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페르시아 전쟁
1. 개요
7세기에 일어난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 동로마 제국은 큰 위기에 몰렸으나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반격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2. 배경
포카스의 치세 8년 동안 동로마 제국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국고는 바닥났고 민심 역시 바닥을 기었다. 돈이 없으니 당연히 군대 또한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이전 마우리키아누스 시절 발칸 전쟁의 실패로 발칸 반도의 넓은 영토는 공중분해되었으며 북쪽 슬라브, 불가리아 등이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페르시아는 동로마 제국을 도발하며 힘을 키워갔다.
3. 전개
3.1.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
603년 포카스 시절 시작된 페르시아의 공격은 시도때도 없이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의 황제 호스로의 목적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부활과 동로마 제국의 정복이었다.[1] 그것은 곧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의미했고 동로마 제국은 좋으나 싫으나 이러한 악연을 끊기 위해서는 전쟁에 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3.2. 악화되는 동방의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카르타고 총독인 헤라클리우스는 608년 카르타고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610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해 즉위했다(자세한 사항은 헤라클리우스 문서 참조).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라도 당장에 암울한 상황을 타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처음에 아나톨리아를 프리스쿠스 장군, 시리아와 이집트를 자신의 사촌인 니케타스에게 맡겨 방어하게 하였으나 실패했고, 이 지역들은 페르시아에 점령되었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는데 즉위한 해인 610년 시리아의 주도이자 5대 교구중 하나인 유서깊은 도시 안티오크가 넘어갔으며 곧 카파도키아 주도인 카이사레아 역시 함락되었다. 611년 황제가 몸소 이끄는 군대가 카이사레아에서 페르시아군과 격돌해 격퇴시키긴 했으나 이미 많은 영토를 잃은 후였다. 얼마 후 황제의 황후가 사망하고 헤라클리우스는 조카딸과 재혼했는데, 613년 헤라클리우스는 다시 결정적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안티오크에서 그는 페르시아에게 크게 패배하였고 시리아가 페르시아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비슷한 시기 아르메니아에서 페르시아군은 로마세력을 축출하고 친 페르시아계 관리를 두어 아르메니아를 로마로부터 완전 차단하고 북부 아나톨리아의 관문인 타르소스를 함락해 아나톨리아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호스로는 시리아 공략 2년만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기독교 최대 성지인 예루살렘이 존재하는 곳이었고 이 지역이 돌파당하면 바로 비진틴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인 이집트가 위험해졌다. 하지만 결국 예루살렘은 포위 공격 3주만에 함락당하여 9만명이 학살당하고 기독교 최대의 성물인 예수가 못 박혔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마저 페르시아에 약탈당하기에 이른다.
3.3. 서방의 상황
이러한 전황의 악화는 서방도 마찬가지였다. 발칸 전쟁 실패의 여파로 밀려내려온 슬라브족의 행렬은 아바르족 등 까지 달고 내려와 동로마 제국 발칸 북부의 주요도시 시르미움이 함락당했고 싱기두눔과 나이수스와 같은 유서깊은 도시들도 파괴되었다. 슬라브족은 이카이아 반도까지 밀고 내려와 크레타 섬까지 진출했다.614년에는 페르시아의 팔레스타인 공격과 함께 달마티아-일리리아의 주요 도시인 살로나가 함락되어 일리리쿰에 로마세력이 완전히 말소되었으며 617년 상황을 타개하고자 직접 회담에 나선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아바르족의 배신에 의해 목숨을 빼앗길 뻔 했다. 그리고 멀리서는 스페인에서 서고트족이 영토를 회복하고자 밀고 내려와 유스티니아누스가 정복한 영토를 잠식했다. 이탈리아도 여타 이민족 문제로 시끄럽기는 매한가지. 그나마 북아프리카는 안전하다는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3.4. 이집트, 함락되다
결국 이러한 상황 악화는 최악의 상황을 일으켰다. 황제의 사촌인 니케타스가 이끄는 군대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 619년 이집트의 관문요새인 펠루시움이 페르시아 기병대에 함락당하였고, 전쟁내내 전장이 되본 적 없는 곡창지대 이집트마저 페르시아의 칼날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결국 610년, 역시 5대 교구이자 주요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는 총대주교와 니케타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협정에 의해 페르시아에 점령당했으며 페르시아군은 서쪽으로 밀고들어가 키레나이카까지 함락당하고 말았다.
3.5. 위기에 처한 콘스탄티노플
한편 페르시아의 분견대는 아나톨리아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카파도키아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서쪽으로 밀고들어가 보스포루스 해협까지 당도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과 바로 마주보고 있는 칼케돈을 점령하였으며, 이것은 곧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나팔이었다. 이 때 황제는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 제국의 존망을 걱정해 호스로에게 휴전제의를 하였으나 호스로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곧 태도를 바꿔 엄청난 공물을 요구했고 헤라클리우스는 수락했다. 헤라클리우스는 이 기간동안 공물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군대를 재편성해 반격의 칼날을 갈았으며 호스로는 그의 페르세폴리스인 다스타게르드로 돌아갔다.
3.6. 반격의 칼날
처음 헤라클리우스는 자신의 본거지인 북아프리카로 돌아가 힘을 키울 생각을 하였으나 총대주교인 세르기우스의 격렬한 반대로 생각을 바꿨다. 일단 그는 전쟁과 포카스의 학정으로 인해 망가진 재정을 복구시키기로 했다. 막무가내로 관리들의 월급을 절반으로 줄였고 이집트가 함락된 시점에서 힘들어진 곡물 수입으로 인해 수도에서 행하는 곡물 배급도 중단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조치에도 망가진 재정을 회복시키기는 매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총대주교 세르기우스와 의논하고 그의 허락하에 교회의 재산에 손을 대어 재정을 복구하기로 하였다. 다음으로 그가 개편한건 행정제도였다. 고대부터 내려온 속주 제대가 속주의 대규모 이탈로 인해[2]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어지자 헤라클리우스는 테마제란 행정제를 실시하였다. 테마 제도는 각 지역을 테마라는 일정한 단위로 묶고 그 지역에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해 거주하게 하고 대신 주민들에게 군역의 의무를 주어 각자 자신들의 땅을 보호케하는 일종의 둔전병 제도였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그간 사용했던 기동 용병타격대가 아닌 자국 상비군을 부릴 수 있게 되어 군사적인 면에서 비용절감 효과를 크게 보았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가 반격에 사용한 것은 대부분 용병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헤라클리우스는 크고 작은 개혁으로 동로마 제국의 국고를 채워가기 시작했고, 채워진 국고는 곧 군사개혁에 투자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그간 패배에도 불구하고 땅을 내주더라도 병력을 아낀다는 생각으로 군대를 아껴왔고 이전 제국의 3/4 이상의 군인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은 동로마 제국이 영토를 탈환하는데 매우 큰 기여를 했다. 619년 헤라클리우스는 드디어 트라키아에서 군대를 소집했다. 그는 아바르족에 20만의 금화를 보내 평화를 얻어내어 서방을 안정시켰고 장엄한 미사를 치룬 후 5만 결사대와 함께 619년 봄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원정길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율리아누스 이후 250년 만에 처음으로 격퇴가 아닌 원정을 떠난 황제가 되었다.[3]
3.7. 이수스 전투
헤라클리우스는 수도 바로 맞은편의 칼케돈에 포진해있는 페르시아군을 즉각 공격하지 않고,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접견지대에 있는 이소스에 함대와 함께 상륙했다. 이소스 주변 크고 작은 요새에 주둔해있던 동로마 반격군이 주력군과 합류했고, 이 소식을 들은 페르시아 사령관 샤흐르바라즈는 곧장 이소스로 진격했다. 그 동안 여름 헤라클리우스는 이곳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으며 그간 크게 중시되지 않았던 궁기병대를 중심적으로 육성했고, 이는 전쟁 내내 그를 큰 승리로 이끈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페르시아군이 곧 당도했고 그들의 포위로 인해 전투는 시작됐다.
헤라클리우스는 기동대에게 페르시아 측면을 포위하라 명했고 훈련된 로마군은 오랜 원정으로 지친 페르시아군을 포위해 비교적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로마가 페르시아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후 헤라클리우스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장 아나톨리아를 넘어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이소스에서 패한 페르시아군은 군대를 재집결시켜 그들을 추격했으며 아나톨리아 요새에 주둔해있던 페르시아군도 합류해 로마군을 추격했다. 결국 아르메니아에서 두 제국군은 접전을 펼쳤고 다시 로마군이 승리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군은 아나톨리아에 어느정도 영향력을 회복하고 아르메니아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축출할 수 있었다.
3.8. 메소포타미아 전역
이듬해 겨울, 헤라클리우스는 할리스 강으로 퇴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뇌물을 주어 잠재워둔 아바르 족이 트라키아를 침공했단 소식이 들려왔고 그는 급히 카파도키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수도로 향해 그들과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더 많은 뇌물을 먹인 후에야 그는 다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다. 623년 3월 봄 그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출병했고 호스로 2세는 역시 휴전을 거부하고 전쟁을 속행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5천의 군사를 새로 모집한 헤라클리우스는 트레비존드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진격했고 페르시아의 성지인 간자크를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드빈을 함락한 로마군 앞에 페르시아군이 나타났지만 4만의 병력밖에 없었던 호스로는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명령을 내렸으며 페르시아의 성지는 그대로 파괴되고 철저히 약탈당하였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방해로 그는 수도인 크테시폰까지 향하지 못하고 이듬해 겨울 아르메니아로 퇴각해 군세를 보충할 수 밖에 없었다.
624년 봄 헤라클리우스는 재출병했지만 병력을 보충한 페르시아의 방해로 진격은 더욱 힘들어졌다. 메소포타미아와 메디나에서 3회에 걸친 대규모 회전이 일어났고 모두 로마의 승리로 끝났지만 페르시아의 끈질긴 추격으로 결국 황제는 철군해 반 호수에서 겨울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헤라클리우스는 겨울을 이용해 재점령한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를 군사테마화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암울한 소식도 전해졌는데 고트족이 동로마 제국의 스페인 지역 최후의 요새인 카르타고 노바를 점령했다는 소식이었다.
625년 봄 황제는 재차 출병했고 저항없이 티그리스 강을 도하해 페르시아의 주요 도시 아미다를 함락한 후 콘스탄티노플에 자신의 안위를 전하였다. 페르시아군은 로마의 진격을 우려해 유프라테스의 다리를 파괴했지만 여울목을 건넌 로마군이 추격해오자 사루스 강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페르시아군은 침착하게 대처해 샤흐르바라즈의 지휘 아래 로마군을 기습했고 로마군은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군을 독려했고, 저녁때까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결국 로마군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4. 결과
이후 로마군은 세바스테이아로 진격했고 페르시아군은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아나톨리아에서 본국으로 철수했다. 동로마 제국은 빼앗긴 성유물을 모두 되찾았으며 이후 니네베 전투에서도 패한 호스로 2세가 궁정 쿠데타로 축출되고 새로운 샤한샤가 된 카바드 2세가 화친을 청하게 되면서 로마-페르시아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두 나라가 아닌 이슬람 제국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도 안 되어 이슬람 세력은 지친 두 제국을 향해 칼을 들었으며, 전쟁이 끝난 지 30년 뒤엔 이미 사산조는 멸망했고 로마는 다시는 아시아의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