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1. 개요
2. 배경
3. 결과
4. 예외 지역
5. 비슷한 경우
6. 관련 문서


1. 개요


1919년에서 1922년 사이에 벌어진 터키 독립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한 뒤에, 1923년 그리스 왕국터키 공화국간에 인구를 교환하는 협약을 맺어서 총 2백만명 가량이 상호 이주한 사건을 말한다. 이 협약은 로잔 조약제6장으로 편입되었다. 이 합의에 의해서 터키 지역에 살던 130만 명 정도의 그리스 정교도가 그리스로 이주하고, 그리스 지역에 거주하던 50만 명 정도의 무슬림이 터키로 옮겨갔다.

2. 배경


본래 튀르크인들은 시베리아에서 중앙아시아에 널리 분포하던 유목민이었으나, 범튀르크민족에 속하는 여러 민족들(오스만, 베일리크, 셀주크 등등)이 중세부터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들은 샤머니즘(텡그리 신앙), 불교를 믿고 있었으나, 서쪽으로 가면서 일부는 기독교화되고 대부분은 이슬람화되었다. 이들중 이슬람을 신봉하던 오스만 제국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에 걸치는 대제국을 세웠다.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정교회)를 믿고 있던 여러 민족들에게 개종을 그다지 강요하지 않은 데다가[1] 기본적으로 민족 단위의 자치를 허용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내의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들은 종교, 언어, 풍습 등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스만 제국 내에는 상당히 많은 정교회 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2] 뿐만 아니라 제국 영역 안에 여러 민족의 공동체가 섞여 살고 이들이 제국 각 영역으로 이주하다 보니, 그리스인 무슬림과 터키인 기독교도 혹은 터키어만 할 줄 아는 그리스인과 그리스어만 할 수 있는 터키인과 같은 존재도 나온 것이다.[3]
1832년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그리스는 발칸 반도아나톨리아 전역의 모든 그리스 민족의 통일과 고대 그리스동로마 제국 영토의 회복을 주창하는 이념인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를 국시로 삼고 그리스인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확장해 나가는 정책을 펼쳤다. 이후 80여 년에 걸쳐서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크레타, 동부 에게해 제도 등을 야금야금 빼앗아오던 그리스에게 드디어 메갈리 이데아를 현실화할 둘도 없는 기회가 생겼는데 바로 숙적 오스만 제국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전해 패전국이 되고 그리스는 협상국의 일원으로서 승전국이 된 것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리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한 유럽 터키 전역과 스미르나 일대를 할양받아 아나톨리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조약 결과 오스만 제국은 반병신 상태가 되었고 세르비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슬라브족 다수 지역을 먹었으니 관심이 없을 것이고 알바니아는 아나톨리아를 수복한 뒤 곧 잡아먹을 약소국일 뿐이며 불가리아는 패전국이라 할 말이 없으니 자신들을 막을 나라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 그리스는 내친 김에 최종 목표인 옛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아나톨리아를 수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지금이야 국력으로는 그리스가 터키에게 상대가 안 되지만 당시 세브르 조약으로 아나톨리아만 남게 된 1919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인구는 고작 1,463만 명이고 당시 그리스 인구가 757만 명으로 오스만 영토 일대에 거주하는 그리스인 인구가 200만 명에서 250만 명 사이였다.
처음에 그리스군은 아나톨리아를 갈라먹으려는 협상군과 함께 오합지졸 터키군을 박살내고 터키 대국민회의 소재지인 앙카라 근교까지 진격하는 등 승기를 잡았으나 한 먼치킨이 규합한 터키군에 의해 패배하고 만다. 결국 그리스는 스미르나를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거점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의 동부 트라키아를 모두 잃고 에게 해에 있는 대부분의 섬을 보전하는 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리스-터키 전쟁이 1922년에 끝나고, 두 국가는 스위스 로잔에서 로잔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두 국가가 그리스인은 그리스로, 터키인은 터키로 추방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터키 정부는 그리스인들을 자기 땅에서 보기가 싫었고, 개발지에 정착시킬 인구가 필요했다. 그리스 정부도 나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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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당시 소아시아의 민족분포

3. 결과


이 때 인종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언어도 혈통도 아닌 종교적 요소만을 고려하였다. 오스만 제국 시절만 쳐도 500년 가까이 그리스인터키인은 같이 살았는데, 실제로는 만지케르트 이전부터 터키인은 아나톨리아에 들어와서 그리스인과 살았다. 동로마 제국은 튀르크인들을 정교회로 개종시키고 용병으로 쓰기도 했고, 동로마 최후의 전투인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당시에도 동로마 측에서 싸운 튀르크인들이 있다. 그러니 실제로는 1000년 가까이 좋든 싫든 그리스인과 터키인은 나란히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기간 두 민족이 비슷한 영토에 살았는데, 통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
터키인들의 주류였던 튀르크인들은 원래 중국 역사에 등장했을 정도로 황인종에 가까웠을 듯하지만 지금의 터키 영토인 서아시아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스탄불 등 동유럽 발칸반도 일대에 정착한 이후로는 그리스인,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페르시아인, 쿠르드인, 불가리아인 등 중동, 유럽의 코카소이드 계열 민족들과 혼혈화되어 현대 터키인들은 백인 계통으로 분류된다.[4] 서로의 언어도 뿌리는 다르지만, 워낙 오랫동안 엉켜 살다 보니 그리스어-터키어가 짬뽕된 피진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많았다.[5]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은 소속 종교밖에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교회인이라면 그리스인으로, 무슬림이면 터키인으로 판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종교를 통한 구분 역시 현실의 사회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리스인과 터키인들 간의 문화적 교류는 굉장히 깊었고, 따라서 동네는 이오안니나, 테살로니키 같은 그리스 영토에 살며 그리스어를 쓰면서도 종교는 무슬림이고, 반대로 사는 곳은 아나톨리아이고, 언어도 터키어를 쓰지만 종교는 정교회인 경우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에 대해 종교 하나만으로 터키인, 그리스인으로 선을 그어, 그 동네에서 수 백년간 뿌리 내려 살던 사람들을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추방했다.[6]
결과적으로 터키에서 150만 명 가량의 "그리스인"이, 그리스에서 50만 명 가량의 "터키인"이 추방되었다. 물론 민족주의의 열풍에 따라 이미 이전부터 정교회인들은 대다수 아나톨리아를 떠나고, 반대로 그리스와 발칸 반도에서는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터키로 이주하고 있었다.
터키에서 추방된 "그리스인"들 중 40만 명 가량은 터키어만을 알았지 그리스어를 할 줄 몰랐다. '본토'인 그리스 왕국도 난민들을 막 받아줄 만큼 부유한 것도 아니고, 이들이 또 그리스 사회에 갑작스럽게 떨어져도 먹고 살만한 재력이나 능력은커녕 그리스어도 못 했으니 이들 아나톨리아 출신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사회에 잘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다가 많은 수가 30년대, 40년대를 걸쳐 그리스 공산당에 투신했고, 결국 그리스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추방되었지만 정작 그리스어는 전혀 모르고, 추방자들끼리 산골마을에서 모여살아 터키어 마을을 형성하는 동네들도 있었다. 터키어가 모국어인 튀르크계 정교도 그리스인의 인터뷰 인터뷰속의 할머니는 카이세리 출신의 추방자 1세대로, 그리스로의 추방 이후의 정착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상당히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카이세리 사투리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터키계 정교도 마을이 외부와 교류가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6살 때 추방되었으며, 그리스어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서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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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리스 민족과 터키 민족이 얼마나 섞여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위 사진에 나타나 있는 터키 콘야의 실레(Sille) 마을에 위치한 아야 엘레니(Aya Eleni) 성당의 입구에 쓰여진 명문이 있다. 명문이 그리스 문자로 쓰여있지만 그리스어가 아니라 터키어다. "327년에 성 엘레니 아르항겔로스의 이름으로 성당을 세운 이래 현재의 성당은 세번째 수리를 거쳤으며, 술탄 마흐무트 2세의 명령으로 이루어졌으며, 본 공사를 위해 노력한 모든 이들과 수호성인인 대천사 미카엘에게 중보를 청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는 내용이다. 이 글은 아나톨리아 반도 내륙지역인 카파도키아 지방에 거주하면서 터키어를 사용하나 신앙은 정교회였던 카라만인들이 작성한 것인데, 왜 이들이 그리스 문자로 터키어를 쓰면서 정교회인이었는지는 의문에 싸여있다. 원래 그리스계였으나 튀르크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되 종교만 남은 경우일 수도 있고, 동로마 시절에 정교로 개종한 이후 오스만 제국까지도 정교도로 남아있는 경우일 수도 있고, 본래 무슬림이었지만 그리스 민족에 동화된 경우일 수도 있다.[7] 분명한 건 카라만인들의 묘비나 기록들에 남은 이름들을 보면 미카일, 니콜라오스, 마리아 같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이름을 쓰고 있다는 점과 성씨를 붙이지 않고 ~의 아들, ~의 딸로 표기하는 옛 튀르크인들의 전통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8] 이들이 살던 지역에 있는 교회에 가면 전례문을 그리스 문자로 썼는데, 그리스어가 아닌 것들이 있다.[9] 이것은 비록 근대 이전에도 그리스어 모어 화자는 정교회를 믿고, 터키어 모어 화자는 이슬람교를 믿는게 일반적이긴 했지만, 꼭 반드시 그렇게 깔끔하게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점으로 설명된다. 이즈미르, 트라브존 같은 그리스 영향이 깊었던 지방은 구어로는 터키어를 쓰면서도 문자는 그리스 문자를 쓰는 경우도 흔했고, 코렐리의 만돌린을 쓴 저자인 루이 드 버니어의 소설, 날개 없는 새에서 이런 사회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인, 터키인들은 천년간 동거하면서 상당부분 서로 수렴해 갔다는 점이다. 다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하지는 못했다.
그리스에서는 비교적 적은 50만 명이 추방되었다. 그리스를 비롯한 오스만 지배에서 독립한 발칸 반도 국가들은 19세기 말부터 강경하게 무슬림들을 추방하고, 공민권을 박탈하고, 오스만 통치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음에도 막판에 찾아 보니 50만이나 더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인데, 그리스 내 무슬림들이 주로 살던 마케도니아 지방을 그리스 왕국이 손에 넣은 게 1913년으로 채 10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추방된 "터키인"들은 터키 공화국 첫 인구조사 결과(1927년)와 인구교환 당시의 통계를 통해 거의 절대 다수가 그리스와 가까운 서부지방(마르마라 주 및 에게 주)에 정착한 것을 볼 수 있다. 에디르네 도에 가장 많은 수인 49,441명이 정착했으며, 그 다음 발르케시르 도에 37,174명, 이스탄불 도에 36,487명, 테키르다으 도에 33,728명, 이즈미르 도에 31,502명 순으로 정착했다. 상위 5개 도 정착민 수를 합치면 거의 반에 육박한다. 동부지방에서 가장 많은 수가 정착한 도는 비틀리스 도로 3,360명이 정착했으며, 나머지 동부지역에 정착한 인구는 각 도마다 1000명이 채 안 된다. 출처
이렇게 인구교환으로 추방된 이들은 이주해간 두 국가에서 사회 밑바닥을 이루었고 추방되어 간 국가에서 도리어 차별까지도 받았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의 좌파 지지자들의 상당수가 이렇게 터키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이며, 이들은 그리스에서 환영받기는커녕 도리어 "터키인"이라는 차별을 받았다. 이런 갈등 및 그리스 사회의 모순은 결국 1946년부터 3년간 벌어진 그리스 내전으로 폭발하였고,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과 유고슬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공산계 빨치산의 전쟁은 수만명의 사망자를 냈을 만큼 잔혹했다.

4. 예외 지역


양측 합쳐 200만 명의 인구가 이동하는 상황 속에서 예외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마르마라 해의 프렌스 군도, 터키로 편입된 에게 해의 두 섬, 임브로스와 테네도스에 거주하던 50만 명 가까이 되는 그리스인들은 협약에 따라 인구 교환 대상에서 제외되어 당장 추방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0년대 터키 민관의 조직적인 박해(이스탄불 포그롬)로 인해[10] 급격히 그리스인이 줄어들었고, 현재는 터키 내 그리스인이 5000명 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 키프로스를 두고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주민들이 터키계 주민들과 충돌하고 이들을 학살하는 사례가 일어나자 터키에서는 항의 차원으로 이스탄불의 그리스계 주민들 가운데 터키 국적이 없는 이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이 돌아가자 터키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보복을 외치며 이들을 괴롭혔고 결국 이스탄불의 그리스계 주민은 다수가 이스탄불을 떠나 그리스로 이주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에게 해의 두 섬의 그리스인을 추방하지 않았던 것처럼 서부 트라키아 지방에 거주하는 약 9만 명의 터키인들은 추방되지 않았다. 이들은 그리스 정부에서 '터키인'으로 분류되지 않으며, 대신 로잔 조약의 규정에 따라 트라키아의 '터키인'들은 포마크인[11], 무슬림 집시들과 같이 하나로 묶어 '무슬림 그리스인'으로 분류 및 관리되고 있다. 그리스 대법원에서는 터키인은 터키 국적의 사람을 의미한다며 트라키아의 터키인 소수민족 단체에 대해 '터키인'이라는 이름을 못 쓰게 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일단 그리스 정부에서는 형식적으로는 이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트라키아 지방의 터키인들을 비공식적으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터키에서 추방된 정교회 '그리스인'들을 이 곳에 정착시키거나 트라키아 지방의 토지를 사는 그리스인들에게 저리 융자를 제공해 주는 등 트라키아 지방의 터키 색채를 지우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행해왔으며, 아울러 실질적으로 이 지방의 터키인들은 포마크인[12], 아나톨리아에서 이주해온 룸인들과 한 데 묶여 박해당하고 거의 비국민 취급을 받았다. 또한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그리스 내전 당시 주된 격전지역이었기 때문에 내전에서 희생된 이들도 많았다. 당시를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당시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1970년대 그리스의 민주화 이후로도 키프로스 문제 때문에 그리스 내 터키인들은 이런저런 차별을 받았다. 예를 들면 민족적 의미에서 그리스인이 아니라고 규정된 사람들은 귀국을 보증하지 않으면 출국과 동시에 그리스 국적을 박탈하는 법이 1990년대까지 있었는데 주로 터키인 등의 그리스 무슬림들이 대상이었다. 링크 많이 나아진 지금에 와서도 그리스 정부와 그리스의 터키인들은 앞서 언급한 '터키인' 칭호 사용 금지 등 여러 갈등이 남아 있다. 현재도 그리스 인구의 1.3%[13]는 무슬림이며 이 중 절반 가량이 바로 서부 트라키아 지방에 거주하는 터키인이다.
위의 예외 사례와 별개로 다른 나라의 지배로 인해 인구 교환을 피해간 지역이 있었는데 바로 로도스 섬을 비롯한 도데카니사 제도키프로스이다. 각각 이탈리아영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도데카니사 제도는 그리스로 편입되었으나 그리스 정부가 터키인을 추방하지 않았기에 도데카니사 제도는 그리스 내에서 아직도 터키어가 제법 통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14], 키프로스는 다수 그리스계의 주도로 그리스와의 통합 운동이 일었으나 영국이 별개 국가로 독립시킨 이후 그리스터키의 대리전의 전장으로 고통받았다. 이 지역에 사는 그리스계와 터키계는 구분하기 힘드며, 그저 종교와 모국어로 정체성을 찾는 듯하다. 즉 이는 터키계와 그리스계가 오랜 세월의 상호교류로 두 민족간의 경계가 거의 없어졌음을 말한다.

5. 비슷한 경우


인도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힌두교도는 인도로, 무슬림은 파키스탄으로 많이 이주했다. 다만 이는 조직적인 인구교환, 추방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자발적인 대량이주에 가까웠다. 물론 지리와 종교권이 일치하지 않아서 적지 않은 힌두교도가 파키스탄에, 무슬림이 인도에 남았다. 특히 인도 내 무슬림 수는 매우 많아 인도를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를 잇는 최대 이슬람 국가로 만들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6. 관련 문서



[1] 종교적 관용이라기보다는 당시 오스만 제국은 지즈야라는 제도를 통해서 이교도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기 때문에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한 세금만큼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즈야를 내지 않는 무슬림은 대신 병역의 의무를 짊어졌지만, 대신 무슬림들이 지배하는 제국의 각 행정기관에서 출세하기도 쉬웠으므로(물론 권력은 쉴레이만 1세 이후로 기독교도 출신인 데브시르메 집단이 잡았지만) 자발적인 개종은 있었다.[2] 오스만 술탄의 여러 칭호 중의 하나가 "기독교의 수호자"였다.[3] 쿠르드족 또한 이러한 역사의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발칸 반도(터키령인 동트라키아 제외)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쿠르드족 탄압을 피해 중동 국가(특히 터키)에서 망명해온 경우도 있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대대로 발칸 반도(동트라키아 제외)에서 살아온 경우도 있다.[4] 실제로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리스인들과 터키인들은 요리나 복식 또한 유사한 경우가 많다. 국민성까지 섬뜩할 정도로 닯았다. 그리스 여성들은 슬라브인과 함께 터키 남성에게 인기있었고, 그리스 남성은 터키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강하게 자리잡은 오늘날 그리스와 터키에서 두 국가의 문화가 비슷하다고 하면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터키의 케밥이라는 음식은 그리스에서 거의 똑같은 기로(Gyro)라는 음식이 있다. 서로 자기네들이 원조라고 우겨댄다.[5] 현대 터키어와 그리스어는 만개 이상의 단어를 공유하며, 그나마도 각국의 언어 순화 운동으로 적어진 것이다. 그리스인의 튀르크화와 튀르크인의 그리스화가 정점에 달했을 오스만 제국 중후기에는 터키어와 그리스어가 현대보다 훨씬 많은 단어를 공유했을 것으로 보인다.[6] 사실 이는 그리스인과 터키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 자체가 다민족국가였으니 말이다. 보슈냐크인이나 포마크인 같이 이슬람교를 믿는 슬라브계 주민들도 많았으며, 민족 전체가 독실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인 걸로 유명한 아르메니아인 중에서도 엄연히 무슬림이 존재했다.[7] 정치적 숙청 등으로 인해 몰락한 무슬림 튀르크인 지배층이 신분 세탁을 위해 지즈야를 감수하면서까지 기독교로 개종한 경우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성기의 오스만 제국은 여러 종교들 중 이슬람교의 지위가 가장 높긴 했지만 죄수를 처벌할 때는 딱히 그 죄수의 종교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8] 터키인들은 전통적으로 성(姓)씨가 없었으며, 케말 아타튀르크시대에 서방식 근대국가를 지향하면서 모든 국민이 이름뿐만 아니라 성을 갖게 되었다. 아타튀르크라는 성도 "튀르크의 아버지"라는 뜻. 많은 경우 귀찮아서 그냥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oglu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들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편입되면서 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오글루 대신 러시아인처럼 ~프가 붙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앙아시아인들은 슬라브인이 아님에도 이름 끝자에 v가 많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의 축구선수인 제파로프아흐메도프 등등.[9] 그리스 총리와 대통령을 여러번 지낸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이쪽 출신이다. 터키어로 "카라만인"을 의미하는 Karamanlı를 그리스어 남성명사형으로 바꾸면 대놓고 카라만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리스인들 중에는 성에 ~스가 안 붙고 터키어 접미사인 ~오글루가 붙으면(예를 들어 축구선수 코스타스 미트로글루, 호주의 그리스계 축구선수인 안게 포스테크글루) 그 사람은 거의 이때 그리스로 넘어온 사람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10] 로잔 조약에서 양국은 각국에 남은 이들의 신앙 및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해놓았지만 당시 터키를 통치 중이던 군사 정권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11] Πομάκοι,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슬람으로 개종한 불가리아인에 기원을 둔 슬라브계 무슬림 민족이다. 불가리아인이 이들의 기원인 고로 이들의 언어는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불가리아 남부 루프 방언과 동일하다.[12] 이쪽은 불가리아 본토에서도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13] 그리스 내 무슬림 중에서는 이러한 통계를 그리스의 반터키, 반이슬람 정서에 의해 축소된 통계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어쩌면 겉으로만 정교회로 개종한 척 연기하면서 이슬람 신앙을 비밀리에 계속 유지하다가 훗날 무슬림으로 커밍아웃한 경우도 있을 듯싶다.[14] 물론 그리스-터키 간 갈등으로 인해 민족간의 싸움이 일어나서, 많은 이들이 떠나기는 했지만, 강압적인 추방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계는 있었으며, 터키 정부는 도데카니사 제도에 최대 15,000명 가량의 터키인이 거주한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