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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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Xaver[1] Wolfgang Mozart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1791년 7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 1844년 7월 29일 체코 카를스바트(카를로비바리)에서 사망.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및 음악 교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여섯 아이 중 막내아들(4남)이자, 형(차남)인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Karl Thomas Mozart, 1784년 9월 21일 ~ 1858년 10월 31일)와 함께 유아기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두 명의 아들 중 한 명이다.
외양이 아버지 모차르트와 닮은 점을 이용하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세'''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지만, 음악가로서의 명성이 그렇게 높지는 못했다. 이유는 그 시대에 불어닥친 낭만파의 기조를 따라잡지 못하고 빈 고전파 양식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의 작품에서는 아버지의 스멜이 진하게 배어 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도 아니었는데, 태어난 지 4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 콘스탄체는 덴마크의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과 재혼했다. 한편 이름 '프란츠 사버'는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 1766년~1803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몇몇 음모론자들은 이 때문에 프란츠 사버가 사실은 모차르트가 아닌 쥐스마이어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펼친 적도 있었다. 물론 사실무근이다.
어렸을 때부터 역시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형 카를 토마스도 어렸을 때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프라하를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까지 갔었지만, 어느새 흥미를 잃고 조용히 접은 뒤 그 자리에서 공무원이 되어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다음은 마치 베토벤의 초기 작품 같이 과도기적인(...) 그의 작품 몇 개이다.
▲ 피아노 4중주곡 g단조 Op.1: 1악장. '''9살 때''' 작품이다.
▲ 첼로 소나타 E장조 Op.19: 1악장. 아버지는 첼로를 싫어해서 첼로를 위한 곡을 작곡한 적이 없다.
▲ 피아노 협주곡 2번 E장조 Op.35: 1악장
프란츠 사버 볼프강은 어머니 콘스탄체가 기대를 많이 건 아이였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5살 때부터 음악활동을 했고, 어린 나이에 바로 위의 피아노 4중주곡을 작곡했다. 요제프 하이든, '''안토니오 살리에리''', 요한 네포무크 후멜 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뒤 13세 때인 1805년 4월에는 빈의 '테아터 안 데어 빈(Treater an der Wien)'에서 메이저 데뷔하였다. 이 극장은 마술피리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아버지의 동료인 시카네더의 극장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곡과 연주를 듣고 모차르트가 살아돌아왔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 때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성공한 프란츠 사버는 음악교사 스카우트도 제의받아 1808년에는 렘베르크(Lemberg)로 가 폴란드 백작 빅토르 바보로프스키(Wiktor Baworowski)의 두 딸을 가르치기도 했다. 보수는 제법 괜찮았지만 피드카민(Pidkamin)이란 곳에 잡은 거처가 워낙 외진 곳이라서 쓸쓸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이듬해 도시로 나가 부르시틴(Burshtyn)의 폰 야니체브스키 백작의 딸들을 가르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종종 콘서트를 열어 자신과 아버지의 작품을 연주하는 활동을 계속했고, 2년 후 다시 렘베르그로 옮겨 20년이나 음악교사와 연주 활동을 했다.
물론 렘베르그에만 머무르지 않고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연주 활동을 계속했고, 결과는 연이은 성공이었다. 특히 1826년에서 1829년까지는 400명의 아마추어 가수들로 이루어진 '성 체칠리아 합창단'을 조직해 지휘하였다. 1820년대에 간행된 〈안톤 디아벨리의 주제에 의한 50개의 변주곡(Vaterländischer Künstlerverein, 파트 2)[2] 〉에는 카를 체르니, 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50인의 작곡가 중 한 명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도 안았다. 그가 작곡한 변주 테마는 28번째.
1838년 거처를 빈으로 옮긴 프란츠 사버는 자신의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Internationale Stiftung Mozarteum) 설립식에서는 합창지휘자로 초청받았다. 거기서 모차르트의 아들이란 점을 이용해 아예 음악감독으로 눌러앉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1841년부터는 카를스바트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후에 이름 있는 피아니스트가 될 에른스트 파우어 등을 가르치는 등 제자 양성에 힘썼고, 그곳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3세. 모차르트의 아들로서 충실히 살았고 그에 걸맞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사후에는 묻혀버렸다. 문제는 형인 카를 토마스마저 처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모차르트 가의 대가 끊겼다'''는 사실이다(...). 그의 유산은 후원자였던 요제피네 데 바로니-카발카보(Josephine de Baroni-Cavalcabò)에게 넘겨졌다고 한다.
프란츠 사버는 낙천적인 아버지와는 달리 성격이 내성적이고 겸손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다고 하며, 평생 홀로 지냈기 때문에 처자식도 없었다. 그는 53세에 사망했는데 당시 기준으로도 썩 장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모친인 콘스탄체 모차르트가 죽은 후 겨우 2년 뒤에 사망한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일각에서는 그가 더 오래 살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와 아버지를 자꾸 비교하는 바람에 그 스트레스 때문에 수명이 줄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당대에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척 점잖은 신사이지만 어딘가 짓눌린 듯했다'고 증언했다. 아버지에 대한 부담이 크기는 컸던 모양.
그의 묘소는 아버지의 고향인 잘츠부르크 인근의 도시 칼스바드에 있다. 볼프강의 무덤에는 그의 삶을 축약하는 묘비명이 새겨져있다. '''May the name of his father be his epitaph, as his veneration for him was the essence of his life.'''(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비문이 되게 하소서, 아버지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그의 생활의 요체였기 때문이로다)
Franz Xaver[1] Wolfgang Mozart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1. 개요
1791년 7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 1844년 7월 29일 체코 카를스바트(카를로비바리)에서 사망.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및 음악 교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여섯 아이 중 막내아들(4남)이자, 형(차남)인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Karl Thomas Mozart, 1784년 9월 21일 ~ 1858년 10월 31일)와 함께 유아기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두 명의 아들 중 한 명이다.
외양이 아버지 모차르트와 닮은 점을 이용하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세'''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지만, 음악가로서의 명성이 그렇게 높지는 못했다. 이유는 그 시대에 불어닥친 낭만파의 기조를 따라잡지 못하고 빈 고전파 양식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의 작품에서는 아버지의 스멜이 진하게 배어 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도 아니었는데, 태어난 지 4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 콘스탄체는 덴마크의 외교관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과 재혼했다. 한편 이름 '프란츠 사버'는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 1766년~1803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몇몇 음모론자들은 이 때문에 프란츠 사버가 사실은 모차르트가 아닌 쥐스마이어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펼친 적도 있었다. 물론 사실무근이다.
어렸을 때부터 역시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형 카를 토마스도 어렸을 때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프라하를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까지 갔었지만, 어느새 흥미를 잃고 조용히 접은 뒤 그 자리에서 공무원이 되어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다음은 마치 베토벤의 초기 작품 같이 과도기적인(...) 그의 작품 몇 개이다.
▲ 피아노 4중주곡 g단조 Op.1: 1악장. '''9살 때''' 작품이다.
▲ 첼로 소나타 E장조 Op.19: 1악장. 아버지는 첼로를 싫어해서 첼로를 위한 곡을 작곡한 적이 없다.
▲ 피아노 협주곡 2번 E장조 Op.35: 1악장
2. 생애
프란츠 사버 볼프강은 어머니 콘스탄체가 기대를 많이 건 아이였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5살 때부터 음악활동을 했고, 어린 나이에 바로 위의 피아노 4중주곡을 작곡했다. 요제프 하이든, '''안토니오 살리에리''', 요한 네포무크 후멜 등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뒤 13세 때인 1805년 4월에는 빈의 '테아터 안 데어 빈(Treater an der Wien)'에서 메이저 데뷔하였다. 이 극장은 마술피리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아버지의 동료인 시카네더의 극장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곡과 연주를 듣고 모차르트가 살아돌아왔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 때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성공한 프란츠 사버는 음악교사 스카우트도 제의받아 1808년에는 렘베르크(Lemberg)로 가 폴란드 백작 빅토르 바보로프스키(Wiktor Baworowski)의 두 딸을 가르치기도 했다. 보수는 제법 괜찮았지만 피드카민(Pidkamin)이란 곳에 잡은 거처가 워낙 외진 곳이라서 쓸쓸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이듬해 도시로 나가 부르시틴(Burshtyn)의 폰 야니체브스키 백작의 딸들을 가르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종종 콘서트를 열어 자신과 아버지의 작품을 연주하는 활동을 계속했고, 2년 후 다시 렘베르그로 옮겨 20년이나 음악교사와 연주 활동을 했다.
물론 렘베르그에만 머무르지 않고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연주 활동을 계속했고, 결과는 연이은 성공이었다. 특히 1826년에서 1829년까지는 400명의 아마추어 가수들로 이루어진 '성 체칠리아 합창단'을 조직해 지휘하였다. 1820년대에 간행된 〈안톤 디아벨리의 주제에 의한 50개의 변주곡(Vaterländischer Künstlerverein, 파트 2)[2] 〉에는 카를 체르니, 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리스트와 함께 50인의 작곡가 중 한 명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도 안았다. 그가 작곡한 변주 테마는 28번째.
1838년 거처를 빈으로 옮긴 프란츠 사버는 자신의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Internationale Stiftung Mozarteum) 설립식에서는 합창지휘자로 초청받았다. 거기서 모차르트의 아들이란 점을 이용해 아예 음악감독으로 눌러앉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1841년부터는 카를스바트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후에 이름 있는 피아니스트가 될 에른스트 파우어 등을 가르치는 등 제자 양성에 힘썼고, 그곳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3세. 모차르트의 아들로서 충실히 살았고 그에 걸맞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사후에는 묻혀버렸다. 문제는 형인 카를 토마스마저 처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모차르트 가의 대가 끊겼다'''는 사실이다(...). 그의 유산은 후원자였던 요제피네 데 바로니-카발카보(Josephine de Baroni-Cavalcabò)에게 넘겨졌다고 한다.
프란츠 사버는 낙천적인 아버지와는 달리 성격이 내성적이고 겸손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다고 하며, 평생 홀로 지냈기 때문에 처자식도 없었다. 그는 53세에 사망했는데 당시 기준으로도 썩 장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모친인 콘스탄체 모차르트가 죽은 후 겨우 2년 뒤에 사망한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일각에서는 그가 더 오래 살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와 아버지를 자꾸 비교하는 바람에 그 스트레스 때문에 수명이 줄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당대에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척 점잖은 신사이지만 어딘가 짓눌린 듯했다'고 증언했다. 아버지에 대한 부담이 크기는 컸던 모양.
그의 묘소는 아버지의 고향인 잘츠부르크 인근의 도시 칼스바드에 있다. 볼프강의 무덤에는 그의 삶을 축약하는 묘비명이 새겨져있다. '''May the name of his father be his epitaph, as his veneration for him was the essence of his life.'''(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비문이 되게 하소서, 아버지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그의 생활의 요체였기 때문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