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라 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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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리즈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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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나이는 못 속인다(...)
Ramlah Ram, 1965.2.19 ~
'''말레이시아 복고풍 음악의 전설'''[1]
말레이시아의 가수이자 여배우. 1985년 Bintang RTM의 우승자로서 이듬해 정규 1집을 내고 데뷔했다.
1965년 2월 19일 조호르 주 무아르에서 태어났다. 2017년 기준으로 꼭 51세이며 '락의 여왕'으로 불리는 엘라 아미누딘보다 1살 연상이라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면 6,70대를 보는 듯 하다. 이건 상대적으로 람라의 얼굴이 노안이기 때문. 반대로 엘라는 동안이라, 둘이 1살 차이의 동생이라는 게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 뭐, 둘의 리즈시절이던 8,90년대에 엘라는 의외로 별 동안은 아니었지만, 람라는 그 때에도 유독 노안이었다.
왠만한 말레이시아 가수들은 이름에 'bin(남성)'이나 'binti/binte(여성)'를 붙이며 의외로 길고 괴랄하다. 때문인지 대부분은 Siti Nurhaliza, Ella, Ziana Zain과 같이 일부만 떼서 쓰거나 아예 예명을 만들어 쓴다. 이러고 보면 Ramlah Ram도 예명이 아닌가 하겠지만 실제로는 '''본명이며 풀네임'''이다. 근래에는 히잡을 쓰는 등 본인이 전형적인 무슬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무슬림이었지만, 의외로 저게 안 붙은 것을 보면 중국인의 후손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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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2] Bintang RTM에 출연하여 프란치스카 피터의 노래 "Dia"를 부르고 우승했다. 이 때 전설적인 국빈 음악가 아흐마드 나와브를 만났으며 나와브 본인이 만든 나와브 프로덕션스(NP)와 계약을 맺고 이듬해 정규 1집 "Sabarlah Sayang"을 내고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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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초 Bintang RTM에서 주목받은 것과는 달리, 이 앨범은 실제로 큰 히트를 치지는 못했다. 끽해봤자 에픽하이 1집의 인기 정도, 아니, 그보다도 낮을 수도 있는 인기일 뿐이었다. 그나마 사실상의 타이틀곡[3] 인 "Sabarlah Sayang"으로 간신히 이름을 알렸으나, 그것도 쪼잔하기 그지없다(...). 그 외에도 "Di Hati Ini", "Betapa Sayangnya Aku" 등이 있다고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인기를 얻었을까 말이다.
게다가 당시 상황 치고도 녹음환경이 열악해서인지, 음질도 사실상 모노이며 까놓고 말하자면 개떡같다. 그렇지만 은근 노래들은 좋은데다 람라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앨범이므로 나름 들어보는 것을 권장한다. 참고로 풀앨범은 여기서 들을 수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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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87년에는 별일 없이 조용히 휴식하다가, 1988년 2집 "Kau Kunci Cintaku (Dalam Hatimu)"를 내고 컴백했다. 이번에는 레이블을 NP에서 PMC로 이전했으나, 나와브의 도움은 그대로 받았다. 특히 이번에는 깔끔한 음질에다가 한결 더 세련된 스타일이 대표적이며, 나와브 특유의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음악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 앨범이다. 다만 수록곡 중 6개가 여전히 음질이 거지같은데, 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4개를 먼저 녹음한 뒤 녹음기 등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주요 히트곡은 "Kau Kunci Cintaku (Dalam Hatimu)", "Apa Khabarmu Di Sana", "Diam-diam Jatuh Cinta" 등.
특히 "Kau Kunci Cintaku (Dalam Hatimu)"는 매우 폭발적인 히트를 쳤으며,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여전히 불리는 노래다. 여담으로 이 노래 덕분에 말레이시아 최고의 가수 중 하나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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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기에 힘업어 바로 이듬해인 1989년 3집 "Cintaku Hanyut Di Lautan Sepi"를 내고 컴백했다. 이번에는 NP와 PNC 두 곳에서 발매되었으며, 이전과 같이 거지같은 음질은 말끔히 사라졌다. 풍은 2집과 비슷하나, 한결 더 세련된 음질이 특징이며, 기존의 발라드, 로컬 댄스, 재즈(빅밴드) 중심에서 벗어나 헤비메탈에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힙합[5] 등 보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는 차이가 있다. 주요 히트곡은 "Cintaku Hanyut Di Lautan Sepi", "Semoga Kau Masih Ingat", "Terpandang Wajahmu", "Ku Terbakar Kepanasan Cintamu" 등.
이전과 마찬가지로 말레이시아 최고의 가수 타이틀을 유지하는 데 문제는 없었으나, 2집과는 달리 히트곡의 수가 상대적으로 줄었으며, 엘라와 같은 나름의 경쟁상대들이 락이나 댄스음악 등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드문 장르들을 집중적으로 들고오기 시작하면서 람라의 위치는 좀 위협받기 시작했다. 특히 시대를 맞추기보다는 시대에 좀 지난 고전풍의 음악을 고수한 람라의 경우 상대적으로 인기는 밀리기 당연지사.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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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명색이 최고의 가수인데 그 인기에 힘업어 1990년 4집 "Duri Dalam Cinta"를 냈으며, 레이블도 기존의 NP와 PNC를 벗어나 국제적인 베르텔스만 뮤직 그룹(BMG)으로 이전했다. 주요 히트곡으로는 "Duri Dalam Cinta", "Balada Cintamu", "Ke Kiri Sepi Ke Kanan Rindu" 등이 있지만, 이전에 비해 인기는 급격하게 하락했으며, 최고의 가수라는 타이틀도 아이샤 아리핀에게 빼앗겼다. 그럴 만도 한게, 이미 이 시대에는 훨씬 더 새로운 풍의 노래들이 나왔는데 기존부터 이어져 오던 고딕풍의 노래를 계속 했으니 말이다. 하마터면 구글에서 "Duri Dalam Cinta"라고 쳐도 이 가수가 부른 게 아닌 정작 브루리 마란티카라는 인도네시아 가수가 부른 완전 딴 노래가 훨씬 더 많이 나올 정도인 것 보면 얼마나 인기를 많이 잃었나를 잘 보여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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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집 "Kau Penawar Segala Dukaku"를 냈지만 인기 따위는 꿈 깨자. 기껏 히트곡이라 해 봤자 "Kau Penawar Segala Dukaku", "S.A.Y.A.N.G", "Siapa Yang Bersalah", "Menanti Hatimu Terbuka"가 전부이며, 특히 그나마 히트를 쳤다는 "Kau Penawar Segala Dukaku"도 쪼잔하기 그지없다.[7] 현재로서 이들 노래 라이브는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좀 더 다양한 범위로 나아가 크다 방언으로 된 "Pi Mai Pi Mai Tang Tu"까지도 있다지만, 그래봤자 대중들은 별 관심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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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2년[8] 6집 "Di Ambang Pintu Kasih"를 내고 컴백했다. 예전에 나와브와 연애 중이었는 지는 모르겠으나, 이 앨범을 보면 이 점은 사실인 듯 하다. 그럴 만도 한게, 이 때부터는 나와브와 인연 자체를 아예 끊어버렸으며, 당장 수록곡들을 봐도 나와브가 작곡한 노래는 단 하나도 없다. 정작 나와브가 작곡한 노래가 앨범의 다수를 차지했던 전작들과 비교하면, 이 설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가 되지 않나 할 수도 있다.
여하튼 나와브로부터 나와서인지 보다 더 다양한 컨셉들이 시도되었으며 한결 더 세련된 노래들이 등장했지만, 오히려 인기는 이전보다 더 내려갔다. 특히 나와브의 노래가 다소 고전풍일지 몰라도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끄는' 특유의 매력이 있는데, 문제는 나와브가 빠진 뒤로는 그 매력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안그래도 상대적으로 노안이라 젊은층들에게 그리 호감을 얻지 못하던 람라가 젊은층들의 음악을 하니, 당시 청년들 사이에서 자주 까였던 모양이다. 특히 "Di Ambang Pintu Kasih"의 경우 당대 파우지아흐 라티프(당시 22세)의 "Kau Sakiti Hatiku", 시마(당시 24세)의 "Teringin" 등과 풍이 많이 비슷하며 훗날에 나오는 지아나 제인의 "Penawar Semalu" 등과도 풍은 비슷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적어도 노안이 아니라서 그런지 인기는 많았으나, 람라는 노안이어서인지 별 호감은 얻지 못한 듯 하다. 이해가 안 간다면, 만약에 양희은이 요즘 걸그룹이 부르는 댄스곡을 하면 젊은이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를 한번 상상해 보자. 물론 이것은 좀 과장된 비유라지만, 그래도 이해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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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동년 7집 "Nadi Cinta"를 냈는데, 지난 앨범들과는 달리 신곡 5개만 들어간 것으로 나머지 5곡은 1집의 히트곡 일부를 담아서 다시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곡들은 어김없이 다시 나와브의 노래인데, 분명 나와브와의 인연을 끊었음에도 그의 노래가 실린 이유는, 사실 이 신곡 5개는 원래 1집에 수록될 예정이었던 노래들이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이유[9] 로 수록되지 못한 채 사장되었고, 결국 다시 녹음되어 수록되었다. 물론 인기는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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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집 "Dangdut"을 내고 컴백했다. 이름 그대로 시도한 장르는 100% 당둣이다. 물론 이전에도 1집의 수록곡 "Izinkanlah"처럼 당둣을 시도한 적은 있었으므로 이번이 고로 첫 시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당둣을 시도했다는 것을 비로소 대중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전의 인기는 얻지도 못했으나, 그래도 "Selamat Jalan Romeo"와 같은 히트곡으로 숨 좀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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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자신의 이름을 딴 9집 "Ramlah Ram"을 냈는데, 전곡이 1994년에 녹음된 것으로 역시나 딱한 사정(...)으로 발매시기가 좀 미뤄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인기는 없었고, 이듬해 인도네시아 가수 넬리 아구스틴과 함께 듀엣엘범인 "Cinta Di Musim Dangdut"을 냈으나 역시나... 그리고 1년을 딱 쉬고 1998년 10집 "Sekeping Cinta Sehampar Janji"를 내고 컴백했지만, 인기는 아주 바닥으로 떨어진 뒤였다. 여담으로 1987년 한 해를 풀로 쉬더니 1997년도 결국 한 해를 풀로 쉬었는데, 결국 람라는 '''7로 끝나는 해에는 앨범을 내지 않는 가수'''인 셈이다(...).
그리고 1999년에는 11집 따위 없이 컴플리케이션 앨범 "Koleksi Terbaik"을 냈고 신곡 "Jendela Di Kamar Usang"과 "Kasih Yang Berpinggir" 둘만을 냈으며, 이후에는 영화 OST나 가끔 내는 것 외에는 별 활동은 없었고 결국 가요계에서 사실상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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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009년 11집 "Ketentuan"을 내고 10년만에 컴백했다. 어느덧 44세의 아주머니로 더 이상 젊은 여가수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컴백은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 동명의 노래 "Ketentuan" 등과 같은 세련된 노래로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이 앨범 덕에 Anugerah Juara Lagu 대열에 올라가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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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2년 12집 "Aspirasi Hati"를 내고 3년만에 컴백했으며, 47세라는 나이와는 걸맞지도 않은 랩 등 새로운 패러다임의 노래로 다시금 팬들을 주목받게 했다. 여담으로 이 앨범 덕에 람라는 4세대(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걸쳐 정규앨범을 발매하는 유일한 가수라는 타이틀을 얻는 데 성공한다.[10]
하지만 지금은 별 소식이 없으며, 현재로서는 사실상 은퇴한 모양이다. 지금도 가끔 콘서트를 하긴 하지만, 그래봤자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이나 나이도 벌써 51인데 대중들의 관심은 와니 슬라맛이나 셰릴 샤즈와니와 같은 2010년대 신인들에게 쏠려있지, 누가 50대 가수를 환영할까 말이다. 지금까지의 공백 기간을 보면 2010년대 안으로 신곡을 낸다면 내더라도, 일단 정규앨범은 적어도 2022년에 가야 새로 나올 듯 하다. 물론 이 때 진짜로 낸다면 5세대에 걸쳐 내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일단 그 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나는 미지수. [11]
올해는 아무런 소식조차 없다.
잘나가던 리즈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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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나이는 못 속인다(...)
1. 개요
Ramlah Ram, 1965.2.19 ~
'''말레이시아 복고풍 음악의 전설'''[1]
말레이시아의 가수이자 여배우. 1985년 Bintang RTM의 우승자로서 이듬해 정규 1집을 내고 데뷔했다.
2. 생애
1965년 2월 19일 조호르 주 무아르에서 태어났다. 2017년 기준으로 꼭 51세이며 '락의 여왕'으로 불리는 엘라 아미누딘보다 1살 연상이라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면 6,70대를 보는 듯 하다. 이건 상대적으로 람라의 얼굴이 노안이기 때문. 반대로 엘라는 동안이라, 둘이 1살 차이의 동생이라는 게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다. 뭐, 둘의 리즈시절이던 8,90년대에 엘라는 의외로 별 동안은 아니었지만, 람라는 그 때에도 유독 노안이었다.
왠만한 말레이시아 가수들은 이름에 'bin(남성)'이나 'binti/binte(여성)'를 붙이며 의외로 길고 괴랄하다. 때문인지 대부분은 Siti Nurhaliza, Ella, Ziana Zain과 같이 일부만 떼서 쓰거나 아예 예명을 만들어 쓴다. 이러고 보면 Ramlah Ram도 예명이 아닌가 하겠지만 실제로는 '''본명이며 풀네임'''이다. 근래에는 히잡을 쓰는 등 본인이 전형적인 무슬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무슬림이었지만, 의외로 저게 안 붙은 것을 보면 중국인의 후손인 듯 하다.
3. 가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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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2] Bintang RTM에 출연하여 프란치스카 피터의 노래 "Dia"를 부르고 우승했다. 이 때 전설적인 국빈 음악가 아흐마드 나와브를 만났으며 나와브 본인이 만든 나와브 프로덕션스(NP)와 계약을 맺고 이듬해 정규 1집 "Sabarlah Sayang"을 내고 데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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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초 Bintang RTM에서 주목받은 것과는 달리, 이 앨범은 실제로 큰 히트를 치지는 못했다. 끽해봤자 에픽하이 1집의 인기 정도, 아니, 그보다도 낮을 수도 있는 인기일 뿐이었다. 그나마 사실상의 타이틀곡[3] 인 "Sabarlah Sayang"으로 간신히 이름을 알렸으나, 그것도 쪼잔하기 그지없다(...). 그 외에도 "Di Hati Ini", "Betapa Sayangnya Aku" 등이 있다고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인기를 얻었을까 말이다.
게다가 당시 상황 치고도 녹음환경이 열악해서인지, 음질도 사실상 모노이며 까놓고 말하자면 개떡같다. 그렇지만 은근 노래들은 좋은데다 람라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앨범이므로 나름 들어보는 것을 권장한다. 참고로 풀앨범은 여기서 들을 수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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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87년에는 별일 없이 조용히 휴식하다가, 1988년 2집 "Kau Kunci Cintaku (Dalam Hatimu)"를 내고 컴백했다. 이번에는 레이블을 NP에서 PMC로 이전했으나, 나와브의 도움은 그대로 받았다. 특히 이번에는 깔끔한 음질에다가 한결 더 세련된 스타일이 대표적이며, 나와브 특유의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음악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 앨범이다. 다만 수록곡 중 6개가 여전히 음질이 거지같은데, 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4개를 먼저 녹음한 뒤 녹음기 등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주요 히트곡은 "Kau Kunci Cintaku (Dalam Hatimu)", "Apa Khabarmu Di Sana", "Diam-diam Jatuh Cinta" 등.
특히 "Kau Kunci Cintaku (Dalam Hatimu)"는 매우 폭발적인 히트를 쳤으며,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여전히 불리는 노래다. 여담으로 이 노래 덕분에 말레이시아 최고의 가수 중 하나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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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기에 힘업어 바로 이듬해인 1989년 3집 "Cintaku Hanyut Di Lautan Sepi"를 내고 컴백했다. 이번에는 NP와 PNC 두 곳에서 발매되었으며, 이전과 같이 거지같은 음질은 말끔히 사라졌다. 풍은 2집과 비슷하나, 한결 더 세련된 음질이 특징이며, 기존의 발라드, 로컬 댄스, 재즈(빅밴드) 중심에서 벗어나 헤비메탈에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힙합[5] 등 보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는 차이가 있다. 주요 히트곡은 "Cintaku Hanyut Di Lautan Sepi", "Semoga Kau Masih Ingat", "Terpandang Wajahmu", "Ku Terbakar Kepanasan Cintamu" 등.
이전과 마찬가지로 말레이시아 최고의 가수 타이틀을 유지하는 데 문제는 없었으나, 2집과는 달리 히트곡의 수가 상대적으로 줄었으며, 엘라와 같은 나름의 경쟁상대들이 락이나 댄스음악 등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드문 장르들을 집중적으로 들고오기 시작하면서 람라의 위치는 좀 위협받기 시작했다. 특히 시대를 맞추기보다는 시대에 좀 지난 고전풍의 음악을 고수한 람라의 경우 상대적으로 인기는 밀리기 당연지사.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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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명색이 최고의 가수인데 그 인기에 힘업어 1990년 4집 "Duri Dalam Cinta"를 냈으며, 레이블도 기존의 NP와 PNC를 벗어나 국제적인 베르텔스만 뮤직 그룹(BMG)으로 이전했다. 주요 히트곡으로는 "Duri Dalam Cinta", "Balada Cintamu", "Ke Kiri Sepi Ke Kanan Rindu" 등이 있지만, 이전에 비해 인기는 급격하게 하락했으며, 최고의 가수라는 타이틀도 아이샤 아리핀에게 빼앗겼다. 그럴 만도 한게, 이미 이 시대에는 훨씬 더 새로운 풍의 노래들이 나왔는데 기존부터 이어져 오던 고딕풍의 노래를 계속 했으니 말이다. 하마터면 구글에서 "Duri Dalam Cinta"라고 쳐도 이 가수가 부른 게 아닌 정작 브루리 마란티카라는 인도네시아 가수가 부른 완전 딴 노래가 훨씬 더 많이 나올 정도인 것 보면 얼마나 인기를 많이 잃었나를 잘 보여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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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집 "Kau Penawar Segala Dukaku"를 냈지만 인기 따위는 꿈 깨자. 기껏 히트곡이라 해 봤자 "Kau Penawar Segala Dukaku", "S.A.Y.A.N.G", "Siapa Yang Bersalah", "Menanti Hatimu Terbuka"가 전부이며, 특히 그나마 히트를 쳤다는 "Kau Penawar Segala Dukaku"도 쪼잔하기 그지없다.[7] 현재로서 이들 노래 라이브는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좀 더 다양한 범위로 나아가 크다 방언으로 된 "Pi Mai Pi Mai Tang Tu"까지도 있다지만, 그래봤자 대중들은 별 관심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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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2년[8] 6집 "Di Ambang Pintu Kasih"를 내고 컴백했다. 예전에 나와브와 연애 중이었는 지는 모르겠으나, 이 앨범을 보면 이 점은 사실인 듯 하다. 그럴 만도 한게, 이 때부터는 나와브와 인연 자체를 아예 끊어버렸으며, 당장 수록곡들을 봐도 나와브가 작곡한 노래는 단 하나도 없다. 정작 나와브가 작곡한 노래가 앨범의 다수를 차지했던 전작들과 비교하면, 이 설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가 되지 않나 할 수도 있다.
여하튼 나와브로부터 나와서인지 보다 더 다양한 컨셉들이 시도되었으며 한결 더 세련된 노래들이 등장했지만, 오히려 인기는 이전보다 더 내려갔다. 특히 나와브의 노래가 다소 고전풍일지 몰라도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끄는' 특유의 매력이 있는데, 문제는 나와브가 빠진 뒤로는 그 매력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안그래도 상대적으로 노안이라 젊은층들에게 그리 호감을 얻지 못하던 람라가 젊은층들의 음악을 하니, 당시 청년들 사이에서 자주 까였던 모양이다. 특히 "Di Ambang Pintu Kasih"의 경우 당대 파우지아흐 라티프(당시 22세)의 "Kau Sakiti Hatiku", 시마(당시 24세)의 "Teringin" 등과 풍이 많이 비슷하며 훗날에 나오는 지아나 제인의 "Penawar Semalu" 등과도 풍은 비슷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적어도 노안이 아니라서 그런지 인기는 많았으나, 람라는 노안이어서인지 별 호감은 얻지 못한 듯 하다. 이해가 안 간다면, 만약에 양희은이 요즘 걸그룹이 부르는 댄스곡을 하면 젊은이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를 한번 상상해 보자. 물론 이것은 좀 과장된 비유라지만, 그래도 이해가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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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동년 7집 "Nadi Cinta"를 냈는데, 지난 앨범들과는 달리 신곡 5개만 들어간 것으로 나머지 5곡은 1집의 히트곡 일부를 담아서 다시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곡들은 어김없이 다시 나와브의 노래인데, 분명 나와브와의 인연을 끊었음에도 그의 노래가 실린 이유는, 사실 이 신곡 5개는 원래 1집에 수록될 예정이었던 노래들이었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이유[9] 로 수록되지 못한 채 사장되었고, 결국 다시 녹음되어 수록되었다. 물론 인기는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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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집 "Dangdut"을 내고 컴백했다. 이름 그대로 시도한 장르는 100% 당둣이다. 물론 이전에도 1집의 수록곡 "Izinkanlah"처럼 당둣을 시도한 적은 있었으므로 이번이 고로 첫 시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당둣을 시도했다는 것을 비로소 대중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전의 인기는 얻지도 못했으나, 그래도 "Selamat Jalan Romeo"와 같은 히트곡으로 숨 좀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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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자신의 이름을 딴 9집 "Ramlah Ram"을 냈는데, 전곡이 1994년에 녹음된 것으로 역시나 딱한 사정(...)으로 발매시기가 좀 미뤄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인기는 없었고, 이듬해 인도네시아 가수 넬리 아구스틴과 함께 듀엣엘범인 "Cinta Di Musim Dangdut"을 냈으나 역시나... 그리고 1년을 딱 쉬고 1998년 10집 "Sekeping Cinta Sehampar Janji"를 내고 컴백했지만, 인기는 아주 바닥으로 떨어진 뒤였다. 여담으로 1987년 한 해를 풀로 쉬더니 1997년도 결국 한 해를 풀로 쉬었는데, 결국 람라는 '''7로 끝나는 해에는 앨범을 내지 않는 가수'''인 셈이다(...).
그리고 1999년에는 11집 따위 없이 컴플리케이션 앨범 "Koleksi Terbaik"을 냈고 신곡 "Jendela Di Kamar Usang"과 "Kasih Yang Berpinggir" 둘만을 냈으며, 이후에는 영화 OST나 가끔 내는 것 외에는 별 활동은 없었고 결국 가요계에서 사실상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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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009년 11집 "Ketentuan"을 내고 10년만에 컴백했다. 어느덧 44세의 아주머니로 더 이상 젊은 여가수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컴백은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 동명의 노래 "Ketentuan" 등과 같은 세련된 노래로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이 앨범 덕에 Anugerah Juara Lagu 대열에 올라가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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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2년 12집 "Aspirasi Hati"를 내고 3년만에 컴백했으며, 47세라는 나이와는 걸맞지도 않은 랩 등 새로운 패러다임의 노래로 다시금 팬들을 주목받게 했다. 여담으로 이 앨범 덕에 람라는 4세대(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걸쳐 정규앨범을 발매하는 유일한 가수라는 타이틀을 얻는 데 성공한다.[10]
하지만 지금은 별 소식이 없으며, 현재로서는 사실상 은퇴한 모양이다. 지금도 가끔 콘서트를 하긴 하지만, 그래봤자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이나 나이도 벌써 51인데 대중들의 관심은 와니 슬라맛이나 셰릴 샤즈와니와 같은 2010년대 신인들에게 쏠려있지, 누가 50대 가수를 환영할까 말이다. 지금까지의 공백 기간을 보면 2010년대 안으로 신곡을 낸다면 내더라도, 일단 정규앨범은 적어도 2022년에 가야 새로 나올 듯 하다. 물론 이 때 진짜로 낸다면 5세대에 걸쳐 내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일단 그 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나는 미지수. [11]
올해는 아무런 소식조차 없다.
4. 앨범
4.1. 정규 앨범
- Sabarlah Sayang (1986)
- Kau Kunci Cintaku (Dalam Hatimu) (1988)
- Cintaku Hanyut Di Lautan Sepi (1989)
- Duri Dalam Cinta (1990)
- Kau Penawar Segala Dukaku (1991)
- Di Ambang Pintu Kasih (1992)
- Nadi Cinta (1993)
- Dangdut (1994)
- Ramlah Ram (1995)
- Sekeping Cinta Sehampar Janji (1998)
- Ketentuan (2009)
- Aspirasi Hati (2012)
4.2. 듀엣 앨범
4.3. 컴플리케이션 앨범
- Kombinasi Ramlah Ram & Zu Ghairi (1987)
- Terbaik Dari Ramlah Ram (1989)[12]
- Lagu-lagu Cinta Ramlah Ram (1993)
- Best of Ramlah Ram (1995)
- Koleksi Terbaik (1999)
- Ramlah Ram vs Ziana Zain (2002)
- Keunggulan Ramlah Ram 86 98 (2006)
- 26 Tahun (2011)
- Hits Terbaik (2015)
[1] 이 별명이 실제로 붙여진 별명은 아니지만, 그래도 람라가 세월이 좀 지난 고전풍의 음악을 하는 건 사실이다.[2] 당시 정확히 20세였다. 그런데 노안은 노안인지라, 20세가 맞나 할 정도(...)[3] 말레이시아는 타이틀곡을 정하지 않는다. 네이버에서 제공되는 말레이시아 앨범들을 보면 죄다 1번 트랙이 타이틀곡이라고 되어 있지만, 은근 상당수의 앨범들이 1번 트랙은 이름없는 노래인 경우가 허다하다. 다만 히트곡이 사실상의 타이틀곡이나 다름없다.[4] 다만 유튜브의 경우 데스크톱으로 해놓아야 하며, 모바일로 하면 아예 재생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유튜브로 듣는 것은 꿈 깨야 한다. 차라리 Offliberty 등으로 다운받아 듣는 것을 권장한다.[5] 물론 랩은 없고 멜로디만 있는 힙합이다. 당시야 뭐 힙합이 랩이나 엇박자 위주의 그런 게 아니라 멜로디에 초점을 맞췄다.[6] 더 웃긴건 히트곡이라면서, 가사를 찾아봐도 브루리가 부른 건 쭉 나오지만, 람라가 부른 건 최근까지도 안 나왔다(!).[7] 이것도 최근까지 가사가 없었다(!).[8] 흔히 1993년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으나, 1992년이 맞다.[9] 물론 말은 그렇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정규 앨범은 원칙적으로 최대 13곡만 넣는 것이 관례이다. 그리고 보통은 9곡이나 10곡이다. 그런데 이 5곡을 포함하면 당장 1집에 15곡이 들어가며, 이것은 관례를 파괴하는 행동으로 음반사에서도 나름 골치를 썩었던 모양이다.[10] 정작 람라를 제쳤던 많은 가수들은 끽해봤자 3세대에 지나지 않으며, 상당수는 1세대에 그친 경우도 많다.[11] 말레이시아 가수들에게 50대는 사실상 가요계에서의 마지막 시대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의외로 많은 음악인(가수 포함)들이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2016년에도 전설의 음악인 아드난 아부 하산이 향년 59세로 타계했고, 지난 2014년 국빈 여가수 샤리파 아이니가 향년 61세로 타계했다. 여담으로 말레이시아의 평균 수명은 약 75세로 대한민국(81세)보다 몇 년 낮다. 물론 람라는 오랫동안 살아있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운명은 운명인지라(...) 앞날은 알 수가 없다.[12] NP에서는 1989년에, BMG에서는 1990년에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