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리 소콜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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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리 리프마노비치 소콜로프 Григорий Липманович Соколов''' [1]
http://www.grigory-sokolov.com
1. 개요
2. 생애
2.1. 1966년 제3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2.2. 우승 후 은둔(?)
2.3. 재발견과 medici.tv, Deutsche Grammophon 계약
2.4. 사별
3. 연주 스타일
3.1. 극도의 긴장감과 디테일, 거대한 서사
3.2. 논레가토 주법, 팔색조 음색
3.3. 트릴 덕후
3.4. 그 외
4. 여담
4.1. 녹음 혐오와 협주곡 은퇴 선언
4.2. 6개월 단위의 프로그램과 순회 공연


1. 개요


그의 연주는 사라진 옛 러시아 피아니즘의 시대를 다시 보여주는 듯했다

- 더 가디언, 2007

소콜로프는 많은 이들에게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피아노의 도스토옙스키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광대하며, 마지막 한 방울의 깊은 심연까지 쥐어짜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 International Piano, 2006

1950년생의 러시아 피아니스트. 16살에 1966년 제3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였으나 극도로 언론 노출과 레코딩을 꺼려하는 성격 탓에 서방세계 뿐만 아니라 소련에서조차도 그 인지도가 낮았지만, 그의 라이브 연주들이 하나 둘 세상에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일반 대중들에게도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버드, 쿠프랭, 라모에서부터 프로코피예프, 스크랴빈, 스트라빈스키까지 무지막지하게 넓은 레퍼투아와 경이로운 테크닉, 끝을 모를 사색적인 해석으로 이미 현역으로 활동하는 동안 전설의 반열에 든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스타일을 가장 잘 보여줄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제7번 3악장 연주. 템포를 희생하고 집요하게 울림을 탐구하는 자세, 스타카토 주법, 공중에서 찍어내리는 독특한 타건에 주목.

2. 생애


소콜로프는 5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7살 때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리야 젤리흐만에게 사사하였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니스트가 된 이후 지휘자의 길을 걷는 경우가 많은데, 소콜로프는 특이하게 먼저 지휘자를 지망했다가 피아니스트로 진로를 바꾼 케이스. 12살 때 모스크바에서 바흐, 베토벤, 슈만, 쇼팽 등을 연주하는 리사이틀을 처음으로 열었으며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렇듯 신동으로 알려졌다. 음악원에서는 성실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6살이 되던 해 일대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2.1. 1966년 제3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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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미샤 디히터(2위), 에밀 길렐스(심사위원장), 그리고리 소콜로프(1위)
'''1966년도 제3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 가장 어린 나이로 참가하여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해버린 것이다!'''
그 때 소콜로프는 완전한 무명에 가까웠고, 그의 만장일치 우승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거기다 협주곡을 연주하는 결선 곡으로 카미유 생상스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을 선택했는데, 보통 스케일이 크고 대륙의 기상이 넘치는 차이콥스키나 프로코피예프,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우승은 더욱 충격적인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대회를 취재했던 뉴욕타임즈의 Harold Schonberg는 결선 연주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소콜로프은 화려한 손가락 기교와 화성 테크닉을 가졌다. 그는 피아노를 너무나도 쉽게 다루는 듯 보여서 생상스 피아노협주곡 제2번 3악장의 프레티시모가 진정으로 맑고 가볍게 들렸다. 이제 영영 사라졌다고 생각됐던 피아니즘, 음악성, 예술성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같았다.

'He possesses brilliant finger and chord technique, he easily wields the piano, so easily that he performs prestissimo the last movement of the Saint-Saëns Concerto No.2 with truly refined lightness. A kind of pianism, musicianship and artistry one thought had vanished forever.'

- Harold Schonberg, 1966

우승 직후 녹음된 생상스 피아노협주곡 제2번. 16세 소년의 연주이다! [2]
그의 우승에 관해 재밌는 일화가 있다.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소련 당국은 제1회 대회에서 반 클라이번(미국)의 우승과 제2회 대회에서 존 오그던(영국)의 공동 우승 이후 내심 대회의 국제적 인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소련 대중들은 미국에서 날아온 잘생긴 피아니스트 미샤 디히터에 더 열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녹화를 자주 할 수 없었던 당시 사정상 대회 영상은 인기있는 참가자들 위주로 진행됐는데, 그로 인해 우승자 소콜로프의 연주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 소련 당국은 이후 부랴부랴 짜깁기 영상을 만들었는데, 소콜로프의 얼굴만 보여주는 영상에 라캄파넬라를 입힌다거나, 오케스트라가 없는 스튜디오에서 소콜로프가 혼자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친다거나 하는 안습할 정도의 퀄리티가 나오고 말았다.
짜깁기된 영상
소콜로프가 우승하자 화가 난 소련의 인민들이 길렐스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길렐스는 그 충격으로 위원장직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길레스가 탄 차에 침을 뱉고 토마토를 던졌다는 증언도 있다. 평소 소콜로프가 가장 존경하던 길렐스가 이런 고초를 겪고 자신도 온갖 기막힌 일들을 겪고 난 이후, 소콜로프는 카메라 노출과 스튜디오 녹음을 극도로 피하게 된 것으로 그의 지인들은 보고 있다.

2.2. 우승 후 은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소콜로프는 우승 이후 다시는 스튜디오 녹음을 하지 않게 되었고, 공연도 70년대에 일본 미국 등을 서너 번 방문한 이후로 소련과 유럽 대륙 내에서만 머무르며 열게 되었다. 21세기가 되기 까지 약 30여년의 연주 활동 기간 동안 소콜로프의 음원은 소련 Melodiya에서 실황녹음한 10여개의 음반이 전부였고, 이 기간동안 소콜로프라는 이름은 그의 공연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과 소수의 예술가들을 제외하곤 대중들에게는 완전히 잊혀졌다. 어찌 보면 라이브 공연을 완전히 그만두기로 선언하고 은둔 생활에 들어간 글렌 굴드와 유사한 경우로 볼 수도 있는데, 사실은 서방세계에서 보기에 은둔의 삶을 선택한 것으로 보일 뿐 소콜로프는 그 기간 동안 굉장히 왕성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소콜로프는 20대의 나이에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되어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고 ,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소련과 유럽 내에서 연간 수십~백회에 달할 정도의 왕성한 공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단지 그가 음반화와 유명세에 관심히 전혀 없었을 뿐이다 [3]

2.3. 재발견과 medici.tv, Deutsche Grammophon 계약


소련 해체 이후 소콜로프의 음원들이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대중들의 인지도도 급격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4] 특히 쇼팽 전주곡을 담은 90년 파리 실황음반이 황금디아파종 상을 수상하고, Opus111 음반사를 통해 옛 Melodiya 음반들이 CD로 재발매되면서 그의 연주에 대한 오컬트적 인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90년 파리 실황 전주곡 연주
그리고 21세기가 되어서 소콜로프의 인지도에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바로 클래식 영상 전문가 브루노 몽생종(Bruno Monsaingeon)과의 만남과 유튜브의 등장이다. 리히터, 굴드, 피셔-디스카우 등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과 영상을 제작한 브루노 몽생종은[5] 그의 2005년 파리 실황을 놀라운 영상으로 담아내었고, 때마침 유튜브의 등장과 맞물려 그의 연주 영상들이 전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연주들을 몰래 녹음한 수많은 음원들이 유튜브에 상주하게 되었다.
소콜로프 음원의 대부분을 찾을 수 있는 YouTube 페이지
이로 인해 소콜로프의 국제적 인지도는 급격하게 올라갔고, 세계의 수많은 젊은 피아니스트들에게 영감을 주게 되었다.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4위를 차지한 에릭 루가 한 예인데,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The Great Sokolov 라는 플레이리스트가 따로 올라와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인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많은 음반사들이 소콜로프와의 새로운 음반계약을 따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워낙에 음반 발매를 혐오하는 소콜로프인지라 성사될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의 클래식스트리밍서비스 업체인 medici.tv가 기존의 소콜로프 실황 영상 판권을 사들인데 이어, 2013년 소콜로프의 베를린 실황 영상을 브루노 몽생종과 다시 한 번 작업하여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후 매년 medici.tv에서 소콜로프 실황 영상이 하나씩 나오고 있다. 2016년까지 액상프로방스에서 연주한 바흐,베토벤,슈베르트 실황 공연이 발매되었다.

그리고 2015년, 음반화에 대한 시선이 조금은 자비로워졌는지 드디어 도이치 그라모폰이 소콜로프와의 음반 계약을 따내는데 성공한다. 08년 잘츠부르크 실황부터 시작하여 현재 모차르트/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실황음반까지 발매가 된 상황. 이게 대단한 이유가, 소콜로프는 2000년대 중반부터 피아노협주곡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

2.4. 사별


소콜로프는 러시아의 시인 안나 소콜로바와 결혼하였는데, 2014년 사별하였다. 이후 소콜로프의 레퍼투아가 후기 베토벤과 슈베르트 등 침잠하고 사색적인 프로그램으로 구성되기 시작했고 연주 또한 점점 더 느려지고 무거워져서, 혹시 사별 이후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한 이보 포고렐리치의 상황이 재현될까 걱정되는 상황.
그런데 영국의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리히트(Norman Lebrecht)가 안나 소콜로바가 사실은 소콜로프 사촌의 과부였다는 것을 블로그에 쓰면서 약간의 논란이 일었다. 그것도 최초 작성할 땐 오타를 내서 안나 소콜로바가 소콜로프의 이모(aunt)였다는 폭탄드립을 쳐버리는 바람에 당연히 소코롤프는 대노. 소콜로프는 2015년 클래식 음악계에 헌신한 사람에게 수상되는 크레모나 상을 받게 되었으나, 이 사건 때문에 소콜로프는 레브리히트가 이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절하였다. [6] 지금으로선 안나 소콜로바에 관한 논란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이는 중.

3. 연주 스타일



1998년 마드리드 실황 (라모 클라브생 모음곡 사장조,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제16번,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제1번)
소콜로프의 연주 스타일은 크게 극도의 집중력과 긴장감, 논레가토 주법, 트릴로 묘사될 수 있다. 이는 라모부터 프로코피예프까지 일관되게 나타나는 스타일인데, 최대한 날카롭고 육중한 사운드와 비장한 서사를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소콜로프는 글렌 굴드, 에밀 길렐스, 안톤 루빈스타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음 하나하나가 강조되는 논레가토 주법은 굴드, 전반적인 해석의 기조는 길렐스의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본인이 언급한 것처럼 음악적 지향점은 안톤 루빈스타인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낭만성을 극한까지 쥐어짜냈다는 안톤 루빈스타인에 관한 기록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3.1. 극도의 긴장감과 디테일, 거대한 서사


소콜로프가 치는 모든 곡들은 지독하게 깊고 심각하다. 농담이 아니라 소콜로프는 바이엘을 친다 하더라도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고뇌를 담을 수 있다 할 정도로 그의 연주에선 항상 비장한 서사가 드러나며, 극도로 계산된 집중력 있는 사운드를 들려준다. 소콜로프를 피아노의 도스토옙스키라고 표현하는 것도 수긍이 가는 부분. 프리드리히 굴다나 언드라스 쉬프 같은 거장들이 보여주는 위트나 여유는 소콜로프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소콜로프 연주를 듣다 보면 "우와아앙 쩐다" 하면서 듣게 되다가도, 긴장감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이내 멘탈이 지치게 될 정도. 어려운 곡도 쉽게 보이게 하는 거장이 있는가 하면, 소콜로프는 쉬운 곡도 대단히 어렵게 보이게 한다.

라모 클라브생 모음곡 나단조 中 "사이클롭스"
바흐 프랑스 서곡
바흐 파르티타 제4번 중 제6곡 '지그'
특히나 소콜로프는 바로크와 초기 고전 곡들을 연주할 때 템포의 긴장감과 엄격함이 도드라지는데, 단순히 악보에 쓰인 템포와 리듬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청자를 말려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숨가쁘게 밀어붙인다. 이런 성향은 토카타 풍의 곡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는데, 빽빽한 사운드와 빈틈 없는 리듬은 동시대 연주자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경지이다.
베토벤 소나타 제29번 내림나장조, Op.106 "함머클라비어" 中 제4악장
매우 느린 템포에도 불구하고 듣다 보면 쫄린다.

쇼팽 왈츠 가 단조 (유작). 극도로 음울하고 정제된 소리에 주목. 우아한 해석의 알렉상드르 타로와 비교해 들어보자
쇼팽 피아노 연습곡, Op.25 中 제12번 "대양"
소콜로프는 낭만 시대 곡들을 연주할 때 줄곧 극적인 전개와 서사를 보여준다. 특히 셈여림에 관한 자유로운 해석을 보일 때가 많은데, 그 대표적인 예가 위의 대양 연습곡. 피날레를 향해 쉴새없이 밀어붙이다가 절정의 바로 직전 pp(피아니시모)로 소리를 죽이는 효과를 내고 있다. 전주곡 제24번에서도 마지막 직전 하강 아르페지오를 pp로 시작하는 등 청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 해석을 즐겨 보여주는데, 이게 또 듣다 보면 정신력이 쭉쭉 빠지는걸 느낄 수 있다.
몇몇 한 두 마디의 표현 뿐만 아니라 큰 틀에서의 서사 진행도 매우 스펙터클하다. 그의 웬만한 낭만시대 피아노 협주곡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데, 브람스 1, 2번, 라흐마니노프 3번, 차이콥스키 1번은 과도한 프레이징과 자의적인 호흡으로 호불호를 상당히 타긴 하지만, 그 긴장감과 위압감만은 견줄 곳이 드물 정도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 라 단조, Op.30 中 제1악장 "카덴차" 부분

3.2. 논레가토 주법, 팔색조 음색


소콜로프는 집약된 소리를 위해 페달 사용을 최대한 아끼며, 웬만한 프레이즈는 모두 논레가토 주법으로 처리한다. 하지만 아예 페달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고, 영상을 보면 음표 단위로 페달을 새로 가는 것을 자주 볼 수가 있다. 개별적인 음들의 울림을 조탁해내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가끔씩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스타카토가 없음에도 스타카토로 찍어 치기도 한다. 이러한 스타일은 다성부 음악을 연주할 때 특히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바흐 푸가의 기법이나 베토벤 함머클라비어 소나타에서 그 강점이 잘 드러나는데, 여러 성부가 응집되고 선명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어서 그 디테일이 엄청나다.
소콜로프의 이러한 주법은 그의 연주 영상을 직접 보면 확실히 느낄 수가 있는데, 마치 손이 발레를 하듯이 건반 위 매우 높은 곳에서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타건 방식이 그의 독특한 응집되고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쿠프랭 틱-톡-쇽(Tic-Toc-Choc)
그의 논레가토 주법과 손모양을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쿠프랭 연주. 바로크 음악에 어울리게 하프시코드처럼 소리를 가볍고 날카롭게 내는데에 큰 효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소리가 항상 건조하고 날카로운 것만은 아니다. 물론 어느 곡을 연주하든지 간에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해석은 일관적이지만, 작곡가에 따라 울림의 깊이와 음색을 다양하게 조절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브람스 간주곡 Op.117 中 제2번
드뷔시 전주곡 제2권 中 제10곡 'Canope' (소콜로프의 유일한 드뷔시 연주)
라벨 소나티네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 한 모음곡에서 얼마나 다양한 음색 변화가 나타나는지 주목. 대표적인 폴리니 연주와 비교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내림나장조, Op.83. 역시 폴리니와 비교
특히 1악장에서 얼마나 다채로운 울림을 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3.3. 트릴 덕후


그러나 소콜로프의 연주 스타일은 뭐니뭐니 해도 미칠 듯한 트릴이다. 트릴은 소콜로프의 전매 특허라 할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인데, 바로크 음악과 후기 스크랴빈 연주에서 완연하게 빛을 발한다. 들어보면 피아노를 하프시코드처럼 다루면서 남들보다 한 트릴에 한 두번 정도의 떨림을 더 준다. 그러나 가끔씩은 트릴에 대한 욕심이 심해서, 악보에 트릴이 등장하기만 하면 과하게 트릴을 꺾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라모 클라브생 모음곡 사단조 中 암탉(La Poule) (스타카토와 트릴의 압박...)
극악한 트릴이 가장 많이 요구되고, 또 그만큼 가장 중요한 곡은 아마 스크랴빈의 후기 소나타일 것이다. 특히 곤충의 날갯짓을 표현한 스크랴빈 소나타 10번은 아예 트릴로 도배가 돼있는데, 트릴 덕후답게 이 곡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스크랴빈 소나타 제10번, Op. 70

3.4. 그 외


워낙 크고 극적인 해석을 좋아하는 성향의 피아니스트이다보니, 항상 최대한 길고 화려한 판본의 악보를 선택하는 경우가 잦다. 가장 대표적인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곡 전체에 3개의 Ossia가 있는데, 하나는 유명한 무거운 카덴차이고 나머지 둘은 3악장에 있다. 마지막 ossia는 피날레의 옥타브 하강인데, 셋잇단음표가 아니라 넷잇단음표(...) 옥타브 하강이다. 소콜로프는 3개의 ossia를 모두 사용했다.

넷잇단음표 하강은 영상 5분48초부터
그 외에도 쇼팽 즉흥환상곡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쓰던 판본을 치고, 슈베르트 피아노 소품 D.946은 슈베르트가 썼다 지운 부분을 포함한 초판본을 쓴다. 한 술 더 떠서 슈만 피아노 소나타 3번은 아예 아무도 치지 않는 초판본 악장들까지 끼워서 무려 5악장짜리 곡으로 연주한다 (헨레판 보면 악보는 다 있긴 있다). 특히나 클라라 주제에 의한 변주곡인 느린 악장은 최종판본과 비교해서 들어보면 가히 마개조 수준(...) 들어보기. 느린 악장은 19분 30초부터
이런 걸 보면 소콜로프는 맥시멀리즘에 가까운 해석을 선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마이너 덕후일지도.

4. 여담



4.1. 녹음 혐오와 협주곡 은퇴 선언


소콜로프는 음반화를 포함한 모든 녹음 및 녹화 작업을 혐오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음악은 그 현장에서 발화하여 없어져야 한다는 본인의 확고한 철학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을 불완전한 매체에 담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그래서 우승 이후 50년에 가까운 연주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매된 음반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글렌 굴드가 라이브를 혐오하고 스튜디오 녹음에만 전념했다면, 소콜로프는 완전한 정 반대의 경우이다.
재밌는건 소콜로프의 음원이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계약을 맺고 있는 Opus 111 이라는 레이블은 소콜로프의 모든 실황 공연들을 매번 녹음한다고 한다. 그러나 소콜로프가 그 음원을 음반화하는 것에 워낙 완고하게 반대 입장을 표하고 있어서 내지 못할 뿐이라고. 심지어 소콜로프는 Opus 111 관계자에게 "님들 레이블 이름을 Opus 111 이라고 하지 말고 Opus Posthumous로 하는게 어떰?" 이라고 했다고.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를 의미하는 opus 111에서, 죽고 난 다음 출판된 유작을 의미하는 Opus Posthumous로 이름을 바꾸라는 건데, 한마디로 '''자기 죽기 전엔 음반화는 어림도 없단 얘기다'''.
소콜로프는 또 2005년경부터 앞으로 협주곡을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협주곡은 곡을 완성하기 위해 드는 시간(=리허설)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콜로프는 한 곡을 정하면 그 곡만 6개월동안 연주회에 올리면서 끊임없이 한 곡을 탐독하는 스타일의 연주자이다. 그런데 협주곡은 쇼케이스의 경향이 강하고, 지휘자와 해석에 관한 토론 을 하는 데에 충분히 긴 시간을 투자할 수 없기 때문에 연주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사실 소콜로프의 협주곡 음반을 들어보면, 피아노 혼자서 아예 소우주를 형성해서 큰 서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소콜로프의 연주에는 오케스트라가 끼여들 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위대한 피아노 연주이고, 나쁘게 말하면 협동이 전혀 되지 않는 것.
그렇기 때문에 2017년 3월 도이치 그라모폰이 소콜로프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발매한 것은 2배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거기다 이 음반에는 "A Conversation That Never Was" 라는 소콜로프 다큐멘터리 DVD특전도 들어있는데, 퀄리티가 가히 괴랄하다. 시작부터 '소콜로프는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지인들과의 인터뷰로만 제작한 다큐이다. 그래서 이 제목은 소콜로프와 한 적 없는 대화 (conversation that never was) (...) 이다' 라고 선언을 하는 것. 적당히 덕후들을 위한 보너스 디스크 정도의 수준이다.

4.2. 6개월 단위의 프로그램과 순회 공연


소콜로프의 공식사이트 http://www.grigory-sokolov.com 에 들어가면 소콜로프의 연주회 일정과 공연 프로그램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소콜로프는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누어 1년에 단 두 종류의 프로그램만 연주하고, 하나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전 유럽을 돌면서 많을 땐 이틀에 한 번씩 연주회를 연다는 것이다. 어림하면 소콜로프는 한 곡을 6개월동안 70~80회에 걸쳐서 연주한다. 심지어 앵콜곡조차도 6개월마다 6~7곡씩 고정으로 정해놓는다. 앵콜곡도 엄연히 프로그램의 일부인 셈.
이렇게 반복적이고 빡빡한 연주 일정을 수십년 동안 소화해내면서 매번 엄청나게 집중된 연주를 들려주는 걸 보면 확실히 대가는 대가인 듯.

[1] 가까운 이들에겐 그리샤(Grisha)라는 애칭으로 자주 불린다[2] 물론 16세에 이만큼의 기교를 보여주는 피아니스트는 없지 않다. 해석의 무게에 주목.[3] 이것이 빈말인 것만은 아닌게,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소콜로프는 혼자 장비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며, 항공덕후에 철덕후라고 한다. [4] 물론 소콜로프 본인은 60년대부터 변함 없는 연주 활동을 이어오고 있었고,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상황[5] 굴드의 그 유명한 골트베르크 영상과 리히터 생애 마지막 다큐 Enigma를 감독한 사람이다[6] 이 외에도 소콜로프와 레브리히트는 사이가 좋지 않다. 영국 당국의 병크로 인해 소콜로프의 비자가 취소되어 빡친 소콜로프가 앞으로 영국에서 공연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자 레브리히트가 영국 무시하냐고 디스를 걸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