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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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소련,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우크라이나 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이다.[2]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깊이 있는 해석과 바로크부터 현대에 이르는 넓은 레파토리, 피아노의 음향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굉장한 타건력으로 유명하다. 강한 집중력이 느껴지면서도 전체를 조망하는 듯한 연주는 다른 피아니스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강점 중 하나이다.
2. 생애
리흐테르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태생이었지만, 독일 국적자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아마추어 음악가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리히테르 본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매우 뛰어난(excellent) 피아니스트였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세계적으로 유명한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했다. 이후 빈에서 한때 나름 잘나가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지만, 결투를 하게 되어 범법자가 되어 우크라이나로 도망갔다. 이후 오데사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다가 레슨 제자인 지주 귀족의 딸 안나 파블로프나와 결혼했다. 리흐테르의 외할아버지는 딸이 평민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어쨌거나 둘은 결혼했다. 리흐테르는 1915년 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이 터지자 지주 귀족 출신인 어머니 집안이 소련의 숙청 대상이 되었기에 가족이 뿔뿔히 흩어지는 비운을 겪었다. 리흐테르는 네 살 때 부모와 떨어져 8살 때까지 고모 집에서 자라야만 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여덟살 때 다시 부모와 함께 살게 되면서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당시 여느 독일인 어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식에게 엄격한 아버지였던 듯 하다. 아버지가 피아노를 이상하게 친다고 꾸짖으면 어머니가 말리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똘기 어린 행동을 해도 잘 이해해 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래서 어릴 때 체계적으로 피아노를 배우지는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른 선생을 주선해 주기도 했지만 역시 오래 가지는 못하고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혼자서 계속 피아노를 연습했고, 15살때 오데사에서 처음 공개 연주회를 열었고 이것이 성공을 거두자 이후 '''제대로''' 피아노를 공부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해 오데사 오페라 극장에서 반주를 맡으면서 음악가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성악가들의 반주자로서 다른 지방으로 연주여행도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페이는 형편없어서 생활은 빈곤했지만, 리히테르 본인은 자신이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어서 좋았다고 한다.
1935년경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모든 소련인들이 그랬지만, 특히 그의 가족은 독일계여서 큰 공포 속에서 지냈다고 한다.
22세에 모스크바로 상경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겐리히 네이가우스[3] 를 사사한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소전쟁이 터지자 당시 오데사 주재 독일 영사에게 피아노 레슨을 했던 그의 아버지는 독일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 혹은 처형되고 말았다. 오데사에 있던 그의 어머니는 삼촌과 함께 간신히 소련을 탈출하여 독일로 망명했다. 이렇게 리흐테르는 졸지에 가족과 인연이 끊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이후 소련 비밀경찰(KGB)이 그의 어머니가 독일에 망명했다는 이유로 리흐테르를 미행하고 다녔지만, 가족을 잃은 리히테르는 오히려 피아노 연습에 더욱 전념했다. 소련에서 그의 명성은 높아져 갔으며, 에밀 길렐스와 함께 소련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1949년 스탈린상을 받으며 소련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공식 인정을 받았고, 직후부터 동구권 여러나라와 중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가 집권한 후 소련은 서방에 유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소련은 1955년부터 자국의 대표적인 예술가인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에밀 길렐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서방 공연을 허가하여 체제 선전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흐테르는 가족사 때문에 서방으로의 연주여행이 계속 불허되었다. 그러자 이미 서방으로 연주 여행을 다니던 길렐스가 청중들에게 "저 산 넘어 제 조국 소련에는 저보다 뛰어난 리흐테르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그를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1958년 차이코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소련을 다녀온 미국의 반 클라이번이 소련에 리흐테르라는 엄청난 피아니스트가 있다고 서방 언론에 전하면서 서방에서 리흐테르의 명성은 높아져 갔다.
결국 소련 당국도 리흐테르의 서방 공연을 허가할 수 밖에 없었고, 리흐테르는 1960년 첫 서방 공연을 허가받아 미국 뉴욕 카네기홀, 시카고 등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이 카네기홀 공연에서 20년만에 어머니와 상봉하게 된다. 이 공연 전까지 20년 동안 리흐테르는 어머니의 생사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소련은 그에게 그녀의 어머니가 전쟁 중에 사망했다고 말했었다. 그는 공연장에서 소련 당국을 의식해서인지 객석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는 객석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4] 물론 공연 뒤에 어머니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상봉했다. 이후 1961년 런던 공연 등 서구권에서 공연을 이어가면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94년에는 한국에도 방문했다.
3. 연주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타연주자를 압도하는 장기를 하나씩 갖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왼손, 알프레드 코르토의 루바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엄청나게 큰 소리, 글렌 굴드의 영롱한 터치, 등. 이에 비해 리흐테르는 그 어떤 연주스타일로도 분류되지 않는 카멜레온같은 연주자였다.
제드 디슬러 (평론가)[5]
생전에 그는 "연주자의 임무는 음악을 지배하는게 아니라 그 안에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8] 이처럼 개성은 배제하고 작곡가의 의도대로 치는게 그의 연주 철학이었다.세상엔 두 종류의 연주가 있습니다. 하나는 연주자가 악기를 스스로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쓰는 경우입니다: 파가니니와 프란츠 리스트처럼요. 그리고 나머지는 청취자를 연주자 개인의 개성이 아닌 음악 자체에 연결해주는 경우입니다. 제 생각엔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보다 후자의 예시에 어울리는 연주자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7]
3.1. 평가
'''우리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연주자 중 하나.'''
(처음 그의 연주를 목격했을 때를 회상하며) '''"처음엔 특별하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눈물이 흐르더군요." "피아노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건 완전히 다른 악기였다. 리흐테르는 지성을 갖춘 거대한 음악가다"'''
'''내가 경험한 가장 위대한 피아노 연주였다'''
반 클라이번[10]
[11]
'''마음에 드는 러시아인 피아니스트는 단 한명이다: 리흐테르.'''
3.2. 바로크
3.3. 고전파
3.4. 낭만파
3.5. 20세기 음악
3.6. 러시아 피아노 음악
3.7. 가곡, 2중주 및 실내악
3.8. 협주
4. 여담
- 1977년 즈음부터 암보가 아닌 악보를 펴 놓고 연주를 했는데(기억력의 문제는 아니고 신체노화로 인해 청각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자기 귀에 들리는 음이 실제 음정보다 몇 도나(!) 높게 들리기 시작했다고) 음감이 쇠퇴하기 전에 보여줬던 그의 기억력은 방대한 레퍼토리만큼 기억력도 기인급이였다.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7번을 나흘동안 머리속으로 연습해서(!) 완성했다고 한다.[12] 기억력이 지나치게 뛰어나서 그가 만난 모든 사람과 심지어 그들의 지인까지도 늘 머리에 맴도는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 어머니가 대단히 모험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여서 아들에게 숫기가 없다고 자주 면박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더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13]
- 8살때 피아노를 혼자 건반을 눌러가며 시작한 첫곡이 쇼팽의 녹턴 1번과 25-4 연습곡.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는 스케일같은 기본기도 안배웠으면서 뭐하는 짓이냐고 경악을 했지만 어머니가 그냥 냅두라고 해서 본인 마음대로 즐기며 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14] ''
- 철저한 악보원칙주의자였다. 한번은 머레이 페라이어의 공연에서 쇼팽 소나타 3번을 들었는데, 연주후 무대뒤의 페레이어를 찾아가 왜 1악장의 도돌이표를 따르지 않았냐고 따졌다는 일화가 있다.[15] 이 외에도 도돌이표를 철저히 준수하라고 강조한 사례가 꽤 많다.
- 바흐의 이탈리안 콘체르토에서 단 하나의 음을 F샵 대신 F로 잘못알고 연주했었는데, 이후 새롭게 녹음한 음반에서 사죄문을 올린적이 있다: "매우 송구스럽게도 저 리흐테르는 그동안 이탈리안 콘체르토 2악장 마지막 부분의 F를 F샵으로 잘못 연주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황당하게도 리흐테르는 그때까지 이 곡을 40년을 넘게 쳤는데 그 어떤 음악가와 녹음 기술자한테도 이 사항을 지적받은적이 없다고 한다.[16] 물론 이 일화의 진정한 묘미는 리흐테르가 13분을 상회하는 이탈리안 콘체르토를 40년을 넘게 악보 한번 보지 않고 암보했다는 것(...).
- 동성애자라는 루머가 있는데, 이 루머는 소프라노 니나 도를리악(1908-1998)과 1945년 결혼은 하였으나 평생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정식부부도 아니었으며 아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 공산주의 소련 체제에서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은 통상적이지는 않은 일이었으며,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리흐테르의 성지향에 대해서는 그의 생존 시기에도 때때로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리흐테르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없고, 극도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었기에 인터뷰 일체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죽기 직전까지 지속된 브루노 몽생종의 다큐멘터리 필름에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없다. 현재는 평생 동반자였던 니나 도를레악도 사망한 이후이기 때문에 리흐테르의 성적 지향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니나는 평생 리흐테르에게 충실했고, 90년대에 내한 공연때도 매니저처럼 동행하였으며, 리흐테르의 사망까지 옆을 지켰다.
- 글렌 굴드는 리흐테르의 연주에 대해 정신을 못차릴 정도의 황홀경이라고 언급했다.
- 쿠엔틴 타란티노와 얼굴이 닮았다는 의견이 많다. 당장 위의 쇼팽 발라드 연주 때만 봐도...
[1] 러시아어로는 Святосла́в Теофи́лович Рихтер, 우크라이나어로는 Святослав Теофілович Ріхтер.[2] 리흐테르의 아버지는 독일인이었다. 리흐테르 본인도 독일계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와 관련된 카라얀과의 일화가 있는데, 녹음 중 잠시 쉬는 시간에, 리흐테르가 '나는 독일인이오' 라고 하자, 카라얀이 '그럼 나는 중국인이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3] 소련의 피아니스트로 명교사로 이름이 높았다. 리흐테르 외에 대표적인 제자들로는 야코프 자크, 에밀 길렐스, 아나톨리 베데르니코프, 라두 루푸 등이 있다.[4] 그의 어머니는 3년 후 사망했다.[5] https://www.gramophone.co.uk/feature/sviatoslav-richter-centenary-tribute[6] 15:15 - 16:13 https://www.youtube.com/watch?v=iVhxqEN9j7k [7] 굴드는 전자에 속하는 음악을 굉장히 싫어하고 평가절하했다. 비록 굴드와 리흐테르의 연주 스타일은 다소 달랐으나, 음악의 절대적인 궁극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같았고, 나중에는 둘 모두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버리고 야마하로 갈아탄 것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다.[8] Sviatoslav Richter: Notebooks and Conversations by Bruno Monsaingeon (2001-03-01) [9] Bruno Monsaingeon, The Enigma (film biography of Richter). [10] 1958년 소련에서 그의 연주를 처음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미국으로 돌아와 한 극찬이다[11] "Year in Review — Arts & Culture". CN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8-12-19[12] 그의 다큐멘터리에서 본인이 증언, 48:42초: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2740&v=yfJVpjI3wJM [13] 출처: 그의 다큐멘터리[14] 출처: 그의 다큐멘터리[15] 페레이어는 놀라며 "다들 그렇게 하지 않나요?"라고 반문했다.[16] 1950년대 녹음한 이탈리안 콘체르토에 이 실수가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