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앤 포시

 


Dian Fossey
(1932.01.16~1985.12.27(추정), 향년 만53세)
[image]
1. 인물 소개
2. 일생
3. 비극과 죽음
3.1. 1977, 고릴라, 디지트의 죽음
3.2. 과격한 보호운동
3.3. 미국으로 귀환
3.4. 코넬 대학교 생활
3.5. 1984, 르완다 귀환
3.6. 1985, 의문의 죽음
3.7. 용의자와 판결
3.7.1. 엠마누엘 르위레카나의 유죄판결과 자살
3.7.1.1. 음모에 의한 르위레카나의 모함설
3.8. 새로운 용의자
4. 평가
5. 기타
6. 같이보기


1. 인물 소개


미국의 인류 학자(영장류학자). 르완다에서 평생 고릴라 보호와 연구에 힘썼다. 저서로 '안개 속의 고릴라' 가 있으며 동명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한국어로 그녀의 일생에 대해 자세한 자료를 보고 싶다면 그녀를 후원하기도 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 다이앤 포시 특별편이 포함된 회차를 보면 좋다. 고릴라들의 뒷이야기도 다룬다.

2. 일생


1932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다이앤이 세 살 무렵 어머니는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 이혼하고 6살에 재혼한다. 그러나 새아버지는 다이앤을 무시했으며, 친어머니마저 이부동생들만 편애했다. 특히 다이앤은 새아버지를 매우 싫어하여 그와 식사도 같이 하지 않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새아버지의 기대 때문에 캘리포니아 마린(Marin) 칼리지의 경영학과에 진학했으나 다이앤 본인은 경영학보다는 생물학에 흥미가 있었기에 나중에는 수의학과를 갈 목적으로 경영학과를 중퇴한 후 1954년 자비로 [1] 캘리포니아대 생물학과 수의학 과정으로 전과한다. 대학 수의학과를 졸업하여 한동안 동물병원 보조로 일하다가 산 호세 주립대에 들어가 작업치료사가 되기 위한 학위까지 땄다. 학위를 딴 다이앤은 아동병원의 작업치료사로 취직하여 한동안 그 곳에서 일했다.
친구들을 통해 아프리카에 흥미를 가졌고, 1963년에 6주간 아프리카 사파리로 여행을 다녀온다. 여행 중 올두바이 협곡에서 루이스 리키(1903~1972) 박사를 만난 다이앤은 유인원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깊은 감명을 받고 영장류학자의 길을 걷는다.
1966년 다이앤은 리키 박사에게 산악고릴라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내셔널 지오그래피 소사이어티로부터 지원금도 받아낸다. 처음에는 카바라에서 연구를 시작했으나 내전 때문에 르완다로 이동했다. 다이앤은 카리심비 산과 비소케 산 사이에 캠프를 차리고 그 이름을 ‘카리소케’ 라고 지었다.
영장류의 생태와 사회조직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선 고릴라와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다이앤은 고릴라들의 행동과 언어를 흉내내며 고릴라 무리가 자신에게 습관화될수 있도록 몇 년을 기다렸다. 고릴라들은 경계를 풀고 다이앤과 친구가 되었으며, 다이앤은 맨 먼저 손을 내민 수컷 고릴라에게 피넛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릴라 무리들이 다이앤을 받아주자 다른 고릴라 무리나 새끼 고릴라들도 다가와서 털갈이를 하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이는 인간과 고릴라가 우호적 관계로 접촉한 최초의 사례이다.
[image]
수컷 고릴라 디지트는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197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비극과 죽음




3.1. 1977, 고릴라, 디지트의 죽음


그러나 1977년 수컷 고릴라 디지트가 사살당한다.
[image]
디지트의 머리와 팔이 잘려나간 시체를 서글프게 바라보는 모습.
1977년, 밀렵꾼 여섯 명이 사냥개를 대동하여 고릴라 사냥을 벌였다. 디지트는 무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결국 죽었다. 그 외 수많은 고릴라가 희생되었으며 디지트의 새끼들은 잡혀갔다. 포시가 아끼던 개도 희생되었는데, 이 개도 고릴라 무리를 돕기 위해 싸우다가 죽은 것이다. 디지트를 기리기 위해 다이앤은 1978년에 만든 고릴라 보호기금의 이름을 디지트 펀드로 지었다. (1992년에 다이앤 포시 국제 고릴라 기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3.2. 과격한 보호운동


그 뒤에도 연이어 고릴라들이 희생당하자 다이앤은 과격한 방식으로 보호운동을 펼쳤다. 고릴라 보호구역에 생긴 마을에 방화하거나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라며 협박했고 주민들이 가축을 몰고 보호구역으로 오면 가축에 물감 스프레이를 뿌려 오지말라는 경고까지 한다. 이때문에 다이앤의 급진적인 환경 운동에 유인원 학자들도 비판할 정도로 원성이 쏟아졌다.

3.3. 미국으로 귀환


다이앤을 후원하던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리키 펀드'조차 다이앤에게 질색하여 그만두지 않으면 지원금을 끊겠다며 압력을 가했고, 르완다 정부도 미국 정부에 항의하였다. 미국 언론에서도 고릴라에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하면서 자극적인 기사를 계속 내보냈고 미국 정부도 다이앤한테 그만두며 당장 미국으로 돌아오게끔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다이앤은 미국으로 돌아간다.

3.4. 코넬 대학교 생활


돌아온 이후 코넬 대학교에 자리를 잡아 1983년 책 '안개 속의 고릴라' 를 집필했다. 이 책은 전세계 사람들이 고릴라 보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으며 다이앤에게도 큰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3.5. 1984, 르완다 귀환


하지만 다이앤은 고릴라 보호를 계속하기 위해, 과격한 노선을 버리겠다고 약속하며 1984년에 르완다로 돌아왔다.
다이앤이 르완다로 돌아왔을때 고릴라 보호구역은 르완다 군대가 개입하여 밀렵은 줄었지만 대신 정부가 주도하는 고릴라 관광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다이앤은 관광지의 고릴라를 꾸준히 연구하는 동안 이상행동을 발견했고, 이것은 관광으로 발생한 쓰레기와 질병, 이동경로의 방해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결론내린다.
다이앤은 약속대로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세계에 고릴라 관광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며 고릴라 관광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관광수익을 내는 르완다 정부가 반발하게 되었고 다이앤은 그녀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자주 충돌했다.

3.6. 1985, 의문의 죽음


이때문에 르완다에서 다이앤의 신변이 위험해졌고 1985년 가을, 키우던 앵무새는 독살당하고 집 문 앞에서 퍼프 에더(아프리카 살무사) 조각들이 발견된다. 이것은 지역에서 사용되는 흑마술로 ‘죽음의 저주를 내린다’ 를 뜻했다. 그래서 이를 우려한 다이앤의 지인들은 다이앤에게 안전을 위해 르완다를 떠날것을 권고했으나 다이앤은 거부하며 자기 역시 디지트를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지인들에게 말했다. 게다가 이때 다이앤은 건강도 좋지 않았다. 다이앤은 담배를 많이 피우는 골초에다 알코올중독자라서 술도 많이 마신터라 폐기종에 걸리게 되었다. 나중에는 호흡곤란과 산소부족에 시달리게 되어 야외연구도 힘들어할 정도로 악화된다.
같은 해 12월 26일, 오두막에서 잠자던 도중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시체는 오두막의 침실에서 발견되었는데 마체테로 난도질당했고[2], 사건 현장에는 호신용 권총이 남아있었다. 여권과 돈이 그대로 있어 원한으로 인한 살인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는 피가 많지않아 다이앤이 끌려나와 외부에서 살해된 채로 다시 옮겨진것으로 보고 있다.

3.7. 용의자와 판결


르완다 정부는 범인으로 르완다인 밀렵꾼 추적자 '엠마누엘 르위레카나'와 다이앤 밑에서 일하던 미국인 연구소 직원 '웨인 맥과이어'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맥과이어는 미국에서 손을 쓴 결과 무사히 귀국했지만 르위레카나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복역한 지 9달만에 자살했다.

3.7.1. 엠마누엘 르위레카나의 유죄판결과 자살


체포 당시 현지 경찰은 엠마누엘 르위레카나가 "다이앤에게 해고된 적이 있고, 평소 다이앤을 증오했다"며 르위레카나를 체포했고 이에 대해서는 이전 문서에서도 똑같이 서술되어있었으나 이는 와전된 것으로, 오히려 르위레카나는 몇 번이고 일을 그만두려했지만 실력이 좋아 다이앤에게 계속해서 고용됐고 그러다 다이앤이 죽기 사흘전 결국 자기발로 다시 나간것이 저렇게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그만둔 것을 해고당했다며 사람을 몰아간것. 게다가 르위레카나는 다이앤 사망일 당시 하루종일 가족과 함께 집에만 있었다.
따라서 실제 범인은 르위레카나가 아닐 수 있고 그 역시 다이앤처럼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 주장을 제기한 환경운동가 팔레이 모와트(Farley Mowat)는 1987년에 출간한 다이앤 포시의 전기 'Woman in the Mists'에서 그녀의 죽음이 고릴라 관광산업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르위레카나가 범인이 아니라는 주장 자체는 다이앤 포시 사망 직후 용의자 두명이 발표되고부터 주변인과 동료들이 꾸준히 주장해온 것으로, 르위레카나 범인설에 대한 의문점은 생전 그녀를 후원하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다이앤 스페셜에서도 언급된다.

3.7.1.1. 음모에 의한 르위레카나의 모함설

르위레카나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반박점을 종합하자면,
  • 그는 해고당한 것이 아니라 고민끝에 자기발로 그만둔 것이라 다이앤에게 아무런 앙심도 없었고, 다이앤을 죽여봤자 아무런 득볼 것이 없는 사람이다.
  • 다이앤이 사망한 그 날 그는 하루종일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 그는 감옥에서 사망했는데 목을 매 죽었다는 경찰들의 말은 목을 맬 도구가 하나도 없던 그의 수감상태에 기반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외에도 살인사건 용의자 두명 다 따지고 보면 범인이라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 증거 및 정황이 많기에 다이앤을 알던 사람들은(심지어 현지인들도!) 사실상 다이앤이 두 용의자가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조직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고. 살인사건과 용의자 정황에 대해 대강이라도 알고싶다면 이 영상클립을 참조할 것.

3.8. 새로운 용의자


최근에는 루엔게리 주지사가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밝혀지지 않았다. 이 주지사는 르완다 대통령의 처남이자 고릴라 관광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쓸어모으고 있었기에 관광 사업의 어두운 점을 폭로한 다이앤에게 원한이 컸다고 한다.

4. 평가


고릴라 보호와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제인 구달비루테 갈디카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저명한 유인원학자이다.[3] 업적은 매우 컸으나 다이앤이 중간에 과격파로 돌아서면서 평가가 갈리기 시작한다. 폭력적 수단으로 고릴라 보호를 몸소 실현했으나 오랜 내전과 경제적 문제로 고통받는 르완다 사람들은 고릴라를 보호할 여유조차 없었다. 고릴라 박제와 고기, 새끼 고릴라를 애완동물로 사가는 전세계 부유층들 또한 막아야 했으나, 다이앤은 직접적인 밀렵과 환경 훼손 행위를 중점적으로 저지했다.
제인 구달인터뷰에서 "나는 다이앤 포시가 제발 그 부족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랐지만, 다이앤은 그러지 않았다. 다이앤의 죽음이 그 지역 원주민과 적대적인 관계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또한 기사에서 "고릴라 보호에 대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알콜중독자였고 또한 그녀의 고릴라들을 그녀 주위에 살고 있었던 아프리카인들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다만 다이앤이 처음부터 원주민들을 적대시한 건 아니었다. 친하게 지내던 고릴라가 죽기 전에는 밀렵꾼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끼던 암컷 고릴라 논피가 영양을 잡으려고 놓아둔 올무에 걸려 다리를 절단해야 했을 때도 올무를 설치한 밀렵꾼을 용서하는 등, 20년 가까운 고릴라 연구 기간 중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현지인과 밀렵꾼을 이해하며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다이앤이 과격해진 것은 르완다 현지인들을 혐오해서가 아닌 갈수록 심해지는 고릴라 밀렵 때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적지만 젊은 시절에 르완다에서 강간당한 경험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이앤은 콩고 군인들이 자신을 철장 안에 여러 백인들과 함께 가뒀으며, 다른 백인들은 한 명씩 끌려나가 모두 살해당하고, 자신만 윤간당한 뒤 살아남있다고 증언했다. 이 일화는 다이앤 포시가 친구 비루테 갈디카스와 몇몇 사람에게만 말했기 때문에 유명하지 않다. 게다가 의문점도 많다. 다이앤 포시의 지인인 헤이즈는 다이앤의 삶에 대한 회고가 수시로 바뀌었다고 밝혔다. 어떤 때는 콩고군이 자신을 해친 적이 없었다고 하고, 어떤 때는 자신을 집단으로 강간당했다고 말하는 등 일관성이 없었는데 마치 자신을 신비로운 존재처럼 포장하려는 듯 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제인 구달, 비루테 갈디카스와 비교당한다. 그러나 두 사람과 달리 다이앤이 간 곳은 르완다자이르 공화국이였다. 제인 구달이 연구한 곳은 당시 아프리카에서 안전한 편인 탄자니아였고, 갈디카스 역시 보르네오에서 안정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하지만 콩고 지역은 내전이 한창이었고, 르완다 사람들은 전쟁과 폭동 속에서 굶주리는 등 온건한 방식으로 고릴라 보호 운동을 확산시키기엔 너무 어려운 환경이었다.
다이앤 포시 박사가 살해당한 뒤, 다이앤의 부모는 다이앤이 죽자마자 소송을 걸어 재산을 가로챘다. 제인 구달과 비루테 갈디카스의 부모가 딸을 응원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다만 제인 구달과 비루테 갈디카스는 부모와 나쁜관계가 아니었으나 다이앤은 부모와 의절하고 살 정도로 관계가 매우 나빳다. 그녀 자신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자신이 죽거든 그 재산을 고릴라 보호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다이앤이 결혼을 하지 않아 남편과 자식이 없었기에 소송은 결국 부모의 승리로 끝났다.[4] 그나마 남은 돈으로 지인들이 르완다에 고릴라 보호 시설과 그녀의 기념비를 세우고 지금까지도 고릴라 보호에 앞장서고 있지만 고릴라 개체 수는 심각하게 감소하고 있다.

5. 기타


[image]
시고니 위버 주연 영화 '안개 속의 고릴라(Gorillas In The Mist: The Story Of Dian Fossey)(1988)' 가 바로 그녀의 일생을 다룬 영화이다. 위의 그녀의 저서에서 제목을 따온 듯. 네이버 영화소개 및 국내 비디오 및 DVD 제목은 '정글 속의 고릴라' 로 되어있다(국내 미개봉작이다). 그런데 TV 방영 제목은 '안개 속의 고릴라'. 감독은 나중에 언리미티드를 감독한 마이클 앱티드. 배급은 북미는 유니버설. 해외 배급은 워너브라더스. 2200만 달러로 제작하여 6139만 달러 흥행을 거둬들였다. 영화에서도 실제처럼 마지막에 잠자는 그녀를 누군가가 집으로 들어와 마체테로 내리치면서 끝이 난다..주말의 명화로도 더빙,방영된 바 있다.
현재까지도 르완다에서도 내전과 여러 사정으로 고릴라의 수는 나날이 수가 줄어들고 있다. 2008년 르완다에서 발견된 고릴라 시체들은 온전하고 그냥 총으로만 쏴죽였다. 이 상태로 보아 군벌들이 저지른 짓이라 파악(밀렵꾼이라면 이렇게 멀쩡하게 시체를 놔둘 리 없기 때문이다.)되지만 범인을 알아도 처벌할 수가 없기에 지금도 이런 고릴라 학살은 계속되고 있다. 고릴라 보호단체들은 그냥 쳐다볼 수밖에 없는 현실.
마찬가지로 콩고에서도 내전이 심해지면서 군자금 벌이나 전자제품(바로 스마트폰!)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될 콜탄이라는 자원 채취를 위해 숲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거나 식용으로 사용하려고 밀렵한 탓에 고릴라 개체수가 많이 줄고 있다. 콩고 공화국 안에서는 단 2마리가 서식한다는 듯('안개 속의 고릴라' 책을 봐도 콩고에서 살던 고릴라가 수백마리라고 나오던 걸 생각하면 얼마나 절망적인지 알 수 있다).
2014년 1월 16일에 구글에서 다이앤 포시의 생일에 맞춰 대문을 다이앤 포시 관련 테마로 바꿨다.

6. 같이보기


[1] 왜냐면 경영학과를 중퇴하면서 양부, 친모와 크게 갈등해 생활비를 끊자 다이앤도 그들과 의절하면서 백화점 점원 일과 공장 일을 하여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2] 마체테에 얼굴이 찔리고 머리를 강하게 맞아 머리가 쪼개져 죽었다.[3] 참고로 이 세 사람 모두 위에 언급된 루이스 리키 박사의 영향으로 유인원 연구(제인 구달은 침팬지, 비루테 갈디카스는 오랑우탄)에 평생을 바쳤다.[4] 다만 이때 친부와 양부는 사망하고 없었기에 재산은 생존해있던 다이앤의 어머니가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