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

 


[image]
'''▲ 미나모토(源 みなもと) 가문의 대나무잎과 용담꽃 문장.'''
1. 개요
1.1. 기원
1.2. 역사
1.3. 기타
2. 미나모토 성을 쓰는 인물
2.1. 실존 인물
2.2. 가공의 인물
3. 관련 항목


1. 개요


일본의 4대 본성 중 하나. 보통 일족을 가리키거나, 설명을 할 때는 『源氏』라 쓰고, 겐지, 미나모토우지라 읽는다.
헤이시(平氏, 또는 타이라), 후지와라시(藤原氏), 타치바나시(橘氏)와 함께 4대 본성 『겐페이토키츠』(源平藤橘)라 칭해진다. 원래는 천황의 아들이나 손자가 신하의 신분으로 강등될 때 주어지던 으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족으로는 타이라타치바나가 있다.

1.1. 기원


옛날에 북위에서 탁발(拓拔)씨가 원(元)씨로 바꿀 적에 방계인 독발(禿髮)씨는 소리가 같은 원(源)씨로 바꾼 일을 본따서 사가 덴노가 아들들에게 이 성씨를 준 일이 처음이다.

1.2. 역사


겐지 중에서도 일파가 나뉘어 하위로 21류파가 존재하며, 그중에서도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계열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1] 세이와 겐지 계열은 56대 천황인 세이와 덴노의 자손들로 그중에서도 카와치국(河内國)을 근거로 했던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미나모토노 요시미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이 이 계열이었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가인 아시카가 가문, 에도 막부의 쇼군가인 도쿠가와 가문도 세이와 겐지의 분파였다. 세이와 겐지 외의 겐지 류파 중 유명한 가문은 센고쿠 시대의 유력 다이묘 가문이었던 롯가쿠씨, 아마고씨, 쿠로다씨의 시조격이었던 '''우다 겐지(宇多源氏)'''나 요리미츠 4천왕의 일원이었던 와타나베노 츠나의 후예인 와타나베씨의 원류 '''사가 겐지(嵯峨源氏)''' 등이었다. 일본에서는 무사 정권 시절에도 천황의 상징성이 생각보다 강했기에 천황 가문과 연결된 일족이 아니면 고위직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으므로 막부를 수립한 가문은 하나같이 천황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처럼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를 연 정이대장군(세이이타이쇼군) 가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성씨였던 만큼,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 등도 외국에 보내는 문서에는 자신들의 성을 '''미나모토'''로 표기하기도 했다. '''미나모토=일본을 지배하는 자라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던 셈이다.'''

1.3. 기타


'미나모토노'라고 된 것도 '미나모토'씨이다. '노(の)'는 '~의'라는 뜻으로 '미나모토 가문의' 라는 뜻이 된다. 일본 고대 귀족의 이름을 쓸 때 이렇게 쓰는데, 서양식으로 따지면 스페인(de)과 용례가 유시한 것 같지만 굳이 귀족이 아니더라도 씨명을 부를 때나 각종 고유명사를 이어붙일 때 고대 일본에서 자주 쓰이던 용법이므로 귀족과는 별 상관 없다. 영어의 'of'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2]
그와는 별개로 皆本, 皆元, 水元, 南本 등 '미나모토'라고 읽을 수 있는 다른 성씨들도 있기는 하지만 위의 원(源)씨와는 독음만 같을 뿐 상관이 없다.
'''일족 간에 내분이 빈번했던 일본 내의 여러 가문 중에서도 가장 내분이 심했다.''' 재밌는 점은 몰락할 때는 물론 승승장구 할 때에도 내분이 있었다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겐페이 전쟁''' 후반기에 미나모토 가문이 다이라 가문을 몰아붙이는 시점에서도 내전이 일어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친동생 요시츠네를 보내 자기 사촌 미나모토노 요시나카(키소 요시나카)를 토벌한 사건이 있었고, 나중에는 그 동생을 숙청해버렸다. 애초에 겐페이 전쟁 이전 카와치 겐지가 약해지고, 이세 헤이지(헤이케)가 득세하게 된 것은 4대 당주 미나모토노 요시타다의 암살 및 그에 연관된 잇따른 내분으로 인해 가문의 유력자들 상당수가 사라진 것이 그 원인이었는데, 이 모든 참극이 당주 자리를 빼앗으려던 요시타다의 숙부 신라사부로 요시미츠의 간계 때문이었다는 후대의 기록이 있다.[3] 그리고 이 요시미츠와 대립했던 인물 중 요시타다의 동생이자 요시미츠에게는 또다른 조카인 미나모토노 요시쿠니가 있었는데 이 요시쿠니의 장남은 이후 닛타 가문의 시조가 되었고, 차남은 아시카가 가문의 시조가 되어 훗날 후손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대에 무로마치 막부를 건립하게 된다. 그런데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있어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더불어 일생의 숙적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닛타 요시사다로 앞에서 언급한 요시쿠니의 장남 가문의 당주가 차남 가문 당주의 철천지 원수였다는 것을 보면 그냥 일족 간의 내분이 유전자 단위로 새겨졌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

2. 미나모토 성을 쓰는 인물



2.1. 실존 인물



2.2. 가공의 인물



3. 관련 항목


[1] 여담이지만 21류파라고는 해도 이 중에는 천황의 자식인 친왕 중 1명만 따로 겐지의 성을 얻어 분가했다가 곧바로 후손이 단절되어 사라지는 등 사실상 이름뿐이었던 분파들도 전부 포함한 숫자이다.[2] 성씨를 이름과 이을 때 쓰던 말로, 굳이 귀족 전용은 아니었으나 당시에는 성씨를 가진 것이 귀족밖에 없었으니 그렇게 이미지가 굳어진 것.[3] 참고로 이 양반을 가문의 시조로 모셨던 후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센고쿠 시대 다이묘 중에서도 모략과 신의없음으로 유명한 그 다케다 신겐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그 조상에 그 후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4] 다만 한국으로 들어올 때 성이 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