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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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노차갑(盧且甲)
이명
노차용(盧且用), 노재원(盧在原)
본관
광주 노씨[1]
생몰
1904년 11월 27일 ~ 1967년 1월 8일
출생지
경상남도 창녕군 오야면 동산동
(현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동산리)[2]
사망지
경상남도 창녕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노차갑은 1904년 11월 27일 경상남도 창녕군 오야면 동산동(현 이방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간회 대구지회와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의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허가를 받은 합법단체로는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928년 2월 두 단체를 탈퇴한 뒤 1928년 5월 문상직(文相直)·정태봉 등 5명과 함께 달성공원에 모여 'ㄱ당'을 창당했다. 이들이 조직의 명칭을 'ㄱ당'이라 한 것은 'ㄱ'이 한글의 처음 글자로 조선의 기원(起源)을 촉구하고자 붙인 것이었다. ㄱ당은 조직부와 재정부·조사연구부 등을 두었는데, 그는 재정부의 일을 맡았다.
이들의 활동 목표는 한국인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 실력양성의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에서 농경지를 매수하여 그곳에 농민을 이주시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적당한 인물을 발굴하여 중국 광둥성에 설치된 군사학교에 파견, 정규 과정을 이수케 함으로써 무력양성의 계획도 구상했다. 노차갑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고, 1928년 6월 1일 곽동영과 함께 신호용 권총을 휴대하고 달성의 부호 김교식을 상대로 5천여 원의 군자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8년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1929년 6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서 1937년 동아일보 오사카지사를 운영하면서 조선인 단체 신문사를 창설하고 신문을 통하여 재일본 조선인의 정치적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8.15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갔고, 1967년 1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노차갑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광주군계 30세손 '''재(在)''' 규(圭) 지(地) 권(權) 항렬.[2] 인근의 석리·현창리와 함께 광주 노씨 집성촌이다. 노태극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