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 아미누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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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 Zila binti Haji Aminuddin (Ella), 1966.7.31 ~
말레이시아의 가수, 배우, 모델로 1981년 데뷔한 이래 36년째 활동하고 있다. 과거 엘라 앤 더 보이즈(Ella & The Boys)의 보컬리스트였으며 현재는 솔로로 활동하고 있다. 일명 '''락의 여왕'''(Ratu Rock)으로 불린다.
사람들에게 흔히 '엘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예명이다. 본명은 '노르 질라 빈티 하지 아미누딘.'
이 문서 제목인 '엘라 아미누딘'은 본인의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의 아이디이며, 구글에서 이 가수에 대해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검색어이기도 하다. 당연히 '엘라'나 'ella'라고 검색해서는 찾을 수가 없다. 'ella aminuddin' 또는 'ella malaysian singer' 등으로 검색해야 한다. 다만 구글을 말레이시아로 해 놓으면 'ella'라고 검색 시 바로 이 가수가 뜬다.
1966년 7월 31일 풀라우피낭 주 글루고르에서 태어났다. 2017년 기준으로 '''50세'''인데 사진으로 봐서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 한마디로 동안이다.
본명에서 보이듯이 하지 아미누딘의 딸인데, 이러한 인명법을 사용하는 전형적인 말레이인 무슬림 집안 출신이다. 헌데 외모로 보아서는 중국인 내지 아랍인 피가 섞인 것으로도 보이며, 피낭 주의 특성상 영국인 혼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슬랑오르 주 클랑으로 이사왔으며 텡쿠 암푸안 라히마 중학교를 나왔는데, 어렸을 때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학교에서 노래자랑대회가 있을 때마다 꼭 나와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특히 수도권 지역이라 툭하면 클럽에 가서 노래를 부르거나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밴드 더 보이즈가 자기네 밴드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는데, 이에 엘라는 통쾌히 승낙하고 밴드에 합류했다. 이로서 엘라 앤 더 보이즈로 재탄생한 밴드는 1981년부터 6년간 활동을 시작했고, 엘라는 비로소 언더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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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엘라 앤 더 보이즈의 보컬리스트로서 언더활동을 시작했지만, 기껏 해봤자 클럽이나 카페에서 노래 부르는게 전부였다. 당시에는 고작 16살에 중학교 4학년, 한국으로 따지만 고1이었고 학교 공부도 공부였다보니 앨범 내고 활동할 여건도 안 되었다.[1] 물론 그 나이 때에 데뷔한 가수들도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이들과는 달리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클럽에서 노래나 부르고 다니며 땡땡이치곤 했으니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당연히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안그래도 공부해야 할 학생이 이렇게 땡땡이치고 다니고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한국의 수능에 해당되는 SPM에서 떨어졌다고.[2][3] 그 후로 정신 좀 차리고(...) 재시험을 봤지만, 또 떨어졌다.
애당초에 뭘 전공으로 삼으려 했는 지 알 바는 아니지만, 여하튼 SPM이 떨어졌으니 대학 갈 생각은 꿈 깨야만 했다. 대신의 자신의 노래실력을 새로운 직업으로 삼았는데 바로 SPM 재시험을 본 1983년(당시 18세) 문래커라는 또다른 언더밴드와 손잡고 비로소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만에 와해되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본인에게는 문래커보다는 더 보이즈가 더 맞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 후에도 클럽을 돌아다니며 무명가수로서의 활동을 하다가, 1985년 더 보이즈의 리더인 록만 이드리스(예명 로드)의 지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드디어 1집 "Battle Of The Bands 1"을 내고 무명활동을 접고 본격적인 대중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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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치, 레프트핸디드, 소페아, 러스티 블레이드와 더불어 말레이시아 락음악계의 1세대를 대표하는 이들의 하나로서 그 인기는 대단했으며, 당시 람라 람, 셰일라 마지드[4] , 자이톤 사메온, 로하나 잘릴 등과 같은 많은 신인들의 데뷔와 이미 이전부터 데뷔한 수디르만 아르샤드, 아즐리나 아지즈, 프란치스카 피터 등과 같은 많은 전설들이 있었음에도, 한마디로 말하자면 '''194,50년대 서부영화에 나올 법한 풍의 노래들'''을 선보였던 이런 가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락이란 한마디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는 발라드나 재즈 일색이었고 그런 노래들의 간주 부분을 락 기타가 때워주는 거 외에 락이란 없었다. 그러나 엘라 앤 더 보이즈는 말레이시아에 없었던 락을 끌고 나왔으며, 이것은 당시 가요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하드록부터 기존의 발라드에 락을 접목시키는 등 종류만 다양했는데, 이것은 훗날 락을 보편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Dua Insan Bercinta". 구하기 힘든 원곡 버전인데, 사람들에게는 1993년에 나온 편곡 버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87년 4집 "Ella & The Boys 2"를 발매했고 노래 "Dua Insan Bercinta"(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를 '''사실상'''의 타이틀곡[5] 으로 삼았다. 지금 들으면 그저 평범한 락 발라드곡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의 관점으로나 그렇지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현악기 풍이 강해서 마치 클래식 음악과 옛날 서부영화 풍의 노래를 접목시킨 듯 한 복고풍의 발라드라는 차원을 넘어, 당시로서는 없었던 락 발라드를 말레이시아인들에게 선보였다. 그야말로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이를 기점으로 락 발라드곡은 2000년대 중초반까지 말레이시아 가요계를 대표하게 되었다.[6][7]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바로 그 해 "락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등 승승장구를 쳤지만, 그룹 내부의 파열음으로 해체 위기까지 몰리면서 엘라의 앞날에 비상등이 켜졌다. 마치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말이다. 결국 이듬해인 1988년 엘라는 엘라 앤 더 보이즈를 떠났고, 이후에는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엘라가 떠나면서 밴드의 이름은 이전의 "더 보이즈"로 돌아갔고, 이후에는 새로운 락커 시마를 영입해 "시마 앤 더 보이즈"라는 이름으로 새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시마까지 떠나면서 이름은 또다시 예전대로 돌아갔고 지금은 아무런 소식이 없다.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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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를 떠난 직후 자신의 레이블을 워너 뮤직으로 옮겼고, 이듬해인 1989년 1집(내지 5집) "Pengemis Cinta"를 내고 솔로 데뷔했다. 밴드 시절의 영향 때문인지 솔로데뷔 이후에도 인기는 자자했으며 동명의 노래 "Pengemis Cinta"(거지의 사랑)로 엘라 본인의 이름을 팬들에게 제대로 각인시켰다. 이웃나라인 인도네시아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는지, 거기까지도 진출해서 "Sembilu"라는 앨범까지 냈으니 말 다했다.
1990년 각각 2집과 3집인 "Puteri Kota"와 "Identiti"를 냈으며 "Tiada Tangis Lagi"(더 이상 울지 말아요), "Puteri Kota"(도시의 공주), "Sepi Sekuntum Mawar Merah"(외로움이 붉은 장미를 꽃피게 하네)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그 중 "Sepi Sekuntum Mawar Merah"가 이듬해 주아라 라구(노래경연대회)에서 승리하면서 그야말로 '''말레이시아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인도네시아 가수이자 작곡가 데디 도레스[8] 하고 듀엣까지 했고 그 앨범이 결국 무려 '''1백만 장'''이나 팔리면서 양국에서 큰 히트를 쳤다.
1992년 레이블을 EMI로 옮기고 새 앨범 30110을 내고 인기는 수직으로 상징한다. 수록곡 "Sembilu"(슴빌루)[9] , "Layar Impian"(꿈 속의 여행), "Kitalah Bintang"(우리가 별이지) 등 한결 더 세련된 노래들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 후 앨범 30110은 당대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특히 "Layar Impian"과 "Kitalah Bintang"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듬해 발매된 앨범 "Dua Insan Bercinta"에 리메이크되어 수록되었을 정도이다. 안그래도 위에 "Layar Impian"의 라이브 비디오를 수록했는데, 3분 19초부터 볼 수 있다. 저 때가 '''1994년(!)'''이다. 옛날 노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세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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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앨범 "Ella USA"가 발매되었는데, 이후 엘라는 단순히 누산타라(말레이 제도) 지역의 스타 수준을 넘어서 '''세계적인 스타'''로 급부상했다. 앨범 이름을 직역하면 "미국의 엘라"인데, 이름 그대로 '''미국에 진출했다.''' 말레이시아 가수가 미국에 진출한 첫 사례이다.[10] 그것도 앨범 자체가 미국에서 녹음한 것이니 말 다했다. 물론 전곡이 말레이어로 되어 있으며 영어 노래 따위는 없지만(...), 대신에 말레이어 노래를 미국인들에게 선보였으니, 한마디로 '''말레이시아 홍보대사'''였다. 이리하여 미국인들에게 말레이시아를 홍보하는 대사가 되었고, 이듬해 1995년 데뷔 10주년 기념 콘서트 때는 무려 '''40곡'''을 쉬지 않고 불러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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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성기가 있으면 몰락도 있는 법. 1996년 앨범 "Demi"를 내고 활동을 계속 했지만, 당시 새로 등장한 시티 누르할리자, 누룰 와하브, 노라, 에이미 마스투라, 리자 하님 등이 데뷔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엘라의 인기는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한다. 특히 시티 누르할리자는 특색을 살리기보다는 대중성을 강조한 평범한 가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등장 자체가 가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등장과 함께 기존의 히트가수들은 대대적으로 밀려났다. 국민적 가수이자 전설이었던 샤리파 아이니도 이 때부터 인기가 시들시들해졌고[11] , 엘라의 대표적인 경쟁상대였던 아위와 파우지아흐 라티프[12] 도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티의 등장 이후로는 서서히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동년 신곡 "Jalan Ke Sisimu"(그대를 향한 길)가 히트를 쳤지만, 예전의 영광은 누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1997년 한 해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가(...), 이듬해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1998년 영연방 체육대회의 말레이시아 대표 가수들 중 그것도 메인 가수로 나서면서 다시금 팬들에게 '엘라'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대표들 중에는 신인 내지 경쟁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여하튼 바로 그 해 체육대회 테마곡 "Standing In The Eyes Of The World"로 다시금 히트를 치면서 인기가 잠시 상승했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인기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영영 뜨지는 못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많은 앨범들을 내고 활동을 계속 이어갔지만, 예전보다 휴식 기간이 늘어났고, 이미 아칙 & 나나와 같은 그녀의 제자들(...)[13] 이 새로 뜨기 시작하면서 인기는 대대적으로 밀린 뒤였다. 거기에다가 2006년부터 가요계 자체에서 락은 사실상 '구시대적인 노래'가 되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 엘라는 여전히 활동하는 락 가수로서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가수'라는 이미지만 뒤집어쓴 채 진전을 보지 못했다.
2009년 정규 앨범이면서 컴플리케이션 앨범인[14] Ella: Greatest Hits를 냈지만, 기존의 히트곡들을 다시 꺼내봤자 이미 지난 세월들 얘기인데 별 소용 없다. 그리고 이후에는 사실상 은퇴했고, 이후로는 지금까지 앨범을 내고 있지 않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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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00년대 후반부터는 가수 활동보다는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Ella's Production과 같은 회사들을 만들어서 자신의 연예활동을 나름 보조하는(...)가 하면, 화장품 회사까지도 운영하면서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이웃나라인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에 제품들이 수출되면서 나름 잘 나아가는 것 같지만, 어느 라이벌의 회사에 비하면 쨉도 안 되는 듯... 여하튼 지금은 파묻혔다.
2012년 파이어플라이 항공의 비행사인 아자르 후사이니 가잘리와 결혼했는데, 당시 엘라는 무려 '''46세(!)'''였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쭉 솔로'''였다는 건데, 남자였으면 '노총각'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16] 그리고 남편은 '''30세.''' '''16세 연하'''와 결혼했다. [17] 하지만 늦게 결혼해서 그런지 애를 낳을 수 있을지는 의문. 지금까지 애를 낳지도 않았다.
현재는 가끔 콘서트나 TV에 출연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다. 이미 50대에 접어들었고 60대 무렵에 세상을 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많은 아티스트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 더 이상은 예전처럼 신나게 활동을 할 일은 없어 보인다. 물론 지금도 노래하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이미 시대가 지난 아티스트를 누가 좋아하겠나. 이미 그녀의 많은 경쟁자들과 동시대 본인과 함께 한 시대를 대표했던 많은 이들도 이미 가요계를 떠났는데 말이다. 지금은 그저 나이든 중장년들이나 그녀와의 추억을 다소 회상할 뿐이다.
그런데 조만간 신곡이 나온단다. 이미 녹음까지 마친 상태이며 아직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다만 싱글로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금 상황에서 정규앨범을 낼 상황이 아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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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 Zila binti Haji Aminuddin (Ella), 1966.7.31 ~
1. 개요
말레이시아의 가수, 배우, 모델로 1981년 데뷔한 이래 36년째 활동하고 있다. 과거 엘라 앤 더 보이즈(Ella & The Boys)의 보컬리스트였으며 현재는 솔로로 활동하고 있다. 일명 '''락의 여왕'''(Ratu Rock)으로 불린다.
2. 이름
사람들에게 흔히 '엘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예명이다. 본명은 '노르 질라 빈티 하지 아미누딘.'
이 문서 제목인 '엘라 아미누딘'은 본인의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의 아이디이며, 구글에서 이 가수에 대해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검색어이기도 하다. 당연히 '엘라'나 'ella'라고 검색해서는 찾을 수가 없다. 'ella aminuddin' 또는 'ella malaysian singer' 등으로 검색해야 한다. 다만 구글을 말레이시아로 해 놓으면 'ella'라고 검색 시 바로 이 가수가 뜬다.
3. 생애
1966년 7월 31일 풀라우피낭 주 글루고르에서 태어났다. 2017년 기준으로 '''50세'''인데 사진으로 봐서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정도(...). 한마디로 동안이다.
본명에서 보이듯이 하지 아미누딘의 딸인데, 이러한 인명법을 사용하는 전형적인 말레이인 무슬림 집안 출신이다. 헌데 외모로 보아서는 중국인 내지 아랍인 피가 섞인 것으로도 보이며, 피낭 주의 특성상 영국인 혼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슬랑오르 주 클랑으로 이사왔으며 텡쿠 암푸안 라히마 중학교를 나왔는데, 어렸을 때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학교에서 노래자랑대회가 있을 때마다 꼭 나와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특히 수도권 지역이라 툭하면 클럽에 가서 노래를 부르거나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밴드 더 보이즈가 자기네 밴드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는데, 이에 엘라는 통쾌히 승낙하고 밴드에 합류했다. 이로서 엘라 앤 더 보이즈로 재탄생한 밴드는 1981년부터 6년간 활동을 시작했고, 엘라는 비로소 언더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4. 밴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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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엘라 앤 더 보이즈의 보컬리스트로서 언더활동을 시작했지만, 기껏 해봤자 클럽이나 카페에서 노래 부르는게 전부였다. 당시에는 고작 16살에 중학교 4학년, 한국으로 따지만 고1이었고 학교 공부도 공부였다보니 앨범 내고 활동할 여건도 안 되었다.[1] 물론 그 나이 때에 데뷔한 가수들도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이들과는 달리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클럽에서 노래나 부르고 다니며 땡땡이치곤 했으니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당연히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안그래도 공부해야 할 학생이 이렇게 땡땡이치고 다니고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한국의 수능에 해당되는 SPM에서 떨어졌다고.[2][3] 그 후로 정신 좀 차리고(...) 재시험을 봤지만, 또 떨어졌다.
애당초에 뭘 전공으로 삼으려 했는 지 알 바는 아니지만, 여하튼 SPM이 떨어졌으니 대학 갈 생각은 꿈 깨야만 했다. 대신의 자신의 노래실력을 새로운 직업으로 삼았는데 바로 SPM 재시험을 본 1983년(당시 18세) 문래커라는 또다른 언더밴드와 손잡고 비로소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2년만에 와해되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본인에게는 문래커보다는 더 보이즈가 더 맞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 후에도 클럽을 돌아다니며 무명가수로서의 활동을 하다가, 1985년 더 보이즈의 리더인 록만 이드리스(예명 로드)의 지원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드디어 1집 "Battle Of The Bands 1"을 내고 무명활동을 접고 본격적인 대중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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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치, 레프트핸디드, 소페아, 러스티 블레이드와 더불어 말레이시아 락음악계의 1세대를 대표하는 이들의 하나로서 그 인기는 대단했으며, 당시 람라 람, 셰일라 마지드[4] , 자이톤 사메온, 로하나 잘릴 등과 같은 많은 신인들의 데뷔와 이미 이전부터 데뷔한 수디르만 아르샤드, 아즐리나 아지즈, 프란치스카 피터 등과 같은 많은 전설들이 있었음에도, 한마디로 말하자면 '''194,50년대 서부영화에 나올 법한 풍의 노래들'''을 선보였던 이런 가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락이란 한마디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는 발라드나 재즈 일색이었고 그런 노래들의 간주 부분을 락 기타가 때워주는 거 외에 락이란 없었다. 그러나 엘라 앤 더 보이즈는 말레이시아에 없었던 락을 끌고 나왔으며, 이것은 당시 가요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하드록부터 기존의 발라드에 락을 접목시키는 등 종류만 다양했는데, 이것은 훗날 락을 보편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Dua Insan Bercinta". 구하기 힘든 원곡 버전인데, 사람들에게는 1993년에 나온 편곡 버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87년 4집 "Ella & The Boys 2"를 발매했고 노래 "Dua Insan Bercinta"(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를 '''사실상'''의 타이틀곡[5] 으로 삼았다. 지금 들으면 그저 평범한 락 발라드곡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의 관점으로나 그렇지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현악기 풍이 강해서 마치 클래식 음악과 옛날 서부영화 풍의 노래를 접목시킨 듯 한 복고풍의 발라드라는 차원을 넘어, 당시로서는 없었던 락 발라드를 말레이시아인들에게 선보였다. 그야말로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이를 기점으로 락 발라드곡은 2000년대 중초반까지 말레이시아 가요계를 대표하게 되었다.[6][7]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바로 그 해 "락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등 승승장구를 쳤지만, 그룹 내부의 파열음으로 해체 위기까지 몰리면서 엘라의 앞날에 비상등이 켜졌다. 마치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말이다. 결국 이듬해인 1988년 엘라는 엘라 앤 더 보이즈를 떠났고, 이후에는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엘라가 떠나면서 밴드의 이름은 이전의 "더 보이즈"로 돌아갔고, 이후에는 새로운 락커 시마를 영입해 "시마 앤 더 보이즈"라는 이름으로 새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시마까지 떠나면서 이름은 또다시 예전대로 돌아갔고 지금은 아무런 소식이 없다.지못미
5. 솔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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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를 떠난 직후 자신의 레이블을 워너 뮤직으로 옮겼고, 이듬해인 1989년 1집(내지 5집) "Pengemis Cinta"를 내고 솔로 데뷔했다. 밴드 시절의 영향 때문인지 솔로데뷔 이후에도 인기는 자자했으며 동명의 노래 "Pengemis Cinta"(거지의 사랑)로 엘라 본인의 이름을 팬들에게 제대로 각인시켰다. 이웃나라인 인도네시아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는지, 거기까지도 진출해서 "Sembilu"라는 앨범까지 냈으니 말 다했다.
1990년 각각 2집과 3집인 "Puteri Kota"와 "Identiti"를 냈으며 "Tiada Tangis Lagi"(더 이상 울지 말아요), "Puteri Kota"(도시의 공주), "Sepi Sekuntum Mawar Merah"(외로움이 붉은 장미를 꽃피게 하네)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그 중 "Sepi Sekuntum Mawar Merah"가 이듬해 주아라 라구(노래경연대회)에서 승리하면서 그야말로 '''말레이시아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인도네시아 가수이자 작곡가 데디 도레스[8] 하고 듀엣까지 했고 그 앨범이 결국 무려 '''1백만 장'''이나 팔리면서 양국에서 큰 히트를 쳤다.
1992년 레이블을 EMI로 옮기고 새 앨범 30110을 내고 인기는 수직으로 상징한다. 수록곡 "Sembilu"(슴빌루)[9] , "Layar Impian"(꿈 속의 여행), "Kitalah Bintang"(우리가 별이지) 등 한결 더 세련된 노래들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 후 앨범 30110은 당대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특히 "Layar Impian"과 "Kitalah Bintang"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듬해 발매된 앨범 "Dua Insan Bercinta"에 리메이크되어 수록되었을 정도이다. 안그래도 위에 "Layar Impian"의 라이브 비디오를 수록했는데, 3분 19초부터 볼 수 있다. 저 때가 '''1994년(!)'''이다. 옛날 노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세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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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앨범 "Ella USA"가 발매되었는데, 이후 엘라는 단순히 누산타라(말레이 제도) 지역의 스타 수준을 넘어서 '''세계적인 스타'''로 급부상했다. 앨범 이름을 직역하면 "미국의 엘라"인데, 이름 그대로 '''미국에 진출했다.''' 말레이시아 가수가 미국에 진출한 첫 사례이다.[10] 그것도 앨범 자체가 미국에서 녹음한 것이니 말 다했다. 물론 전곡이 말레이어로 되어 있으며 영어 노래 따위는 없지만(...), 대신에 말레이어 노래를 미국인들에게 선보였으니, 한마디로 '''말레이시아 홍보대사'''였다. 이리하여 미국인들에게 말레이시아를 홍보하는 대사가 되었고, 이듬해 1995년 데뷔 10주년 기념 콘서트 때는 무려 '''40곡'''을 쉬지 않고 불러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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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성기가 있으면 몰락도 있는 법. 1996년 앨범 "Demi"를 내고 활동을 계속 했지만, 당시 새로 등장한 시티 누르할리자, 누룰 와하브, 노라, 에이미 마스투라, 리자 하님 등이 데뷔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엘라의 인기는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한다. 특히 시티 누르할리자는 특색을 살리기보다는 대중성을 강조한 평범한 가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등장 자체가 가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등장과 함께 기존의 히트가수들은 대대적으로 밀려났다. 국민적 가수이자 전설이었던 샤리파 아이니도 이 때부터 인기가 시들시들해졌고[11] , 엘라의 대표적인 경쟁상대였던 아위와 파우지아흐 라티프[12] 도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티의 등장 이후로는 서서히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동년 신곡 "Jalan Ke Sisimu"(그대를 향한 길)가 히트를 쳤지만, 예전의 영광은 누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1997년 한 해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가(...), 이듬해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1998년 영연방 체육대회의 말레이시아 대표 가수들 중 그것도 메인 가수로 나서면서 다시금 팬들에게 '엘라'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대표들 중에는 신인 내지 경쟁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여하튼 바로 그 해 체육대회 테마곡 "Standing In The Eyes Of The World"로 다시금 히트를 치면서 인기가 잠시 상승했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인기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영영 뜨지는 못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많은 앨범들을 내고 활동을 계속 이어갔지만, 예전보다 휴식 기간이 늘어났고, 이미 아칙 & 나나와 같은 그녀의 제자들(...)[13] 이 새로 뜨기 시작하면서 인기는 대대적으로 밀린 뒤였다. 거기에다가 2006년부터 가요계 자체에서 락은 사실상 '구시대적인 노래'가 되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 엘라는 여전히 활동하는 락 가수로서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가수'라는 이미지만 뒤집어쓴 채 진전을 보지 못했다.
2009년 정규 앨범이면서 컴플리케이션 앨범인[14] Ella: Greatest Hits를 냈지만, 기존의 히트곡들을 다시 꺼내봤자 이미 지난 세월들 얘기인데 별 소용 없다. 그리고 이후에는 사실상 은퇴했고, 이후로는 지금까지 앨범을 내고 있지 않다.[15]
6.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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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00년대 후반부터는 가수 활동보다는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Ella's Production과 같은 회사들을 만들어서 자신의 연예활동을 나름 보조하는(...)가 하면, 화장품 회사까지도 운영하면서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이웃나라인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에 제품들이 수출되면서 나름 잘 나아가는 것 같지만, 어느 라이벌의 회사에 비하면 쨉도 안 되는 듯... 여하튼 지금은 파묻혔다.
2012년 파이어플라이 항공의 비행사인 아자르 후사이니 가잘리와 결혼했는데, 당시 엘라는 무려 '''46세(!)'''였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쭉 솔로'''였다는 건데, 남자였으면 '노총각'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16] 그리고 남편은 '''30세.''' '''16세 연하'''와 결혼했다. [17] 하지만 늦게 결혼해서 그런지 애를 낳을 수 있을지는 의문. 지금까지 애를 낳지도 않았다.
현재는 가끔 콘서트나 TV에 출연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다. 이미 50대에 접어들었고 60대 무렵에 세상을 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많은 아티스트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 더 이상은 예전처럼 신나게 활동을 할 일은 없어 보인다. 물론 지금도 노래하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이미 시대가 지난 아티스트를 누가 좋아하겠나. 이미 그녀의 많은 경쟁자들과 동시대 본인과 함께 한 시대를 대표했던 많은 이들도 이미 가요계를 떠났는데 말이다. 지금은 그저 나이든 중장년들이나 그녀와의 추억을 다소 회상할 뿐이다.
그런데 조만간 신곡이 나온단다. 이미 녹음까지 마친 상태이며 아직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다만 싱글로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금 상황에서 정규앨범을 낼 상황이 아니다.[18]
7. 앨범
7.1. 엘라 앤 더 보이즈
- Battle Of The Bands 1 (1985)
- Battle Of The Bands: Round 2 (1986)
- Ella & The Boys 1 (1986)
- Ella & The Boys 2 (1987)
7.2. 솔로 앨범
- Pengemis Cinta (1989)
- Sembilu (1989)[19]
- Puteri Kota (1990)
- Identiti (1990)
- Koleksi Terbaik Ella (1991)
- 30110 (1992)
- Kesal (1992)
- Dua Insan Bercinta (1993)
- Unggul (1993)
- 100% Remix (1993)
- Ella USA (1994)
- 8494 (1995)
- Demi (1996)
- El (1998)
- El - Limited Edition (1999)
- Diva Metal (2000)
- Ilham Bicara (2001)
- Ilham Bicara - Platinum Edition (2002)
- Puteri Rock (2002)
- Simbiosis (2003)
- A Journey Beyond... The Very Best of Ella (2005)
- Ratu Rock (2005)
- Rama-Rama (2007)
- Rama-Rama II - Gold Edition (2007)
- Kasih (2007)
- Balada (2008)
- Ella: Greatest Hits (2009)
- Siri Bintang Pujaan (2014)
8. 웹사이트
[1] 많은 말레이시아 가수들이 이 나이 때에 데뷔하는데, 평균연령은 18세이다. 국민가수 시티 누르할리자, 파우지아흐 라티프, 완, 리자 하님, 닝 바이주라, 시티 노르디아나, 아칙 스핀 등 왠만한 인기 가수들은 10대 후반에 데뷔했고 안와르 제인이나 시티 무슬리하처럼 10대 중초반에 데뷔한 가수들도 나름 있다. 그러나 엘라는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2] 이건 본인이 '''당당하게''' 밝힌 사실이다. [3] 기본 5개의 의무 과목들은 필수 응시 과목이며 나머지는 듣든 말든 자유이다. 떨어질 것 같으면 안 들어도 된다. 하지만 무조건 최소 5개 이상은 C 이상(50점 이상)을 받아야 하며 특히 방금 설명한 기본 과목들은 최소 E(40점 ~ 45점)는 받아야 한다. 만약에 C 이상을 받은 과목이 4개 뿐이다, 뭐 이러면 바로 '''낙제'''이다. 이런 경우에는 재시험을 보면 되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것도 안 될 수가 있고 이러면은 전문대(2년) 외에는 갈 길이 없다. 한마디로 '''SPM을 망쳤다는 건 곧 인생 전체를 망쳤다는 것.'''[4] 일명 "재즈의 여왕".[5] 말레이시아에는 '타이틀곡'이라는 개념 따위가 없다. 다만 최고의 히트를 친 곡이 사실상의 타이틀곡이라고 할 수 있다.[6]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웃나라인 인도네시아에도 나름의 영향을 주었을 정도.[7] 나중에는 Setia Kasih(1991년), Gubahan Rindu Puisi Syahdu(1992년), Kenari(1995년), Jerat Percintaan(1996년) 등 수많은 락 발라드곡들이 히트를 쳤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Memori Berkasih(2001년) 등 여전히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소강상태에 접어들더니, 2006년 이후로는 듣기가 힘들어졌다.[8] 당시 인도네시아 최고의 가수이자 록스타 니크 아르딜라의 프로듀서였다. 애석하게도 니크는 1995년 세상을 떴고, 데디 본인도 2016년 결국...지못미[9] 한국어로 번역하기가 쉬운 단어가 아니라 발음 그대로 적었다. 뜻을 굳이 말하자면 "가느다랗고 뾰족한 대나무 조각" 정도. 참고로 동명의 영화도 있는데, 당시 신인가수 지아나 제인과 남성 락의 주자로 엘라와 나름 경쟁상대였던 아위가 출연했다.[10] 2년 전인 1992년 파우지아흐 라티프가 Hua Xi Ya라는 앨범을 내고 중국으로 진출한 적이 있었다. 당시 "Ku Ingin Bebas"(나는 자유를 원한다)의 중국어 버전이 당시 대대적인 히트를 쳤는데, 하지만 말레이시아 가수들 중에 지금까지 미국에 진출한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다.[11] 아마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훗날인 2004년 시티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오해를 산 적도 있을 정도였다.[12] 특히 파우지아흐는 목소리까지 삭아가기 시작하면서 이미 내려갈 때가 되었다. 한마디로 내려갈 가수는 내려간다.[13] 이 듀오는 락을 주 장르로 삼았는데, "Memori Berkasih"처럼 발라드와 접목시킨 경우도 있었고, "Paling Comel"이나 "Mainan Cinta"처럼 신나는 락(...)도 있었다. 물론 이것도 엘라가 남긴 유산(...)이기 때문에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14] 기존의 히트곡들을 재수록한 것.[15] 2014년에 Siri Bintang Pujaan이 나왔지만, 이것은 몇몇 인기 가수들을 기리는 뜻에서 낸 앨범으로 가수들이 직접 낸 게 아니다. 이 때 다른 가수들은 왠만해서는 32곡인데 엘라는 28곡(...) [16] 하지만 이 덕에 엘라가 그나마 오래 활동한 게 아닌가 하기도 한다. 의외로 그녀의 많은 라이벌들은 일찍 결혼했고, 이들은 일찍 활동을 중단했다. 특히 리자 하님이나 아르니 나지라를 보면... 지금은 그냥 평범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가정주부일 뿐이다.[17] 이 세상에는 못할 것도 없다. 후안 페론-이사벨 페론(36년 연하), 아르눌포 아리아스-미레야 모스코소(46년 연하)에 비하면 저건 아무것도 아니다.[18] 2010년대 이후 말레이시아 가요계에서 정규앨범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마 음반 시장이 지금 상황이 안 좋은 모양인데, 요즘 데뷔하는 가수들 다 매년 싱글 1,2개 정도만 내지 아예 1집을 당당하게 들고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규앨범을 간혹 내는 경우가 있으나 이미 이전부터 활동 중이던 경우나 그럴 뿐.[19] 인도네시아에서만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