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와라노 미치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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菅原 道真/菅原 道眞[1])
845년 음력 6월 25일[2] ~ 903년 음력 2월 25일[3]

東風(こち(かば (においおこせよ (うめ(はな (あるじなしとて (はる(わするな[4]

(코치후카바 니오이오코세요 우메노하나 아루지나시토테 하루오와스루나)

동풍 불거든 꽃향기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 해서 봄을 잊지 말지니[5]

1. 소개
2. 생애
3. 사후
5. 대중문화 속의 미치자네


1. 소개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문인이자 정치가.

2. 생애


헤이안 시대 제일가는 천재라고 칭송받은 인물이다. 격은 낮지만 학자 가문인 스가와라 가에서 태어나[6]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재상급인 우다이진(右大臣)까지[7] 올랐다.
그러나 당시 헤이안 시대는 후지와라 일족이 대대로 왕의 외척의 지위를 차지하고 권세를 휘두르던 때였기 때문에 격이 낮은 귀족으로 우대신이 된 그는 후지와라 일족의 음해를 많이 받았다. 게다가 그는 당시 일본의 정치체제의 근간이었던 율령제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기득권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쇼타이의 변(昌泰の変)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좌천되었다. 게다가 천황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사실 처음에 그를 발탁한 인물은 우다 덴노(宇多天皇)[8]였는데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나서도 미치자네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우다의 아들 다이고 덴노(醍醐天皇)는 미치자네를 시기하던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時平)를 신임하여 미치자네를 멀리 했다. 이 상황에서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토키히라의 참소를 당해 다자이곤노소치(大宰権帥)[9][10]직으로 내쳐져 중앙정치에서 추방당했다.[11] 거의 유배당하다시피 한 그는 수도에서 먼 오늘날의 큐슈로 좌천된 후 한을 품고 죽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서를 짓고 금욕하며 시를 지으면서 자신을 위로한 점도 대단하다.
견당사(遣唐使)를 폐지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 조정은 전에 하던 대로 894년에 견당사를 보내려고 했고, 미치자네를 견당사로 선정했다. 그런데 당시 당의 국세가 거의 막장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미치자네가 나서서 "이번에는 가지 맙시다."라며 계획을 취소시켰는데, 이 때문에 사실상 폐지되었고 얼마 못가서 당이 멸망하고 만다. 이 조치는 그때까지 일본에서 만연하던 당풍(唐風, 중국풍) 문화가 국풍(國風, 일본풍) 문화로 교체되어 '''일본 고유의 독자문화를 꽃피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육국사 중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을 편찬하는 데 관여했다. 또한 미치자네가 지은 류취국사(類聚國史)는 일본사뿐 아니라[12] 한국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발해를 언급하면서 "그 주민은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13]이 적다."라고 한 기록이 대표적. 이는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수의 말갈인을 지배하는 왕조국가 발해'''의 모습을 그리게 하는 주요 사료가 되었다.
낮은 신분이나 실력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재능이 뛰어났지만 시대의 한계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후 학문을 관장하는 신(또는 신적 존재)으로 숭배받았다는 점에서 신라최치원과 비교되기도 한다.

3. 사후


여기서 끝났다면 그저 정치의 억울한 희생자 정도로 여겨지고 말았겠으나[14]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이 문제였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죽고 나서 일본에는 대규모 역병과 각종 자연재해가 연달아 일어났고, 심지어 930년 7월 24일에는 대낮에 천황의 궁궐인 교토고쇼의 정전인 청량전에 천둥번개가 내리쳐서 많은 신료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일어났다. 예로부터 벼락은 신벌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공포는 대단했다. 거기다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나라로 치면 경복궁 근정전 한복판에 벼락 쳐서 신하들이 한꺼번에 죽은 것과 같은 수준의 사건이었으니 두려울 만도 하다.
이 와중에 후지와라노 토키히라는 벼락이 떨어져 다들 놀란 와중에도 칼을 빼들고 하늘에 겨눈 채 "너(미치자네)는 살아 있었을 때도 나보다 관직이 낮았고, 지금 벼락신이 되었다 해도 이 지상에 내려온 이상은 지상에서의 상관인 내게 예를 표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게 무슨 짓이냐?"라고 일갈했는데, 신기하게도 벼락이 멎었다고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에서도 이 일화가 등장한다. 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천둥번개가 내리칠 때 피뢰침이나 다름없는 칼을 칼집에서 빼들고 하늘로 겨눈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타이밍 안 따라줬으면 자기도 죽을 뻔한 셈.
하지만 이 허세는 오래가지 못했으니,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음해했던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집안이 본인을 비롯해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전부 연속으로 요절한 것이다.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딸이 다이고 덴노의 후비였기 때문에 이는 곧 다이고 덴노의 황태자와 황태손도 요절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사건까지 일어나면서 이것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원령이 일으킨 복수라는 공포가 귀족 사회에 밀려들었다.
본인과 자손이 이렇게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바람에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집안은 거의 몰락하고 동생 후지와라노 다다히라가 후지와라 일족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살아남은 자손들도 언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원혼에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고 한다. 만화 음양사에도 이와 같은 묘사가 등장한다.
헤이안 시대 일본의 상류층들은 유독 바케모노(요괴와 모노노케)를 두려워해서 음양사들의 점괘에 맞춰 방위가 안 좋으면 집을 옮겨다니기도 할 정도로 미신을 잘 믿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죽고 온갖 괴이쩍은 일들이 벌어지자 그가 천황의 정궁에 벼락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바케모노가 되었다고 믿었다.
공포감이 극에 달한 조정에서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규슈로 추방한 내용을 담은 칙서를 불태우고 그에게 우대신 관직을 돌려주는 등의 조치까지 취했으나 그 이후에도 흉흉한 일이 이어졌고 다이고 덴노는 두려움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민간 설화에 따르면 어떤 귀족이 죽었다가 되살아났는데, 그 귀족이 말하기를 자기가 저승에 갔을 때 다이고 덴노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자신의 피눈물로 일본을 잠기게 하겠다면서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같은 연유로 죽은 뒤 억울함 때문에 강대한 원령이 되었다고 여겨져서 후지와라 가문은 헤이안 시대 내내 그를 두려워했고, 미치자네의 원혼에 관련한 무수한 일화가 생겨났다. 다행히도 사후 100년 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원한이 정화되었다고 여겨지고 나서부터는 원령이 아니라 학문의 이자 뇌신으로 숭배되어 현재의 천신(天神) 신앙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미치자네를 신격화시킨 이들이 후지와라 가문이었다. 단, 이 후지와라 일족은 미치자네를 모함한 후지와라 일족과는 계파가 좀 다르다[15].
그리고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치자네의 손자 스가와라노 후미토키(菅原文時)를 문장박사로 복권할 수밖에 없었다. 음양사로 유명한 아베노 세이메이의 스승이자 본인도 고명한 음양사였던 카모노 타다유키의 아들 요시시게 야스타네[16]도 후미토키의 수제자가 되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스토쿠 덴노, 타이라노 마사카도와 함께 일본삼대원령으로 꼽히지만 지금도 온갖 괴담이 넘쳐나는 둘과 달리 정화되어 학문의 신이 되었기 때문에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를 대신 넣기도 한다.
현대 일본에서는 그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기 때문에 입시철이 되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해가 잘 안 간다면 한국의 갓바위를 떠올리면 된다.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의 주 수입원은 입시철에 팔리는 오마모리[17]에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8]
미치자네를 모시는 신사 중 특히 큐슈에 있는 다자이후덴만구(太宰府天滿宮)와 교토에 있는 기타노덴만구(北野天満宮)가 유명하다. 야마구치현호후시에 위치한 호후덴만구(防府天満宮)까지 합쳐서 3대 덴만구로 꼽는데, 이 세 곳은 일본 전국에 위치한 덴만구 가운데서도 톱으로 꼽힌다.[19]
다자이후덴만구에는 매화나무가 매우 많은데 교토에서 다자이후로 좌천될 때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덕과 학문을 흠모한 매화들이 날아와서 그렇다고 한다. 이것을 토비우메(飛梅)라 부른다. 일설에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죽었을 때 그 원한과 억울함이 깊어서 운구하던 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덕분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신 다자이후 텐만구를 비롯해 그 외에 신사에 가보면 소 동상이 많다. 아픈 사람은 자신의 아픈 곳과 같은 소의 부위를 만지면 병이 낫고 머리나 을 만지면 지혜롭게 된다고 한다.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에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간토 땅에서 신황(新皇)을 자처하게 된 계기가 하치만 대보살의 사자를 자처하는 한 무녀가 나타나 "타이라노 마사카도에게 일본의 천황의 지위를 내리신다는 하치만 대보살의 뜻을 받들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그 내력을 전한다." 하고 신탁을 전한 것이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아들 스가와라노 카네모치(兼茂)는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영지에 가까운 히타치의 지방관을 지내기도 했다.
또한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아버지 요시마사가 살던 도요타군 인근 마카베군에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또 다른 아들인 스가와라노 가게유키(景行)가 살았는데, 그는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동생인 타이라노 마사히라에게 학문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스가와라노 가게유키는 이후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숙부인 타이라노 요시카네와 함께 자신이 사는 곳에 아버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시는 신사를 짓기도 하는 등, 스가와라 집안은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집안과 여러모로 연줄이 있었던 모양.
이 때문에 메이지 시대에는 아예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환생이 타이라노 마사카도였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19세기 말에 말이다(...)

4. 백인일수



'''제24번 스기와라노 미치자네(菅家)'''

このたびは ぬさもとりあへず 手向山(たむけやま もみぢのにしき (かみのまにまに

이번 여정은 누사[20]

를 준비 못해 타무케야마[21] 비단결의 단풍잎 마음껏 받으소서

  • 5-8-5-7-7의 형태로 중간에 1글자 더 끼었다.
  • 여행을 떠나기 위해 안전을 보장받고자 타무케야마노카미에게 먼저 기도하고 가려 했으나 깜빡하고 누사를 준비하지 못해서 주변의 괜찮은 단풍이라도 주워다 바치니 넓은 도량으로 좀 봐주십쇼 하는 내용이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우다(宇多) 전(前) 천황의 명을 받아 요시노 미야타키(吉野の宮滝, 나라현)에 다녀오다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는 이 정도면 신에게 바칠거리로도 무방하겠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5. 대중문화 속의 미치자네


유메마쿠라 바쿠의 음양사(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카노 레이코[22]의 동명의 만화에서 꽤 출연빈도가 높은 원령 멤버로 등장한다. 걸핏하면 나타나서 여기저기 벼락을 때리는 데 이것은 그가 뇌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23][24] 1권에 보면 처음 등장한 미치자네의 원령 옆에 고통받는 조정대신의 영혼이 나오는데 바로 그를 음해한 토키히라다.[25] 초기 해적판 번역에서는 이름이 이상하게 나와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다만 읽어보면 은근히 개그스런 면모도 없지 않다.[26]
마찬가지로 음양사를 소재로 하는 《음양의 도시》에서 손자인 스가와라노 후미토키가 등장한다. 뭐, 주인공이 수제자인 요시시게 야스타네다보니.
만화고스트 스위퍼》헤이안 편에서는 천신으로 추앙되면서 선의 미치자네와 악의 미치자네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전자는 아군, 후자는 적군으로 나온다. 다만 초창기 번역판에는 '원도진'이라고 菅(스가)자는 뺀 이름으로 나온다.
세가와 타카쓰구의 《암야귀문》에서, 주인공 나쓰키의 조상으로 '''모함을 받아 좌천되어 억울하게 죽은 후 벼락신이 된''' 기타노 대감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티브로 한 인물로 여겨진다. 어차피 《암야귀문》이라는 작품 전체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음양사》의 번안(?)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나쓰키에 해당하는 실존인물 미나모토노 히로마사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혈연상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히로마사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좌천시킨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외손자이므로 미치자네의 입장에서는 원수의 자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듯.[27]
동방도명수의 최종보스 마가하라 미타마의 모티브이다.
징기스칸 4에서는 일본문화권 출신이 아닌 국왕이 다자이후를 점령하고 주둔하면, 이 유적과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에 대해 이야기하고 국왕의 정치력을 올려주는 이벤트가 나온다. 국왕이 일본문화권만 아니면 된다.
진 여신전생 4에서는 영적국방병기라는 타이틀의 강력한 악마로 등장. 아수라회의 우두머리 타야마의 권속으로 주인공을 막아선다. 나중에 신물들을 얻었다면 미치자네를 쓰러트린 장소에서 이벤트가 발생해 미치자네를 동료마로 만들 수 있게 된다.[28] 모습은 활을 든 궁병을 연상시키는 복장을 하고 있지만, 학문의 신이면서 뇌신이라는 점을 반영해 갑주의 빈 부분에 푸른 전기가 일렁이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노라가미에 등장하는 신인 텐진이 바로 이 사람이다. 후쿠오카시번화가텐진 역시 미치자네가 봉안된 신사인 스이쿄텐만구에서 따온 지명이다.
하이바라 야쿠의 만화 응천의 문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와 귀족 아리와라노 나리히라가 후지와라씨가 다른 성씨를 제치고 권세를 키워가던[29] 교토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역사 미스테리 만화로, 여기서는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전, 문장생으로 대학료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일본 현지에서는 2020년 2월 기준으로 12권까지 나왔는데 한국에서는 아쉽게도 정발이 되지 않았다.

[1] 이름을 미치자네 대신 '미치마사'라고도 부르며, 음독으로는 도신(どうしん)이라고 한다.[2] 양력(율리우스력)으로는 7월 28일[3] 양력(율리우스력)으로는 3월 21일[4] (はる(わすれそ라고 된 판본도 있다.[5] 우대신에서 다자이노곤노소치로 좌천되어 떠나던 날에 지었다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와카이다. 현재 다자이후덴만구 앞에 있는 매화나무와도 관련이 있는데, 교토에서 좌천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찾아 하루만에 다자이후까지 허공을 날아와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경내의 다른 매화들보다도 먼저 꽃이 핀다고.[6] 스가와라 가는 노미노스쿠네를 시조로 하는 하제 씨에서 비롯된 가문이다. 최인호의 소설 ≪제4의 제국≫에서는 노미노스쿠네가 살았다고 알려진 땅이 가야계 스에키 토기가 발견되는 옛 금관가야인의 주거지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역시 하제 씨의 후손으로 '가야인의 피를 잇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되기도 했지만, 신라사부로 떡밥과는 달리 그렇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7] 조선으로 치면 우의정 정도이다. 게다가 헤이안시대 일본은 오를 수 있는 관직과 관위가 타고난 신분에 따라서 거의 결정되기 때문에 낮은 신분은 아무리 애를 써도 고위직에 오를 수 없던 때이다. 한마디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선 인물. 그러나 그 대가가 너무 비쌌다.[8] 드물게 어머니가 후지와라 가문 사람이 아닌 천황이였다.[9] 지금의 큐슈(九州)일대를 관장하는 태재부(太宰府)의 장. 하지만 권(権)은 외부에서 들어온 인사에게 해당하는 직책이기 때문에 다자이노소치(大宰帥)보다 한 계급 아래이다.[10] 우대신과 비교하면 10계급이나 강등당한 셈.[11] 아버지 우다 상황이 이를 반대하며 아들 천황에게 면담을 청했는데 만나지도 않았다.[12] 일본육국사 중 일본후기에 빠진 부분은 류취국사를 통해 메꾸곤 한다.[13] 문맥상 대개 고구려 유민을 가리킨다고 본다. 다만 한규철은 말갈을 익히 알려진 여진족(및 만주족)이 아니라 고구려 지방민에 대한 비하적 호칭이라고 보는 견해에서, 토인을 '''사인(士人)의 오기'''라고 해석하기도 했다.[14]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후지와라노 토키히라를 좌대신으로 중용한 것은 그를 내세워 후지와라 일족의 전횡을 막아보려는 뜻이었는데,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그런 천황의 뜻도 몰랐으니 그야말로 진짜 헛똑똑이일 뿐이라고 보는 평도 있다.[15]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후손이 아닌 그의 동생 다다히라의 후손들이다.[16] 분가하면서 성씨를 바꾸었다. 와타세 소이치로의 소설 음양의 도시 주인공이 바로 이사람.[17] 신토의 부적.[18] 만화 고스트 스위퍼에서 보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레이코를 만나러 왔다가 위치를 들켜서 엄청난 수의 수험생들이 그에게 달려드는 모습이 나온다.[19] 다자이후와 기타노의 두 덴만구가 덴만구 가운데서 투 톱이기는 하지만, 호후덴만구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사망한 바로 이듬해(904년)에 지어져 3대 덴만구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다.[20] 신토에서 신에게 빌기 위해 사용하는 기다란 종이나 천. 대략 탄자쿠와 비슷하다.[21] 타무케야마노카미. 여행의 안전을 비는 신.[22] 만화의 신으로 알려진 데즈카 오사무의 며느리다. [23] 머리가 아프로마냥 뻗쳐 있는데 이것도 뇌신임을 반영한 설정인듯.[24] 그래도 학문의 신이라는 설정은 어디 안 가서 2권에서 '넌 저기 찌그러져서 훌쩍거리면서 시나 읊고 있으라.'는 원령의 말에 발끈해 '학문을 깔보니까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게 허망한 짓인줄 죽어서도 모르는 거지.'라고 까기도 한다.[25] 청룡이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쪽 귀로 뚫고 나와 있다.[26] 작중 궁중 와카 시합에 미나모토노 히로마사가 우방측 멤버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딱 봐도 우방이 지겠다는 마쿠즈에게 "그치만 우방이 이긴다면 어떨까? 내가 붙으면 그 쪽은 다 이기게 돼 있거든"라고 했다가 "좌수가 양이고 우수가 음인데 음인 당신이 어떻게 음에 붙냐. 그리고 당신 원래 토키히라 핏줄 싫어하는 거 아니었냐."라는 마쿠즈의 도발에 넘어가서 "아 내가 붙으면 그쪽이 무조건 다 이긴다니까!"라며 마쿠즈의 (와카 시합의 승패가 걸린) 바둑 두기 내기 제안에 응한다.[27] 앞에서 말한 만화 음양사에서도 아쓰히토(다이고 덴노)와 토키히라의 피를 이은 자손이라며 격노하는 미치자네를 보고 아베노 세이메이가 급히 손을 쓰는 부분이 있다.[28] 마찬가지로 다른 영적국방병기들도 같은 이벤트로 동료마로 할 수 있다.[29] 제목인 응천의 문은 헤이안 시대 교토 황궁의 정문이었던 오텐몬(응천문応天門)을 가리키는데, 이 응천문이 방화로 전소된 사건인 오텐몬의 변(応天門の変)을 계기로 후지와라 북가는 오텐몬 화재의 주범으로 지목된 도모 씨 가문을 비롯한 다른 정적 가문들을 정권에서 배제시키고 후지와라 북가 중심의 정권을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