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조에 신이치로
竹添進一郞
1842년 ~ 1917년
일본 메이지 시대의 외교가, 정치가, 한학자. 자는 고코(光鴻), 호는 세이세이(井井)이며 구마모토 현 출신이다.
1842년 일본 구마모토 현에서 태어나 1875년 이토 히로부미의 인정을 받아 정치계에 입문하였고 청에 파견되어 주(駐) 톈진(天津) 공사를 지냈으며 이후 베이징(北京) 총공사를 지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였을 때 주(駐) 조선 일본 공사관이 구식 군대들에 의해서 습격을 받자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후임으로 주 조선 일본 공사로 부임하였다. 이 때부터 고종과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에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서광범 등이 주도하는 개화파를 후방 지원하며 김옥균과 개화파가 우정국 축성식 때 정변을 일으키고 민태호, 조영하 등을 살해하고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히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1] 으로 피신시키자 일본군 군대를 경우궁으로 파병하여 고종과 명성 황후를 경호하도록 지원하였다. 김옥균도 다케조에의 후방을 받아 정변에 성공하였던 듯 싶었다.
그러나 3일 후 위안 스카이(원세개)가 이끄는 청군이 경우궁으로 들어오면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일본 본국으로부터 조선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는 훈령에 따라 청군이 오기 직전 일본군의 모든 병력을 경우궁에서 인천으로 철군시킨 계기로 이 때부터 김옥균과 개화파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여겼고 결국에는 김옥균과 개화파로부터 배신했다는 낙인을 받았다. 그리고 다케조에의 배신적인 행위로 정변은 3일만에 실패하였고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과 함께 인천으로 피신하며 일본 국적 선박 치토세마루 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정변 이후 조선 특명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이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고 일본에서 한학을 통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충정로의 일제시대 명칭이었던 다케조에쵸(죽첨정)는 조선총독부에서 다케조에를 기리기 위해서 갖다붙였다. 광복 이후는 민영환에서 유래된 충정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구한말을 다룬 사극 명성황후에 출연했다. 배우는 고 김상순. 자세한 것은 한국 사극/외국인참조.
[1] 오늘날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의 자리에 있었던 23대 순조의 친어머니 수빈 박씨를 모신 사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