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체르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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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정치인.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의 최고권력자로, 소련 공산당 제5대 서기장이자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지냈다.
전임자 안드로포프와 함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사이의 과도기 2년 4개월 동안 집권한 두 듣보잡 서기장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나마 안드로포프는 과거 KGB의 위원장이었다는 경력에서 오는 위엄, 정체 상태에 빠진 소련을 개혁하려고 한 점, 그리고 미국 소녀 서맨사 스미스와의 일화 때문에 어느 정도는 유명한 편이지만, 체르넨코의 경우에는 '''정말로 존재감이나 치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안드로포프와 마찬가지로 건강이 그다지 따라 주지를 못해서 고작 1년밖에 통치를 못 하고 죽어야 했다. [1]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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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前前)임 서기장 및 전임 서기장과 함께 있는 사진. 가장 오른쪽에서 서 있는 사람이 체르넨코이다.
2.1. 출생부터 군 입대까지
1911년 9월 24일 러시아 제국 시베리아의 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노보쇼보로 지구 보리샤야-테시에 살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에는 부농에게 고용되어 일했다. 1929년에 콤소몰의 단원으로 가입했으며,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소련 육군의 징병에 따라 국경경비대에서 복무했다.
2.2. 공산당 활동
1931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체르넨코는 전역한 직후에 부임한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당의 선전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당 서기로 승진했다.[2] 전쟁이 끝난 1945년에 펜자 지구당 서기로 전근했다가 1948년 몰도바 공산당의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으로 승진했는데, 당시 몰도바 공산당의 서기가 바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였다.
몰도바 소비에트에서 키시네프 교육대학을 졸업한 체르넨코는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브레즈네프로부터 후대받은 덕택에 1956년에 소련 공산당의 선전부 대중선동 활동과장에 등용되었다. 이후 그는 브레즈네프의 측근으로서 승진을 거듭했다. 특히 브레즈네프가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에 취임하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총무부장으로 영전하면서 오랫동안 재임한 덕택에 소련 공산당의 당조직 안에서 광범위한 인맥을 쌓게 되었다. 또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투서부를 마련해 소련 공산당/소련 장관회의/소련 최고회의 상무회를 구성하는 하급 관료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려고 했다.
1982년에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반(反) 브레즈네프 세력에 속한 유리 안드로포프가 후임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체르넨코는 권력에서 밀려나는 듯했으나, 1984년 2월에 안드로포프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체르넨코는 당 관료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서기장에 취임하여 권력을 획득했다.
2.3. 서기장 취임 후
1984년 4월에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소련 헌법상의 국가원수)을 겸직한 체르넨코는 취임 초기부터 병약했고, 눈에 띄는 실적은 없었지만, 교육정책에 대하여 기술교육과 전문교육을 중시한 덕택에 교육개혁에 착수했다.[3] 또한 중요한 인사에 대하여 정책을 단행할 힘이 없는 것으로 보였으나, 9월 6일 당에 비판적인 언동을 반복하던 니콜라이 오가르코프(소련군의 총참모장)를 해임하고, 그의 후임으로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를 임명하면서 당정군의 관료 정치를 개편했다.
다만 오가르코프의 해임에 대해서는 체르넨코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체르넨코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서기였던 그레고리 로마노프가 각각 여름 휴가와 해외 출장으로 동시에 부재중 상태가 된 다음날 새벽에 공산당 정치국 회의가 급작스럽게 소집되었고, 이 자리에서 오가르코프의 해임이 결정되었다. 이 때문에 오가르코프의 해임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비(非)체르넨코파(派)가 체르넨코파(派)의 거대한 인맥에 흠집을 내기 위해 공작한 것이라는게 이 설을 지지하는 이들의 논거다.
한편, 체르넨코는 노동조합을 지원하고, 중국과 무역협정을 위해 교섭하였다. 그러나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의 서독 방문을 막는 등, 냉전의 완화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2.4. 사망
1985년 3월 10일, 오랜 세월 동안 앓고 있던 만성 폐쇄성 폐질환이 악화되어[4] 발생한 심폐기능 부전에 의한 심장마비로 인해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유해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3. 평가
취임한 지 불과 1년 만에 죽음을 맞았으며 소련 국민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던 서기장이었지만, 일가족의 가장으로서는 둘도 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부인인 안나 드미트레브나 체르넨코는 남편의 장례식 때 오열하면서 죽은 남편의 시신에 계속 키스했다고 한다.
[1] 사실 이러한 평가도 곤란한 게, 말렌코프는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게 일찍 숙청당해서 물러난 것일 뿐 적어도 여생 면에서는 상당히 장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르넨코는 그렇지도 못했다. 물론 이는 직전임자이던 안드로포프 역시 마찬가지였다.[2] 크라스노야르스크 지구당 서기를 맡을 당시 재밌는 일화가 존재한다. 스탈린은 1913년 크라스노야르스크 관할이던 쿠레이카라는 북극권의 오지에서 유형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체르넨코가 1942년에 이 때의 스탈린의 일화들을 모아 스탈린 숭배용 책으로 내서 점수를 좀 따보려고 했던 것. 그러나 돌아온 스탈린의 반응은 불 같은 격노였다. 직접 전화해서 아주 혼쭐을 내줬다고.. [3] 체르넨코의 교육개혁 정책은 고르바초프 시절에도 예정대로 진행했지만, 석유값 폭락으로 개혁이 우왕좌왕하고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체르넨코 본인이 구상했던 초안과 많이 다른 모습이 되었다.[4] 무려 9살 때부터 담배를 피우던 골초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