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일본기
1. 개요
續日本紀
일본의 정사 중 하나. 《일본서기》에 이어 육국사의 2번째에 해당된다. 총 30권으로 순수 한문체, 편년체로 기록했지만 일부 인물들의 사망 기사에 ‘훙전(薨傳)’이라 불리는 짧은 전기(傳記)를 덧붙여 기전체의 요소도 일부 사용했다.
나라 시대 제42대 몬무 덴노 원년(697)부터 제50대 간무 덴노 10년(791)까지를 다루는데 전 40권에 달한다. 한국과 관련된 기록들을 국사편찬위원회가 별도로 모아서 온라인 열람을 제공한다. 참고로 속일본기에는 간무 덴노의 생모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백제 25대 무령왕의 자손으로 기록되어서 아키히토 덴노가 2001년에 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2. 상세
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인 797년에 간무 덴노의 명으로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전반부와 후반부의 편찬이 각각 달리 진행되었다.
- 전반부는 몬무 덴노 원년부터 코켄 덴노(46, 48대)의 재위기까지[1] 로 총 30권이었다. 그러다 간무 덴노대에 들어 스가노노 마미치(菅野眞道) 등이 이를 20권으로 새로이 편수(編修)했다.
- 후반부는 간무 덴노의 명으로 제47대 준닌 덴노와 제49대 코닌 덴노의 재위기[2] 도 새로이 편찬토록 했으며 총 40권이었다. 이것을 후지와라노 쓰구타다(藤原継縄) 등이 794년에 14권으로 줄였고, 스가노노 마미치(菅野眞道) 등이 간무 덴노의 재위기인 791년까지의 내용을 6권의 분량으로 더해 20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모두 모아서 40권으로 편찬한 것이다.
3. 한국사와 관련된 기록
한국사의 남북국시대와 겹치는 시기를 다룬 사서인데, 일본서기가 백제나 가야와 관련된 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면, 속일본기는 동시대에 존재한 통일신라 및 발해가 일본과 관련된 내용이 제법 수록되어 있다. 신라 측 기록도 한국/중국 사서에는 없는 내용이 다수 있어서 주목받지만 특히 발해사 연구에는 꼭 필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 신라와 달리 발해는 스스로 역사서를 남기지 못했고, 신라의 옛 기록을 모아 고려에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만들고 현대까지 전해지는 반면 발해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도 직접 다루지 않아 지금까지 남아있는 발해사 자료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3.1. 발해 건국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한 갈래이다. 대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계루(고구려)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을 거점으로 성곽을 쌓고 거주하였다.
3.2. 무왕 관련 기록
발해왕이 아룁니다. 산하(山河)가 다른 곳이고, 국토가 같지 않지만 어렴풋이 풍교도덕(風敎道德)을 듣고 우러르는 마음이 더할 뿐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대왕은 천제(天帝)의 명을 받아 일본의 기틀을 연 이후 대대로 명군(明君)의 자리를 이어 자손이 번성하였습니다. 발해왕은 황송스럽게도 대국(大國)을 맡아 외람되게 여러 번(蕃)을 함부로 총괄하며,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習俗)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너무 멀어 길이 막히고 끊어졌습니다. 어진 이와 가까이 하며 우호를 맺고 옛날의 예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어 이웃을 찾는 것이 오늘에야 비롯하게 되었습니다.
《속일본기》, 728년 1월
무왕 10년(728), 무예(무왕)가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여러 번국들을 결속시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遺俗)울 잇게 되었습니다....선린을 도모하고자 귀국(일본)에 사신으로 영원장군 낭장 고인의(高仁義) 외 24인을 보내 외교문서를 전하고, 아울러 담비 가죽 300장을 보냅니다.
3.3. 문왕 관련 기록
지금 보내온 국서(國書)를 살펴보니 부왕(父王)의 도를 갑자기 바꾸어 날짜 아래에 관품(官品)을 쓰지 않았고, 글 끝에 천손(天孫)이라는 참람된 칭호를 쓰니 법도에 어긋납니다. 왕의 본래의 뜻이 어찌 이러하겠습니까. ... 고씨의 시대에 병난이 그치지 않아 조정의 위엄을 빌려 저들이 형제를 칭하였습니다. 지금 대씨는 일없이 고의로 망령되이 사위와 장인을 칭하였으니 법례를 잃은 것입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