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구이
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국무총리 대행, 해군총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2. 생애
1874년 청나라 복건성 민후현에서 출생했다. 1902년 남강해군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을 2기로 졸업하여 영국으로 유학했다. 1904년 귀국하여 해천(海天)호의 1등 항해사로 복무했다. 당시 해천호의 관대는 훗날 해군총장이 되는 유관웅 제독이었는데, 두시구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관웅이 항해를 계속하다가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다. 두시구이는 책임이 없음이 인정되어 여러 직책을 거쳐 1911년 7월, 강정(江貞)호의 관대에 임명되었다.
중화민국 건국 후 1912년 12월, 복건성 방위군 대리사령에 임명되었으며 1913년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해군총장 유관웅의 지시를 받아 혁명군을 진압했다. 하지만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자 이에 반발하여 호국전쟁 발발 후 혁명군 지지를 선언하며 전 해군총사령관 이정신, 1함대 사령관 임장택 등과 함께 군무원 측에 가담하였다. 약법 복구와 리위안훙의 총통 취임 이후 다시 북양정부로 복귀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선을 나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직예군벌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특히 우페이푸와 친분을 맺게 된다.
1921년, 해군중장으로 진급하여 해군 2함대 사령 겸 상해함대 사령에 임명되었으며 1922년 발생한 1차 직봉전쟁에서 직계 측으로 가담하여 봉천군벌의 보급로를 공격했다. 1923년 11월 중화민국 해군총사령에 임명되어 영위장군(瀛威將軍)에 봉해졌다. 1924년에 해군상장으로 진급했다.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직계 측 해군총사령관으로 참전했으나 이번에는 장쭤린에게 패하고 말았다. 북경정변 이후 수립된 황푸 섭정내각은 두시구이를 해군총장에 임명하였으나 두시구이는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쑨촨팡, 치셰위안, 소요남, 유진화, 주음인, 채성훈, 왕보, 이병지 등과 연명하여 돤치루이를 임시집정으로 추대하였다.
1925년 11월, 돤치루이로부터 해군총장에 지명되어 취임하였고 이후 옌후이칭 내각까지 유임하게 된다. 1926년 직봉풍전쟁이 발발하여 장쭤린과 우페이푸가 손잡게 되었다. 둘은 옌후이칭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으나 자신과 친밀한 진윈펑이 총리에 임명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은 장쭤린이 옌후이칭 내각을 핍박하면서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옌후이칭은 총리 대리로 두시구이를 지명하고 사퇴했다. 하지만 두시구이 내각 역시 장쭤린과 우페이푸의 눈치를 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3개월 만에 구웨이쥔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하야했다.
한편 1926년 7월부터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었다. 두시구이는 1함대와 2함대에 자유행동을 허락하였고 사태를 관망하던 해군은 난징과 상하이의 함락 이후 1927년 3월, 국민혁명군 지지를 선언하고 북벌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두시구이 본인은 1927년, 장쭤린의 대원수에 취임한 후에 공직에서 사퇴하여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29년 11월, 국민정부로부터 군시찰단에 참여받을 것을 요청받아 유럽, 미국, 일본 등을 순방했으며 귀국 후 고찰구미일본해군보고서(考察歐美日本海軍報告書)를 제출하였다. 1931년 7월, 국민정부로부터 해군 상장 계급과 함께 복주해군학교 교장직을 제안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국난회의에 참가하여 사태 해결을 촉구하였다. 1933년 복건사변이 발생하자 협력을 부탁받았으나 거절하고 상하이로 피난했으며 그곳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주요경력
4. 참고문헌
- 서우춘, 『民國人物大辭典』(석가장: 하북인민출판사, 1991).
- 쉬처, 『만주군벌 장작림』(서울: 아지랑이,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