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벨리 변주곡(베토벤)
1. 개요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변주곡의 끝판왕. 작품번호는 120이며 기본 조성은 C장조이다. 원 제목은 33 Veränderungen über einen Walzer von Diabelli(디아벨리의 왈츠에 의한 33개의 변주곡).
건반악기 변주곡 분야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쌍벽을 이루는 걸작이며[2]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곡 가운데 함머클라비어 소나타와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크고 기법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전인미답의 경지를 이룩한 작품이다. 그만큼 제대로 된 연주와 감상을 위해 연주자와 청자 모두에게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작품으로 악명이 높다.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악보를 함께 보면서 연주를 들어보자.[3]
그리고리 소콜로프.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2. 창작 배경
2.1. 작품의 탄생 과정
'디아벨리 변주곡'은 1819년에 작곡이 시작되어 4년 후인 1823년에 완성되었고[4] , 다음 해 6월에 빈의 'Cappi und Diabelli'사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유명한 출판업자이자 아마추어 작곡가였던 안톤 디아벨리[5] 는 1819년에 베토벤을 비롯하여 빈에 체류하고 있는 인기 작곡가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왈츠를 주제로 각각 하나의 변주곡을 써달라고 의뢰한다. 이 기획은 베토벤 외에도 50여명 가량의 작곡가(체르니, 훔멜, 크로이처, 리스트, 슈베르트, 루돌프 대공, 슈타들러 신부 등이 포함됨)가 섭외되었는데 심지어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도 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빈에 거주하는 전업 작곡가들을 모두 섭외해서 1곡씩의 변주곡을 작곡하게 한 후 이를 정리해서 출판하겠다는 대단히 거창한 프로젝트였다. 디아벨리가 당시 비인 악보 출판계의 큰 손이었기 때문에 이런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것.
그런데 정작 당시 작곡가 가운데 본좌급이었던 베토벤은 디아벨리의 왈츠 주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하고[6] 이 기획에 참여를 거절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곧 마음을 바꿔 독자적으로 이 주제를 바탕으로 한 변주곡을 만들어보기로 하고 디아벨리와 출판계약을 맺는다.[7]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고금의 명작인 디아벨리 변주곡이다.
실제로 이 왈츠는 별 특징이 없는 평범한 춤곡이긴 하지만 이 점을 가지고 디아벨리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주제 자체가 너무 아름답고 뛰어나다면 변주가 돋보일 수가 있을까? 실제로 베토벤은 디아벨리의 왈츠보다 훨씬 단순하고 짧은 주제를 가지고도 훌륭한 명작들을 대거 작곡했다. 훌륭한 변주곡을 만들기 위해 주제가 굳이 훌륭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주제가 평범하다는 점이 베토벤의 도전정신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하자.
한편 베토벤의 변주곡과 별도로 디아벨리가 원래 구상했던 '조국 음악가 동맹' 기획은 그대로 추진되어 베토벤을 제외한 다른 작곡가들이 모두 한곡씩 작곡한 곡을 묶어 "애국 예술가 동맹((Väterandischer Künstlerverein)의 변주곡" 이라는 손발이 살짝 오그라드는 제목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디아벨리 변주곡 1부는 베토벤의 변주곡, 2부는 이 애국 예술가 동맹 변주곡으로 구성하여 출판하였다.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과 달리 이 거창한 기획 변주곡 모음집은 아쉽게도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50곡이나 되는 많은 곡수에 비해 정말 재미가 없다. 세부적인 작곡플랜이 없이 단순히 여러 사람의 변주를 모아놓은 탓에 악상의 통일성도 없고 변주양식도 다들 전형적인 19세기 초 비엔나 고전파 양식이라 엇비슷하게 들린다. 그래서 잘 연주가 되지 않고 설령 연주가 되더라도 50개의 변주가 한꺼번에 연주되는 경우는 정말 없다. 이렇게만 말하면 괜히 궁금할테니 직접 들어보고 판단하자.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은 출판 후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von Brenntano)에게 헌정되었다.[8] 베토벤 당시 딱히 초연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베토벤 생전에 이 작품의 연주가 이루어졌는지는 불명확하다.[9]
2.2. 작품의 제목에 대해
베토벤은 원래 이 거대한 변주곡의 제목을 Große Veränderungen über einen bekannten Deutschen Tanz (유명한 독일 춤곡에 의한 거대한 변주곡)으로 명명했다. 하지만 출판시에는 제목을 33 Veränderungen über einen Walzer von Diabelli(디아벨리의 왈츠에 의한 33개의 변주곡)으로 바꾸었고 오늘날에도 이 명칭이 통용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베토벤이 자신의 변주곡을 통상적인 이탈리아식 용어인 바리아치오넨(Variationen) 대신 페어엔더룽엔(Veränderungen)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 페어엔더룽엔은 단순한 의미의 변화보다는 transformation(변성/전환)의 뜻이 강한데, 그가 굳이 이런 표현을 쓴 것은 그만큼 이 작품에서 단순한 주제의 변용보다는 좀더 본질적이고 심도있는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한국말로 딱히 저 단어를 표현할만한 적절한 용어가 없는 관계로 그냥 통상적으로 변주곡으로 번역한다.
3. 곡의 해설[10]
3.1. 성격 변주곡
이 디아벨리 변주곡은 소위 '성격 변주'의 대표작으로 불린다. 베토벤 이전의 고전파 시기의 변주곡은 대체로 주제의 패턴을 유지하고 주제와 같은 마디수를 유지하면서 주제의 선율/리듬/화성/조성/템포와 같은 요소 중 한두가지를 변화시키거나, 선율에 장식음을 추가하거나 아르페지오 형태로 선율을 화려하게 바꾸거나, 기교적인 반주를 추가하는 식으로 작성되었는데, 이를 음형변주곡이라고 한다.
이러한 통상적인 음형 변주곡의 예로 베토벤이 20살에 작곡한 리기니의 아리아 '사랑아 오너라(Venni Amore)' 주제에 의한 24개의 변주곡을 들 수 있는데, 변주곡 수가 24개로 상당히 많지만[11] 주제의 패턴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 통상적인 변주곡의 문법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반면 디아벨리 변주곡과 같은 성격변주곡은 주제로부터 한 두마디의 선율이나 리듬, 화성 등에서 일부의 요소만 취해서 좀더 자유롭게 변화발전시키는 변주방식으로, 주제의 패턴이나 마디수를 유지할 필요가 없고 주제의 분위기에 구속되지도 않기 때문에 각 변주가 음형변주곡에 비해 훨씬 독립적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이런 성격 변주 방식은 작곡가의 성향과 역량에 따라 천차만별의 변주가 나올 수 있으며, 곡을 연주할 때에도 매우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12]
디아벨리 변주곡의 경우에도 주제는 왈츠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즉흥곡/연습곡/미뉴에트/푸가/스케르초 등등의 다양한 변주양식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디아벨리 변주곡은 성격변주의 경지를 한단계 더 넘어서서 변주곡의 구성 방식도 통상적인 관념을 완전히 깨뜨리고 있다. 예를 들면 익살스럽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조용하고 심각한 분위기로 바뀌거나(예를 들면 22,23변주와 24 변주), 일종의 서주와 푸가처럼 즉흥곡 풍의 변주 다음에 엄격한 형식을 갖춘 대위법적인 변주가 나타나는(31 변주와 32 변주) 등 여기저기에서 갑작스러움과 반전이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음악사가 도널드 그라우트(Donald Jay Grout)는 이 작품의 기상천외함에 대해 '기괴함과 숭고함', '소박함과 심원함이 공존'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얼핏 들으면 이러한 해괴함과 의외성이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뜬금 없어 보이지만 제대로 들어보면 바로 이런 구성 덕분에 이 장대한 곡이 지루해지지 않고 곡 전체의 역동성이 배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성적으로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마지막 곡으로 피날레에 어울리는 장엄한 푸가나 기교와 에너지로 충만한 곡이 아니라 중간 쯤에 등장하면 어울릴 듯한 우아한 미뉴에트가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전곡의 연주가 끝나도 이게 정말 끝난게 맞는지 어리둥절하게 느껴진다. 완전히 종결을 짓기보다는 일종의 여운을 남기는 결말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내가 이 주제로 얼마든지 변주곡을 더 쓸 수 있지만 그냥 이 정도에서 끝낼께'라는 메시지로 들리기도 한다.
3.2. 곡의 구성
각 곡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여기 잘 되어 있으니 이 링크를 참조하자. 이 항목에서는 간략하게만 설명한다.
- 주제 - 3/4박자로 왈츠 리듬을 갖고 있다. 이렇다할 특징이 없는 평범한 곡인데 오히려 이 평범함 덕분에 변주곡의 주제로는 매우 적합한 곡이 되었다. 주제 맨 처음에 등장하는 4도 관계(도-솔)와 6마디째에 나타나는 5도 관계(레-솔)가 이후 전체 변주곡을 아우르는 매우 중요한 키포인트가 된다. 도미솔 3화음과 레파솔 3화음으로 구성된 반복 음형도 변주곡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된다.
- 주제(디아벨리의 왈츠)의 첫부분
- 변주곡 제 1 - Alla Marcia Maestoso(행진곡풍으로 엄숙하게)라는 지시에 걸맞게 4/4박자의 강건한 행진곡의 분위기로 진행된다. 전술한 4도 관계와 5도관계 및 주제의 화음구조가 대체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 변주곡 제 2 - 왼손과 오른손이 반박 차이로 교차로 진행되고 있다. 대체로 오른손이 반박 늦지만 종종 바뀌기도 하며 스타카토 풍으로 진행되는 덕분에 경쾌하고 가벼운 느낌을 준다.
- 변주곡 제 3 - 2변주와 대조적으로 레가토가 빈번하게 활용돼서 부드럽고 유연하게 진행된다.
- 변주곡 제 4 - 모방 기법을 활용한 변주로 처음에는 고성부로부터 저성부로 첫 단락이 모방되고 후반부에는 반대로 저성부에서 고성부로 모방이 일어난다. 첫 단락의 모방이 일어난 후 음이 중첩되면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 변주곡 제 5 - 왼손으로 주제의 4도 하강과 5도 하강을 제시하고 오른손은 이를 받아서 전개한다. 후반부에는 반대로 왼손에서 4도 상승을 제시하고 e단조로 전조된다.
- 변주곡 제 6 - 2옥타브 간격의 캐논 형태로 진행되며 트릴이 자주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초반에는 고음부가 먼저 등장하고 저음부가 이를 모방하는데 후반에는 반대로 저음부를 고음부가 모방한다.
- 변주곡 제 7 - Un poco più vivace. 전술한 4도 관계를 화려한 펼침화음 형식으로 확장시킨 변주이다. 초반에는 하강형으로 진행되다가 후반에는 상승형으로 진행된다.
- 변주곡 제 8 - Poco vivace. 오른손이 주제의 반복음형을 응용한 느린 음형을 연주하고 왼손에서는 지속적인 상승음형이 등장한다. 비바체 지시기호가 있지만 오른손 음형이 천천히 움직이고 약하게 연주하라는 지시기호가 붙어 있기 때문에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을 준다.
- 변주곡 제 9 - 처음으로 C단조로 조바꿈이 된 변주로, 단조이긴 하지만 익살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주제의 첫 꾸밈음을 활용한 장식적인 음형이 곡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 변주곡 제 10 - Presto의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오른손은 트레몰로, 왼손은 옥타브로 진행되면서 자주 음역을 바꾼다.
- 변주곡 제 11 - 9변주처럼 주제의 첫 꾸밈음을 활용한 곡인데 빠르고 유머러스한 9변주와 달리 우아하고 부드러운 알레그레토로 진행된다.
- 변주곡 제 12 - Un poco più moto의 기호가 붙어 있으며 양손 모두 주제 첫부분의 장식음을 8분음표로 펼친 음형을 바탕으로 양손이 연습곡처럼 역동적으로 진행된다. 왼손은 유니즌이지만 오른손은 주로 4도 화음 형태로 전개된다.
- 변주곡 제 13 - Vivace의 지시기호가 있지만 쉼표가 굉장히 많아서 빠르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최소한의 음표만 사용해서 주제의 뼈대만 남겨놓고 있으며 대신 중첩화음을 사용해서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 변주곡 제 14 - Grave e maestoso의 지시기호가 붙어 있는 매우 느린 변주로 이전 변주들의 분위기와 매우 다른 멜랑콜릭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주제의 장식음형을 변형시켜서 겹점음표와 64분음표로 표현하고 있다.
- 변주곡 제 15 - 주제의 음형이 비교적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초반에는 스타카토로 끊어지는 느낌이 들다가 후반에 레가토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 변주곡 제 16 - 오른손은 트릴을 활용하여 주제의 선율을 행진곡풍으로 변형한 선율을 연주하고 왼손은 펼친 옥타브 형태로 빠르게 진행한다.
- 변주곡 제 17 - 16변주와 일종의 짝을 이루고 있는데 16 변주와 반대로 왼손이 선율을 연주하고 오른손이 펼친 옥타브 형태로 진행된다.
- 변주곡 제 18 - 앞선 변주들의 활기차고 기교적인 분위기와 달리 레가토 스타일로 느리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 변주곡 제 19 - 일종의 1옥타브 간격의 2성의 캐논인데 빠르고 역동적인 움직임이 특징이다.
- 변주곡 제 20 - Andante의 지시기호를 갖고 있는데다 2분음로 진행되기 때문에 진행이 굉장히 느리게 느껴진다. 코랄풍의 장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갖고 있다.
- 변주곡 제 21 - 초반에 4/4박자로 트릴과 도약을 통해 역동적으로 진행되다가 후반에는 3/4로 변박이 되면서 좀더 부드럽게 진행된다.
- 변주곡 제 22 - 특이하게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의 시작부에 등장하는 아리아 'Alla Notte e giorno faticar(밤이나 낮이나 항상 피곤하네)'를 패러디한 것으로 원곡 초반부의 선율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 아리아도 디아벨리의 왈츠와 마찬가지로 4도 관계 - 5도 관계의 음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외로 변주로 잘 어울린다. 베토벤의 눈썰미와 유머감각(?)을 엿볼 수 있는 변주.
- 변주곡 제 23 - 강렬한 강타음으로 시작해서 연습곡 풍의 빠른 패시지로 전개된다. 이 변주곡 역시 일종의 패러디인데, 당시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크라머(Johann Baptist Cramer)의 연습곡 C장조를 패러디했다고 한다.
- 변주곡 제 24 - 안단테 지시 기호를 가진 느린 3성의 소(小) 푸가(Fugetta)로 32변주의 푸가와 달리 통상적인 대위법에 충실하게 전개된다.[13]
- 변주곡 제 25 - 왼손이 16분 음표의 빠른 베이스 음형을 형성하고 오른손은 스타카토 스타일로 변형된 주제를 제시한다.
- 변주곡 제 26 - 오른손과 왼손이 응답 형식으로상행/하행 펼침화음을 전개한다. 짧은 곡이지만 특별한 속도지시가 없어서 연주자 간 해석의 차이가 큰데, 대체로 너무 빠르지 않고 부드럽게 연주하는 해석을 선호하는 것 같다.
- 변주곡 제 27 - 26 변주처럼 상행/하행의 펼침화음으로 전개되는데, p가 붙어 있는 앞변주와 달리 빠르고(vivace) 강력하고 역동적으로 진행된다.
- 변주곡 제 28 - 2/4박자로 감 7화음이 자주 등장하며 연속되는 8분음표를 각 박자마다 sf로 강조하고 있어서 상당히 특이한 느낌을 준다.
- 변주곡 제 29 - 이 변주부터 31변주까지 C단조로 전조가 되며 이전의 격렬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느리고 멜랑콜리한 분위기로 전환된다.
- 변주곡 제 30 - 4성의 느슨한 캐논 형태로 진행되며 상당히 명상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
- 변주곡 제 31 - 31,32 두 변주곡은 일종의 '전주곡과 푸가'의 형태를 갖고 있다. 31변주는 라르고 지시기호가 붙어 있는 매우 느린 변주로 장식음이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즉흥곡 풍의 느낌이 난다.
- 변주곡 제 32 - E♭장조의 푸가이며 각 성부가 엄격하게 맞물린 바흐식 푸가보다는 좀더 자유롭게 변화하는 헨델식 푸가에 가깝다. 4분음표 음형이 반복되면서 ff의 당당한 행진곡 풍으로 진행되다가 후반부에 p로 조용해지면서 좀더 동적인 분위기로 바뀐다. 맨 마지막에 화려한 아르페지오가 등장한 후 다음 변주로 넘어가기 위해 느리고 조용한 6마디의 연결부가 등장한다.
- 변주곡 제 33 - 특유의 강렬하고 장엄한 마무리를 선호하는 베토벤답지 않게 3/4박자의 산뜻한 미뉴엣을 마지막 변주에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미뉴엣이지만 춤곡의 느낌보다는 명상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지며 마지막에 소리가 잦아들다가 f의 강한 으뜸화음으로 이 장대한 변주곡을 마무리하고 있다.
3.3. 골드베르크 변주곡과의 비교
예로부터 건반악기 변주곡 분야의 쌍벽인 바흐의 골드베르크변주곡과 디아벨리 변주곡을 비교하는 떡밥이 계속 회자되고 있는데, 작품성 측면에서 이 두 작품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 두 변주곡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상당히 다른데,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긴 곡 전체를 아우르는 엄격한 구성미가 돋보인다면 디아벨리 변주곡은 특정한 규격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의외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실 특정한 주제에 묶일 수밖에 없는 '변주곡'과 '자유로움'은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데 디아벨리 변주곡은 이와 같은 선입견을 완전히 깨버리고 있다. 즉, 디아벨리 변주곡은 주제의 음악적 요소들(조성, 선율, 리듬 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어디까지 주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주제의 흔적을 남기면서도 어디까지 다른 음악을 만들 수 있는지 등에 대한 극한의 음악적 실험을 추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바로 이런 점들이 디아벨리 변주곡의 연주와 감상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있는데, 한편으로 연주자들 입장에서는 오직 자신만의 디아벨리 변주곡을 가질 수 있도록 무궁무진한 해석의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 이 곡에 도전하는 연주자 입장에서 해석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즐겨야 하는' 과제인 셈인데,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하려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음악성을 갖춰야 할 것이다.
4. 평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이 디아벨리 변주곡이 이룩한 성취에 대한 위압감이 너무 큰 탓인지 베토벤이 걸작을 남겼던 다른 분야(교향곡, 현악4중주, 소나타, 협주곡 등등)에서는 이후에도 많은 명작들이 탄생했지만 이 변주곡 분야만큼은 필적할만한 작품이 잘 나오지 않고 있다.[14]
한편 이 디아벨리 변주곡은 명성과 가치에 비해 의외로 연주횟수가 적고 대중적인 인기도 낮은 편인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의 연주나 감상이 너무 어려운 탓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연주자들은 이 곡의 연주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는데, 큰 규모나 난해한 연주기술의 문제와 별도로 곡의 해석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연주시간부터 연주자마다 48분~65분으로 편차가 심한 것만 봐도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지 알 수 있다.[15] 예를 들어 분명 같은 악보로 연주했는데도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와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연주는 거의 다른 음악처럼 들린다. 폴리니나 소콜로프 급의 거장 연주자들의 연주 가운데 어떤 연주가 더 좋고 더 옳은지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면서도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에 호불호의 판단은 100% 청자의 몫이다.
이 디아벨리 변주곡은 현재까지도 딱히 표준이라고 할만한 연주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초심자들이 참조할만한 권위있는 해석이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다, 변주곡의 특성상 아름다운 선율미나 연주자의 기교를 자랑할만한 화려한 패시지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청중들에게 청각적으로 어필하기기도 쉽지 않다.[16] 연주자들이 이 곡의 연주를 꺼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청중과 음반 제작자들의 눈에 띄어야 하는 신예 연주자가 이 곡을 레파토리로 삼는 경우는 별로 없으며 주로 거장 반열에 오른 연주자들이 이 난곡에 도전하는 편이다.
한편으로 이 곡에 대한 해석이 무척이나 다양하듯이 이 곡에 대한 감상도 정말 다양할 수밖에 없다. 확실한 것은 별다른 사전정보 없이 단지 위대한 명작이라는 세간의 평만 믿고 이 곡을 한참 듣다 보면 괴상망측한 곡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통에 머릿속이 혼란과 어리둥절함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감동이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이 곡을 선택했다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것이고, 좀더 음악적인 이해를 갖추고 분석적인 차원으로 접근해야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 바로 이 디아벨리 변주곡이다. 다만 이성적 차원이건 감성적 차원이건 이 곡의 의외성과 기상천외함을 즐기기 시작하게 됐다면 드디어 디아벨리 변주곡이 추구하는 진정한 세계로 들어왔다고 생각해도 좋다.
5. 명연주
전술한 것처럼 연주자에 따라 각양각색의 연주가 행해지는데, 거장 연주자들의 경향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참고 연주로 링크한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연주는 연주시간이 1시간 정도로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Piotr Anderszewski)의 연주와 더불어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연주의 대표주자로 거론된다. 반면에 다른 참고 연주로 링크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의 연주는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와 더불어 연주시간이 50분 내외로 훨씬 속도가 빠르며 박진감과 피아니즘이 돋보이는 연주의 대표주자로 평가받는다. 유명한 연주 가운데 가장 빠른 연주는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의 연주로 4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17]
21세기 이후 연주회나 레코딩에서 연주되는 디아벨리 변주곡의 전곡 연주시간은 대략 52~55분 정도로 명상적인 연주와 피아니즘을 추구하는 연주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는것이 대세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베토벤에 대한 애착으로 유명한 김선욱이 2016년 디아벨리 변주곡으로 전국 순회 리사이틀을 가지기도 했다. 같은 한국의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전국 순회 리사이틀을 열었던 것과 대비되는 행보.
[1] 이 항목에는 매우 기본적인 내용만 서술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전문가가 저술한 책이나 논문, 인터넷 사이트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2] 후배인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25 변주곡과 이 두 곡을 묶어서 3대 변주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 같은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두 연주는 해석 측면에서 상당히 대조적이다. 후술되는 내용 참조. 모두 실황연주라 종종 미스터치가 들리지만 그런데 신경을 쓸 이유가 없을만큼 훌륭한 명연이다.[4] 물론 4년 내내 작곡되었던 것은 아니고 1819년 초 의뢰받은 직후에 이미 23개의 변주곡을 완성했고 이후 뜸을 들이다 1823년 겨울에 다른 10곡(1,2,15,23∼26,28,29,31)을 완성했다. 이 공백기간 동안 장엄미사를 비롯한 다수의 대작들이 작곡되었다.[5] 이 분이 나름 음악에 욕심이 있었던지 자신의 출판사에서 자작곡도 많이 출판했다. 하지만 현재는 정작 자신의 작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단지 이 변주곡 제목의 주인공으로만 유명하다.[6] 베토벤은 이 왈츠를 구두방의 쪼가리 가죽(Schusterfleck)이라고 빈정댔다.[7] 일설에 의하면 디아벨리가 거액을 제시해서 변주곡 작곡이 성사됐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다.[8] 한동안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으로 거론되었던 분이다. 이미 브렌타노와 연애가 끝난지 한참 지난 상황에서 이런 대작을 그녀에게 거리낌없이 헌정한 것을 보면 헤어지고 나서도 그녀를 계속 잊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베토벤은 이 분의 딸에게도 피아노 소나타 30번을 헌정했으며, 학자들은 가곡집 '멀리 있는 연인에게(op. 96)'를 이 안토니 브렌타노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보고 있다.[9] 사실 디아벨리 변주곡 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작품 대다수가 당시의 악기와 연주기술로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베토벤 사후 한참 지난 후에야 제대로 연주가 이루어졌다.[10] 이 항목에는 매우 기본적인 내용만 서술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전문가가 저술한 책이나 논문, 인터넷 사이트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11] 디아벨리 변주곡과 비교하기 위해 일부러 변주곡 수가 많은 곡을 예제로 들었다.[12]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성격변주 방식에 비해 음형변주 방식이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명백한 착각이니 오해가 없도록 하자. 모차르트의 뒤포르의 미뉴엣에 의한 변주곡(K. 573)이나 멘델스존의 엄격변주곡 처럼 음형변주로도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에 어설픈 성격 변주곡은 재미 없는 짧은 곡을 무질서하게 모아 놓은 소곡집으로 전락할 수 있다. 예술에서 작품성을 담보해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술가의 역량이지 형식이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자.[13] 그래서 흔히 이 24 변주를 바흐풍의 푸가, 32 변주를 헨델풍의 푸가라고 말한다.[14] 디아벨리 변주곡 이후 그나마 훌륭한 피아노 변주곡으로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24' 이나 라흐마니노프의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등이 거론된다. 다만 낭만주의 도래 이후에 변주곡 분야에서 명작이 적은 이유는 주제나 동기를 처리하는 방법이 훨씬 다양해지면서 변주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쇠퇴한 측면도 있다. 리스트의 돈주앙 환타지나 파가니니 연습곡 등이 대표적인 예.[15] 디아벨리 변주곡과 사정은 좀 다르지만 연주시간 편차가 심한 것은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장르를 막론하고 규모가 큰 곡들은 해석에 따른 연주시간의 편차가 많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디아벨리 변주곡은 정말 연주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악이 창출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16] 베토벤 피소 전집을 처음으로 완성한 베토벤 해석의 권위자 아루투르 슈나벨이 스페인 공연을 마치고 부인에게 써 보낸 편지내용이 이렇다. "디아벨리 변주곡을 연주할 때면 늘 청중들에게 미안함을 금할 수가 없다오. 연주회장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나 뿐인 듯 한데 난 돈까지 받지 않소. 그런데 저들은 돈까지 내고 와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거든!"[17] 들어보면 알겠지만 호흡이 없이 너무 급하다는 느낌이 든다. 감상의 관점에서는 부적절한 측면이 있지만 베토벤이 직접 자기 작품에 지시해 놓은 말도 안되는 빠르기를 감안하면 나름 작곡자의 의도(?)에 좀더 부합하는 연주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참고로 굴다는 이 디아벨리 변주곡 뿐만 아니라 소나타를 비롯한 베토벤의 다른 피아노 작품도 엄청나게 빠른 템포로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