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호(연호)

 


일본어
(たい (ほう
그레고리력
701년 5월 3일 ~ 704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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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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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운
1. 개요
2. 특징
3. 출전(出典)
4.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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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네 번째 연호(元号).''' 시기는 율리우스력 기준 701년~704년. 구자체로는 大寶라고 쓰며, '''だ'''いほう로도 읽을 수 있다.
슈초 사용 종료 이후 연호 사용이 중단된 지 15년 만인 701년 5월 3일(율리우스력)에 개원하였으며, 이 때 이후로 일본의 연호 사용은 한 번도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개원의 계기는 쓰시마섬(対馬嶋)에서 금(혹은 백은)이 헌상된 것이나, 797년에 쓰인 속일본기에서는 이 때 헌상된 금이 쓰시마산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704년 6월에 당시 수도였던 후지와라쿄(藤原京)에 즈이운(瑞雲)[1]이 나타난 것을 기념하여 연호를 다이호에서 게이운(慶雲)으로 바꿨다.

2. 특징


아스카 시대 후기로, 제42대 천황이였던 몬무 덴노가 다스린 시기. 다이호 율령이 시행된 시기로, 이로 인해 고대 일본은 중앙집권화가 촉진되고 독립적인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율령제 국가로 들어섰다.

3. 출전(出典)


「天地之大德曰生、聖人之'''大寶'''曰位」

「천자의 큰 덕은 생(生)이요, 성인의 '''큰 보배'''는 위(位)이니」

''『易経』 「繋辞下」''

''『역경』 「계사 하」''

성인도 마땅한 지위가 없으면 그 말이 세상에 먹혀들지가 않는다는 뜻이다.

4. 주요 사건


이하는 전부 율리우스력을 사용한다.
  • 원년 (701)
    • (개원 전): 쓰시마섬(対馬嶋)에서 금이 헌상되었다.
    • 5월 3일: 다이호(大宝) 연호 개원. 관직명과 위호(位号)를 개정하고 관복을 정했다. 주나곤(中納言)이 폐지되었다.
    • 5월 12일: 단바노쿠니(丹波国)에서 지진이 3일 간 계속되었다.
    • 7월 12일: 천황의 경호를 담당하는 우도네리(内舎人)를 처음으로 임명했다.
    • 9월 9일: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반포 및 시행. 지방행정구획이 국평제(国評制)에서 국군리제(国郡里制)로 개편되었다.
    • 10월 2일: 다카야스성(高安城)[2]을 폐했다.
  • 2년 (702)
    • (일자 불명): 전국적으로 통일된 계량단위가 정해졌다.
    • 3월 3일: 다이호 율령이 전국에 공포되었다.
    • 5월 9일: 히다노쿠니(飛騨国)에서 신마(神馬)[3]가 헌상되었다. 히다노쿠니에 사면령이 내려지고 그 해의 조(租) 전액과 용(庸) 절반이 감면되었다.
    • 7월: 아와타노마히토(粟田真人), 야마노우에노오쿠라(山上憶良)가 견당사로 파견되었다.
    • 8월 28일: 사쓰마노쿠니(薩摩国)와 다네가시마(種子島)의 하야토를 정벌했다.
    • 11월 14일: 지토 태상천황이 미카와노쿠니(三河国)에 행차(行幸)했다.
  • 3년 (703)
    • (일자 불명): 하타노 히로타리(波多広足)가 견신라사로 파견되었다.
    • 1월 13일: 몬무 덴노의 후견(後見)으로 통치를 관장하던 지토 태상천황이 승하했다.
    • 2월 10일: 오사카베노 친왕(刑部親王)을 지태정관사(知太政官事)에 임명하여 후견 역할을 맡겼다.
  • 4년 (704)
    • (일자 불명): 703년에 파견된 견신라사가 귀환했다.
    • 1월 27일: 지토 태상천황의 대장(大葬)이 거행되었다.
    • 6월 16일: 후지와라쿄(藤原京)에 즈이운(瑞雲)이 나타난 것을 기념하여 연호를 게이운(慶雲)으로 바꾸었다.

[1] 불교에서 길조(吉兆)로 여겨지는 구름으로, 보랏빛을 띠거나 다섯 색으로 빛난다. 현대에는 사이운(彩雲; 채운)으로 불리며, 구름을 이루는 물방울에 태양광선이 회절하면서 생겨나는 것으로 밝혀졌다.[2] 백강 전투 패배 후 667년에 수도 방어를 위해 지은 산성. 지금의 나라현오사카부 사이에 있는 다카야스산 정상 부근에 있었다.[3] 신사 제례 때 쓰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