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리즈코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리즈코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жков
Nikolai Ivanovich Ryzhkov
'''
<colbgcolor=#cc0000> '''출생'''
1929년 9월 28일 (94세)
우크라이나 SSR 슈체르비니브카[1]
'''국적'''

'''학력'''
우랄 주립 기술대학
'''정당'''
→ 권력을 인민으로 →
'''직업'''
정치인
'''경력'''
소련 중앙위원회 의원(26, 27, 28대)
(1981년 3월 3일 ~ 1991년 8월 29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경제부장
(1982년 ~ 1985년 8월)
'''소련 장관회의 주석'''
(1990년 3월 15일 ~ 1991년 12월 25일)
1. 개요
2. 생애
2.1. 정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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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 러시아의 정치인이자 테크노크라트이며, 소련 마지막 장관회의 주석이다.[2]

2. 생애


1956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9년 우랄 주립 기술대학을 졸업했으며 루간스크 주스베르들롭스크우랄마시 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했고, 이 시기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던 안드레이 키릴렌코 장관회의 의장을 만나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2.1. 정계에서


당시 친 브레즈네프 성향의 좌장 키릴렌코 파벌에 있던 인물이다보니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어 1975년 화물교통부 제1차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주석에 임명되었고 1981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진출했다. 1982년을 기점으로 키릴렌코가 건강상의 이유로 2인자로 밀려 유리 안드로포프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에 임명되어 브레즈네프와의 노선을 달리 한 친 안드로포프 성향의 개혁파가 권력을 잡았고, 더군다나 브레즈네프가 사망하면서 친 브레즈네프 파 세력의 중심은 체르넨코 파벌이 되며 정치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으나...
공장장으로 일할 때 태업을 적극적으로 막은 것이 당시 브레즈네프의 방임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이 너무 논다는 것을 우려한 안드로포프의 눈에 들어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경제부장 직에 임명되었다. 이때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만났고, 유리 안드로포프의 정책을 잘 수행해 소련을 잠시나마 부흥기로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유리 안드로포프가 사망한 후 브레즈네프 파의 좌장이자 과거와 현재 모두 리즈코프의 라이벌이었던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중앙위원회 서기장에 임명되었고, 중앙위원회 경제부장이었던 리즈코프의 의견이 체르넨코의 반대에 부딪혀 대부분 무산되었다.[3] 그러나, 체르넨코 권력 싸움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완승하고, 리즈코프는 오히려 지위가 더 낮아졌다.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리즈코프는 암시장의 활성화와 주류시장 타격을 예상해 캠페인을 적극 반대했고, 정확히 들어맞았다.
1986년 시작된 제12차 5개년 계획에서는 생산품의 생산량과 질을 향상시키자는 고르바초프를 지지했다. 그러나 기계 품질 향상과 전반적인 투자량 확대 중 무엇을 할 것이냐의 차이로 기계 품질 향상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얻을 방법이 없는 것을 안 고르바초프와 투자량 확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리즈코프는 갈라섰다. 결과로는, 무리하게 안드로포프식 방식을 추진한 고르바초프의 정책과 미래에 대한 생각 없이 브레즈네프식의 다소 뒤떨어진 방식을 추진한 리즈코프의 정책은 모두 중단됐다.
1986년 우크라이나 SSR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서 반경 30km 내[4] 많은 사람들을 대피시켜 우크라이나계 정치인의 좌장이라는 이름을 알렸다.
1987년 리즈코프와 고르바초프는 기업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기존의 브레즈네프 식의 방임과는 다른 방식인 기업주의 권한 축소로 노동자의 힘을 증가시켰지만, 결과적으로 너무 커져 실패했다.
1988년에는 아르메니아 SSR에서 일어난 지진 복구를 하겠다며 나섰고,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소련 전 지역에서 큰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공황으로 인한 정부 예산 부족으로 전체 복구에는 실패했지만, 국민들 관심 돌리기에 바빴던 고르바초프보다는 행동으로 나선 리즈코프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았고, 고르바초프의 주 적수가 되었다.
1988년 점진적 시장경제 도입을 꾀한 페레스트로이카 추진 당시 급격한 민영화가 불러올 영향을 안 리즈코프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극구 반대했고 리즈코프의 규제 시장경제 정책[5]은 부패한 관료들이나 브레즈네프 독트린 파기를 우려한 군부, 그리고 지식인들을 막론하고 큰 지지를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1992년 이전에 모든 나라가 독립하면서 러시아는 페레스트로이카에 버금나는 급격한 시장경제화를 맞이했다.
리즈코프와 고르바초프의 실책(제12차 5개년 계획, 기업에 관한 법률)을 사실상 전혀 검토하지 않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경제부를 폐지시켰고, 중앙정부의 힘을 강화시켜 보다 효율적인 경제 정책 시행을 꾀했지만, 1990년 고르바초프가 대통령 직위를 도입하며 정부의 힘을 약화시켜 둘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1990년 리즈코프의 지지율은 빠르게 떨어졌지만, 지방정부를 강화시켜 소련 해체에 영향력을 미친 리즈코프의 경제 개혁안인 500일 정책[6]은 결함이 심각할 정도로 많은 고르바초프의 것과 다르게 높이 평가되었다. 리즈코프는 러시아 의회의 내각 불신임권 실패 이후에도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과의 타협에 실패해 빠르게 지지를 잃어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패했고 러시아는 이 선거를 기점으로 소련에게서 차례차례 벗어나기 시작했다.

2.2. 소련 해체 이후


소련 해체 이후 소수정당들을 차리고 러시아에서 계속 활동했으나 겐나디 쥬가노프를 지지하며 은퇴했다.

[1] 토레츠크[2] 1990년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장관회의는 소련 내각으로 변경되었고 장관회의 주석 또한 소련 총리로 변경되었다.[3] 리즈코프는 안드로포프가 5년만 더 살아있었더라도 중국의 개방정책와 비슷하게 개방되어 소련이 붕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의 경제 정책을 평가하며 회고했다.[4] 정확히 30km는 아니었고, 일부 오염지역은 방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정부를 대신해 많은 사람들을 구출한 것은 공이지만.[5] 시장경제 도입을 민간 기업과 공기업 사이에 위치한 기업 다수를 창출한 후 서서히 사회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사상. 당시 리즈코프는 시장경제의 본격적 도입 시기를 1992년으로 잡았다.[6] 가격 자유화, 중앙정부 통제 하의 지방 분권화, 단계적 민영화, 무상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