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오르테가
1. 개요
현 니카라과 대통령.
'''소모사 독재정권의 붕괴를 주도한 혁명가이지만''' 그와 동시에 재집권 후에도 종신 집권을 노리고 있는 '''권력욕의 화신'''... 이었는데 시위진압과정에서 뻘짓을 반복한데다가 산하단체와 경찰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한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 종신집권의 꿈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허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조기선거안을 거부하고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혁명가 정신을 내다 던졌다는 평을 듣고 있는 중. 물론 혁명가 정신을 내다 버렸다는 말 자체는 이미 90년대부터 듣고있었고,[2] 2000년대에 노선 선회를 하면서 니카라과 내 지식인들로부터 혁명가 정신은 개나 줘버리고 정경유착을 해대는 대통령으로 욕을 많이 쳐먹었다.
예를 들어 니카라과 주요 대기업이나 보수 종교계와 짝짝꿍하면서 낙태금지법에 찬성하거나 비리로 수감된 알레만 대통령[3] 을 풀어주거나 환경오염을 초래할 것이라는 반발에도 니카라과 운하사업을 추진 하거나 민영화 된 기업들을 계속 민영기업을 냅두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다만 재집권 이후로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을 나름대로 유능하게 편 덕택에 지지율이 압도적이긴 했다. 2019년 들어서는 이미지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서 지지율이 다시금 50%를 넘고 있는 중이다.
2. 생애
2.1. 산디니스타 혁명가
1945년에 혁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첫째 동생과 둘째 동생 모두 소모사에 맞서서 투쟁했다. 자라나서부터는 소모사 일당의 횡포에 대해 듣고 자라면서 1963년에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 가입하게 되었고 두각을 나타내면서 1965년에 도시 지역의 투쟁을 책임지는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책임자가 된 직후 혁명자금 확보를 위해 은행을 습격하다 체포되었고 고문을 당하면서 7년간 감옥에서 생활했다.
석방 된 이후로는 쿠바로 망명가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74년에 산디니스타 해방전선을 지휘하게 되었고 소모사 일당을 지속해서 괴롭혔다. 물론 지지를 얻은것과는 별개로 소모사 일당이 지닌 사병력이 강했고 산디니스타가 게릴라인지라 여러모로 불리했다. 실제로도 자신의 동생인 카밀로 오르테가를 전투중에 잃기도 했다.
1978년부터 소모사 일당이 페드로 차모로를 암살하며 스스로 자폭하였고, 그 이후로부터 보수파와 중도파, 급진좌파에 이르는 다양한 세력들과 연합하여 1년간 소모사를 상대로 혁명전쟁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1979년에 소모사 일당이 미국으로 도망감으로써 혁명이 성공한 뒤로는 오르테가는 과도연립정권의 수장직에 올랐다.
2.2. 1기 집권
임금인상, 문맹퇴치, 의로보건체계 재정비, 소모사 일당이 소유한 기업과 토지의 국유화 및 토지개혁을 통한 재분배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생산성도 급속하게 올라가고 세계 각국으로부터 지원도 받는 등 희망차게 출발하는듯 싶었지만...
1980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고나서 점차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레이건은 소모사 일당과 산디니스타 내에서의 이탈파, 과도정부의 스페인어 강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원주민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면서 내전이 대대적으로 터지게 되었고 경제재제도 가하면서 경제도 점차 먹구름이 끼게 된다. 레이건은 이란-콘트라 사건이란 무리수 까지 두면서 강력하게 오르테가 정권을 압박했다.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오르테가는 1984년에 원주민들과의 협상을 통해 자치권을 주는 방식으로 일단 내전의 고리중 하나를 끊어냈고,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오르테가는 혁명 후 첫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콘트라와의 대결을 이유로 징병제 도입과 언론탄압등의 조치를 취하며 점차 지지를 잃어가게 된다. 대외적으로도 미국의 경제재제가 국제적인 비난에도 지속적으로 강화되면서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의 대출이 막히는 등 지속적인 치명타를 입었다.
결국 언론검열 조치를 완전히 풀어버린 1987년부터는 일부 산디니스타 해방전선 당원들의 부패상이 보도되어 권위가 실추되었으며, 결정적으로 복지지출 축소와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악재가 겹쳐지면서 1기 임기 초중반에 그런대로 굴러나가던 경제는 1960년대 수준으로까지 추락하였다. 더불어 일부 민영화 정책도 시행하면서 지지를 대거 잃었다.
1990년 대선에서 40%의 지지를 얻는데 그치며 베올리타 차모로를 위시로 한 우파정권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사실 배올리타 차모로는 페드로 차모로의 부인으로 1980년대 초반에 다니엘 오르테가를 위시한 과두정부에 참여했지만 1980년대 초중반에 등을 돌렸다.
2.3. 야당 생활
1990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로는 의외로 야당의 입장에 충실하였다. 일부 산디니스타 당원들과 농민들이 베올리타 차모로 정권을 뒤엎을려고 햇지만 어차피 쿠데타가 성공해봐야 이미지가 안 좋아질게 뻔하고 실패하면 나가리인지라 쿠데타 시도를 막았다고 전해진다.
차모로 정권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동생이 지속해서 니카라과 군의 사령관으로 재직하게 만들게함으로써 산디니스타가 우파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영향력을 유지하는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
오르테가는 차모로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예상보다 덜 받으면서 재기가 가까워 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1996년 대선에서는 여론조사에서 콘트라 출신인 알레만 후보에게 내내 우세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알레만 후보가 과반의 득표율로 당선이 되었고 오르테가는 쓴 맛을 봐야했다.
1998년에 성추행 스캔들이 펼쳐지면서 다니엘 오르테가는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것도 보통 스캔들도 아니고 무려 자기 의붓딸을 집적거렸다는 '''근친 성범죄''' 의혹. 면책특권 덕에 조사가 더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국민들은 거진 사실로 믿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불세출의 혁명가에서 파렴치한 변태 할아범으로 한동안 위상이 떨어졌었다. 일부 산디니스타 당원들이 그의 전횡에 회의감을 느끼며 탈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자신의 부인이 적극적으로 변호한 덕택에 겨우 살아남았지만, 이를 계기로 이미지를 전환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온건주의 노선을 대거 받아들였다. 2001년 대선에서 여론조사에서 과반의 득표율을 기록할것이라고 예상되었지만 미국에서 여전히 다니엘 오르테가를 안 좋게 본 건 여전하여 결국 43%의 득표율로 낙선되었고 엔리케 볼라뇨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로 2005년 엔리케 볼리뇨스가 알레만 대통령 일파의 비리를 잡을려고 하자[4] 알레만파가 이에 반발하면서 탄핵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서 보수정파가 두개로 분열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이를 잘 활용하여 알레만파와 제휴하면서 선거법 개정을 이끌어냈다. 결선투표제를 득표가 35% 이상이고 2위와 격차가 5% 이상이면 당선되는 시스템으로 개헌한 것. 그런데 재집권 후에는 너무 인기가 좋아 쓸데가 없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6년 대선에서 한때 자신의 적이었던 콘트라의 수장인 하이메 모랄레스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면서 38%의 득표율을 얻어 겨우 당선되었다.
2.4. 2기 집권
2기 집권기에는 베네수엘라와 쿠바로부터 석유와 의사들을 받아와서 이를 전력생산과 공공의료서비스, 교육시스템 확충에 쓰고 최저임금도 올리는 복지 정책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주요기업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투트랙 전략을 폈고 이를 바탕으로 보수정당들의 지지기반을 완전히 잠식해나갔다.
대통령에 재선된 이후로는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대통령 선거에 몇번 출마하든 제한을 두지 않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2011년 대선에서 62%의 득표율로 대승을 거두며 3선에 성공했다.
이후로도 매년 4-5%대의 경제성장을 그럭저럭 이룩하면서도 공공서비스를 확충했기 때문에 지지율은 매우 높으며 2016년 대선에서도 70%로 압승했다. 4선 이후로도 인기를 이어나가며 그럭저럭 통치를 하고 있는 중이다.
2.5. 장기 집권의 길
후계자를 지명하며 계속 정권을 연장하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다름 아닌 자신의 부인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는데 이에 대해 야당진영과 <라 프렌사> 지를 비롯한 언론계를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지지가 굳건하다.
끊임 없는 정권 연장과 가족 족벌식 태도는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소모사 왕국에 이은 오르테가 왕국이라는 용어도 나올 지경이다. 오르테가의 자식들이 사업을 벌이며 기업가가 되거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계에 진입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2016년 선거의 압승에는 오르데가가 자기파를 열심히 심어놓은 대법원과 헌법 재판소에서 충성심을 발휘하여 야당후보 2명을 비리혐의로 출마를 금지시키는 호재까지 겹쳤다. 어차피 야당후보를 날리지 않았어도 오르테가가 50% 후반-60% 초반대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기는 하다.
다만 아무래도 2021년 대선에서 유력후보로 나설수도 있으니 미리 날려버리는 게 오르테가도 어차피 큰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야권지지자들이 대거 기권한 덕택에 투표율이 다소 떨어지기는 했고(2011년 75%, 2016년 65%) 심지어 투표율이 선관위 발표보다도 훨씬 낮아서 대표성이 상실했을 정도라는 얘기가 야권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하지만 실상 여론조사상으로나 실제 민심으로나 오르테가의 4선은 이미 예측된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중이라고.
여하튼간에 선거과정에 잡음이 크게 생긴 건 사실이며, 외국단체의 선거 과정 참관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사실 오르테가의 4선은 예약된 것이나 다름 없어 딱히 개표조작을 단행할 필요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야당후보 2명이 날려 먹은데다가, 동시에 진행되는 총선 과정에서의 금권선거 논란을 지적당하기가 영 껄끄러워서 허용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결국 선거운동기간 막판에 논란을 종식시키려고 미주기구 관계자들을 선거과정을 참관시키기로 했다. 이전보다 외국단체의 선거감시활동이 덜해진 것도 사실이다.
2018년 4월 들어서 욕을 꽤 얻어먹고 있는 중이다. 이대로 가면 연금기금이 언젠간 바닥날지 모른다는 IMF의 권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연금기여금을 늘이면서 연금수령액을 줄이는 방식으로 연금개혁을 하려고 했다가 어느 한 쪽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고,[5] 이 때문에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여야 지지자들간의 충돌이 크게 빚어지면서 시위가 크게 격화되었고, 시위를 보도하는 TV방송국의 송출을 일시적으로 끊는 일까지도 벌여서 욕을 왕창 쳐먹고 있는 중.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라 시위가 격화될 조짐이 보이자 재빠르게 민간부문과의 대화를 재개하면서 부랴부랴 폭력자체를 당부하면서 사태수습에 나섰고, 문제가 되었던 연금개혁안을 철회하면서 사실상의 항복선언을 했지만, 그렇다 해도 일주일간의 폭력사태만으로도 사망자가 60명 넘게 나오고 부상자도 세자릿수가 나온데가, 약탈사태까지 벌어진지라 그 동안 치안안정과 경제성장으로 고공행진했던 지지율도 큰 폭으로 떨어지는 등의 타격을 크게 입었다.재정을 아낄려고했다가 반발여론과 시위를 과소평가하면서 무작정 강경진압 모드로 나서는 실책을 범했고 결과적으로 사망자가 수십넘게 나오고 부상자도 속출하면서 본전도 못건진 상태가 되었던 셈. 5월 들어서 시위는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가면서 협상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때 오르테가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고, 지지단체들이 여러모로 무리수를 둔 것도 있기 때문에 다니엘 오르테가한데 그리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다.
여하간 여론이 오르테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다가 경찰과 산디니스타 산하단체들도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다니엘 오르테가도 더 이상의 장기집권은 하기 힘들다고 판단하는지 일단 협상결과를 받아들이겠다고는 하는 중. 예정보다 임기를 단축하는 안이 에정되어있으며 2019년 중순에 조기 대통령 선거를 치른 후에 퇴진이 예상되는 중이었는데... 거부했다. 그 때문에 다니엘 오르테가의 '''친동생'''인 옴베르토 오르테가도[6] 이렇게 사태가 악화될바에 조기총선하고 명예롭게 퇴진하라고 권유하고 있고, 상당수의 전직 산티니스타 당원들도 둘째 남동생인 카밀로 오르테가[7] 의 면목을 어찌보겠냐며 퇴진을 권하고 있지만 귀담아 듣고있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조기선거안을 거부하면서 계속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지지단체들과 경찰들을 통제할 생각을 할 생각조차 않고 그냥 강경진압하도록 냅두는 바람에 희생자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상황인지라 욕을 쳐먹고 있는 중이다.
이 상황에서 2019년 3월 3일 지방선거가 고시되어있는데 실질적으로 이 선거가 다니엘 오르테가에 대한 중간평가가 되기에 야권이 어느정도의 성적을 거두느냐의 따라 정국의 향방이 갈릴듯 한다.
다만 2018년 하반기 들어서 시위가 주춤해졌고 2019년 들어서는 야권과 협상에 나서면서 30%대까지 떨어졌던 지지율이 50%대까지 회복되었고, 2019년 선거에서 고전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투표율 저조와 야권분열로 예상외로 싱겁게 승리를 거둔 덕택에 유리한 입지를 지니게 되었다.
3. 평가
'''니카라과 혁명 이후에 치러진 모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집권 1기 중, 후반기에 상당히 독재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여준건 사실이지만, 절친하게 지내는 피델 카스트로와는 다르게 집권 1기때에도 나름대로 민주적으로 선거를 치렀다. 그 이후로 여러번 낙선당했을 때도 내전을 일으킬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승복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딱히 대중에게 얼굴을 내밀기를 크게 즐겨하는 스타일은 아니며, 이점에 있어서는 우고 차베스와 크게 차별화 된다. 사실 다니엘 오르테가가 이제 70대에 접어드는 노인네인지라 더 이상 전면에 나서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자신의 부인이자 부통령인 로사리오 무릴로가 훨씬 대중친화적인 스타일이다. 오르테가의 지지기반의 한 축인 복지정책도 무릴로가 입안한 것이 많다.
니카라과 대중들한테는 전설적인 혁명가이기는 한다만, 실각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는 1980년대의 경제파탄 이미지와 성추문 때문에 인기가 엄청나게 떨어졌다. 자신도 찔리기는 하는지 대통령에 재당선 된 이후로는 여성인사들을 적극 기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야권에 위낙에 인물이 없기도 하고 집권 2기때는 그럭저럭 니카라과를 잘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지층이 광범위하다. 다니엘 오르테가가 뒤가 상당히 구린 인물인 건 맞지만 보수정당도 사실 집권기간에 별다른 경제성장을 이루지못한 건 물론이고 부패와 관련해서는 큰 말할 처지는 아니라는 점이 크다. 오르테가에게 정권내준 과정만 봐도 말 그대로 스스로 내분으로 자폭한 꼴인지라...
2000년대 중반 재집권 이후로는 재집권하면 니카라과에게 재제를 가할 것이라는 미국의 엄포에도 니카라과의 경제도 괜찮게 돌아가고있고 공공서비스도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재집권은 우파의 분열로 38%만 득표하며 승리했지만, 대중들에게 인기는 정말로 좋으며 지지율이 기본 60%는 깔고 들어간다. 2016년 대선에선 70%의 득표를 얻었을 정도.
세 차례에 걸쳐 낙선하며 노선을 온건화하면서 외교적인 수사 같은 것을 빼기만 하면 전형적인 케인지언에 하느님을 자주 언급하는 정치인이 되었다. 과장 좀 하자면 무슨 기독교 민주주의를 내거는 정당의 당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다.
앞서서 말했듯이 낙태를 찬성하는 행보를 보여서, 80년대에야 보수 가톨릭과 크게 대립을 했지만, 재선 이후로는 이전 엔리케 볼리뇨스 정권 때 통과된 낙태금지법을 개정한다거나 하는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수 가톨릭계에서는 크게 태클을 걸지는 않고 되려 다니엘 오르테가를 나름대로 지지하고 있는 중이다.[8] 다만 니카라과 내의 중산층-지식인층 사이에서 성추문과 우고 차베스, 피델 카스트로와 친하게 지내며 반미적인 발언을 수시로 한다는 점에서 까임의 대상이다.
더욱이 보수 가톨릭계의 눈치를 보며 낙태금지법에 찬성한다거나, 니카라과 재벌들[9] , 옛 콘트라 반군 소속을 포함한 구 우익 정치인[10] 들과 짝짝꿍하는 박쥐같은 행보를 보이고, 노선전환을 한다면서 산디니스타 내의 타 계파들을 축출시킨다거나 하는 등의 행보로 인해서 산디니스타 혁명정신을 내 던져버렸다며 비판을 받았고. # 2018년 시위 이후로 산디니스타 지지자 사이에서도 배신감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며 이러한 비판이 더욱 힘을 얻고 있는 중이다.
4. 외교노선
정치노선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깝기는 했지만, 그 때도 흔히 말하는 스탈린이나 모택동을 떠올리게 하는 수준은 아니기는 했다. 애초에 1980년대 니카라과 2차 내전도 미국에서 개입하면서 판이 크게 커진 것일 뿐이다.
피델 카스토르와는 매주 절친하게 지내고 우고 차베스와 라파엘 코레아, 에보 모랄레스와도 동지로 친하게 지낸데다가. 니콜라스 마두로와도 꽤 친하게 지내는 편이며, 러시아와도 외교적인 보조를 맞추곤 한다. 일례를 들어본다면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바로 해주었을 정도니 말 다한셈. 물론 미국에서 콘트라 반군을 지원해주는 통에 1기 집권기 중후반이 엉망이 된데다가 이후로도 상당기간 동안 노선의 온건화에도 미국에서 오르테가는 안된다고 하면 선거에서 얄짤없이 낙선하는 등 데인것이 하도 많다보니 미국에 좋은 감정은 없지만 경제 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다만 대만과 수교한 대가로 미국의 경제지원을 받게될 예정이니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요새의 행보는 친중이다. 3선 성공 뒤에 파나마의 파나마 운하에 대응해 오랫동안 수면 밑에 있었던[11] 니카라과 운하 프로젝트를 중국에게 투자 받는 대신 100년간 임대해주는 방식으로 체결했다. 그러나 여론이 반반으로 나누고 중국측 시행사가 자금난에 시달리는 등의 악재로 인해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허나 대만과도 계속 국교를 맺는 등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5. 선거이력
[1] 현직 부통령.[2] 예를 들자면 니카라과에서 존경받는 신부로 손꼽히는 인물이자 해방신학의 대부인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이나 80년대에 산디니스타 해방운동 전선으로 총리직을 지냈던 세르히오 라미레즈, 80년대 당시 산디니스타 해방전선 소속으로 수백곡의 당음악과 갬페인 송을 작곡한 민속음악가 카를로스 메자 고도이는 1990년대 초반에 오르테가에게 회의감을 느끼고 따로 산디니스타 혁신운동이라는 정당을 차렸다. 당시 유명인사들이 대거 산디니스타 혁신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선전이 기대되었지만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서 산디니스타 혁신운동은 한 자릿수 득표를 확보하는데 그치는 등 별다른 세를 얻지 못해서 그저 명망가들의 정당 정도로 그쳤다, 현재도 산디니스타 혁신운동이라는 정당은 지속되고 있지만 의회에서 1석도 확보하지 못할 정도로 세가 약하다.[3] 콘트라 출신 정치인으로 1996년 대선에서 다니엘 오르테가와 맞붙어 승리한 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니카라과의 대통령이 되었고, 2001년 대선에서 2000년대 초반 엔리케 볼르뇨스가 집권하면서 정권재창출을 했지만 볼르뇨스가 집권하고 개혁드라이브를 걸면서 부패혐의가 드러나 가택연금형에 처했는데 이때 알레만은 당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당이 두 토막났고, 알레만 대통령은 오르테가와 물밑에서 협상하면서 선거법 개정까지 시켰는데 이게 오르테가의 집권 원인이 되었고, 나중에 오르테가도 친 산디니스타 성향의 헌법재판관을 다수 임명하면서 알레만의 가택연금 형을 취소시키고 명예회복도 시켜주는 등 보답을 해주었다. 다만 볼르뇨스 대통령도 나중에 부패혐의가 드러나면서 도찐개찐 소리 들었기는 했다.[4] 하지만 막상 엔리케 볼리뇨스도 나중에 와서 비리혐의가 드러나면서 도찐개찐이라는 반응을 얻었다.[5] 사실 따지고보면 니카라과가 안정적으로 경제성장을 하고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중앙아메리카 일대에서 최저임금이 가장 낮은 나라고, 이전 보수정권과 마찬가지로 대기업들에게 세율을 낮게 유지시키는 등의 혜택을 주고있음에도 반발이 커지기는커녕 높은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보수정권들과는 다르게 복지정책으로 빈틈을 메워서 그럭저럭 먹고살게는 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평인데 그 동안의 이미지를 까먹는 엄청난 자충수를 둔 셈이다.[6] 오르테가 1기 집권기때와 베올리타 차모르 집권기 동안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다니엘 오르테카, 카밀로 오르테가와 마찬가지로 같이 소모사 정권에 맞서 싸웠으며, 1980년대 국방부 장관을 지냈을 당시에 콘트라에 맞서싸웠다. 그리고 1990년 대선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로도 산디니스타에 대한 회유차원에서 계속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1995년에 국방부 장관에서 물러나면서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후에 니카라과 혁명에 관한 서적을 쓰고 기업가로 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고, 형과는 다르게 정치와는 다소 거리가 떨어진 삶을 살고있었다.[7] 1950-1978 소모사 정권에 맞서다가 전투중인 1978년에 사망했다.[8] 사실 이건 베네수엘라나 브라질을 비롯한 여러 남미국가들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2000년대에 와서는 남미 전역에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들의 권리보장이 이루워지는 등 성소수자에 대한 권리신장이 크게 일었기는 했다지만, 낙태 문제는 진보적인 가톨릭교인들도 낙태금지나 규제에 찬성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낙태에 대한 규제가 여전히 엄격하다.[9] 이 때문에 니카라과의 국가기능을 악화시키고 민영화를 가속화시킨다는 비아냥도 있을 정도다.[10] 콘트라 출신 러닝메이트는 물론이고, 우파 측 전직 대통령이자 부패혐의로 수감된 아르놀도 알레만 전대통령이 대법원의 판결로 풀려난 게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이 되도록 공헌(?)한 공로덕택이라는 평이 지배적일 정도.[11] 사실 니카라과 운하의 건설계획자체는 이미 100여년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보수정부에서도 추진할려고 했지만 자금문제로 인해서 지속적으로 연기되었다.[12] 니카라과는 법적으로 1차 선거에서 1위 후보가 35% 이하의 득표율을 얻은 상태에서 상대후보와 5%이상의 격차를 벌러나가지 못할 경우에는 결선투표가 치러질수있다는 조항이 있으나 1980년대 민주화 이후로는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가 치러진적이 한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