 했고,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각종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26] 동교동계출신임에도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당시 유일하게 민주당에서 반대표를 던진 사람이고, 친노의 후계자인 문재인대통령과 친노의 후계세력 친문에서도 별다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몇 안되는 인사이며, 현재 민주당내 다수의 친노·친문이 지지하고 있다.[27] 문희상, 이해찬, 윤호중은 친노계로 유입되었고, 설훈은 민평련에 걸쳐있다.[28] 설훈, 김한정 국회위원 두 사람과 함께 김홍걸 교수의 더민주 행을 제안한 3인방으로 꼽힌다.[29] 권노갑은 이낙연 지지를 선언하며 더불어민주당에 입당을 선언했으나 거부당한 걸로 알려졌다.[30] 하지만 정대철은 김상현과 더불어 동교동 원로들과 사이가 썩 좋지는 않다. 1997년에 당 총재,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상현과 연합하여 DJ 견제를 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31] 7회 지선 때 김영록 전남지사 후보를 지원한 것을 보면, 현재는 탈당한 듯 하다. 이분의 아들이 현재 민주당의 당협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32] 2018년 민주평화당이 창당한지 2일만에 의원직을 상실하였다.[33] 친박으로 바뀌었다기보다는 반노 성향이 진해져 민주당계 정당과 멀어진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34] 이와 별개로 류준상 전 의원의 경우 김대중 당선 이전인 1997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현재까지 자유한국당 당적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