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 누르할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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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in Sri Siti Nurhaliza binti Tarudin, 1979.1.11 ~
1. 개요
2. 생애
3. 가수 활동
3.1. 데뷔
3.2. 2집 활동과 인도네시아로의 진출
3.3. 3집 활동
3.4. 4집에서 5집까지, 그리고 Adieu, 1990s
3.5. 3, 2, 1... 땡! 새천년의 시작
3.6. 최고의 생일 선물을 받다
4. 여담
5. 앨범
5.1. 정규 앨범
5.2. 듀엣 앨범
5.3. 명절기념 앨범
5.4. 컴플리케이션 앨범
5.5. 라이브 앨범


1. 개요


말레이시아가수, 음악인, 기업인. '''1996년 데뷔 이래 말레이시아 가요계를 평정'''했던 가요계의 거물이었다. 물론 세월에 장사는 없는지라 근래 들어선 셰릴 샤즈와니 등 새로운 스타들에 점점 밀린다는 말도 나오고 있지만, 이미 레전드 반열에 오른 가수라 큰 의미는 없을듯. 쉽게 말해 말레이시아의 머라이어 캐리, 조용필 정도 된다고 보면 편하다. 데뷔하자마자 톱스타 반열에 올랐으며, 이웃나라인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해 활약했다.
샤리파 아이니, 셰일라 마지드, 수디르만 아르샤드, 하디자 이브라힘과 더불어 '다툭[1]'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가수이기도 하다.[2]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많이 알려져있진 않지만, 초록창에 말레이시아 가수들 이름을 쳐보면 시티 누르할리자가 가장 많이 나올 정도로 외국인들이 '말레이시아 가수' 하면 다수가 처음으로 접하는 가수가 바로 이 사람이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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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타루딘 이스마일. 참고로 이 분은 2009년 작고하셨다.
1979년 1월 11일 파항트므를로캄풍아와에서 타루딘 이스마일과 시티 살마 바치크의 4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이었고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는데, 이러고 보면 시티가 가수의 길을 걷는다는 게 뭔가가 좀 무색하기도 하다.
그러나 부모가 아니더라도 유전은 유전인지라(...), 애초에 남매와 친척들이 아예 음악에 미쳐있었다. 오빠인 사이풀 바흐리 타루딘, 큰언니 시티 노르사이다 타루딘[3], 작은언니 시티 사이라 타루딘 모두 가수였으며, 할아버지도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리고 평범한 주부라던 어머니도 전통음악을 부르고 다니던 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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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꼬마애가 훗날 국민가수가 될 줄은 누가 알았는가?
하지만 집안은 가난하기 그지없어서, 하교 후에도 빈둥빈둥 놀 수 있던 아이는 아니었다. 훗날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9살 때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어머니를 돕는 한편 말레이 전통음식인 쿠이를 만들어 팔곤 했었다. 비록 힘든 삶이었지만, 나중에 이를 두고 "고난은 그저 힘든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위한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일종의 수련"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불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동네 이웃들에게 쿠이를 팔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을 끌기 위해 큰 소리로 외치곤 했었는데, 결국 여기서 자신감을 갖고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본격적으로 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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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당시의 모습.
베렉폴리스의 퍼르컵 유치원 때 처음으로 말레이 전통가요 "Sirih Pinang"을 부른 것을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쿠알라리피스로 가서 클리포드 초등학교와 동명의 중학교를 나왔는데, 초등학교 5학년[4] 때 독립기념일 행사로 열린 애국가요 경연대회에서 대표적인 애국가요 "Bahtera Merdeka"[5]를 부르고 상을 탔다.
마냥 노래만 한 것은 아니었고, 한편으로는 교내 특별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체육을 가장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네트볼을 가장 좋아했다고.
아무튼 가요제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참여했고, 삼촌 압둘 라힘 바치크를 통해 밴드까지 결성하면서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곤 했었다. 자신의 고향인 파항에서 열리는 가요제에 참여하면서 가창력을 향상시켰으며,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나서는 그야말로 No. 1이었다. 이를 인지하고 있던 가족들은 시티를 대중가수로 데뷔시키는 것을 계획했고, 중2때 슈스케나가수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인 Asia Bagus에 참여했으나, 안타깝게도 '''떨어졌다'''. 이유는 가창력이 다소 미흡했다고. 그 후 한동안 고향에서 열리는 가요제에 참여하면서 가창력을 서서히 향상시켰다.

3. 가수 활동



3.1. 데뷔


그러던 1995년 RTM의 Bintang HMI에 참여했고, 인도네시아 가수 루스 사하나야의 노래 "Kaulah Segalanya"를 부르고 합격하면서, 의외로 승리할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아이샤 아리핀의 노래 "Camar Yang Pulang"을 부르고 최종 우승했으며, 남들은 중4[6]에 있으면서 공부나 하는 16세에 어여쁜 미모를 가지고 뛰어난 가창력을 자랑하며 가수로 데뷔할 이 소녀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노래하는 장면

시상식 직후에 찍은 사진. 다만 이것은 잘린 사진이고, 원본에는 옆으로 람라 람의 "Kau Kunci Cintaku (Dalam Hatimu)"를 부르고 3위를 차지한 샤르밀라 데위거르상의 "Masih Aku Terasa"를 부르고 2위를 기록한 레주안 바하롬이 있다. 근데 나머지 두 사람의 행방은 지금 묘연하다.[7]
대회 전후로 유명한 작곡가 아드난 아부 하산[8]을 만났으며, 시티는 아드난으로부터 보컬을 배웠다. 바로 그 해 수리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으며, 추후로도 소니 뮤직, 베르텔스만 뮤직 그룹, 워너 뮤직과도 계약을 맺었다.[9] 그리고 이듬해 4월 1일 정규 1집 "Siti Nurhaliza I"을 발매하고 정식으로 데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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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ugerah Juara Lagu에서 "Jerat Percintaan"을 부르는 장면. 참고로 시티 바로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바로 안와르 제인이다.
1996년 4월 1일 정규 1집의 발매와 함께 말레이시아 가요계에는 한마디로 '''경사났다'''. 안그래도 성형한 듯[10]한 어여쁜 외모에 맑고 깔끔한 목소리로 이전에도 주목을 받았었는데, 그런 그녀가 이제는 대중가요계로 진입했으니, 한순간에 반향을 일으키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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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의 주요 히트곡으로는 "Jawapan Di Persimpangan", "Mahligai Asmara", "Jerat Percintaan", "Antara Waktu Dan Usia", "Sempadan", "Cari-cari"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Jerat Percintaan"은 실질적인 타이틀곡이자 첫 싱글로서 인기는 대단했다. 지금 들으면 꽤나 옛날 노래처럼 느껴질 지 몰라도, 은근 듣기 좋은데다 당시로서는 꽤나 세련된 노래였기 때문에, 대중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바로 동년 Anugerah Juara Lagu에서 저 노래로 1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고, 한참 서로 경쟁하며 상위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지아나 제인, 엘라 아미누딘, 파우지아흐 라티프와 같은 수많은 스타들은 시티의 등장과 함께 한마디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저 노래 외에도 히트곡만 무려 6곡(총 수록곡은 10곡)이었고, 다른 가수들에게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보니[11] 시티의 경우는 매우 유례없는 케이스였다. 앨범 판매량만 총 80만장을 기록했으며, 이는 사상 유례없는 최고의 판매량이었다.
그리고 1집 활동이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바로 2집 준비에 들어갔고, 17세로 중5였던 그 해 SPM까지 치른 뒤[12] 본격적인 준비를 개시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27일 2집 "Siti Nurhaliza II"를 발매했다.

3.2. 2집 활동과 인도네시아로의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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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월 27일 2집을 발표했고, 이번에는 1집에 비해 판매량은 반으로 줄어들었으나, 이것이 곧 인기가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인기가 더 올랐으면 올랐지 내려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가수들에게서는 거의 없었던 유례없는 전곡 히트를 달성하면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른 가수들을 뺨치는데 성공했다.[13] 그 중에서 "Aku Cinta Padamu"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Anugerah Juara Lagu에서 다시 우승했고, 셀린 디온의 팝송 "The Colour Of My Love"를 리메이크해 불렀으며 이 역시도 나름 주목을 받았다. 현지 중국인 가수 치앙 텡과 듀엣으로 부른 "Rindu Di Antara Kita"의 중국어 파트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14]
특히나 데뷔한지 딱 1년이 되었던 1997년 4월 이웃나라 인도네시아의 잡지 "POS Kota"에 소개되었고, 이후 곧바로 인도네시아로 진출했다. 물론 엘라 아미누딘처럼 이전에도 인도네시아로 진출한 가수들은 적지 않았으나, 거기서는 얄짤것 없이 외국인인 말레이시아 가수들은 자국민 가수들에 훨씬 밀려 짤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시티는 자국의 그 어느 가수들보다도 훨씬 더 높은 인기를 얻었으며, 이는 말레이시아 가요 vs 인도네시아 가요의 대결구도를 한편으로 낳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대도시들인 자카르타, 반둥, 욕야카르타에서 아예 외국인이 대형 콘서트를 열었으니, 시티의 인기가 인도네시아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그 덕에 2집부터 인도네시아에서 발매하기 시작했고,[15] 말레이시아에서 4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을 때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보다 많은 50만장을 기록했다.[16]
다만 이에 대한 나름의 안타까운 사연(?)이 있긴 한데, 시티 이전에 인도네시아에서는 니크 아르딜라라는 어린 가수가 그야말로 인도네시아 가요계를 장악했었으며, 말레이시아에서도 종종 콘서트를 열고 앨범을 내고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근래에는 시티가 크리스다얀티에게 자리를 좀 위협받는다는 소문이 있으나, 니크는 크리스다얀티보다도 인기가 훨씬 높은 전설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니크는 겨우 20세였던 1995년 교통사고로 요절했고, 이 때문에 시티가 다소 반사이익을 얻었을 수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변의 추측일 뿐이며 이 점에 대해서는 너무 매달리지 말자.

3.3. 3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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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은 시티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해'''라고 봐도 무관하다. 안그래도 경제가 안 좋은 상황 속에서도 인민들을 풀이 죽지 않게 했고 나라 안은 한편으로는 경제적 문제로 이리저리 말이 많으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시티 덕에 경사 났기 때문이다. 아예 말레이시아 가요계 자체가 시티 덕에 힘을 얻기 시작했고, 서서히 국제화로 나아갔으며 심지어는 말레이시아 가요계에는 별 관심조차 갖지 않던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 여파 덕에 동년 11월 17일 3집 "Cindai"를 발매한다. 보통 가수들이 정규 앨범을 1년에 2개 이상 발매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엘라의 "Kesal"(1992)[17]과 더불어 인기의 정점을 제대로 보여준 걸작이기도 하다.[18] 말레이시아에서는 2집과 동일한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10만장으로 2집에 비해 확 줄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최상위의 자리를 유지한 건 변함이 없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까지는 서구식 팝을 추구했지만, 이번에는 전통 말레이 음악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물론 2집의 "Sri Mersing"처럼 이전에도 전통음악을 안한 것은 아니었고, 애초부터 시티는 팝보다 전통음악을 더 잘 소화해 냈지만, 그 때는 단 한 곡이었으며 인기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순수한 전통음악을 시도했다.
특히 제목과 동명의 노래이자 1번 트랙인 "Cindai"가 최고의 인기를 얻었으며, 이 노래는 2016년 현재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불리는 명곡이다. Jalur Gemilang과 같은 애국가요 및 수많은 전통가요를 작곡한 국민 작곡가 팍 응아의 대표작으로, 얼마나 인기가 높았으면 치엔바이후이(千白惠)라는 중국 가수가 아예 중국어 버전으로 불렀을 정도.# 한국에서도 생각보다 인기는 높은 편이며, 여담으로 일베에도 이 노래가 올라왔던 적이 있다.
다음 보스는 10번이자 마지막 트랙인 "Joget Berhibur"이며, 미낭풍의 Cindai와는 달리 이 노래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조겟이다. 말레이어 고유의 이름이지만 굳이 번역하자면 '타령'으로, 한국에서는 대게 군가풍 민중가요에 흔했던 스윙 리듬이다. 물론 Cindai에 비하면 인기는 상대적으로 밀리지만, 그래도 매우 높은 인기를 끌었으니 그걸로도 족하다.
물론 이 두 곡 외에 다른 곡들은 이전부터 구전되어오던 노래들이며, 구전에만 의존하다보니 일부분이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나름 있어서(?), 같은 부분만 많이 반복되어 다소 지겨울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시티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 노래들을 새롭게 재탄생시켰고, 그 중에서도 "Joget Pahang"은 이 앨범의 3인자로 기록되었다.

3.4. 4집에서 5집까지, 그리고 Adieu, 199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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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29일 4집 "Adiwarna"로 컴백했다. 앨범의 뜻은 "다채로운 색깔들"을 의미하며 영어 단어 "resplendent"와 같다. 이름만큼이나 확실히 더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으며, 이전에 비하면 확실히 세련된 편이다. 물론 동년에 데뷔한 안와르 제인은 시대를 확 앞서는[19] 노래들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밀리긴 했지만, 그래도 한발 더 나아가고 있었다.
주요 히트곡으로는 "Purnama Merindu", "Sendiri", "Diari Hatimu", "Satu Cinta Dua Jiwa", "Gelora Asmara" 등이 있는데, 전 수록곡을 노래방에서 다 부를 수 있을 정도로[20] 전체적으로 인기가 매우 높다. 위에 비디오로 첨부한 것은 "Purnama Merindu". 옆나라 인도네시아에서도 어김없이 발매되었는데, 다만 노래 "Sendiri"가 "Mencintaimu Selamanya"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어 발매되었다.
여하튼 얼마나 인기가 높았으면, "Purnama Merindu"가 이듬해 Anugerah Juara Lagu에서 비록 M. 나시르의 "Andalusia"에 밀려 패배했지만 그래도 "최고의 발라드곡"으로 선정되었다. 이어 동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뮤직 페스티벌에서 금상을 타는데 성공했고, 후에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Voice of Asia에서 그랑프리 우승을 탔다. "Satu Cinta Dua Jiwa"의 경우 전자에 비해 인기는 낮았지만, 그래도 최고의 히트곡 중 하나였으며, "We'll Be As One"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호주에 진출했으며 "최고의 여성 보컬"은 물론 "세계에서 40번째로 인기가 높은 곡"이라는 상까지도 무난히 탔다.
동년 노르아니자 이드리스, 리자 하님과 더불어 컴플리케이션 앨범 "Molek"을 냈으며 이 중 시티는 신곡으로 "Kini Kau Di Sisi"를 냈다. 다만 인기는 생각만큼 높은 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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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어김없이 힘업어 1999년 5월 7일 5집 "Pancawarna"를 냈다. 뜻은 4집과 비슷하지만 좀 다른데, 예를 들면 뭐 이런 거다. 그만큼 5집만큼 다채롭지는 않다. 더더욱이나 신남, 슬픔, 고요함, 풍요로움, 추억의 5요소가 다양하게 섞인 4집과는 달리 5집은 전체적으로 슬픔, 고요함, 추억의 3요소에만 지나지 않는다. 물론 "Engkau Bagaikan Permata"처럼 신나는 노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4집만큼 신나지는 않다는 것이다.
앨범 준비기간을 생각하면 1998년 말부터 녹음이 되기 시작했다는 얘기인데, 19세의 소녀에서 20세의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시티의 변화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아이처럼 맑고 귀여운 목소리를 자랑했던 시티의 모습에서, 좀 더 성숙해진 느낌을 볼 수 있다. 주요 히트곡은 "Nian Di Hati", "Engkau Bagaikan Permata", "Kau Kekasihku" 등. "Kau Kekasihku"의 경우 듀오 누룰 & 아자이[21]로 더 유명한 아자이가 처음으로 작곡해준 노래인데 멜랑콜릭한 노랫말이 인상적이다. 이 노래는 "Engkau Bagaikan Permata"와 더불어 2000년부터 2001년까지 Anugerah Juara Lagu에서 문제없이 밀고 나간다.
수록곡 중에 "Lelaki (Warkah Seorang Anak)"이 있는데, 당시 총리이자 독재자인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에게 바치는 일종의 정권찬양 노래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김정일 장군의 노래처럼 정상인이 보기에 혐오스러울 정도는 아니며, 특정한 인물을 언급하지 않다보니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나중에는 종교 지도자 닉 아지즈 닉 맛이 서거하자 그를 추모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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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노르아니자 이드리스와 듀엣 앨범인 "Seri Balas"를 냈으며, 이것은 시티가 두 번째로 전통음악을 시도한 성과였다. 다만 본인의 앨범만은 아니므로, 이건 대개 그녀의 성과로 치지 않는 경향이 있다.

3.5. 3, 2, 1... 땡! 새천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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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1... '''땡!'''
여기저기서 폭죽소리가 울린다. 2000년 1월 1일 오전 0시 0분, 온갖 전쟁을 비롯한 혼란으로 어지러웠던 20세기가 흘러가고 21세기[23]와 새천년이 시작되는 순간, 시티는 이 때 바로 6집을 발매한다. 사실 바로 이틀 전인 1999년 12월 30일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지만, 이 때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판매했다. 그러다가 새천년이 시작되면서, 이를 기념하는 뜻으로 이 때 맞춰 완전히 발매한 것이다.
비록 단 1초 차이라도 2000년에 나왔으니 2000년대 앨범으로 분류해야 하지만, 1월 1일이므로 전곡이 '''1999년에 녹음된 노래'''들이다. 때문에 1990년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이것이 곧 20세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타이틀은 "Sahmura". 주요 히트곡으로는 "Balqis", "Ya Maulai", "Mahligai Permata" 등이다. 3집 "Cindai"에 이어 두 번째 전통음악 앨범인데, 다만 3집에 비해 이번에는 종교적 성향이 다소 짙어졌다. 노래 "Balqis"를 보면 가사 중에 "Syahadah!" 하는 부분이 있으며, "Ya Maulai"의 경우는 "아, 주여!"를 뜻하는, 제목부터가 종교적이다. 다만 이외의 노래들은 그렇지 않다.
단 2곡을 제외하고는 구전되는 노래들이라 특정한 부분이 지겹게 반복되던 3집과는 달리, 이번에는 유명 작곡가들이 직접 작곡한 음악성이 뛰어난 노래들이다. 때문에 듣고보면 별로 지루할 것도 없다. 단,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낮선 장르일 뿐...

3.6. 최고의 생일 선물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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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11일, 21번째 생일을 맞이한 시티에게 뜨거운 선물이 왔다. 그것은 다름아닌 본인의 7집. 일부러 본인 생일에 맞춰 발매한 것이다. 어쩌면은 최고의 생일 선물일지도.
제목은 "Safa"로, "하얗고 맑은"을 뜻한다. 이만큼 맑고 아름다운 노래들이 많다. 변하는 시대에 맞춰 한층 더 세련되고 맑은 노래들을 선보였는데, 대표적인 히트곡으로 "Azimat Cinta", "Percayalah", "Kudus Sinarmu", "Bicara Manis Menghiris Kalbu" 등이 있다. 21세기의 진짜 시작은 2001년이므로 이 앨범은 21세기에 낸 첫 앨범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녹음은 2000년에 이미 마쳤으므로 목소리는 여전히 20세기인 2000년이다.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모습인데, "Lakaran Kehidupan"의 경우 파격적인 3D 뮤직비디오로 촬영했다. 촬영지는 믈라카 주의 아예르크로. 다른 곡들의 경우 상당수가 인도네시아보고르에서 촬영되었다. "Beradu Di Khayalan"의 경우, "Don’t Put My Heart On Hold"라는 제목으로 해서 영어로 번역되었다.

4. 여담


정치적으로는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지지자라고 추정되는데, 덕분인지 마하티르의 엇갈리는 평가와 행보 탓에 2018년 선거와 겹쳐 안티들이 생기기도 한 모양.

5. 앨범



5.1. 정규 앨범



5.2. 듀엣 앨범



5.3. 명절기념 앨범



5.4. 컴플리케이션 앨범



5.5. 라이브 앨범


[1] 다만 '다툭'은 대게 남성을 지칭하며, 여성의 경우는 '다틴'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남녀 구분없이 '다툭'이라고 종종 칭한다.[2] 원래 이런 칭호는 대게 학식 높은 사람들이나 받는 것이다.[3] 흔히 '사이다 타루딘'이라고 부른다.[4] 1991년인데 이 때면 12세로 초등학교 5학년 맞다.[5] 근데 이건 아이샤 아리핀이라는 당시 인기가수가 부른 버전이 가장 유명하다. 물론 그 사람, 지금은...[6] 말레이시아는 고등학교가 없는 대신 중학교가 5학년까지 있다. 중4는 한국의 고1에 해당된다.[7] 아마 사정상 데뷔를 포기한 듯.[8] 미국버클리 음악대학을 나온 사람으로, 아이샤의 "Camar Yang Pulang"도 그가 작곡한 노래이다. 시티 외에도 아즐리나 아지즈, 리자 하님, 지아나 제인, 파우지아흐 라티프 등 아드난의 도움을 받은 가수들이 많으며 이들은 '아드난의 자녀들'이라고 불렸다. 참고로 아드난은 음악 집안 출신으로, 동생인 아즐란 아부 하산아즈만 아부 하산도 유명한 음악인이다. 애석하게도, 아드난은 2016년 3월 18일 향년 59세로 타계했다.[9] 여담으로 수리아 레코드는 시티 덕분에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레이블로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인연을 끊은 지 오래이고, 현재는 FMC에 서서히 밀리고 있는 중.[10] 물론 진짜로 성형한 것은 아니다. 하도 성형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절대 아니다'''. 만약에 성형했다고 헛소리하고 다니면 그날로 명예훼손죄로 깜방간다![11] 파우지아흐 라티프람라 람의 경우 끽해봤자 1,2곡 얻을까 말까였다. 지아나 제인은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상황은 나았다지만, 시티와는 비교가 안 된다.[12] 물론 일찍이 가수하던 사람들은 바빠서 시험 준비를 제대로 할 리는 없었고, 나중에 보니 C 이상이 겨우 2개(전문대 최소 3개, 통과 최소 5개)로 오죽하면 '''전문대도 못 가는 성적'''이다. 그런데도 그녀의 성과를 이해했던 마라기술대학교(UiTM) 아라우 캠퍼스에서 입학 제안이 왔으나, 본인은 바빴던 나머지 거절했다. 여담으로, 상당한 가수들이 낙제했는데, 샤피나즈 슬라맛의 경우는 겨우 1개로 아예 망쳤고, 엘라 아미누딘도 나중에 본인이 떨어졌다고 밝혔다.[13] 이전에도 파우지아흐 라티프가 6집 Epilog Memori Gelita로 전곡 히트를 달성한 적은 있었지만, 이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14] 그러나 말레이인중국어 발음은 원어민 못지 않게 뛰어나서,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물론 그 반대로 중국인말레이어 발음은 아주 꽝이지만...[15] 단 트랙 순서와 구성은 상당히 다르다.[16] 단, 인구 3'''천만'''의 말레이시아와 3'''억'''의 인도네시아의 인구대비를 보면, 말레이시아보다 판매량은 많았더라도 판매 비중은 훨씬 적었다.[17] 물론 이전인 1990년에도 "Puteri Kota"와 "Identiti" 2개를 낸 적은 있었다. 이 해에는 "30110" 다음으로 낸 것.[18] 여담으로 시티와 엘라 둘 다 1년에 2개 이상의 정규앨범을 발매하는 일은 이후 없었다.[19] 이 사람의 1집 노래들을 들어보면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20] 말레이시아 노래방은 한국과는 달리 '''뮤비가 있어야만''' 만들기 때문에, 뮤비가 제작되지 않았으면 그것은 곧 '''노래방에서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21] 한때는 부부였다가 지금은 헤어졌다.[22] 여담으로 닉 아지즈 옹은 야당인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 소속이고, 마하티르는 여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소속이다.[23]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편의상이라 이렇게 서술할 뿐, 사실 21세기의 시작은 200'''1'''년이지 200'''0'''년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알아서 찾아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