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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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가 바로 피닉제다!"'''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MBC개표방송 中[2]
'''불사조''', 혹은 피닉제.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상징적인 별명. 이제는 명실공히 자타공인의 별명이다.'''"불사조는 살아있다!"'''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SBS개표방송 中[3]
대한민국의 정치인. 6선 의원(전 충청남도 논산시 계룡시 금산군 선거구) 출신이다. 판사 출신 노동인권 변호사에서 최연소 노동부 장관과 경기지사를 역임.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왔으며, 제16대 대통령 선거와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경선 후보로 나오기도 한 나름 충청권 정치 거물이었다. YS에게 발탁되어 DJ에게 갔다 JP를 거쳐 이후 다시 새누리당 최고위원도 되는 등 좌우 가리지 않는 화려한(?) 당적 변경 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2. 일생 및 당적 변경사
3. 친박 여부
3.1. 친박으로 보는 견해
이인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의 공동대표로 머무를 만큼 보통 친박으로 분류되는 편이다. 또한 위안부 협의에 대한 의견으로 여론이 매우 나쁘며 국정 교과서에 대해서도 그리 반대하지 않는 견해를 가진다라 한다. 그리고 드디어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집회에 참가했다. 일단 이인제가 역대 인터뷰나 총선에서 했던 말들을 볼 때는 대통령이 무너지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4] 고 생각한 듯. 그렇다고 친박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친박으로 분류하는 건 과거에 어땠냐보다 '''지금''' 어떠냐가 더 중요하다. 예컨대 유승민은 한때 친박이었지만, 지금 그를 친박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이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이인제를 친박이라 볼 수 있다.
또한 2019년 12월, 당직자 출신으로 김무성 대표의 부실장을 맡은 장성철씨의 인터뷰에 의하면 청와대에서 만들어 내린 살생부에 친박중진의원이 여럿 있었는데 무려 친박 9인회의 일원이었던 서청원, 그리고 이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살생부는 엎어지면서 무사히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박근혜에게 뒷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 일단 청와대에서는 '''박근혜의 뜻에 동조하며 거수기 노릇을 했기 때문에''' 친박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친박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례들에 대해 '신(新)박' 이라는 표현도 간간이 언론에서 찾아볼 수는 있다.
3.2. 친박으로 보기 어렵다(혹은 애매하다)는 견해
이인제를 친박으로 분류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친박이라는 표현은 박근혜가 2004년 무렵부터 한나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하면서 박근혜 주변에 모이기 시작한 정치집단을 지칭한다. 특히 2007~2008년 사이 이명박과 박근혜가 한나라당의 양대 유력 정치인으로써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하고,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 대부분이 친박과 친이의 양대 계파로 재편성 되면서[5] 명확해진 개념이다. 이 점에서 보면 박근혜가 아직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인 1997년에 '''신한국당'''을 떠나 친이/친박 대립이 격렬하던 시기에는 광야를 떠돌다가 친박계가 친이계를 당권에서 배제하는 데 성공한 2012년에 이르러서야 새누리당에 복귀한 이인제는 친박/친이 구도에 낄 자리가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 이후 탄핵 반대 입장을 보인 김문수나 홍준표 역시 종종 친박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쪽은 오히려 친이계에 속했다.[6]
다만, 친박 특유의 가혹한 당내숙청 때문에 친이계를 당권 경쟁에서 완전히 몰아낸 뒤 친박 내부에서도 무게감 있는 정치인이 차례로 배제당하면서 박근혜 실각 시점에서는 오히려 본래 친박계의 쌍벽이던 유승민/김무성이 반(反)박의 거두가 되고, 이미 숙청당해서 견제권 밖이던 친이계 중 일부나 친박도 친이도 아니던 이인제 등 유력 정치인들이 고만고만한 쪼렙 정치인 외에는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친박 세력으로 진입한 것 뿐이다. 이런 식으로 박근혜 실각 이후 들어온 인물을 분류하여 뭔가 '''신박'''한 호칭을 붙여 재분류하면 모를까, 친박이라는 표현이 기존에 사용되던 의미를 생각하면 이들을 친박으로 분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7]
한국 현대정치사(특히 보수정당사)에 대하여 잘 모르는 이들은 친박을 단순히 '박근혜 편을 드는 정치인들' 정도로 이해하고 "친박으로 분류하는 건 과거에 어땠냐보다 지금 어떠냐가 더 중요하다." 면서 박근혜 편을 드니 친박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계기로 탄생한 특정한 계파를 지칭하는 표현이며, 친박, 탈박, 쪽박, 반박, 진박, 잔박, 돌박, 멀박 운운하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 역시 이 '계파'의 변화를 통해 보수정파의 변화상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친박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정치사(특히 보수정치사)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고, 이러다 보니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다양한 편인데 이를 '특정한 대상을 부르는 특정한 표현'의 의미 이상으로 확장시킬 경우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8] . '''무엇보다도 그의 당적 변천사를 생각해본다면, 이인제에게 계파는 큰 의미가 없다.''' 쉽게 말해 친박이 몰락한 지금은 또 다른 계파로 언급될 가능성 역시 충분하다는 것.
4. 소속 정당
정작 보수 정당 중 가장 장수한 정당인 한나라당에는 당적을 가져본 적 없다는 점도 아이러니...[17]
5. 선거 이력
피닉제답게 여기저기 난잡한 정당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보수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마저도 여러번 넘나든다. 7선을 바라보면서 단 한번도 같은 이름의 정당으로 총선에 출마한 적이 없다. 총선 이전에, 당장 저 무수한 선거 이력 중 같은 정당명으로 출마한 것이 14대 총선과 1회 지선뿐이다. 사실 이것도 아슬아슬했던 게 1회 지선 1년 뒤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그리고 결국 자유한국당 타이틀로도 선거에 출마한다.
대선 외의 선거에서는 불패의 정치인이었으나 '''끝내 20대 총선에서는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박근혜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박살나면서 이인제에게 재기의 발판이 될 수 있게 되는 것 처럼 보였고, 실제 후속정당인 자유한국당에서는 원로로서 그럭저럭 입지를 다지고, 7회 지선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인 충남지사 후보로 전략 공천되어 다시 불사조처럼 부활할 것처럼 보였지만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후보에게 30% 가량 뒤처지면서 낙선했다.
2019년 5월 21일에 21대 총선 출마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후 충남 논산·계룡·금산 지역구 예비후보로 등록하면서 7선에 도전하였지만 컷오프되었고, 결국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으나 다시 철회했다.
6. 이인제계
7. 기타
- 국정 여러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상당히 무게감있는 목소리에 호소력 있는 연설 능력으로 2000년대 이후에는 연륜을 쌓으며 TV 토론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이인제를 그저 매체를 통해 철새 정치인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의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2007년 대선토론회에서도 그 미미한 존재감과 지지율 속에서도 TV 토론평가는 늘 2~3위권이었다.(1위가 못 된 이유는 역시 존재감 탓.)[25] [26]
- 젊은 시절에는, 하단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평처럼 성실함 부문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적도 있었다. 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일부 유권자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 전년도인 96년에 주류 언론을 통해 타서전[27] 논란이 이는 상황을 보았을 정치인이 이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자기 책에 나온 내용을 묻는 말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기 때문. 2007년 대선에는 TV토론에서 유권자들의 점수를 확실히 얻을 만큼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좀 때늦은 감이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은 이인제의 대선출마를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2002년 대권후보 경선에 나섰다고 밝힌 바가 있다. 이인제에 대해서 "재주는 있어보이는데 성실해 보이지도 않고 철학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88년부터 89년까지 이인제 씨와 함께 국회 노동위를 같이 했다. 그때 이인제 씨는 불성실의 극치였다." 등의 말로 비난을 하기도 했다. 당적을 옮긴 정치인이 대선 후보로 나서게 할 수는 없다는 그의 확고한 논리는 이후 손학규를 비토할 때에도 그대로 쓰였다.
- 사회주의[28] -보수주의의 구도가 아닌 자유주의-보수주의의 좌우 구도(이른바 보수 양당제[29] )를 지향한다.# 문제는 이게 지나쳐서 민주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사회주의자라고 공격한다는 것.[30] 민주당이 그가 있을 때에 비해 비교적 좌경화 된 것은 맞으나 여전히 자유주의에 뿌리를 둔 정당이다. 다만 이인제는 화려한 당적 생활에서도 보이듯 노무현 대통령 포함 좌우 대통령 모두 존경한다는 식의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다.
- 다소 줏대 없어 보이는 정치적 행보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는다. 바로 위에서 보듯 자신에 대한 조롱섞인 세간의 시선에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가 하면, 과거 변호사 시절에는 억울한 피해를 본 사람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해준 적도 있다고. 탤런트 서인석의 지인도 그 중 한 명이며, 나중에 서인석이 찾아가 수임료를 건네자 "무료 변론한다고 말했으면 그렇게 하는건데 왜 돈을 가져오느냐?"면서 받지도 않았다고... 이런 인연 때문에 현재까지도 서인석이 선거유세를 같이 지원해줄 정도로 절친하다.
- 1997년 대선당시 전두환 노태우 사면 공약을 내세워 논란을 빚었다. 당시 대선에서 이회창과 김대중후보뿐만 아니라 김영삼 정부가 이 전 노 사면을 추진하던 터라 이인제도 그 분위기에 편승해 전 노 두 전직대통령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지만...[31][32][33]
- 2007년 대선에 출마할 당시 선거운동 유세차로 대전 관저동 성애노인요양원을 방문하였는데, 한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으며 얼굴이 할머니의 손에 잡혀 흔들리는 등 아이 취급을 받아 웃음거리로 화제가 된적도 있었다. # 이로 인해 '도리도리 이인제', '우쭈쭈 이인제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그래도 피닉제보단 임팩트가 약한 편이다.
- 대만 정치인 쑹추위와 정치 인생이 비슷한 면이 있다. 중화권 언론에서도 쑹추위와 이인제를 놓고 비슷하다고 한 기사가 있었다. 다만, 쑹추위는 자기가 친민당을 만들고 거기서 옮겨다니지는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 호남고속철도 공주역이 이인제 의원의 압력으로 인해 위치가 이상해졌다는 논란이 있지만 사실 이는 오송역과 청주시의 압박 때문으로 이인제 의원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역 위치가 정해진 후에 좀 더 남쪽으로 내려서 짓자고 했을 뿐. 공주역/문제점 문서 참조.
- 사형제도 폐지에 찬성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 더불어민주당 최규성 전 의원과 서울대학교 동기 동창이다. 두 의원은 학창 시절 유신 반대운동을 했는데 이인제 의원이 중앙정보부에서 고초를 당하고 와서는 사법고시를 보겠다고 결심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강제 군징집 복무 후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 19대 대선의 tv 토론에서 동성애 관련 이슈가 부각되면서, 제15대 대선 당시 후보들의 동성애 관련 발언이 재조명 되었는데, 15대 대선에 나온 후보들(DJ, 이회창, 이인제, 권영길)의 동성애 관련 노선은 역대 대선에 나왔던 후보들을 통틀어서도 상당히 진보적이고 긍적적인 스탠스였다. 이인제는 당시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그들에 대해 하나의 신성한 인격체로 바라봐야한다.'[34] 는 요지로 말한 바 있다. "동의하지 않으나 이단시해서도 안된다"고 답한 DJ나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적 자연인의 영역은 지켜져야한다고 답한 이회창보다도 더 온건적인 발언. 19대 대선에서 동성애 논쟁을 부추긴 후보가 같은 당의 홍준표 후보였음을 생각하면 의외라고 할만하다.[35]
- 하지만 위의 인터뷰 내용과 달리 2018년 충남지사 선거 당시에는 충남 인권조례 폐지 공약을 내걸며 "동성연애를 조장하는 인권 조례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토론회에서 경쟁자인 양승조 후보가 위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며 비판하자 "동성애자를 학대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반대한다, 인권으로 포장해서 교육하고 조장하면서 양성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발언했다. #
- 그의 고종사촌 동생 중에서 모 입시학원에서 수학강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얼굴은 똑같이 생겼지만 목소리는 다르다.
- 노무현 관련 다큐멘터리인 노무현입니다에서도 등장한다. 새천년민주당 경선과정이 주 내용인 만큼 다른 인물보다도 비중있게 나오며 네거티브, 경선 불복설 등이 자세히 다뤄진다.
- 쌉니다 천리마마트에도 이름이 언급됐다! 2부 41화에서 정복동이 왠 점쟁이에게 '책사로 영입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고서 조금도 고민없이 이인제라고 답했던 것인데,[36] 이를 본 네티즌들은 정복동조차 인정한(? 이인제를 찬양하는 리플들을 남겼다.
- 2018년 5월 15일 외부자들에 출연하여 공자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14년 동안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노나라로 돌아왔듯이, 자신도 원래 정당으로 돌아오는데 15년 2개월이 걸린 만큼 고생을 많이 했다는 발언을 하였다
- 박씨유대기의 등장인물 이니제의 이름은 작가가 그의 이름을 방송에서 보고 살짝 비틀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속성이 불사이다 보니 이름만이 아니라 모티브 자체가 이인제 아니냐는 말도 있다.
8.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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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선에 다시 서서 : 2003년 작.
- 한라에서 백두를 보네 : 2007년 작.
- 통일은 경제다 - 이제는 통일시대 : 2014년 작.
9. 둘러보기
[1] 익안대군파 16세손, 시조 39세손. 순조의 동생 뻘이다.[2] 그러나 정작 이 발언이 무색하게 이인제는 충남지사 선거에서 피닉스처럼 부활하지도 못하고 더블스코어로 양승조 후보에게 대패를 당한다. 애초에 위기의 남자들이라며 김문수, 안철수와 함께 나왔다.[3] 이와 동시에 나오는게 김문수와 전화기.[4] 탄핵 반대 측에서 주장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생각이다. 그들은 대통령이 없어지면 민주주의가 무너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 무너졌다. 이때도 이때도 그랬다. 사실상 무너진 6.29 선언,노무현 대통령 탄핵때도 민주주의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앞의 세개의 일은 외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5] 이전까지의 친박/친이가 한나라당 내 계파 중에서 두드러지는 2개 세력이었다면, 이 시기 이후에는 한나라당(이후 새누리당)이 친이와 친박으로 양분되었다고 봐야 한다.[6] 정확히 말하면 김문수는 이재오와 함께 학생운동 출신으로 친이계의 핵심인사이자 당 내에서 대표적인 반(反)박계였으나 이재오와 달리 이후 친박으로 갈아탄 케이스고, 이에 비해 홍준표는 명확한 친이계 인사라기보다는 친이계에 가까운 중도파로서 일종의 범 친이계 인사로 여겨지던 편이다. 홍준표는 한때 박근혜와 척을 지기도 했으니.[7] 예를 들어 유승민의 정치적 행보를 설명할 때는 한때 친박(원조 친박)이었지만 박근혜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탈박'이나 '멀박'이 되고, 박근혜와의 대립각이 거세지면서 박근혜에게 찍힌 '찍박'이 되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무렵에는 '진박'과 대립했다고 설명한다. 한때 친박이었지만 지금은 박근혜와 사이가 멀어졌으니 친박이 아니라는 식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8]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사람이 선거에서 대선에서 이명박이나 박근혜, 홍준표를 찍었다면 그 사람은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지지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저 사람은 해당 정당의 '''당원'''이다" 라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해당 정당의 당원이던 사람이 이제 더 이상 그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탈당계를 제출하지 않아서) 그 사람의 이름이 당원 명단에 남아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그 당의 당원이다. 당원은 단순히 지지자가 아니라 '정당의 당원명부에 이름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친박 역시 단순히 박근혜를 지지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특정한 계파'를 의미한다.[9]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0]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 합당[11]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2]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13]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14] 국민중심연합과 신설 합당[15] 새누리당에 흡수 합당[16]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17] 한나라당에서 당명을 바꾼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에는 속해있었다.[18] 1990년 3당 합당, 1990.1.22 민주자유당 창당 합류[19] 1995.6.7 사퇴 (경기도지사 출마)[20] 1997.9.13 탈당, 1997.9.18 사퇴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21] 2002.12.1 탈당, 2002.12.3 자유민주연합 입당[22] 2005.12.7 탈당, 2006.1.27 국민중심당 창당 합류, 2007.5.11 탈당, 민주당 입당,2008.2.17 통합민주당으로 합당, 2008.3.17 탈당 (공천불복)[23] 최저득표율 당선, 이 당시 논산·계룡·금산 선거구에선 한나라당,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무소속이 출마한 5파전이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여러 후보로 표심이 분산되는 효과가 일어났고 결국 30%도 안되는 지지율로 당선이 된 것. 2011.9.8 자유선진당 입당[24] 2012.11.16 새누리당과 합당[25]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이해찬과 함께 5공 세력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면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던 경력이 있다.[26] 놀라는 게 아니라 이인제 의원이 성실하지 않다는 비판을 많이 받긴 하는데 머리가 좋고 스마트하다는 데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말하는 편이다. 이해찬이나 유시민도 이인제가 법머리(legal mind)가 좋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27] 자기 이야기를 써야 할 자서전을, 남이 창작 요소까지 넣어가며 대필하는 걸 빗댄 말. 소재를 굳이 자서전에 한정지어 기사를 낸 것이지만, 언론사에서 정치-경제-외교 란에 실을 기사를 통해, 각자 지지하는 대선 후보들에게 조언하곤 했던 걸 감안하면, 이듬해에 열리는 대통령 선거에 나설 정치인들을 향한 간접적인 충고이기도 하였다.[28] 여기서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만이 아닌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등을 포괄하는 용어이다.[29] 다만 이 보수 양당제라는 표현 자체가 많은 진보적 스펙트럼 중 사회주의만을 특별하게 취급하는 일부 학자들이 쓰는 표현일 뿐이긴 하다. 애초에 공화vs왕정 시절엔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에 대항하는 명백한 진보적 가치였다.[30] 참고로 노무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본인은 (마르크스식) 사회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31] 이인제 pk다지기[32] #[33] #[34] "동성애는 아주 미묘한 문제다. 사회에 저항하고 자신의 성아이덴티티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자연의 섭리를 바탕으로 인간다운 삶이 과연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화 ‘필라델피아’에 나타난 것처럼 동성애자를 하나의 신성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다."#[35] 작금의 한국 보수정당은 YS가 집권하던 1990년대보다 되레 우경화된 측면이 있다.[36] 작품 내에서는 이인재라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