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안드로포프

 

'''유리 안드로포프가 역임한 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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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안드로포프의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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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블라디미로비치 안드로포프'''
'''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
Yuri Vladimirovich Andropov
'''
<colbgcolor=#cc0000> '''출생'''
1914년 6월 15일러시아 제국 스타브로폴 현 나구츠카야 역
'''사망'''
1984년 2월 9일 (69세) |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연방시
'''국적'''

'''학력'''
리빈스크 기술대학 (학사)
페트로자보츠크 주립대학 역사학, 언어학 (학사)
'''정당'''

'''종교'''
무종교(무신론)
'''직업'''
정치인
'''경력'''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주석 (1967년 5월 18일 ~ 1982년 5월 2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82년 11월 12일 ~ 1984년 2월 9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83년 6월 16일 ~ 1984년 2월 9일)
1. 개요
2. 생애
2.1. 서기장 취임 전
2.2. 서기장 취임 후
3. 이야깃거리
3.1. 듣보잡?
3.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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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친애하는 서맨사 양, 편지 잘 받아보았다. 넌 톰 소여의 친구 베키를 닮은, 용기있고 정직한 소녀 같구나.

미국에도 우리 나라에도 핵무기가 있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가는 끔찍한 무기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사용되는 일이 있기를 절대 원하지 않아. 그것이 우리 나라가 결단코 핵무기로 선제 공격을 하지 않기로 세계에 선언한 이유란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지구의 모든 이들을 위해 평화를 원한단다. 우리의 아이들과 너 서맨사를 위해서도.'''

미국 소녀 서맨사 스미스의 편지를 받고 보낸 정성스런 답장의 일부이다. 전문은 서맨사 스미스 문서를 참조.

소련정치인. 1982년부터 1984년까지의 소련 최고권력자로, 소련 공산당 제4대 서기장이자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지냈다.
안드로포프-체르넨코 라인을 잇는 듣보잡 서기장 라인 멤버 중 한 명이지만, 한편으로는 흐루쇼프-안드로포프-고르바초프로 이어지는 개혁파 서기장 라인의 한 축이자 자세히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정책이 실패한 이후 '''소련 최후의 희망'''이었던 서기장. 실제로 그 당시 정치국원 중에 현실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던 사람이 안드로포프였으며, 고르바초프 항목에 나오듯 고르바초프가 당 내에서 큰 권위를 가지지 못한 것에 비하면 안드로포프는 권위에서나 실력에서나 확실히 소련 최후의 희망이라 할 만하다. 당장 당 관료들이 체르넨코를 지지하는 와중에도 KGB와 군의 지지로 서기장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안드로포프가 급사함에 따라 브레즈네프 계파였던 체르넨코가 '''한 일은 커녕 니콜라이 리즈코프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을 반대하기만 하다가'''[1] 1년을 하다가 죽게 되고 서기장의 자리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이어진다.

2. 생애


[image]
전임후임 서기장과 함께 있는 사진. 왼쪽에서부터 세번째에 소련 원수 예복 차림으로 앉은 사람이 브레즈네프, 그 옆에 상장 예복 차림으로 서 있는 사람이 안드로포프,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을 단 정장 차림으로 서 있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람이 체르넨코다. 체르넨코 왼쪽 뒤에서 누군가와 대화 중인 소련 원수 예복 차림의 인물은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2.1. 서기장 취임 전


1914년 6월 15일 러시아 제국 스타브로폴 고베르노라테에서 태어났으며, 페트로자보스크 국립 대학 및 공산당 간부 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다른 전임 서기장들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정치국원이나 못해도 정치인(정치장교)으로써 한 자리 꿰차고 있었지만, 하지만 안드로포프는 역대 소련 서기장 중 유일무이하게 정치인이 아닌 '''파르티잔'''으로서 나치 독일과 싸운 인물이며, 이 시기부터 조금씩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다만,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 기간에 일시적으로 숙청되어 노역 생활을 하다가 복권된 흑역사도 있다.
2차대전 후 외교 분야와 첩보 부문의 실력자로 떠오른 안드로포프는 1953년~1957년에 헝가리 주재 대사관의 참사관과 대사를 연속으로 재임했는데,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헝가리 대사를 지내면서 소련군의 유혈진압에 결정적으로 관여했다. 1957년~1962년에 공산당 중앙위원회 연락부장을[2] 거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임(1957년), 중앙위원회 서기(1962년)를 역임하였다. 1967년부터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보안위원회(KGB) 주석을 거쳐 소련 공산당의 정치국원이 되었고, 1976년에는 상장 계급을 받았다. 안드로포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KGB 주석을 재임하면서 서구사상의 유입을 경계하여 매우 엄격한 검열 및 탄압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론(異論)의 탄압, 반공 작가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추방, 물리학자이자 반체제 인권활동가인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의 연금 등이 안드로포프의 재임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안드로포프가 소비에트 연방의 KGB 주석을 지내던 시절 서독 뮌헨에서 열린 1972 뮌헨 올림픽 도중에 검은 9월단이 일으킨 뮌헨 올림픽 참사가 터지자, '저런 상황이 소련에서 터지면 스페츠나츠만 믿어선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안드로포프는 KGB 내에 자체적인 무력조직 겸 대테러부대인 국내용 '알파 그룹'과 국외용 '빔펠 그룹(베타 그룹)'을 창설하였다. 대테러부대 창설에 별 관심이 없던 당시 소련 지도층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파격적인 결정을 한 셈이다. 재미있게도 이 두 대테러부대는 창설자가 나중에 서기장이 되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서기장에게 유달리 충성심이 강했는데, 훗날 소련 공산당의 보수파가 고르바초프를 축출하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당대의 KGB 주석(정변의 찬동자)이 이들 부대에게 러시아 소비에트 최고회의 의사당을 점령하라고 지시했으나, 그 명령을 거부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서구사상의 유입을 막고 반대파를 처단한 안드로포프였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KGB 주석으로 재직하면서 오히려 브레즈네프 시기를 소련의 '''위기'''라고 생각하였으며, 소련의 체제를 '''개혁하기로''' 굳게 결심하게 된다. 원래 브레즈네프의 후임 서기장으로 내정된 사람은 그의 최측근 겸 조력자였던 수완가 미하일 수슬로프[3]였지만, 1982년 1월 그가 사망해버리자 후계자 자리는 공백이 되었고 결국 궁정 암투로 이어진다. 그 결과 후임 서기장으로 지목받은 사람은 사실 안드로포프가 아닌 체르넨코였지만, 체르넨코가 소련의 당정 관료조직의 지지에만 집중하던 것과 달리 안드로포프는 KGB와 군대의 신뢰를 받고 있었고, 국방장관이던 드미트리 우스티노프가 체르넨코에게 "나와 군대는 안드로포프를 지지한다"라고 대놓고 말하자 체르넨코도 단념했다. 결국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사망하자 체르넨코는 안드로포프를 서기장직에 추천했고 안드로포프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아 소련 역사상 최초로 최고지도자 사후 별다른 잡음 없이 순조롭게 서기장직을 계승한 사람이 된다. 1983년 6월에는 체르넨코의 추천으로 최고회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아 소련 헌법상의 국가원수인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에 선출되었다.

브레즈네프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하고 있는 안드로포프. 목소리를 잘 들어보면 이미 건강이 썩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3:38)부터 낭독하는 안드로포프. 좀 더 앞을 보면 브레즈네프와 키스(...)[4]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2. 서기장 취임 후


전반적으로 '''사회의 나사를 조였다'''는 평가가 많다. 브레즈네프 시절을 거치면서 해이해진 국가와 사회기강에 스탈린급은 아니지만 니콜라이 리즈코프 등 당시 브레즈네프 아래에서 일하던 개혁파 인물들을 동원해 구체적인 정책을 정했고 KGB밀리치야(인민경찰), 지구당을 동원하여 박차를 가하였다.
안드로포프는 취임 후 브레즈네프 시기의 정체된 노선에 수정을 가하면서 노동자들의 꾀병이나 무단결근[5]을 근절하기 위한 노동 규율의 확립[6], 경제적 탈집중화와 같은 실험적인 경제개혁 등으로 경제 생산력의 향상을 꾀했다. 실제로 이 때 실시한 경제개혁의 영향으로 브레즈네프 중후반기 내내 하락한 경제성장률이 반등해서 1985년까지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다시 4%대를 기록하며 고질적인 성장률 저하 문제에서 벗어난 듯 싶었다.[7] 그러나 결국엔 1986년 유가폭락 시기부터 소련의 경제는 다시 침체기에 빠지게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강경노선을 추구함과 동시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실추된 소련의 위상을 다시 복구시키기 위해 당의 원로 세력들을 갈아치우고 개혁 성향을 지닌 젊은 기술 관료(테크노크라트)들이었던 고르바초프와 니콜라이 리시코프[8] 등을 중용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내부 체제 단속을 위해 유대인의 이민을 극소수로 줄였고, 문화·예술·언론을 탄압했다.
하지만 지병인 만성 콩팥병의 악화로 1983년 8월에 헝가리 공산당 서기를 접견한 이후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안드로포프는 이렇게 되기 얼마 전부터 이미 고르바초프를 자신의 후임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집권 기간이 너무 짧았을 뿐만 아니라 보수파의 수장인 체르넨코의 세력이 아직 강했기 때문에 이를 실현시키지 못했다. 병으로 쓰러진 이후에도 병상에서 국정을 챙기려고 했지만 이미 안드로포프의 명이 다했음을 알아챈 관료들은 대부분 체르넨코 편에 서고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를 후임으로 삼는다는 생각은 좌절되었어도, 안드로포프의 재임기 동안 고르바초프가 중앙당에서 최고 권력자의 비호 아래 매우 성공적으로 요직을 수행하면서 인맥을 쌓은 것은 향후의 역사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동안 쌓은 실적을 바탕으로 체르넨코 정권 아래에서도 2인자가 될 수 있었는데 안드로포프의 집권기라도 없었다면 고르바초프가 정말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지 영 의문스럽다. 임종하는 자리에 고르바초프를 불러다 놓고 아들 이고르의 장래까지 부탁할 정도로, 고르바초프와는 이미 평범한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를 넘을 정도로 신뢰하는 사이였고 이는 안드로포프의 지지자들이 상당 부분 고르바초프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대 급부로 체르넨코 계열이 고르바초프를 경계하게 되는 현상도 나타나기는 했다.
1984년 2월 9일 안드로포프가 6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 후임으로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취임했다. 안드로포프의 유해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레닌 영묘 뒷편의 크렘린 벽 묘지로 이동하여 스탈린과 수슬로프의 묘 사이에 묻힘으로써 소련 공산당 내에서는 안드로포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을 반영했다.

3. 이야깃거리



3.1. 듣보잡?


보통 대한민국에서는 안드로포프에 관한 연구가 애초에 잘 되지도 않고 관련 서적도 없어서 안드로포프-체르넨코 계보의 듣보잡 서기장으로 자주 평가받는다. 하지만 안드로포프가 1년 남짓한 치세에 한 것은 의외로 크며 사실 멀리 볼 것도 없이 고르바초프를 중용함으로써 소련의 개혁, 개방의 초석을 닦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고르바초프의 급진적 개혁안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보다는 안드로포프가 조금 더 오래 살아서 집권하는게 소련 입장에선 최선이였고, 실제로도 안드로포프가 살아있었다면 소련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면 중국의 덩샤오핑처럼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유지하면서 경제개혁과 성장에 올인하는 개발독재를 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 점은 당시에 안드로포프를 도와 체르넨코 사후까지 중앙위원회 경제부장을 맡았던 니콜라이 리즈코프도 언급했다.
물론 그 와중에 '''민주화 요구는 무참하게 짓밟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장 이 양반이 KGB 주석 시절에 어떤 일을 했나 보면 답이 나온다. 그러나 확실하게 중산층 및 안정 지향 세력이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맞이하는 급속한 개혁과 민주화로 소련이 파멸한 것을 고려하면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인 소련의 미래를 볼 때 안드로포프의 점진적인 개혁정책이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롤 모델이라고 한다. '''푸짜르'''라는 별명대로 장기집권을 노리는 독재자인 푸틴의 롤 모델로는 보통 스탈린이나 브레즈네프 같은 사람들이 꼽힐 만하기에 의외인 부분. 그러나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장기적 존속을 위해 취했던 정책들을 보면, 빨간 물을 쏙 뺀 소련의 재현인 유라시아 연합을 구상하는 푸틴으로서는 안드로포프의 사례에서 배울 것이 많기는 하다.

3.2. 기타


호빗들이 득실득실했던 역대 소련 서기장 중 키가 182cm로 최장신이었다. 러시아의 지도자로 보자면 후에 187cm인 옐친이 나와서 깨지게 된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당시의 소련 지도자라서 한국의 신문 만평에서는 천하의 개쌍놈 기믹으로 자주 나온다. 고바우 영감이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에 대한 해명을 들으려고 하자 안드로포프가 마스크를 벗었는데 '''입이 없는 인간'''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당대의 만평에서 소련의 높으신 분이 이 캐리캐처를 자주 썼다.
이 문서 맨 위에 나온 편지는 1983년 여름 서맨사 스미스라는 미국초등학생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낸 것이다. 서맨사는 안드로포프에게 미국과 소련이 싸우지 말고 세상이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그는 서맨사와 부모를 소련으로 초대했다. 당시 일부 자유진영에는 빨간 모자늑대라며 만평이 쏟아져나왔다. 이 사건은 미국과 소련이 보이지 않는 대치를 계속하던 냉전 시기에 잠시나마 평화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미 안드로포프가 와병 중인 상황이라 둘의 만남은 불발되었다. 안드로포프는 다음 해 죽었고, 서맨사 스미스마저도 미국으로 귀국한 뒤 유명인이 되었으나 1985년 열세 살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숨지고 만다. # #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던 당시에는 사뭇 다른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해 가을에도 냉전의 한가운데에 있는 한반도에서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터져 전국이 떠들썩해졌고[9] '''세계를 멸망시킬 우발적 핵전쟁의 가능성이 또 한 번 세계를 스쳐 지나갔다.'''
이 시대를 다룬 실시간 전략 게임워게임: 유러피안 에스컬레이션의 싱글플레이 에피소드 3 <에이블 아처>에서는 NATO의 기동훈련인 '에이블 아처 83'을 서방의 침공 준비로 오인한 유리 안드로포프가 '''철의 장막 전역에서 예방공세 웨이브를 시전한다.''' 사실 단순히 게임에서뿐만이 아니라 실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이 당시 에이블 아처 훈련을 NATO측의 대규모 선제 공격의 신호로 오인하고 핵선제공격을 비롯한 선제 예방 공격을 실행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안드로포프는 병중에도 KGB를 통해 선제공격에 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내린 결론은 NATO가 선제 공격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대치 상황만 이어갔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하지 않았으며, 안드로포프는 3개월 후 사망하였다.
안드로포프의 사망 후 출간된 미국의 루리 래넌의 만평에는 자신의 무덤에서 브레즈네프의 무덤에 마이크를 대고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루니 래넌이 그린 만평 중에 하나가 바로 저 빨간 모자 만평이다.
러시아 야로슬라블 주에 위치한 리빈스크 시는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안드로포프의 이름을 따서 '''안드로포프 시'''라고 불렸다.

[1] 원래 보통 전대 국가원수가 개혁파이고 후임이 반동이면 그 후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현상유지만 하는 경우가 많다.[2] 공산권의 당 연락부는 대체로 타국의 자매 공산당과의 교류협력을 담당하는 부서이다.[3] 수슬로프는 확고한 공산주의자였으나 온건노선을 지향했고 안드로포프와 고르바초프를 도왔다. 고르바초프는 그를 원칙주의자지만 수구주의자는 아니였고, 욕심이 없으며 당내 대립과 다툼을 중화시킨 인물이라 평가했고 동시에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였다고 언급했다. (고르바초프 자서전 <선택>)[4] 브레즈네프는 정치적 의도로 키스를 많이 하기로 유명했다.[5] 스탈린 시대에는 그야말로 지옥같은 노동 환경을 구현했지만 흐루쇼프 시대부터는 직장분위기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브레즈네프 시대 후반기에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서 아예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결근한다든지 직장인들끼리 입을 맞추어서 며칠씩 쉬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아예 출근도장만 찍고 그냥 노는 경우도 있었기에 소련 산업 생산성에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큰 골칫덩어리였다.[6] 인민경찰(밀리치야)들을 시켜서 무단 결근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직장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고르바초프 자서전 <선택>)[7] 안드로포프가 추진한 정책인 '원칙과 질서' 캠페인은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인상 깊게 조명받는다. (고르바초프 자서전 <선택>)[8] 훗날 고르바초프 밑에서 소련 장관회의 주석으로 재직했다.[9] 탈북민 강명도 씨의 증언에 따르면 온건파인 브레즈네프에 비해 대서방 강경파였던 안드로포프는 북핵 개발을 지원하고 남침도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