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코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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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fael Correa 1963-[1]
에콰도르의 제43대 대통령이자 경제학자.
정치이념으로 21세기 사회주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며 케인즈주의자에 가깝다.[2] 조지프 스티글리츠에게 수학했기 때문이다. 제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나름대로 주류는 주류였다.
키토의 중산층 집안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5년간 마약사범으로 감옥에 수감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3] 고등학교때도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럼에도 콰야킬 가톨릭 산티아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졸업 뒤에 성 프란시스코 회의 지원을 받아 숨바와라는 소도시에서 몇 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뒤 벨기에 루벤 대학교로 유학을 가 석사학위를 딴 뒤 에콰도르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연구에도 참여하였고, 미국 일리노이 대의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제자가 되어 박사학위를 따냈다. 이 때 그는 장하준과도 인연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에 대해 상당히 잘 알게 되었다고 한다.
2005년에 알프레도 팔라시오 대통령 치하에서 경제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라파엘 코레아는 석유산업 국유화를 통해[4] 그 비용을 다른 산업 및 교육-복지 비용으로 쓸 것과 긴축정책을 완화할 것을 주장하면서 국제통화기금과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알프레도 팔라시오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의 조치를 따르려고 하자 이에 반발하여 경제재무부 장관직을 사퇴했다. 그의 행동은 무례하기는 했지만 국제통화기금에 질릴대로 질린 여론의 지지를 얻었고[5] 경제학자라는 직함도 달고 있기 때문에, 페루의 오얀타 우말라와는 다르게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으며 알바로 노보아를 큰 격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라파엘 코레아는 집권 초기부터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와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였으며 OPEC에 재가입하고[6] 개헌을 통해 여러 개혁안과 대통령의 권한 강화 등을 이뤄냈다. 물론 야권의 반발을 사게 되었지만 지지율이 높았기에 야권과 적절히 타협을 하는 방식으로 넘어갔다.
2008년 하반기에 유가가 폭락하면서 2009년에 채무불이행을 선언했지만[7] 이는 정치적인 목적이 큰 것이었으며, 2010년에 괄목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를 회복하였고 브라질과도 채무조정을 성공적으로 해냈기 때문에 큰 탈없이 지나갔다.
2010년, 교육개혁안 및 경찰개혁안에 대해 교사들과 경찰관들이 대거 반발하였지만 이는 곧 무마되었고,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에콰도르는 경제적으로 건실하게 성장세를 이어가 월급수준도 크게 올랐으며 라파엘 코레아도 2013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집권을 이어나갔다.[8] 그러나 2015년에 유가폭락으로 세수가 급속히 줄면서 가용예산이 크게 줄어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키토 지하철 건설이 지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급하게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세금도 신설하고 상속세 납부 기준도 완하했으며 예산삭감도 단행했지만 경기는 여전히 침체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콰야킬 일대 부유층과 중산층들이 대거 반발하여 상당한 규모의 시위가 일어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16년 1분기 유가가 2000년대 초반 이래 최저수준을 찍는 와중에도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유가도 조금씩 오르면서 경제위기 국면이 끝나나 싶었지만, 2016년 에콰도르 지진국면 수습에 무능한 모습을 보이면서 지진 피해자들에게 상당히 까이고 있고 지지율도 크게 떨어졌다. 경제학자라 그런지 피해비용 마련안을 빠르게 만들기는 했지만, 피해 복구 작업이 그리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컸다. 한편 지진국면 뒤로 외교노선도 조금 바뀌었다. 저조한 지지율에 시달리고 있던 라파엘 코레아 지지측에서 4선을 위한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였는데, 의외로 서명하는 사람이 많아[9] 서명자수가 100만을 넘을 정도였지만 라파엘 코레아 본인이 직접 출마를 고사하면서 2007년-2013년 당시 부통령인 레닌 모레노[10] 가 대신 출마하게 되었다. 2017년 대선의 야권 유력 후보가 다행히도 경제위기가 닥쳤던 1999년도에 재정부문 차관을 역임한 기예르모 올가미인지라[11] 지지율이 떨어지기는 해도 파이스 연립당이 정권을 연장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그렇지만 임기 말에 일련의 레임덕 현상을 겪으면서도 부동산관련 세금을 크게 늘리는 등 경기가 침체인 상황에서도 세수를 무리하게 확충하려는 모습을 보이다보니 지지율이 60-70%대를 오가던 전성기때에 비하면 많이 내려간 편이다. 기본적으로 재임기때 이래저래 한일이 많아서 빈곤층들 사이에서 지지율이 유지되고 있지만 중산층들 사이에서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으며 전체적인 지지율이 극악인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30-40%대 정도의 수준이다.
여러 상황에서 여러모로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고, 임기연장을 위해 개헌을 추진할 때 이런저런 상황이 펼쳐지면서 입장이 오락가락한데다가 2016년 지진 이후로는 4선을 포기했다. 그러나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냄에도 비교적 높은 지지를 얻었는데 1979년 민주화 이래(정확히 말하자면 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20여년 동안 매번 뒤통수만 맞은 영향이 컸다. 사실 우파측으로 선출되나 좌파측으로 선출되나 IMF의 등쌀에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제대로 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라파엘 코레아는 오랬만에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진행한 인물이라 에콰도르 사람들이 볼 때에는 굉장히 나은 대통령으로 보이는 듯 하다. 물론 라파엘 코레아 자신이 뒷통수를 친 일이 없는 건 아니라[12] 상당수 원주민 단체와 등을 돌리기도 했다.[13] 한편 에콰도르인이라 해도 대도시 부유층은 라파엘 코레아를 그다지 곱게 보지 않는데, 이는 집권기간 중에 세금을 올리고 동성커플 법제화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교육개혁을 실행한 일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평가를 받게 되어, 라파엘 코레아에 대한 평이 매우 안 좋다.
사실상 채무탕감이나 재조정을 받은 것도 그렇고 꽤나 위험한 위기를 넘어간 것을 보면 고유가라는 호조를 탄 것을 감안하더라도 역대 에콰도르 대통령 가운데서는 정치감각이 뛰어난 인물이 맞기는 하다. 전임 대통령 루시오 구티에레스[14] 도 이라크 전과 베네수엘라 석유파업이라는 기회를 잡았는데도 놓친 걸 보면 말이다. 다만 측근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지 부패 스캔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게 문제다. 장하준하고 친하게 지내는 데다가 경제정책에 있어서 한국의 사례를 자주 참고하는 편이기 때문에 한국에 우호적인 인물이지만[15] 안습하게도 한국에서는 언론에서 잘 보도되지 않아 그리 유명한 인물이 아닌데 에콰도르 자체가 그리 큰 나라가 아닌 데다가[16] 한국언론 특성상 영미권 언론 기사를 받아쓰기 하는 경향 때문인 듯.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했지만 미국에 상당한 반감을 지닌 데다가 우고 차베스나 피델 카스트로, 다니엘 오르테가 등과도 매우 친하게 지내다보니 보수언론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대대적으로 띄워주기가 껄끄럽고 진보언론 입장에서도 라파엘 코레아가 참고하는 한국의 발전방식이라는 것이 70-80년대 사례를 뜻하는 경우가 많아 대놓고 띄워주기가 애매한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영미권 언론들의 무관심에 비해서[17] 본인은 자기주장에 아주 적극적이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월간신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대통령 신분으로 기고한 적이 있는가 하면, 미국 공영방송 PBS의 여행프로에 직접 출연(!)해# 에콰도르 관광지를 소개하는 등 외부 언론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밖에 특기할 점으로는 위키리스크를 설립한 줄리언 어산지의 망명을 받아들였다는 것인데[18] 국제적으로 평판을 높이면서 보수정당과 언론의 반발을 잠재우려고 망명을 받아들였다는 평이 대다수이며, 망명을 받아들인 초기에는 나름대로 유용했지만 2016년 이후로 어산지가 클린턴 저격에 집중하면서 상당한 골칫덩이가 되었다.
여하튼 전반적으로본다면 에콰도르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 가운데서 독보적으로 일을 제대로 한 인물로 1996년 부카람 당선때부터 이어져왔던 에콰도르 정국의 혼란을 잠재웠고, 에콰도르의 인프라 확충과 경제력 향상에 큰 공을 세웠으며 나름대로 뛰어난 정치적인 감각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원주민 단체와 충돌을 보여주었던것에 있듯이 포용력이 부족하고 귄위적인 모습을 상당히 보여줬던데다가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개혁이 흐지부지 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등 단점도 만만치않게 보여준 지도자라고 볼수있다.
여하튼 2017년 에콰도르 선거에서 부통령이 직권남용과 부패의혹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상황에서도 개헌선에 크게 미달했다지만 어쨌든 국회 과반은 확보했고, 조세피난처 국민투표[19] 에도 55 vs 45%로 승리해서 상대후보인 기예르모 라소[20] 에게 족쇄를 채우는데에는 성공을 거두면서 일단 최소한 얻을것은 얻었지만 그렇다해도 득표율이 크게 감소한고 국회의석도 상당히 감소된건 변함이 없는데다가 레닌 모레노가 매우 간발의 차이로 1차 투표 당선에 실패해서 결선투표까지 치러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승리하고 하기도 뭐하고 패배라고 하기에도 뭐한 상황이라는 평이다.[21] 하지만 결선투표에서 간발의 차이로 이기면서 정권재창출에 성공하며 편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수있게되었다. 선거과정에서 네거티브 전략을 주도한 점이나 개표 이후로 2주 가까이 야권에서 불복선언을 하면서 시위를 벌이는 등 잡음이 있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직접 4선에 나서는 무리수를 두지 않고 장애인 인권운동과 온화한 성격으로 평판이 좋은 레닌 모레노를 차기주자로 택한데다가 선거운동과정에서 레닌이 선역, 라파엘 자신이 악역(?)을 자처해서 도맡는 전략으로 라소를 묶어놓고, 의회에서도 과반은 넘게 차지했으며, 정권재창출에도 성공을 거두웠으니 결과적으로 동료인 에보 모랄레스[22] 와 선배인 우고 차베스가 4선에 도전하려고 이런 저런 무리수를 둔것에 비하면[23] 현명하면서도 유능한 전략을 펼쳤다는 평이다.
어쨌든 선거가 끝난 후에는 그 동안 자신이 받은 선물을 손수 기증해서 박물관을 개장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자신의 아내[24] 를 따라서 벨기에로 갔다. 여담으로 대선 이전부터 레닌 모레노가 당선되면 라파엘 코레아가 상황으로 등극하는것 아니냐는 예측이 돌기도 했지만, 막상 레닌 모레노가 취임이후로 야당이나 언론, 원주민 단체, 기업, 노조와의 대화에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고, 심지어 압달라 부카람이 귀국한 뒤로[25] 압달라 부카람을 면담하자 이를 까는 트윗글을 게시하는 등 레닌 모레노와 대립각을 세우는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베와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이나 톨레도와 쿠친스키 대통령, 호셰프와 미셰우 테메르 브라질 대통령처럼 대립관계로 변모하는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올 지경이다. 2021년 대선에서 출마할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기도 한데, 사실 자신도 차기 대선 출마를 검토하고 있다고 트윗을 올리기도 했고, 집권말기의 경기침체와 권위주의적인 성향때문에 보수파들이나 원주민 단체등으로부터 많이 까이기는 하지만 에콰도르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 가운데서 라파엘 코레아만한 성과를 올린 대통령이 아직은 없기 때문에 대권주자로써의 경쟁력 자체는 충분한 상태이다. 그리고 8월 들어서는 레닌 모레노 대통령과의 대립각을 더욱 강하게 세워서 아예 레닌 모레노와 기예르모 라쏘를 대대적으로 비판하는 트윗을 40여개씩이나 올리고 이대로 갈 경우에는 조국동맹에서 탈당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중이다. 아직은 에콰도르 의회가 알리안사 파이스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2013년-2017년 상반기처럼 개헌선을 넘을 정도의 거대정당에서 과반수를 단 5석 초과할 정도로 의석수가 크게 줄었고 이로 인해서 단 6명만 탈당해도 의회 과반이 붕괴되는데다가[26] 무엇보다도 라파엘 코레아 자체가 조국동맹의 정신적인 지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만일 탈당을 감행할 경우에는 파급력이 세다.
그리고 아예 조국동맹을 아예 탈퇴할 정도는 아니지만 제헌의회 선거가 다시 치러진다면 후보로 나설수 있다는 의향을 밝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는데다가 레닌 모레노의 정책이 기존 여당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야권지지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고있는 상황이라 지지율이 70-80%대를 넘나들기 때문에 여론은 코레아에게 불리하다. 레닌이 일을 잘하고 있는데다가 경제도 호황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회복되고 있고, 테메르나 마크리처럼 경제개혁을 한답시고 무분별한 민영화나 복지예산 삭감단행도 안하는데 뭐하러 벌써부터 초치고 난리냐는 식의 반응도 적지 않은 편.
그렇지만 결국 집권당을 탈당했다. 집권당이 두쪽이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것인데 막상 탈당을 한다고 해도 기존 코레아 지지충 다수가 레닌 모레노 지지쪽으로 이탈하여 국민투표에서 가결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상처를 입는것은 피할수 없는듯하고, 실제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으로 가결되면서 큰 상처를 입게 된건 물론이고 무제한 출마 가능 규정도 백지화되면서 2021년 대선에서 4선을 노릴 기회도 사실상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지면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너무 일찍 레닌 모레노의 신 정책에 반감을 표하며 반격에 나선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 이후로는 RT에서 토크쇼를 진행하다가[27] 2018월 5월과 6월 들어 본격적인 사정정국에 들어가면서 라파엘 코레아 시절에 벌어졌던 여러 비리 스캔들도 드러났고, 2012년에 야당의원이 납치직전에까지 갔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 관련으로 법원 출석명령을 받았는데 법원에 출석하지 않았다가[28] 에콰도르 검찰로부터 소환명령을 받았다. 물론 코레아 본인은 명확한 증거가 없다며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집권 당시에 드러난 비리가 꽤 많은지라 에콰도르 현지에서 소환조사를 해야한다는 여론이 강한 편이다.
사실 근소한 표차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합법적으로 인정받은채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데다가 국회에서도 알리안사 파이스당이 과반을 훌쩍 넘겼고, 이 상황에서, 아무리 비리가 있다한들 임기 말년에 침체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에콰도르의 인프라나 경제를 크게 성장시키고 치안도 안정시켰으며 교육수준도 높인 공은 있기에 처신만 잘 했으면 법적문제에 휘말릴거없이 토크쇼를 진행하고 자신의 전공분야와 통치경험을 제대로 활용해서 고문이나 교수로 재직하는 등 편하게 여생을 보낼수 있었고, 대통령 재임시의 정책을 돌아보면서 잘못한점이나 고쳐야될 점에 대한 복기를 한 다음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막상 퇴임한 후에 레닌 모레노에게 정책을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정책을 집행한다는 이유로 딴죽부터 걸기 시작하면서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며 결별수순을 밞게되고 결국 분당까지 이르는 바람에 에콰도르 의회내에서 자신의 세력이 크게 줄어든 꼴이 되고 말았고, 이 때문에 라파엘 코레아의 발목을 잡는 법안이 큰 반발없이 통과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위기를 스스로 자초했다는것이 주 평가이다. 윗나라 콜롬비아 전직 대통령으로 여러모로 비리 의혹이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남미국가연합 의장까지 지낸 샴페르 전 대통령이나 산토스가 자신의 정책과 반대로 가자 이에 반발하고 따로 정당을 차린 우리베 전 대통령[29] 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차이인 셈이다 머리는 똘똘하지만 자의식이 강하다보니 스스로의 발목을 잡은 타입이라 할수있다 그나마 브라질의 룰라, 페루의 오얀타 우말라, 콜롬비아의 샴페르같은 전직 대통령들이나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나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같은 현직 대통령 일부가 라파엘 코레아를 변호해주었기는 하지만, 잘 될지는 미지수인 상황이다.
2021년 대선 부통령 후보로 나설 예정이다.#
Rafael Correa 1963-[1]
1. 소개
에콰도르의 제43대 대통령이자 경제학자.
정치이념으로 21세기 사회주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며 케인즈주의자에 가깝다.[2] 조지프 스티글리츠에게 수학했기 때문이다. 제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나름대로 주류는 주류였다.
키토의 중산층 집안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5년간 마약사범으로 감옥에 수감되면서 어려움을 겪었고,[3] 고등학교때도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럼에도 콰야킬 가톨릭 산티아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졸업 뒤에 성 프란시스코 회의 지원을 받아 숨바와라는 소도시에서 몇 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뒤 벨기에 루벤 대학교로 유학을 가 석사학위를 딴 뒤 에콰도르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연구에도 참여하였고, 미국 일리노이 대의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제자가 되어 박사학위를 따냈다. 이 때 그는 장하준과도 인연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에 대해 상당히 잘 알게 되었다고 한다.
2005년에 알프레도 팔라시오 대통령 치하에서 경제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라파엘 코레아는 석유산업 국유화를 통해[4] 그 비용을 다른 산업 및 교육-복지 비용으로 쓸 것과 긴축정책을 완화할 것을 주장하면서 국제통화기금과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알프레도 팔라시오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의 조치를 따르려고 하자 이에 반발하여 경제재무부 장관직을 사퇴했다. 그의 행동은 무례하기는 했지만 국제통화기금에 질릴대로 질린 여론의 지지를 얻었고[5] 경제학자라는 직함도 달고 있기 때문에, 페루의 오얀타 우말라와는 다르게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으며 알바로 노보아를 큰 격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라파엘 코레아는 집권 초기부터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와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였으며 OPEC에 재가입하고[6] 개헌을 통해 여러 개혁안과 대통령의 권한 강화 등을 이뤄냈다. 물론 야권의 반발을 사게 되었지만 지지율이 높았기에 야권과 적절히 타협을 하는 방식으로 넘어갔다.
2008년 하반기에 유가가 폭락하면서 2009년에 채무불이행을 선언했지만[7] 이는 정치적인 목적이 큰 것이었으며, 2010년에 괄목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를 회복하였고 브라질과도 채무조정을 성공적으로 해냈기 때문에 큰 탈없이 지나갔다.
2010년, 교육개혁안 및 경찰개혁안에 대해 교사들과 경찰관들이 대거 반발하였지만 이는 곧 무마되었고,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에콰도르는 경제적으로 건실하게 성장세를 이어가 월급수준도 크게 올랐으며 라파엘 코레아도 2013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집권을 이어나갔다.[8] 그러나 2015년에 유가폭락으로 세수가 급속히 줄면서 가용예산이 크게 줄어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키토 지하철 건설이 지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급하게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세금도 신설하고 상속세 납부 기준도 완하했으며 예산삭감도 단행했지만 경기는 여전히 침체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콰야킬 일대 부유층과 중산층들이 대거 반발하여 상당한 규모의 시위가 일어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16년 1분기 유가가 2000년대 초반 이래 최저수준을 찍는 와중에도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유가도 조금씩 오르면서 경제위기 국면이 끝나나 싶었지만, 2016년 에콰도르 지진국면 수습에 무능한 모습을 보이면서 지진 피해자들에게 상당히 까이고 있고 지지율도 크게 떨어졌다. 경제학자라 그런지 피해비용 마련안을 빠르게 만들기는 했지만, 피해 복구 작업이 그리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컸다. 한편 지진국면 뒤로 외교노선도 조금 바뀌었다. 저조한 지지율에 시달리고 있던 라파엘 코레아 지지측에서 4선을 위한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였는데, 의외로 서명하는 사람이 많아[9] 서명자수가 100만을 넘을 정도였지만 라파엘 코레아 본인이 직접 출마를 고사하면서 2007년-2013년 당시 부통령인 레닌 모레노[10] 가 대신 출마하게 되었다. 2017년 대선의 야권 유력 후보가 다행히도 경제위기가 닥쳤던 1999년도에 재정부문 차관을 역임한 기예르모 올가미인지라[11] 지지율이 떨어지기는 해도 파이스 연립당이 정권을 연장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그렇지만 임기 말에 일련의 레임덕 현상을 겪으면서도 부동산관련 세금을 크게 늘리는 등 경기가 침체인 상황에서도 세수를 무리하게 확충하려는 모습을 보이다보니 지지율이 60-70%대를 오가던 전성기때에 비하면 많이 내려간 편이다. 기본적으로 재임기때 이래저래 한일이 많아서 빈곤층들 사이에서 지지율이 유지되고 있지만 중산층들 사이에서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으며 전체적인 지지율이 극악인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30-40%대 정도의 수준이다.
여러 상황에서 여러모로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고, 임기연장을 위해 개헌을 추진할 때 이런저런 상황이 펼쳐지면서 입장이 오락가락한데다가 2016년 지진 이후로는 4선을 포기했다. 그러나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냄에도 비교적 높은 지지를 얻었는데 1979년 민주화 이래(정확히 말하자면 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20여년 동안 매번 뒤통수만 맞은 영향이 컸다. 사실 우파측으로 선출되나 좌파측으로 선출되나 IMF의 등쌀에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제대로 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라파엘 코레아는 오랬만에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진행한 인물이라 에콰도르 사람들이 볼 때에는 굉장히 나은 대통령으로 보이는 듯 하다. 물론 라파엘 코레아 자신이 뒷통수를 친 일이 없는 건 아니라[12] 상당수 원주민 단체와 등을 돌리기도 했다.[13] 한편 에콰도르인이라 해도 대도시 부유층은 라파엘 코레아를 그다지 곱게 보지 않는데, 이는 집권기간 중에 세금을 올리고 동성커플 법제화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교육개혁을 실행한 일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평가를 받게 되어, 라파엘 코레아에 대한 평이 매우 안 좋다.
사실상 채무탕감이나 재조정을 받은 것도 그렇고 꽤나 위험한 위기를 넘어간 것을 보면 고유가라는 호조를 탄 것을 감안하더라도 역대 에콰도르 대통령 가운데서는 정치감각이 뛰어난 인물이 맞기는 하다. 전임 대통령 루시오 구티에레스[14] 도 이라크 전과 베네수엘라 석유파업이라는 기회를 잡았는데도 놓친 걸 보면 말이다. 다만 측근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지 부패 스캔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게 문제다. 장하준하고 친하게 지내는 데다가 경제정책에 있어서 한국의 사례를 자주 참고하는 편이기 때문에 한국에 우호적인 인물이지만[15] 안습하게도 한국에서는 언론에서 잘 보도되지 않아 그리 유명한 인물이 아닌데 에콰도르 자체가 그리 큰 나라가 아닌 데다가[16] 한국언론 특성상 영미권 언론 기사를 받아쓰기 하는 경향 때문인 듯.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했지만 미국에 상당한 반감을 지닌 데다가 우고 차베스나 피델 카스트로, 다니엘 오르테가 등과도 매우 친하게 지내다보니 보수언론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대대적으로 띄워주기가 껄끄럽고 진보언론 입장에서도 라파엘 코레아가 참고하는 한국의 발전방식이라는 것이 70-80년대 사례를 뜻하는 경우가 많아 대놓고 띄워주기가 애매한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영미권 언론들의 무관심에 비해서[17] 본인은 자기주장에 아주 적극적이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월간신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대통령 신분으로 기고한 적이 있는가 하면, 미국 공영방송 PBS의 여행프로에 직접 출연(!)해# 에콰도르 관광지를 소개하는 등 외부 언론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밖에 특기할 점으로는 위키리스크를 설립한 줄리언 어산지의 망명을 받아들였다는 것인데[18] 국제적으로 평판을 높이면서 보수정당과 언론의 반발을 잠재우려고 망명을 받아들였다는 평이 대다수이며, 망명을 받아들인 초기에는 나름대로 유용했지만 2016년 이후로 어산지가 클린턴 저격에 집중하면서 상당한 골칫덩이가 되었다.
여하튼 전반적으로본다면 에콰도르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 가운데서 독보적으로 일을 제대로 한 인물로 1996년 부카람 당선때부터 이어져왔던 에콰도르 정국의 혼란을 잠재웠고, 에콰도르의 인프라 확충과 경제력 향상에 큰 공을 세웠으며 나름대로 뛰어난 정치적인 감각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원주민 단체와 충돌을 보여주었던것에 있듯이 포용력이 부족하고 귄위적인 모습을 상당히 보여줬던데다가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개혁이 흐지부지 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등 단점도 만만치않게 보여준 지도자라고 볼수있다.
여하튼 2017년 에콰도르 선거에서 부통령이 직권남용과 부패의혹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상황에서도 개헌선에 크게 미달했다지만 어쨌든 국회 과반은 확보했고, 조세피난처 국민투표[19] 에도 55 vs 45%로 승리해서 상대후보인 기예르모 라소[20] 에게 족쇄를 채우는데에는 성공을 거두면서 일단 최소한 얻을것은 얻었지만 그렇다해도 득표율이 크게 감소한고 국회의석도 상당히 감소된건 변함이 없는데다가 레닌 모레노가 매우 간발의 차이로 1차 투표 당선에 실패해서 결선투표까지 치러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승리하고 하기도 뭐하고 패배라고 하기에도 뭐한 상황이라는 평이다.[21] 하지만 결선투표에서 간발의 차이로 이기면서 정권재창출에 성공하며 편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날수있게되었다. 선거과정에서 네거티브 전략을 주도한 점이나 개표 이후로 2주 가까이 야권에서 불복선언을 하면서 시위를 벌이는 등 잡음이 있었지만 어쨌든 자신이 직접 4선에 나서는 무리수를 두지 않고 장애인 인권운동과 온화한 성격으로 평판이 좋은 레닌 모레노를 차기주자로 택한데다가 선거운동과정에서 레닌이 선역, 라파엘 자신이 악역(?)을 자처해서 도맡는 전략으로 라소를 묶어놓고, 의회에서도 과반은 넘게 차지했으며, 정권재창출에도 성공을 거두웠으니 결과적으로 동료인 에보 모랄레스[22] 와 선배인 우고 차베스가 4선에 도전하려고 이런 저런 무리수를 둔것에 비하면[23] 현명하면서도 유능한 전략을 펼쳤다는 평이다.
어쨌든 선거가 끝난 후에는 그 동안 자신이 받은 선물을 손수 기증해서 박물관을 개장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자신의 아내[24] 를 따라서 벨기에로 갔다. 여담으로 대선 이전부터 레닌 모레노가 당선되면 라파엘 코레아가 상황으로 등극하는것 아니냐는 예측이 돌기도 했지만, 막상 레닌 모레노가 취임이후로 야당이나 언론, 원주민 단체, 기업, 노조와의 대화에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고, 심지어 압달라 부카람이 귀국한 뒤로[25] 압달라 부카람을 면담하자 이를 까는 트윗글을 게시하는 등 레닌 모레노와 대립각을 세우는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베와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이나 톨레도와 쿠친스키 대통령, 호셰프와 미셰우 테메르 브라질 대통령처럼 대립관계로 변모하는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올 지경이다. 2021년 대선에서 출마할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기도 한데, 사실 자신도 차기 대선 출마를 검토하고 있다고 트윗을 올리기도 했고, 집권말기의 경기침체와 권위주의적인 성향때문에 보수파들이나 원주민 단체등으로부터 많이 까이기는 하지만 에콰도르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 가운데서 라파엘 코레아만한 성과를 올린 대통령이 아직은 없기 때문에 대권주자로써의 경쟁력 자체는 충분한 상태이다. 그리고 8월 들어서는 레닌 모레노 대통령과의 대립각을 더욱 강하게 세워서 아예 레닌 모레노와 기예르모 라쏘를 대대적으로 비판하는 트윗을 40여개씩이나 올리고 이대로 갈 경우에는 조국동맹에서 탈당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중이다. 아직은 에콰도르 의회가 알리안사 파이스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2013년-2017년 상반기처럼 개헌선을 넘을 정도의 거대정당에서 과반수를 단 5석 초과할 정도로 의석수가 크게 줄었고 이로 인해서 단 6명만 탈당해도 의회 과반이 붕괴되는데다가[26] 무엇보다도 라파엘 코레아 자체가 조국동맹의 정신적인 지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만일 탈당을 감행할 경우에는 파급력이 세다.
그리고 아예 조국동맹을 아예 탈퇴할 정도는 아니지만 제헌의회 선거가 다시 치러진다면 후보로 나설수 있다는 의향을 밝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는데다가 레닌 모레노의 정책이 기존 여당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야권지지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고있는 상황이라 지지율이 70-80%대를 넘나들기 때문에 여론은 코레아에게 불리하다. 레닌이 일을 잘하고 있는데다가 경제도 호황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회복되고 있고, 테메르나 마크리처럼 경제개혁을 한답시고 무분별한 민영화나 복지예산 삭감단행도 안하는데 뭐하러 벌써부터 초치고 난리냐는 식의 반응도 적지 않은 편.
그렇지만 결국 집권당을 탈당했다. 집권당이 두쪽이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것인데 막상 탈당을 한다고 해도 기존 코레아 지지충 다수가 레닌 모레노 지지쪽으로 이탈하여 국민투표에서 가결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상처를 입는것은 피할수 없는듯하고, 실제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으로 가결되면서 큰 상처를 입게 된건 물론이고 무제한 출마 가능 규정도 백지화되면서 2021년 대선에서 4선을 노릴 기회도 사실상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지면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너무 일찍 레닌 모레노의 신 정책에 반감을 표하며 반격에 나선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 이후로는 RT에서 토크쇼를 진행하다가[27] 2018월 5월과 6월 들어 본격적인 사정정국에 들어가면서 라파엘 코레아 시절에 벌어졌던 여러 비리 스캔들도 드러났고, 2012년에 야당의원이 납치직전에까지 갔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 관련으로 법원 출석명령을 받았는데 법원에 출석하지 않았다가[28] 에콰도르 검찰로부터 소환명령을 받았다. 물론 코레아 본인은 명확한 증거가 없다며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집권 당시에 드러난 비리가 꽤 많은지라 에콰도르 현지에서 소환조사를 해야한다는 여론이 강한 편이다.
사실 근소한 표차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합법적으로 인정받은채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데다가 국회에서도 알리안사 파이스당이 과반을 훌쩍 넘겼고, 이 상황에서, 아무리 비리가 있다한들 임기 말년에 침체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에콰도르의 인프라나 경제를 크게 성장시키고 치안도 안정시켰으며 교육수준도 높인 공은 있기에 처신만 잘 했으면 법적문제에 휘말릴거없이 토크쇼를 진행하고 자신의 전공분야와 통치경험을 제대로 활용해서 고문이나 교수로 재직하는 등 편하게 여생을 보낼수 있었고, 대통령 재임시의 정책을 돌아보면서 잘못한점이나 고쳐야될 점에 대한 복기를 한 다음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막상 퇴임한 후에 레닌 모레노에게 정책을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정책을 집행한다는 이유로 딴죽부터 걸기 시작하면서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며 결별수순을 밞게되고 결국 분당까지 이르는 바람에 에콰도르 의회내에서 자신의 세력이 크게 줄어든 꼴이 되고 말았고, 이 때문에 라파엘 코레아의 발목을 잡는 법안이 큰 반발없이 통과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위기를 스스로 자초했다는것이 주 평가이다. 윗나라 콜롬비아 전직 대통령으로 여러모로 비리 의혹이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남미국가연합 의장까지 지낸 샴페르 전 대통령이나 산토스가 자신의 정책과 반대로 가자 이에 반발하고 따로 정당을 차린 우리베 전 대통령[29] 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지차이인 셈이다 머리는 똘똘하지만 자의식이 강하다보니 스스로의 발목을 잡은 타입이라 할수있다 그나마 브라질의 룰라, 페루의 오얀타 우말라, 콜롬비아의 샴페르같은 전직 대통령들이나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나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같은 현직 대통령 일부가 라파엘 코레아를 변호해주었기는 하지만, 잘 될지는 미지수인 상황이다.
2021년 대선 부통령 후보로 나설 예정이다.#
2. 선거 이력
[1]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벗겨지고 주름이 늘어나는 등 미모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재임 초중기 당시에는 미남대통령으로 손꼽혔다.[2] 사실 21세기 사회주의라는것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을 빼면 특별한 경제적인 이념이라고 보기 어렵다. 니카라과만 해도 미국과 FTA를 체결했을 정도이니...[3] 당시 알바로 노보아 후보와 에콰도르 야권에서는 코레아가 대선에 출마할 당시 코레아 아버지의 마약 전력을 앞세워 코레아를 비방했으나 그의 당선을 막는데 실패했다.[4] 당시 에콰도르 석유산업을 다국적 기업이 차지하다시피했는데 로열티로 벌어들이는 비용때문에 유가상승에도 에콰도르 정부가 생각보다 재미를 못봤고, 그나마도 석유수입을 통해 얻는 돈의 대다수를 외채상환에 썼던 상황이다.[5] 에콰도르 역사에서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IMF 강점기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며, 좌우 가릴 것 없이 뒤통수 치기로 일관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문제와 연관이 있다. 1980년대 외채로 인해 빚에 짓눌리게 되었기 때문이다.[6] 에콰도르도 197-80년대에 걸쳐 OPEC의 회원국이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1980년대 중반 저유가로 인해 탈퇴했다.[7] 이때 한창 기름 값이 떨어졌기 때문에 디폴트를 선언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유가하락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문제이며, 2015년 이후로 베네수엘라에서 심심치않게 얘기되는 디폴트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이다.[8] 이때 라파엘 코레아의 측근 중 일부가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 되었을 때이며, 우고 차베스가 사망할 때라서 지지율이 다소 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1차에서 여유있게 승리했다.[9] 애초에 니콜라스 마두로나 지우마 호세프는 지지기반을 관리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는 바람에 탄핵을 당하거나 탄핵 위기에 처하기까지도 했지만, 에콰도르는 그에 비하면 타격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라 지지기반 자체는 꽤나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10] 에콰도르의 대표적인 장애인 정치인으로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부통령으로 재직했다. 일단 같은 정당에 속해있고 같이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지내기는 했지만 라파엘 코레아가 필요에 따라서 강경한 조치를 내놓은것을 서슴치 않는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라는 평이 지배적인데 반면에 레닌 모레노는 성격이 온화한데다가 내세우는 정책도 다소 무색무취하기 때문에 라파엘 코레아보다 크게 온건적이면서 포용적인 인물이라는것이 주평이다. 여하튼 한국에서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장애인으로써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고 끝내 고위급으로 출세한 말 그대로 입지전적인 인물인데다가,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많은 상을 수여했고 UN 장애인 특사를 지내는 등 상당한 명성도 있다보니, 레닌 모레노라는 인물 자체를 대놓고 까기는 좀 뭐하기 때문에(...) 야권후보들이 라파엘 코레아의 권위적인 모습이나 상당수 고위 관료들이 브라질 건설회사와 관련된 의혹을 까는식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여담이지만 라파엘 코레아처럼 레닌 모레노도 한국과 꽤 인연이 있는데 반기문과 꽤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11] 정식으로 재직한건 몇 달 되지 않았지만 페널티가 되는 건 사실이고, 2013년 대선 토론에서도 '세금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가 라파엘 코레아에게 '세금 없이 정부사업을 어떻게 진행하려고?'라는 반박에 직격탄을 맞아 20% 초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기도 했다. 그래도 콰야킬 등 서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지세는 있는 편.[12] 뒤통수를 덜 쳤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에콰도르 민주화 이후의 대통령 가운데서 '''비교적''' 뒤통수를 덜 쳤다는 얘기다.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원주민 자치지역의 석유개발을 제한하겠다고 공약했는데, 재정수입을 늘리려고 원주민 거주지역의 석유개발을 강행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13] 그래서 이들 원주민 단체들이 라파엘 코레아에 반대하는 시위를 자주 주동한다는 후문이 있다.[14] 원래는 2000년에 쿠데타를 벌였다 실패한 경력도 있고,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상당히 급진좌파적인 발언을 했기에 집권 후에 우고 차베스와 비슷한 성향의 대통령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정작 대통령에 취임된 뒤 IMF의 구제금융 조건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경제정책을 유지하여 지지자들의 뒤통수를 상큼하게 날려먹었다. 그 뒤로 실정을 해서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 귀국하여 2007년 대선에도 출마했고, 2009년 대선에도 출마했는데 라파엘 코레아에게 철저하게 발려먹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22%나 되는 상당한 지지율을 확보하는 기염을 토해내기도 했다. 다만 이후로는 2010년 경찰관 파업 때 파업을 주도한 것을 빼면 점차 듣보화 되는 중...[15] 실제로 에콰도르 내의 인프라 건설 정책이나 교육정책에 한국의 영향이 짙으며 국무회의에서도 한국을 언급하는 경우가 꽤 빈번하다.[16] 다만 남미 기준에서나 작은 나라지 당연히 남한보다 영토가 훨씬 넓고 남북한 합쳐도 에콰도르보다 작다.[17] 사실 에콰도르 자체가 남미에서 작은 나라이다보니 영향력이 약한데다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룰라와 우고 차베스에 비해 후발주자고, 니콜라스 마두로나 지우마 호세프처럼 경제위기로 탄핵을 당하거나 탄핵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우파인 인물도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극적인 기사를 쓸만한 꺼리가 적어서 관심을 덜받는다. [18] 그렇지만 어산지는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숙식을 할 뿐 에콰도르에 방문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영국 경찰이 스노든이 대사관 밖으로 나올 경우 바로 잡아서 송환시킬 것이라 엄포를 놓았기 때문.[19] 구체적으로 조세피난처로 지정된 국가나 지역에 재산을 두면 공무원과 선출직 공직자로 임용될수없도록 하였다.[20] 파나마 페이퍼즈에 직접 이름이 올려져있어서 크게 엿을 먹은 경험이 있다.[21] 여담이지만 이 선거에서 한국에서 쓰던 전자개표기를 도입해서인지 개표 초반에는 확실히 개표속도가 한국급으로 제법 빨랐지만 개표 후반에 산골지역 개표함을 까기시작하면서부터 개표속도가 말 그대로 56kbsp 모뎀급으로 느려터지게 나오기 시작했다. 대통령 선거 개표결과가 꽤나 아슬아슬하게 나왔던지라 여당지지자든 야당지지자든 X줄타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야권지지자들이 선거부정을 저지르는것이 아니냐며 선관위를 의심하여 시위를 벌이는 지경에까지 다달았다. 일단 선관위측에서는 시골지역 개표함과 재외투표 개표함이 늦게 도착하였고 선거인 명부에 착오가 일부 생겼서 이를 확인하느라고 개표가 늦어졌다고 해명했는데 선관위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개표결과가 선거 중반때 결과와 크게 달라지지 않으면서 오해는 풀렸지만 일처리를 왜 그따고로 하냐며 크게 까이고 있는 중이다. 허나 웃긴건 어쨌든 2000년대에 비하면 나아진것이라는 것(...2000년대까지는 개표완료까지 1주일 걸렸다고 한다.)[22] 에보 모랄레스는 취임이후에 볼리비아가 의욕적인 국유화정책을 토대로 경제성장을 이어갔고, 원자재값이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유능하게 경제정책을 펴와서 2010년대 중후반기 남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고, 페루와도 최저임금이 비슷한 수준으로까지 올라왔지만, 마땅한 후임이 없다는 불안감때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욕이 강해져서인지 4선을 시도하려고 하고있다. 물론 민주화 이후의 볼리비아에서 에보 모랄레스 만한 성과를 낸 인물이 '''없기에''' 에보 모랄레스가 직접 대통령 선거 4선에 도전한다면 당선이 기정사실화되기는 하지만 한차례 국민투표에서 빠꾸를 먹었음에도 마땅한 후임을 못찾아인지 자꾸 4선개헌을 시도하려는 의지를 보이는것이 문제다. [23] 우고차베스는 어쨌든 4선에서도 압승을 거두기는 했다만 결국 건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얼마 못가 사망했고, 후임인 니콜라스 마두로는 예상외로 득표율차가 적게 나서 집권초반부터 야권의 반발을 거세게 산데다가 유가폭락으로 인한 경제위기에 무능하게 대처하고, 경제위기와 총선 참패로 인한 정치적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각가지 꼼수를 쓰면서 욕을 왕창 먹고있는 중이다.[24] 아내가 벨기에 출신이다.[25] 스포츠 선수 출신으로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과야킬 시장과 국회의원직을 지내기도하는 등 유명한 정치인이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는데 선거운동 과정에서 기행(?)을 펼쳐서 유명해졌고, 이러한 기행이 의외로 선거운동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 이후로는 공공요금을 대폭 올리는 다른 의미로 기행을 펼치는 바람에(...) 결국 1997년에 탄핵되면서 에콰도르에서 사실상 쫓겨났고 이후로 귀국하지 못하고 망명생활을 했다가 2017년이 되어서 벌금을 내는 조건으로 귀국하게 되었다.[26] 그나마 성향이 비슷해보이는 파차쿠니나 민주좌파당, 지방 군소좌파 정당들과 연립하면 의석수를 유지시킬수는 있지만 이들정당의 의석을 합쳐도 10석 안팍인지라 15명 이상이 탈당하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이다.[27] 그런데 이 토크쇼 출연진 명단이 후덜덜 하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 놈 촘스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지우마 호세프 등 그야말로 거물급 인사들이 총출동. [28] 물론 코레아가 벨기에에서 살고있기 때문에 벨기에에서 에콰도르를 들락나락 거리면서 법정에서 진출하면 시간소모가 많이 되는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성의가 없었다.[29] 참고로 이 사람 학살사건이나 우익 민병대(사실상 조폭)들과의 연관성이 많기 때문에 다른나라같았으면 정치생명이 끝날 정도의 수준으로 까일꺼리가 많다. 물론 그래도 치안은 향상되었고, 원자재값 상승으로 경제는 좋아졌기는 해서 임기 동안 인기는 많았고, 현재도 적지않은 지지층을 거느리고 있어서 2018년 대선에서 이반 두케를 대통령으로 만들 정도로 콜롬비아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30] 이 선거는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 겸 재신임 투표의 성격으로 치러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