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1. 개요
2. 군란 이전의 상황
2.1. 쌀의 전쟁
3. 군란(軍亂)의 격화
4. 궁궐 기습 및 중전의 피신
5. 대원군의 섭정
5.1. 대원군은 언제부터 개입했는가?
6. 청나라 군대의 파병과 진압
6.1. 누가 청군을 불렀는가?
7. 의의
8. 기타


1. 개요



KBS 역사저널 그날 중에서
1882년(고종 19년) 7월 23일, (음력 6월 9일) 구식 군대가 별기군(근대식 신식 군대)과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면서 조선 왕조에 대해 집단으로 일으킨 군란(軍亂). 조선판 군납비리, 열정 페이가 국가 단위로 발생된 최악의 사례다.
조선 왕조가 멸망의 길을 걷는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또한, 한반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나라의 군주가 살고 있는 궁궐이 군대와 백성들에게 직접 습격을 당한 사례다.[1]
또한 외국 군대, 특히 청군과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제물포 조약, 조일수호조규 속약, 조일통상장정 등이 체결되고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며 청과 일본 상인이 조선 영토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인해 빈약한 기반을 가졌던 조선 상인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1891년 기준 청 거류민은 2천명, 일 거류민은 8,600여명에 육박했다.[2]

2. 군란 이전의 상황


1876년 일본 제국과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은 조선 왕조는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진보적 성향의 개화파와 보수적인 위정척사파간의 갈등은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한편 조선 정부는 기존의 5군영을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으로 통폐합하고 일본의 후원 하에 '별기군(別技軍)'이라 불리는 신식 군대를 창설하여 일본인 교관[3]과 조교의 지도 아래 훈련을 실시했다. 2영의 구식 군인들은 별기군에 밀려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급료조차 제때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다. 이에 군인들은 일본의 후원을 등에 업은 별기군과 그들을 우대하는 조정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된다.
그 와중에 고종은 세자빈 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종의 가례를 위한 혼수품으로 대량의 비단을 일본 회사로부터 구입하는데 거액의 돈을 지출했다.링크 [4]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급여는 체불한 채 아들 혼수품 장만에는 거액의 돈을 들인 것이다.

2.1. 쌀의 전쟁


군인 1 : “아니, 대체 이게뭐야? 이 쌀이 반이고 겨가 반이잖아!”

군인 2 : “이...이것 좀 보게. 내 쌀에는 모래가 섞여있네!”

KBS 수목드라마 명성황후 중에서

1882년 선혜청(宣惠廳)[5]에 전라도의 조미(漕米)가 도착하여 음력 6월 5일 구식 군인들에게 밀렸던 급료를 지급하게 되었는데, 이 조미가 선혜청 관리들의 농간으로 인해 불씨가 되었다. 이유인즉 그 조미에는 식용 쌀이 아닌 썩은 쌀겨와 모래가 섞여 있고[6] 양도 기준에 맞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자, 구식 군인들은 포수인 김춘영과 유복만이 주도하여 집단으로 조미 수령을 거부한 뒤 선혜청으로 가서 쌀을 새로 달라고 요구했다. 지급 담당자가 새로 못 주겠으니까 받기 싫으면 가라는 식으로 군인들을 모욕하고 자극하는 언동까지 일삼자 결국 군인들은 분노가 폭발하여 선혜청 관리들을 구타했다.
사실 사태는 이렇게 악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래의 글은 맨 처음 구식 군인들이 선혜청 관료들을 두들겨 팼단 말을 듣고 음력 6월 9일 고종이 보인 반응이 적힌 실록 내용이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7]

이 아뢰기를,

"추수 후의 농사 형편을 물론 미리 예견할 수 없습니다만 대체로 기전(畿甸, 서울 및 경기 지방)은 틀림없이 흉년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도하(都下, 서울) 백성들의 우환이 실로 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전에는 이러한 때면 매달 양곡을 발매(發賣)하여 기근을 구제하였습니다만, 지금 선혜청(宣惠廳)에 무슨 저축된 곡식이 있습니까? 다만 전날 군자감(軍資監)에서 급료를 내줄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도감(都監)의 군졸들이 받은 곡식이 섬이 차지 않는다면서 두 손으로 각각 1섬씩 들고 하는 말이 '13개월 동안 급료를 주지 않다가 지금 겨우 한 달분을 분급(分給)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가?[8]

' 라고 하면서 해당 고지기를 구타하여 현재 생사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어 대청 위에 돌을 마구 던져 해당 낭관(郞官)이 도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작은 문제이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13개월이나 급료를 내주지 못한 것도 이미 민망스러운 일인데 게다가 섬이 차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도봉소(都捧所)에서 획송(劃送)하면 중간에서 축나는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크게 기율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즉시 무위영 대장(武衛營大將)에게 말은 전하여 엄하게 조사한 다음 법률을 적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 군사들의 가슴 속에 억울함이 쌓인 데에 연유한 듯합니다.

신이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함께 일체(一體)라는 뜻으로 지난날에 진술을 올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위소의 군사가 받는 것은 완전하고 훈련 도감의 군사가 받는 것은 이처럼 완전하지 않았으니, 어찌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탄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10년을 양성하여 하루 동안에 쓰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만약 그 사이에 후함과 박함의 차이가 없지 않아 평일에 원망이 쌓였다면 어찌 우려할 바가 없겠습니까?

근래에 전하께서 행차할 때마다 군사들에게 건호궤(乾犒饋)[9]

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해영(該營)[10]에서 돈이 모자라서 나누어주지 못하였으니, 이는 유명무실한 문서일 뿐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먹여줄 것을 바라는 식량은 아홉 말의 쌀에 불과한데 이것조차도 일 년이 지나도록 충분히 주지 않아서, 스스로 의식(衣食)을 마련하여 분주히 복역하면서도 감히 군령을 어기지 않았으니 오히려 기율이 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다. 군졸들이 군령을 어기지 않는 것은 역시 가상한 일이다."

위의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홍순목 : "올해는 흉년인데, 나라 곳간도 다 비었습니다. 당장 어제만 해도 군인들이 월급 때문에 창고지기를 두들겨 팼답니다.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렸고 1개월치 월급을 줬는데 그 양조차도 엉망이었답니다."

고종 : "월급 13개월을 못 준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그나마 준 한 달치도 제대로 못 주었다니 왜 그런건가?"

홍순목 : "산지에서 쌀을 수송하다 보면 상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 합니다. 다만 심각한 사안이라 엄중히 조사시켰습니다. 근데 진짜 원인은 그게 아니고, 차별 대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식 군인들은 제대로 받으면서 훈련도감 군인들은 제대로 받지를 못했으니 똑같이 하루를 위해 10년 훈련하는 애들 입장에서 화가 안나면 그게 더 이상하죠. 월급 1년이나 넘게 안 받고 스스로 먹을 거 입을 거 해결해가면서 군령을 안 어긴 겁니다. 오히려 군기가 제대로 잡혀있습니다."

고종 : "그러게 말이다. 저러고도 그간 난리 안 쳤다니 대단한데?"

그런데 이후 별다른 조치가 없었거나, 아니면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듣고도 씹었거나...(!!). 특히 선혜청 제조 민겸호가 고종의 말을 듣지 않고 주동자들을 구속해버리면서 군인들이 더욱 분노하여 사건이 커져버렸다(…). 다만 이 대목에서도 위에서 "해당 군영(該營)에서 돈이 모자라서 나누어주지 못하였다"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줄 쌀이 없었을 수가 있다! 심지어는 이 대목이 사건이 터진 이후 민망하니까 변명으로 붙여둔 기록이란 시각까지 있다.
다만 13개월치 월급 중 1개월만 준 건 분명 쌀이 없다는 증거겠지만 그 1개월 월급에도 겨와 모래를 섞었다는 사실은 애초에 횡령할 의도와 횡령이 분명히 있었음을 증명하게 된다.[11] 이게 얼마나 큰일이냐면, 급료를 제대로 줄 수 없는 지경인데도 그나마 있는 돈까지 횡령했다는 소리가 된다.
이는 조선 왕조의 재정 부족과 부정부패가 최악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조정은 이 문제를 완전히 파악했음에도[12] 책임자 처벌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해결조차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13] 차라리 정량보다 적게 주기만 하면서 "나라에서 돈이 없어서 그렇다. 제발 이해해다오."라고 달래기라도 했다면 "열받기는 하지만 주기 싫어서 안 주는 것도 아니고 없어서 못 주는 건데 어떻게 달라고 하냐? 그냥 이거라도 나온 걸로 만족하자." 정도로 끝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렇게 대책도 세우지 않고 군기를 흐트러지게 했다는 것은 "저 새끼들은 더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이 따위로 대우한다 이거냐? 오냐,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불만을 초래하기가 쉽다. 실제로, 삼정의 문란에서 가장 문제가 많았던 환곡에서 수령과 아전들이 횡령을 했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3. 군란(軍亂)의 격화


폭행 사건을 일으킨 김춘영, 유복만과 군인들은 잡혀가서 뭇매질을 당하고 갇히게 됐는데, 그들이 사형을 당한다거나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이 고종에게 군란(軍亂) 진압을 요청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게다가 투옥된 군인들이 모두 죽을 것이란 소문에 구식 군인들은 분노가 제대로 폭발했다.
이에 구식 계통 군인들은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의 주도로 그들에게 동조하는 한성의 백성들과 합세하여 마침내 민겸호의 자택을 습격하여 약탈하고선 운현궁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14] 흥선대원군은 사태를 휘어잡기 위해 일단 그들을 달래주고는 성난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며, 그 다음 자신의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인으로 위장시키고 비밀리에 김장손, 유춘만과 함께 구식 군인들의 지휘를 맡도록 하였다.
음력 6월 9일, 허욱, 김장손, 유춘만의 지휘하에 구식(옛 훈련도감) 군인들은 동별영의 무기고를 부수고 병장기들을 탈취하여 무장했으며 포도청과 관가(의금부)를 습격하여 잡혀간 김춘영, 유복만, 그외 군인들과 위정척사파 및 흥선대원군 지지파 인물들을 비롯한 모든 죄수들을 전원 석방시키고 일부는 중전 민씨의 오빠인 민겸호, 민태호 등 민씨 일가 친척과 개화파 인물들의 자택을 습격하고 파괴하였다. 모두 다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들은 경기 감영을 장악하여 감영의 무기고를 부순 후, 그들과 합세한 일반 백성들까지 무장시키고 개화파 인물에 이어 원흉과 혐오의 대상이었던 주(駐) 조선 일본 공사관과 하도감까지 습격하여 별기군 교관이었던 호리모토 소위를 비롯한 별기군 조교들을 습격해서 살해했으며, 별기군 부대까지 급습하여 별기군 일부를 살해하는 등[15]으로 사태가 끝나는 듯 싶었다.

4. 궁궐 기습 및 중전의 피신


구식 군대는 이에 그치지 않았고, 그 다음날인 6월 10일, 대원군의 지원하에 폭동을 일으킨 백성들과 합세한 뒤 민씨 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이들은 우선 대원군의 형이었지만 고종과 중전(명성황후)을 지지하였던 전 영의정 흥인군(이최응)과 이조참의 겸 호군인 민창식의 집을 습격해서, 현장에서 이들을 살해했다. 이때 백성들이 임오군란에 합류했던 것은 민씨 세력과 명성황후가 관료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조장하고 그들과 똑같은 만행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 또한 구식 군인들처럼 민씨 일파에 대한 증오감과 원한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단숨에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이닥쳤으며, 이를 막아서거나 저지하려는 병사들은 그 누구도 없었다.
궁성으로 들어선 군인들과 백성들은 더 이상의 거칠 것 따위는 없었으며, 궁궐 안까지 들어와 그 원흉이었던 민겸호[16]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붙잡아서 살해했으며, 사실상 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고 할 만한 작자인 중전 민씨를 찾아내서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군졸들은 먼조 교동(校洞) 이최응의 집을 부수고 벌벌 떨고 있는 그를 죽였다. 군병들은 그가 다시 살아날까 염려하여 장창(長槍)으로 항문을 찔러 창날이 머리와 뺨에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나서 "장안의 민가놈은 다 죽이겠다"고 호언하면서, 민겸호(閔謙鎬)·민태호(閔台鎬)·민규호(閔奎鎬)·민두호(閔斗鎬)·민영익(閔泳翊)·민치서(閔致序)·민치상(閔致庠)·민영목(閔泳穆)·민창식(閔昌植)은 종루(鐘樓)에 끌려나와 난자질 당하여 죽었다. 또 김보현의 큰 집, 작은 집과 신관호(申觀浩)·한성근(韓聖根)·윤흥렬(尹興烈)·홍완(洪玩)·이태응(李泰膺)·내영집사 등속과 중인통왜자(中人通倭者:일어통역관)의 집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홍완은 포박되어 죽이려 들자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였다. 그밖에도 민가(閔家)와 친근한 사람이나 궁궐에 출입하는 점쟁이․ 무당들 집까지도 모두 파괴하여 이날 피살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渚上日月, 1882년(壬午年, 고종 19년) 6월 10일

이 때 중전 민씨(명성황후)는 궁녀 옷을 입고서 궁녀로 변장하여 궁궐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구식 군인과 마주치게 되어서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무예 별감으로 있던 홍계훈이 자신의 누이 동생인 홍 상궁이라고 속이면서[17] 그의 도움으로 궁궐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충주 장호원(長湖院)에 있는 충주 목사 민응식의 자택으로 피신하였다.

5. 대원군의 섭정


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해 결국 흥선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하게 되었고 대원군은 구식 군대의 호위 하에 부대부인 민씨, 장남 이재면과 함께 입궐하게 되었으며, 고종은 이재면을 무위대장으로 임명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삼음으로서 다시 흥선대원군의 섭정 통치가 시작되었다. 군인들과 백성들은 대원군이 입궐했을때 만세를 불렀고 대원군은 그들을 달래어 해산하여 귀가시킨다.
대원군은 섭정 통치를 하면서 중전 민씨 지지자들을 모두 파면하면서 그들을 귀양보내거나 처벌했고, 군인들의 밀린 급료 역시 전부 지급했으며 구식 군대에 대한 우대를 강화하기로 하였다. 게다가 이전에 자신을 지지했던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여 조정 관료로 격상시키는 등 고종이 시행했던 부분을 전면 개정하게 되었다. 영의정 홍순목은 원래부터 대원군의 핵심 인사였으므로 자리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부 구식 군인들이 중전의 시신을 공개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자 대원군은 중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중전에 대한 국상(國喪)을 선포하였다.

5.1. 대원군은 언제부터 개입했는가?


사건의 전개 및 수습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행보에 대해 의혹이 있다. 우선 구식 군대 장병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 자체는 봉급 문제와 민겸호 등의 잘못된 일처리에서 나온 것이므로 대원군과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대원군이 사건의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가 다소 의심스럽다. 대원군의 정계 복귀는 봉기를 일으킨 군민들이 대원군을 찾아가서 일을 처리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대원군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이 때 군민들이 '그래도 왕실의 큰어른이니 일을 해결해 주시겠지'라는 생각에 먼저 자발적으로 대원군을 찾아간 것인지, 아니면 마침 기회를 잡으려던 대원군이 먼저 사람을 보내서 자신에게 오게 했는지는 불확실하다.[18]

6. 청나라 군대의 파병과 진압


여기까지만 했어도 좀 컸던 민란 수준에서 사건이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종 혹은 중전 민씨가(누가 청병했는지는 후술)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한다.
청나라는 자국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이 청군의 군영을 방문한 틈을 타서 그를 톈진(天津)으로 납치 감금한다. 대원군은 청군이 이렇게까지 비겁하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청군은 대원군을 잡은 그 날에 톈진으로 보내버렸다(...)
이에 따라 섭정 통치는 끝나게 되었고 중전 민씨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한 3일 뒤인 음력 7월 16일, 청군은 또한 구식 군인들이 많이 사는 왕십리이태원동을 습격하여 170명을 체포하였다. 그 뒤 반란을 주도한 11명이 처형당한다.[19]
한편 군란으로 자국 공사관과 국민이 피해를 입게 된 일본은 조선에 즉각적인 배상 책임과 보상을 요청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모든 피해를 보상하게 되었고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에 있는 자국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켜 경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임오군란은 구식 군대의 반란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 끝은 결국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국제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일 수호 조규 속약, 제물포 조약 등 청과 일본의 이중 외압의 심화를 불러왔으므로 본격적인 조선의 식민지화의 시작으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2년 후인 1884년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대(對)백성 사과문[20]과 함께 개화 의지를 천명하였고, 이 사건을 끝으로 기존의 개화 반대 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더 이상 주도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유림들은 이후 대세를 바꿀 수 없다고 느꼈는지,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고종도 유림들을 달래주기 위해서 문묘 종사를 받아들여 김집, 조헌 등이 문묘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6.1. 누가 청군을 불렀는가?


일단은, 군란의 과정에서 중전 민씨가 은신처를 제공한 윤태준을 통해 고종에게 밀서를 넣어 청에 군대를 파병해줄 것을 요청해서 대원군이 청으로 끌려갔고, 이 때문에 조선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종전까지의 교과서 내용이자 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2006년 7월 1일, '임오유월일기'가 발견되면서 위의 학설이 깨져버렸다.# 이 일기는 음력 6월 10일 궁에서 탈출한 이후 6월 13일부터 환궁하기 직전인 8월 1일까지의 날씨와 동정, 주변 인물들의 행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전은 2달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동안 한성, 경기도, 충청도를 거치며 정신없이 이동하였다. 심지어 이와중에 인후염과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메기도 한다. 윤태준을 통해 고종에게 밀서를 넣기는 커녕, 도저히 제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세한 이동경로는 다음과 같다.

창덕궁한성부 관훈동 → 경기도 광주부 적취리[21]

→ 광주부 조현리(새오개)[22] → 경기도 이천군 읍내 → 경기도 여주목 단현리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장호원)[23] → 충청도 충주목 노은면[24]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 → 경기도 지평현 상동면[25] → 충청도 충주목 감곡면 → 경기도 안성군 읍내 → 경기도 양지현 읍내 → 경기도 용인현 읍내 → 경기도 용인현 포곡면 신원리 → 창덕궁 환궁

이에 따르면 중전이 대원군의 나포를 알게 된 것은 청의 포고문을 본 다음이다. 더구나 경기 감영에 자신의 생존을 알린 것이 음력 7월 4일, 서울의 상황을 알아보게 사람을 보낸 것이 7월 15일인데 대원군이 청군에 억류된 것이 7월 13일, 끌려간 것이 7월 15일이다. 홍계훈은 충주까지 동행하여 양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여비 500궤미를 내놓은 조충희는 전라남도 영광군수에 임명되었다. 서울과 충주를 계속 왕래하며 정보를 수집하던 북청 물장수(보부상) 이용익이 바로 이 때의 공로로 천거된 인물이다.
흔히 청군은 중전 민씨, 혹은 민씨 일파가 요청하여 파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장 박시백은 자신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어떠한 통보도 없이 영선사 김윤식만이 중차대한 파병을 홀로 요청할 수 있는가?"라며 민씨와의 소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쫓겨다니며 서울의 정보를 알아보기에도 급급했던 민씨가 김윤식과 소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소거법으로 따지고 보면 고종밖에 남지 않는데, 따라서 고종이야말로 청에 밀서를 보낼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 보기도 하나, 이 역시 물증은 없다. 그러나 파병은 예로부터 군통수권자의 고유권한이며, 군통수권자에게 그만한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건 국가원수 정도 뿐이니,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인 만큼 적어도 고종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김윤식어윤중은 사건이 일어날 당시엔 벌써 고종에 의해 영선사로 발탁되어, 청에 체류중이었다.

7. 의의


이후로 벌어지는 갑신정변, 동학 농민 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일전쟁, 을사조약,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스펙타클한 사건이 워낙 많이 일어난지라 임팩트가 크지 않아보이지만, 사실 조선왕조는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회생불가의 상태임이 입증되었다. 유능한 군 지휘부나 왕족에 의해 일어난 정변도 아니고, 정부가 봉급도 제대로 안 줘서 하급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들고 일어난 '민란' 수준의 폭동에도 정권이 뒤바뀔 정도로 조선의 재정 상태와 부정부패가 막장에 다다랐음이 만천하에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시민 혁명 같이 현대의 비슷한 사례를 떠올릴 수 있는데, 민주주의 기반의 현대 국가와는 달리 이 당시 조선은 명실상부한 '전제 왕조'라는 사실을 잊어선 곤란하다. 국가의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는 것을 전제로 하는 민주국가와 달리 왕조의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조 국가에서 민란으로 정권이 위협받는 것은 국가 멸망의 징조로 여겨졌고, 실제로 말기에 들어 민란으로 붕괴한 역사속의 왕조국가는 매우 많다. 만약 외세의 개입과 식민 제국주의라는 요소가 없었으면 조선 왕조는 임오군란과 뒤이은 민란으로 스스로 무너졌을 확률이 높았다.
특히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입장에서는 임오군란이 일종의 '조선을 노려도 좋다'는 뜻의 청신호로 여겨졌다. 각국 지도층들에게 있어 어떠한 나라의 내부 상황이나 속사정을 면밀히 파악하고 식민지화할 수 있을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자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공개된 것으로 당대에는 많은 내용들이 기밀로 처리되며, 스파이나 간첩을 통해 알아내는 정보에도 한계가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의외로 열강의 식민 침투를 막아낼 저력은 있을지도 모르고 그 와중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 엉뚱한 제3국이 가장 큰 이득을 챙길수도 있다. 즉, 제국주의 국가 입장에서도 식민지화는 그냥 대충 깃발만 꼽으면 되는 행위는 아니었고 신중한 포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임오군란 같은 사건은 기밀로 감출 수 없는 것들이고 외국 열강들에게 있어 조선이 그만큼 허약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장치였다. 역사에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종종 있는데 프랑스 혁명 직후 '민중에 의해 국왕이 참수되었다'는 소식에 허약해진 프랑스로부터 이권을 나눠 먹으려고 벌어진 전쟁이 프랑스 혁명 전쟁이고 중국도 아편전쟁이 참패로 끝나자 간을 보던 많은 서양 열강들이 본격적인 이권 침투에 나섰다. 그러나 프랑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타나 그 불리한 상황을 딛고 승리해 열강들을 막아냈고, 중국은 이권은 상당수 빼앗겼지만 열강 하나가 단독으로 먹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그에 비해 조선은 너무나 쉬운 상대였다.
실제로 임오군란 이후로 열강들의 이권 침투가 가속화되었고 외국 군대, 특히 청군과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제물포 조약, 조일수호조규 속약, 조일통상장정 등이 체결되고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며 청과 일본 상인이 조선 영토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인해 빈약한 기반을 가졌던 조선 상인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1891년 기준 청 거류민은 2천명, 일 거류민은 8,600여명에 육박했다.[26]

8. 기타


김주영의 대하 소설 객주 8권부터 자세히 묘사되며, 이 작품을 드라마화한 장사의 신 - 객주 2015명성황후, 조선 총잡이에서도 그려졌다.
찬란한 여명이 군란 직전의 상황과 청군의 군란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이태원, 왕십리 전투 등까지 가장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웹툰 참교육 10화에서 나화진이 구운하이텍고 일진들을 참교육시키고 성적순에 따라 학교급식을 차별하자 분노한 일진 한 명이 임오군란이 어떻게 일어난지 모르냐며 나화진에게 싸움을 건다. 그러자 나화진은 너네 입에서 임오군란이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드디어 교육자로써 가르친 보람이 난다고 기뻐하며 상으로 개기는 일진들 엉덩이 한 대씩만 때렸다(...)[27]
[1] 임진왜란 시기에 경복궁이 불태워진 일은 그 주체가 한양 백성들인지 왜군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지라 일단 배제한다. 더군다나 그 당시엔 선조와 만조백관 이속들이 모두 다 도망가서 텅 비어버린 궁성이었다.[2] 청상은 수는 적었지만 특유의 단결력과 자본력으로 급성장했다. 한성, 강경은 물론 어느 벽지의 장터에서도 청상을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 그러나 정작 개성 이북은 연안 지대를 제외하고는 송상의 영향력으로 발을 붙이지 못했으며, 내륙에서는 조선 객주의 중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무조건적인 조선 상업의 몰락만은 아니었다. 물론 독점적 영향력을 자랑하던 육의전이나, 인천 개항장의 조선 객주들은 큰 손실을 보았다.[3] 일본 육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였다.[4] 「고궁문화」, 국립고궁박물관, p. 27. "황태자비 민씨는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딸이며 임오년(1882년) 왕세자 순종과 가례를 올렸다. 모후인 중전 민씨가 생존 시에 거행된 대혼(大婚)으로서 고종은 신사년(1881년)에 가례에 필요한 혼수 직물을 동경 직물 회사에 주문하였던 기록이 확인된다. 상기한 바와 같이 당시의 가례는 임오년 『嘉禮都監儀軌』와 상당한 수량의 의대 기록이 있는 <궁중발기>로 남아있다."[5] 대동법 시행에 따라 쌀·포(布)·전(錢) 등을 출납했던 관청.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6] 당시 민씨 척족은 조창과 경창을 장악해 막대한 양의 쌀을 빼돌렸다. 지방에서 수도로 쌀을 올릴 때 쌀은 빼돌리고 대신 겨와 모래를 잔뜩 채워 수량만 맞춘 것이다. 이 방법을 화식이라 한다.[7] 2년 후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 개화파 홍영식의 아버지로 갑신정변에 죄책감을 느끼고 며느리, 손자와 함께 음독 자살한다.[8] 13개월이나 급료를 안줬으면 구식 군인들이 어떻게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조선후기 당시 무위영, 장어영의 구식 군인들은 군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급료만으로는 생계를 유지 할 수가 없어서 평소에는 농사나 막일 혹은 상업 등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한 달에 며칠 정도 근무하는 시스템이었으며, 따라서 급료의 지불 여부에 생계가 달려있지는 않았다.[9]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는 일을 호궤(犒饋)라고 한다. 건호궤란 음식 대신 돈을 주어 위로하는 일을 뜻한다.[10] 군졸들이 소속된 해당 병영[11] 앞서 이야기한 것 외에도 명성황후는 무속행사에 과다한 비용을 지출하였고, 병판 민겸호는 척족의 중심으로 역시나 여러 부정을 저질렀다. 사실 문제는 대원군이 개혁해보려고 했으나 오히려 무분별한 당백전 주조 등으로 역효과를 내면서 가뜩이나 악화시키기 시작했던 왕실 재정을 민씨 척족과 국왕 고종이 전부 까먹으면서 고갈시키기만 할 뿐,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즉, 왕실이 근검절약이라도 했다면 불만을 가졌어도 이해할 건덕지라도 있었지만, 그것이 아니었으니 폭발하는 게 당연지사.[12] 고종과 홍순목은 이 문제의 이유를 잘 알고 있다.[13]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중앙 정규군에게 이런 대접은 안했을 것이다. 군인이 권력자 본인들의 목숨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군인들도 등쳐먹을 정도로 조선 정부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니면 별기군만 믿고 나몰라라 했을 수도 있다. 애초에 구식 군인 차별을 한걸 보면 그냥 별기군만 편애하고 나몰라라 했을 가능성이 크다.[14] 알다시피 조선 말기 당시에는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횡포가 매우 심했는데, 중전 민씨와 여흥 민씨 세력이 이를 부추기고 똑같이 일삼았기 때문이다.[15] 일본 공사관 직원 세 명이 이들에게 살해당했고,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는 기밀 문서를 소각하고서 남은 직원들과 함께 인천으로 도주했다. 인천에서도 조선인들의 습격을 받아 호위하던 일본 경찰관 6명이 피살을 당했고 공사관으로 피신하던 일본 유학생 3명 역시 시위대들에 의해 피살을 당한 것이다.[16] 민영환의 아버지로 사건의 계기를 제공한 주제에 살아남기 위해 내시로 위장하고 궁궐에서 튀려고 했으나, 수염을 깎지 않은 까닭에(...) (그 대신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녔다고 한다(...) 발각당해서 궁궐에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뻔뻔하게도 흥선 대원군이 입궁하는 걸 보고서 자기를 도와달라며 애원했으나, 대원군은 "나같은 늙은이를 우습게 보던 분이 이제와서 그 늙은이에게 목숨을 구걸하냐"는 말로 냉소를 비치면서 거절하고, 군인들과 백성들에게 민겸호를 군말없이 넘겨줬다. 결국 민겸호는 그를 몹시도 증오하는 구식 군인들과 백성들한테 잔혹하게 살해당하면서 최후를 맞이한다. 사실 위에서 보듯 군란을 일으키게 한 원흉이었던 만큼 맞아죽어도 싼 인물이었다. 군납비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고대 로마 시대부터 군량 갖고 장난치는 자가 있다면 목을 잘라서 죽이는 형벌로 응징하는 게 관례였을 정도로 크나큰 문제였다. 그래서 그걸 처음으로 어긴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그렇게 당대에서나 지금에서나 욕을 먹는 것이다.[17] 애초에 구식 군인들의 목적은 명성 황후와 그 지지 세력의 인물들을 처단하는 것이지, 궁녀나 내시들을 주살(죄를 물어서 죽임)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이에 속아넘어가서 목적 달성을 못하게 되었지만(그래도 민씨 일파 인물들을 살해하긴 했다. 안 죽은 이들도 없잖아 있었고 주요 핵심 인물인 명성황후가 생존해서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명성황후의 지지자가 아닌 이상 민씨 세력 제거가 아닌 살인을 할 이유가 없어서 죽이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이런 임오군란과는 달리 을미사변의 경우 일본은 그딴거 없이 궁녀들도 닥치는 대로 죽였기 때문에 명성황후가 궁녀로 변장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8] 다만 임금이였던 고종의 실정책임을 중전에게 물었던 만큼 이들로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찾기 위하여서는 대원군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대원군 역시 재집권을 하기위한 명목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었기에 군란 중간에 지도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 이러한 군란을 대원군이 계획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19] 9명은 참수로 끝났으나 군인들의 지도자였고 장교 계급에 있었던 김장손과 유복만은 반란의 핵심 주동자라며 참수당한 뒤 시신까지 훼손되는 조선식 능지처참을 받았다.[20]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절절한 대백성 사과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드물게 한페이지를 가득 채워 수록했다. 고종실록의 전문을 링크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907020_001[21]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노상동과 적취리가 합쳐져서 상적동이 되었다.[22]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 새오개[23]충청북도 음성군 감곡성당 부근. 감곡성당은 군란 14년 뒤인 1896년 조선 땅에서 18번째, 충북에서 최초로 생긴 성당이다. 당시에는 현재 이천시에 있는 장호원까지 모두 충주에 속했다.[24] 현 충북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25] 현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양근군과 지평현이 합쳐져서 생긴게 양평군이고, 상동면은 양동면으로 개칭되었다.[26] 청상은 수는 적었지만 특유의 단결력과 자본력으로 급성장했다. 한성, 강경은 물론 어느 벽지의 장터에서도 청상을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 그러나 정작 청나라와 가까운 개성 이북은 연안 지대를 제외하고는 송상의 영향력으로 발을 붙이지 못했으며, 내륙에서는 조선 객주의 중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무조건적인 조선 상업의 몰락만은 아니었다. 물론 독점적 영향력을 자랑하던 종로의 육의전이나, 인천 개항장의 조선 객주들은 큰 손실을 보았다.[27] 9화에서 일진들 쪽지시험을 봤는데 시험 난이도가 초등학생도 풀 수 있을 정도로 유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찐따 취급이나 받던 학생 빼고는 전부 처참한 성적이었다. 그리고 그 찐따 취급 받은 학생을 나화진이 학생들의 왕(...)으로 임명했다. 참고로 시험문제는 인터넷에서 유명한 응봉공고 기초학력평가 문제를 패러디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