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
傭兵, Mercenary
1. 개요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자국 혹은 타국의 무장 세력 간의 전쟁에 참여하는 일을 하는 직업 혹은 그 직업 종사자를 뜻하는 말.
2. 정의
정규 혹은 계약직 공무원의 일종으로 직접 채용하는 모병제 혹은 징병제하에서 자원 입대한 정규 군인은 용병이 아니다. 따라서 외국인이 타국 군대에 복무한다고 해서 무조건 용병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또한 개인이라든지 전문적인 집단이 아니라 봉건 영주가 금전적 이익을 목표로 용병처럼 고용되는 경우들 또한 있었다.
일반적인 직업군인과, '용병'으로 칭하는 집단과의 차이는 국가에 직속되어있는가와 금전적 계약을 중시하는가[1] 라고 할 수 있다. 용병은 보수만 주어지면 의뢰주와의 약속대로 의뢰받은 업무를 해주기 때문에, 의뢰주가 누구든 관계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당연히 직업 특성상 대부분 군사력이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며, 따로 옵션으로 이것도 수행해주겠다고 사전에 계약을 맺거나 혹은 계약을 중도 변경하지 않는 한 일반적인 정규군이 하는 재난 구호 업무 등은 시킬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일반적인 직업군인은 '직업 공무원'이라면 용병은 '기업', 그것도 '민간 기업'에 비유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애매한 부분도 많지만 스페인 내전의 국제 여단이나 무자헤딘 같은 의용군도 원칙적으로 용병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들은 이익 관계와 급여가 아니라 특정한 개인적, 이데올로기적, 신념적 이유로 남의 전쟁에 자진해서 뛰어든 것이며, 이들의 경우도 대부분 어떤 방식으로든 해당 분쟁이 끝나면 민간인 신분으로 복귀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용병은 순전히 금전적 이유로, 장기 복무하는 전문 군인들을 의미한다.
3. 역사
3.1. 고대
용병은 고대 국가 시절부터 존재해 온, 인류가 가진 오래된 직업 중 하나다.
고대 이집트도 용병대를 운용했으며,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또한 용병을 많이 사용했다. 중장보병 위주였던 그리스는 주로 스키타이 출신의 기병과 크레타 섬 출신 궁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잘 써먹었고, 반대로 궁병이나 기병이 강했던 페르시아에서는 그리스 본토의 폴리스나 그 식민도시 출신의 중장보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일이 많다.[2] 이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페르시아의 왕자 小 키루스가 고용한 1만여 명의 그리스 용병대다. 이 용병들은 반란을 일으킨 키루스를 따라 제국의 서쪽 끝인 리디아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행군했고, 그곳에서 왕의 군대와 맞붙었다. 그러나 고용주인 키루스는 전투 중 전사하고, 남은 용병들은 티그리스 강을 따라 방향을 돌려 아르메니아, 캅카스 지역을 통해 흑해 연안으로 탈출한다. 적지 한가운데에서 페르시아군 추격대를 따돌리고,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토착민들의 공격을 버텨내며 행군한 이 과정은 용병대의 장교들 중 한 명이었던 저술가 크세노폰이 남긴 책 아나바시스(Anabasis)를 통해 매우 유명해졌다.
그리스 이후 용병으로 유명해진 고대 국가는 역시 카르타고다. 카르타고는 상업 국가로, 물론 자체적인 시민병이나 상비군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병력을 용병에 의존했다.[3] 카르타고가 용병으로 주로 고용했던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과 켈트족, 그리고 누미디아 기병대였다. 이들은 상당히 잘 싸웠지만, 월급 문제로 인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용병에 의존하는 것의 취약점을 드러내게 하기도 했다. 물론 오랫동안 용병들을 다뤄본 경험으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도 조기에 제압하는 등 용병단의 발호로 나라가 휘청인 적까지는 없었다.
상비군 중심의 편성을 고집했던 로마군 역시 적지 않은 용병들을 고용했다. 강력했던 보병, 공병에 비해 기병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탓에 누미디아 기병, 갈리아 기병, 게르만 기병을 수시로 고용하여 기병 전력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투석병, 투창병, 궁수같이 상대적으로 고도로 숙련된 특수한 기술이 요구되던 병과들이 용병으로 고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로도스섬 출신 투석병은 그리스군·마케도니아군에서, 발레아레스 섬 출신 투석병들은 로마군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다만 예시로 든 발레아레스 투석병이나 갈리아 기병대, 소아시아의 궁병대 등은 로마의 정복이 완료된 이후에는 속주병 혹은 보조병이 되었으며, 보조병은 용병과는 '''전혀''' 다르다.
제정 말기에는 이미 공화정 말기에 진행된 중산 계급의 몰락과 국가 시스템의 붕괴로 용병의 비중이 올라갔는데, 18~19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저술가들은 이들 용병들의 정치적 타락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취급했으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용병들의 발호를 로마 몰락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4] 에 더 가깝게 보고 있다. 애당초 말기의 로마가 국방을 용병에게 의존했다는 썰부터가 붕괴한 지 오래다. 게르만족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용병대가 아니라 그냥 로마 정규군으로서 복무한 것이 대부분이며, 이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로마에서 찾았지 게르만족에서 찾지 않았다. 당장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기둥이라 불린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도 게르만족 혈통이었지만 로마의 장군답게 살다 죽었다.
3.2. 중세
서로마가 붕괴되어 게르만족이 서유럽을 채우던 중세 초기부터, 중세 성기에 해당하는 12세기까지도 유럽의 주력 병력은 봉건제 원칙에 따라 소집된 '''자유민'''이었다. 게르만족은 자기자신의 무장을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재산을 충분히 소유한 자유민들은 전사로써 역할을 겸하는 상무적 전통을 이어왔는데, 이런 전통이 기존 서로마의 습속과 결합해 나타난 것이 봉건주의였다. 서로마가 붕괴되었다고는 하지만 서유럽 땅에 살던 로마인들이 갑자기 다 죽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다 농노가 된 것도 아니었고, 재산을 충분히 가진 사람들은 자유민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자유민은 농노보다는 낫다해도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고, 투구와 방패와 창 혹은 활 정도만 간신히 갖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좀 더 부유하면 흉갑 등 다른 갑옷도 갖춰입어서 중보병이 되는 식. 더 간혹 부유한 자유민이나 영주의 눈에 어떻게든 띄어서 후원을 받은 자유민은 말과 중갑을 갖춰 기사가 되기도 했다. 이런 중무장한 자유민 병사를 통칭하는 말이 맨앳암즈.
하지만 10-13세기를 거치면서 자유도시가 발전하고 상업혁명이 일어나 경제가 발전하여 사회가 변하자 봉건주의에 따른 군사 행정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일단 봉건주의 원칙하에서 봉신이 주군을 위해 전사로 봉사하는 날은 1년에 40일[5] 였다. 부족 시절이나 동네 왕초 영주들끼리 싸우는 8-10세기에는 40일 동안 싸우는 거로 충분했지만, 중앙 집권이 발전해서 부족이나 동네 수준을 넘는 전쟁이 벌어지자 40일로는 턱도 없게 모자라게 된다. 그 기간을 초과하면 다음 해의 복무일수를 땡겨온다던가, 월급을 줘야한다던가, 아니면 애초에 주군이 전부 먹여살려주고 있어야한다던가하는 제약이 걸려 있었다. 중세 성기를 거치면서 학문과 법학이 발전하고 머리가 커진 자유민들이 법전을 따져가며 대가 없이는 군복무도 안해준다고 소리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정예병력이던 기사들도 점점 계급화되어서 하라는 군복무는 안하고 돈 버는데에 골몰하기 시작하니 병력으로써 질이 점점 떨어져 군주들 입장에선 여간 골치가 아니었다.
그 때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영주 중에서는 자기 집에 얹혀 사는 병사들을 놀리는게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자유민들 중에서는 농사 지을 땅은 모자란데 무장은 있으니 다른 방식으로 먹고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자는 영주가 직접 운영한 용병대가 되고, 후자는 company로 표현[6] 되는 용병단으로 결성된다. 그 외에도 장자상속제가 자리잡으며 상속권이 없는 영주의 둘째, 셋째 아들들이 용병으로 투신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용병들이 결성된다.
그런 상황에서 생긴 세금이 '방패세'인데, 군복무를 면하는 대신 금품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물론 정치적으로 극히 다원화되어 있던 서유럽의 특성상, 자유민들이 한번에 좌르륵 방패세를 내고 군면제가 된 건 아니었고, 국가나 지방에 따라 다른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서양 중세의 역사가 복잡한 만큼 용병의 활용이나 유명한 용병 부대도 무수히 많으며, 국가와 시대에 따라 그 형태도 천차만별이었다. 이 와중에 돈으로 사는 떠돌이 전투원 수준을 넘어 뛰어난 무예와 전술, 집단 대오, 적에 대한 무자비함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성, 그리고 고용주에 대한 신의성실성까지 겸비한 중세 용병의 완성형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이가 바로 합스부르크와 오랜 교전으로 다져진 스위스 용병이다.
3.3. 중세 후기
'''용병의 최전성기.'''
르네상스기로 들어가면 독일의 란츠크네히트처럼 국가에서 관리하는 용병대도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는 프랑스에서 헌병을 뜻하는 "장다룸"은 원래 왕이 고용한 용병이었다고 하며, 또한 동로마 제국은 신체 강건한 노르만 출신 용병들을 근위대로도 활용하였는데 그게 바로 바랑기안 근위대이다. 바랑기안 근위대는 높은 충성도로 명성이 높았는데,[7] 1204년 베네치아군과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도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탈리아 전쟁 초기의 이탈리아에서도 '콘도티에로'라는 계약직 용병대가 성행했는데 젊은 나이에 용병대장이 된 후에 밀라노 공작까지 오르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유명하다.
르네상스 시기의 전쟁은 주로 용병들에 의해 치뤄진 탓에 일부러 용병들이 짜고 나라 간의 분쟁을 일으켜 '''싸우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쌍방 피해 없이 보수만 타 먹는 일도 많았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고용한 이탈리아 출신 용병대가 이런 짓을 많이 벌였다고하며 그 밖에도 예전부터 독일, 프랑스, 영국인 등등도 이탈리아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벌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두 용병단이 붙은 전투에서 서로 칼을 두어번 휘두른 뒤 평원에서 쉰 후 보수로 서로 함께 술을 먹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마키아벨리는 "용병을 쓰는 것이 최악, 동맹군은 악, 그리고 오직 국민병만이 최선.", "용병 대장은 유능할 경우 왕의 지위가 위험하며, 무능할 경우 왕의 돈이 아까우므로 결국 쓸모가 없다."라고 일갈하며 용병이란 군체계가 그야말로 최악의 체계이며, 개념박힌 국가라면 절대 피해야 할 군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가 용병들의 먹튀를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반만 맞는 말이다. 결정적으로, 마키아벨리가 대안으로 내놓은 시민군은 용병보다 잘 싸우기는 커녕 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점이 큰 문제였다. 당시의 시민병은 전투 경험이나 전문성 면에서도 용병들보다 떨어지며 열세에 있었지만, 그보다도 시민병은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더욱 불리했다. 몇 십 km 떨어진 곳에서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몇 년이 넘는 기간동안 계속 전쟁을 치른다고 하면 농민이건 상인이건 생계가 곤란해지고[8] , 이는 곧 세수의 감소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나 영주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시민은 생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으로 용병을 고용하는 게 전쟁을 더 오래 수행할 수 있고 국가 내적인 피해도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다보니 각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전쟁이 장기화되고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민병은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로마 제국도 같은 과정을 밟았다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모병제로 전환하기 오래전인 마리우스 시대에 시민병은 사실상 도태되기 시작했다. 물론 징집된 시민병의 개념을 넘어선 상비군 시스템을 사용한다면 저런 문제는 극복되나, 당시의 국가들의 재정이 상비군 시스템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용병이 결국 최선의 선택이었다.이러한 정치적 사정이 프리랜서(용병단)가 활약할 만한 환경을 조성했다. 15~16세기 유럽 대부분의 전쟁터는 프리랜서들의 무대였다. 하지만 애국심이나 승리에 대한 열정 따위는 10원어치도 없는 이 프리랜서들의 전쟁은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누가 빨리 기동해서 주요 전략적 요지를 점령하느냐에 달렸으며 시일만 질질 끌다가 퇴각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도 양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전면전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제한전(limited war)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저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전장에서 용병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저런 지뢰(?) 용병단의 반대 급부로 독일의 란츠크네히트나 스위스의 유명한 스위스 용병대는 충성심과 신용도가 높기로 유명했다. 이들이 충성심으로 유명할 수 있었던 것은 반대로 충성심과 신용도가 떨어지는 용병도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현대에도 물건 조사 제대로 안 했다가 지뢰 밟는 것과 특별히 차이가 없는 것이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스페인 정규군이 임금 체불과 보급 악화로 인해 반란 직전까지 몰렸을 때도 용병들은 돈은 잘 주니까(...) 별다른 불평 없이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베네치아는 용병에 의한 정치 불안을 겪지 않으면서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교황 등이 연합한 캉브레 동맹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이탈리아 용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면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베네치아의 관료들이 경험을 통해 용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은 대규모의 용병을 거느린 용병대장과 계약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소규모의 단위인 '랜스(lance)'별로[9] 각각 직접 계약을 체결했고, 용병대장은 자기가 직접 거느린 병력이 아니라 관료들이 그때 그때 배정해 준 '랜스'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10] 또한 관료들은 전체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을 계획-관리했으며, 각 랜스와의 계약을 장기화함으로써 고용주인 베네치아에 일체감과 충성심을 가질 수 있도록 했고, 또한 정기적으로 점호와 사열을 통해 각 랜스가 계약한 대로의 인원과 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이는 그 후의 국가들이 관료체계를 통해 정규군을 운영하는 방식의 모범이 되었다. 대국이 용병대에 의해 나라가 좌지우지되는 경우도 드물었으며, 마키아벨리 자신이 강조한 '징집된 민병'이 용병들에게 처참히 발리는 바람에 피렌체도 결국 용병을 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기 후반이 되자 스위스 용병대나 란츠크네히트의 위명도 점차 사라져갔지만, 유럽 대륙에서 용병이라는 개념 자체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멀쩡하게 건재하고 있었다.''' 당장 17세기 초반에 일어난 대전쟁인 30년 전쟁만 봐도, 이 전쟁 자체가 '''근대적 국민 국가의 성립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11] 당연히 이 시기의 전쟁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국민병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까지도 대다수의 군대는 순수하게 소득을 찾아 참전한 용병들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 동맹군들의 경우 용병에 의존하는 비율이 굉장히 높았으며, 이 용병들은 마키아벨리의 편견과 같은 허당 무리가 아니라 도리어 무시무시하게 잘 싸웠다. 사실 이 때야말로 유럽 용병의 전성기로 이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다.[12][13] 심지어는 국민병 제도의 근간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스웨덴군마저도 국민병 못지않게 용병을 많이 사용했을 정도로, 이 시기까지도 용병은 사실상 유럽 각국 군의 중추였다. 주로 독일인과 스코틀랜드인들이 유럽 각국에서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스코틀랜드의 경우 전체 스코틀랜드 남성의 15%인 약 4만 명 가량이 30년 전쟁 기간 동안 용병 노릇을 했다. 30년 전쟁 때 종군한 스코틀랜드 용병들은 전쟁 말기 본국의 상황이 찰스 1세와 급진 개신교 세력의 갈등으로 엉망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와 결국 언약도 혁명과 잉글랜드 내전 때 의회파가 본격적으로 크롬웰의 지휘 아래 신모범군을 창설할 때 까지 그나마 영국에서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병사들로 맹활약했다.
3.3.1. 유럽 이외의 지역
지금까지 글을 보면 대부분 유럽 위주로 나와있지만 북아프리카도 유럽인 용병을 고용하고 고대 유럽도 북아프리카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또한 아시아나 다른 대륙도 용병이 없을 리 없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명나라군에도 용병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흑인에서 백인까지 골고루 있었으며 이들은 돈을 받고 명나라군에서 싸웠다. 류성룡은 이런 인종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이라 신기해했는데 명나라 장수는 놀리듯이 좀 뻥을 쳤고 이걸 고스란히 징비록에 기록했는데 "이들은 보통 한족과 달리 강인하고 한참 굶어도 힘이 딸리지 않으며 화낼 때 무섭게 싸운다오." 라는 투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태국도 용병으로 스페인과 네덜란드 백인 용병을 고용해 싸웠고, 이들이 유럽으로 가서 태국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게 남아있다. 용병들은 코끼리를 타면서 총을 쏘며 버마군(현재 미얀마)과 격돌했던 일을 쓰고 있는데 이들의 기록을 봐도 당시 태국군 군대 체제가 상당히 잘 잡혀있으며 전략이나 여러 요소에서도 유럽 강대국 못지않게 잘 잡혀 있었기에 아시아 야만족 전쟁이라 단순하게 생각했다가 고생했고 되려 많이 배웠다고 적혀있다.
또한 무굴제국도 일부 백인 용병을 고용하여 싸웠다. 여기서 백인 용병들은 야만인이라고 무굴 제국군을 우습게 보다가 큰 코다쳤다고 할 정도[14] 였고, 고아를 비롯하여 아시아 일부를 식민지삼던 포르투갈이 무굴제국으로 쳐들어가려고 할때 무굴제국에서 용병으로 참전한 포르투갈인 일부가 포르투갈로 돌아가서 거리도 멀거니와 중남미랑 다르게 그들의 힘이나 무기들은 결코 포르투갈에 밀리지 않으니 우리만 큰 피해가 갈것이라고 반대했을 정도였다. 즉 용병들은 이 당시 돈벌기 위하여 아시아로 간 게 아니라 밀정으로서 임무를 띄고 파병되기도 했다.
오세아니아에서도 여러 나라들 전쟁에 백인들이 용병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좀 더 고대로 가서 중국 삼국시대 무렵에 나오곤 하는 객장[15] 은 어떻게 보면 변형된 용병단으로 볼 수 있다.
3.4. 근대
17세기가 지나고 18세기가 되어서까지도 용병은 유럽의 군대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물론 이전 세기의 발렌슈타인처럼 유력한 귀족 한둘이 용병대를 좌지우지하는 일은 없어졌고, 중앙정부가 군사 업무에 관한 권한을 확실히 장악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군대의 성질을 국민군으로 바꿔놓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비교적 민족 의식이 강했던 프랑스를 봐도, 프랑스 혁명 이전의 경우 전체 보병 연대의 무려 '''3분의 1'''이 외국인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도 민족적 정체성이 적었던 독일의 영방국가들이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보다도 더 심했다.
또한 근대 용병집단들 중 특기할 만한 곳이 있으니, 독일의 헤센-카셀 방백국이다.[16] 헤센-카셀은 본래 독일의 소규모 연방국가 중 하나였는데,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용병업을 국책사업으로 삼았다. 본래 농업국가였는데, 30년 전쟁의 여파로 국토가 초토화되어 먹고 사는것조차 힘겨워지고 활용할 자원이 인력뿐이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 즉 전격 현실판 '''용병 국가.''' 헤센-카셀은 고작해야 도시 한두 개 정도 크기의 아주 작은 연방국가였지만 대대적인 징집으로 전 국민의 무려 7%정도를 계속 군인으로 유지했으며 이를 유럽 각국의 여러 영주들에게 용병으로 대여해주며 외교적 안정과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7년 전쟁때는 또 국토가 초토화되었는데, 이 여파로 군국주의화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그리고 7년 전쟁 이후에는 일반 병사들도 장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급료는 꽤 많이 받았고[17] 복무하면 가족들의 세금은 면제되었지만, 문제는 세금을 못내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고 기간이 무려 24년이었다는 점이다. 징병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엄청난 세금을 내야했다.(250탈러 이상 재산 보유자 및 기술자 등 필수직은 면제) 약탈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실제로는 약탈을 할 수 있으면 했으며 특히 미국 독립전쟁에서는 약탈로 악명이 높았다. 또 헤센 카셀은 신교도 국가에만 고용된다는 원칙이 있었고, 이슬람 세력을 상대할때만 예외였다. 헤센군이 유명해진 것은 당대의 강국인 영국과 자주 계약을 하면서 바로 그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기 때문인데, 이때문에 미국에서 헤센인은 용병과 동의어로 쓰이며 슬리피 할로우에 나오는 목 없는 기사의 정체와 어새신 크리드 3에서 나오는 양측 특수병인 헤센 병사가 바로 이들이다. 물론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미국측이 공식적으로 헤센병 부대를 고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에게 미국의 차고 넘치는 빈 땅을 준다고 꼬드겨 탈영과 해산을 종용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미 대륙의회에서는 헤센 병사들이 미군 쪽으로 전향하는 대가로 50 에이커의 토지와 시민권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미국 독립전쟁 이후로도 헤센 카셀은 여전히 용병업을 계속했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에도 참전했고, 1798년 아일랜드 독립 운동에도 영국편으로 참전했다. 헤센카셀이 용병업을 그만둔 것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헤센-카셀을 점령한 뒤의 일이다. 이후 헤센 카셀은 선제후국이 되었지만 빌헬름 9세[18] 가 쫓겨나고 베스트팔렌 왕국이 되었으며,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빌헬름 1세도 복귀했지만 용병업은 그만두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각국에 불어닥친 민족주의의 바람과 함께 이러한 국가 용병 군대의 입지는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용병은 유럽의 군사 제도 속에서 주목할 만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도 영국군은 군 내부에 독일인 병사들로 이루어진 KGL(King's German Legion)을 유지하고 있었고, 일종의 기업군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인도 회사군은 아예 영국 정규군의 명령 체계를 따르지 않는 사설 군대였다.
3.5. 20세기 이후
민족주의의 시대 동안 사그라들었던 용병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봇물 터지듯 잇달았던 신생 독립국 붐에 의해서다. 다수 신생국이 정비되지 못한 군대 체계를 대신하여 용병을 필요로 했고 현대 병기에 익숙한 유럽의 전직 군인들이 그 수요를 충당시켰다. 대표적인 사례로 콩고 내전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백인우월주의속에서 흑인들과 벌인 전쟁이 크게 터졌고,[19] 공산 국가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용군, 원조군이라는 허울좋은 명목 아래 용병을 만들어 제3세계에 흩뿌렸다.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맹주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은 냉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가끔 이들의 영향 아래 있는 국가들에서 대리전이 벌어졌고, 그들이 흩뿌린 용병들은 어딘가에서 거의 항상 싸우는 것이 진정한 냉전기의 모습이었다.[20]
특히 50~70년대에 걸쳐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전쟁과 내전은 모조리 용병이 관련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시장은 넘쳐났으므로 현대적 용병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또한 이들은 신생국 정부 뿐만 아니라 구 종주국 정부와도 계약을 맺고 경제적 이권 보장, 거류민 보호 등에 종사하였으며 이것이 현재의 민간군사기업(PMC)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장단점
4.1. 장점
현대 노동경제학에서는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징병제와 모병제보다는 용병 고용이 그 사회에 최대한의 효율을 가져다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용병의 오랜 시간에 걸친 학습(learning by doing)과 기술 계발을 통해 군사 직종에 최적화된 노동력이라는 특징 때문. 용병을 활용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이론이 상당부분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가정이기에 용병제는 용병제 나름의 취약한 부분이 있다. 원래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수많은 가정과 전제조건이 딸린, 세상에는 절대없는 비현실적 아바타세상을 만들어 연구한다. 물론 의외로 다른 학문들도 비슷하긴 하다.
특히 근대적인 개념의 민족국가(nation state)가 등장하고 국민군이 보편화되기 이전인 전근대의 국가들은 그 정도의 군대를 항상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경우가 드물었으며, 특수한 능력과 기술을 다른 민족들에서 '구입'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누미디아족 기마술, 갈리아족과 게르만족의 완력과 체력, 로도스섬과 발레아레스섬의 투석, 제노바의 쇠뇌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전쟁터에서 구르다보니 전투력이 좋고 일반적인 징집병보다 사기도 높으며, 체력이나 용맹함 등 용병이 갖춘 덕목은 일반적인 병사들보다 훨씬 유용했다. 이러한 특징은 종종 특정 민족의 특기로 간주되었다.
예컨대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 용병을 고용해서 잘 써먹었고(문제는 내전에서 그 짓을 했다는 것), 스파르타 용병대장 크산티포스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레굴루스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한니발도 갈리아 용병을 잘 활용했고, 누미디아 기병들은 포에니 전쟁 시기 카르타고와 로마 모두에서 고용되어 전쟁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동로마 제국 역시 페체네그 기마궁수, 노르만 중기병 등의 용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를 토착군대와 조합시켜 주변국을 캐관광 태우는데 성공했다. 중국에서도 사실상 후한대에서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기병의 핵심 전력을 차지한 것은 북방 유목민족 용병이었던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봉건제 사회인 중세 유럽에서 용병들은 상비군으로 활용되기 좋은 군대였기 때문에 영주와 국왕들에게 자주 고용되었으며 카탈루냐 용병대 같은 경우 초창기 오스만 제국과 동로마 제국을 둘 다 버로우시켰고 16세기 헝가리의 용병대인 검은 군대는 보헤미아, 폴란드와 2대 1로 싸우고도 가볍게 승리했으며 급기야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여 그 수도인 빈을 함락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30년 전쟁 당시의 발렌슈타인으로, 용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30년 전쟁 중 독일 최고의 실력자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국민군을 창설한 것으로 유명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대도 상당수는 용병으로 채우고 있었다.
일부의 주장과는 달리 잘 관리된 용병 집단은 용맹성과 신뢰성은 어느시대이든지 믿을 수 있는 요소다. 크고 작은 전쟁들이 수시로 일어났고 수많은 용병단이 신규설립 되거나 해체되는 때였다. 당연히 용병단간에 서로 부유한 왕조, 가문들과 계약을 이뤄내려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만일 어떤 용병단에 대해 비겁하거나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용병을 필요로하는 고용주들에게 퍼질 경우엔 계약을 맺을 수 없으며, 계약 하더라도 열약한 조건하에 이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용맹성, 신뢰성이 우수하다고 알려지면 자신들과 계약하려는 고객들이 늘어나고 높은 보수나 선불지급, 장기계약 같은, 더 나은 고용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로인해 용병단의 수입이 올라가고 소속병사들에게 더 나은 급여와 근무조건도 제시할 수 있는데 실력있는 병사 영입에도 유리해지며 용병단의 질적상승에도 연결된다. 이러한 긍정적 순환효과 때문에 용병단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용맹하며 신뢰성이 있는지를 국가와 가문들에 어필하고 다녔는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실전에서 증명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스위스 용병, 네팔 구르카 용병이다.이렇게 잘 관리된 용병 집단은 자신들의 출신지에 대한 소속감, 자존심도 있지만, 무엇보다 용병으로서 비겁한 모습,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21]
유럽사를 기준으로 보면 중세 후기부터 아예 '용병 수출'을 국가 산업으로 육성했다 할 만큼 용병들이 많이 쏟아져 나온 지방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중세 후기에는 스위스, 근세에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와 우크라이나, 발칸반도, 그리고 헤세 같은 독일계 공국 등 지역적인 연고가 확실히 있고, 근세 후기로 넘어가면 이런 용병 수출의 전통이 자국 내의 상무적 이데올로기, 사회적 자의식 (ethos)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끼쳤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용병 배출 지방에서 나온 용병들이 비겁하거나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면 그 민족 용병 전체의 위신에 흠집을 내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고향 후배들의 '취직'길까지 막아버리기 때문에 이런 용병 수출의 전통은 부대, 개인 단위로 내려가면 더더욱 열심히 싸울 동기 기제가 된다. 그래서 보통 이들은 자신의 용병 부대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싸웠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코 디 로마 사건 당시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끌다가 189명 중 42명만이 살아남은 스위스 근위병이나(이 사건 이후 대대로 바티칸 경비병은 스위스 용병을 쓴다), 프랑스 혁명 때 튈르리 궁을 지키고 있다가 몰살당한 786명의 스위스 창병 근위병.[22] 또한 용병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충성심을 자랑한 바랑인 근위대[23] 나 중세 헝가리 왕국 최후의 명군이었던 마차시 1세의 용병이자 근위대였으며 상비군이었던 검은 군대 같은 사례도 있다. 때문에 한탕 해먹고 튀는 양아치들이 아니라 '제대로 된 용병집단'을 고용할 경우, (급료만 제대로 지불한다면) 정규군 못지 않게 믿을만한 군대를 얻을 수도 있다. 즉 중세봉건시대에 주군에게 충성하는 기사도, 무사도와는 다른 용병단 특유의 프로의식이라는 것도 생겨났는데, 돈을 받았으면 받은 만큼은 해야한다는 상도(商道)와 많이 비슷하다. 당장 이라크 전쟁 중 팔루자 전투 당시 모두가 주저하고 있을 때 시내의 미군을 지원하기 위한 증원 전력의 최선봉에는 악재가 있었지만[24] 스스로 나선 블랙워터들이 있었다.
이런 돈이 지급되는 동안은 확실한 충성이란 것 때문에 역으로 근위대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흔했다. 자국의 정치세력에 휘둘릴수 있는 자국민보다 돈이면 되는 용병이 더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도 정규군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용병이 싸고 또 용병을 고용하면 용병의 군사활동은 정규군의 것과는 별도로 계산되기 때문에 자국 내의 반전여론을 억제하기 쉽다. 다만 PMC 수준으로 넘어가면 오히려 정규군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기는 한다. 그래도 여전히 정규군과는 달리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제약이 덜해서 많이 계약한다. 특히나 보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성향 탓에 정규군은 엉덩이가 무겁고 뭘하든간에 규정과 절차가 복잡한데, 민간군사기업은 매우 발빠르게 움직이는 장점이 있다.
4.2. 단점
나라 꼴이 막장으로 치달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봉급이 나오지 않거나 전황이 밀려버리면 우루루 이탈해버리거나, 본국의 정치가 불안정한 때에는 용병대장이 쿠데타로 직접 나라를 접수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용병에 의해 나라가 멸망한 경우라면 대표적으로 서로마 제국. 게르만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소년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폐위되면서 멸망했다. 이탈리아의 용병대장 스포르차는 귀족의 지위까지 오랐고, 마침내는 밀라노 공국 공작의 딸과 결혼하여 자기 자신이 공작이 되기까지 했다. 다만 이런 문제는 용병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어서, 맘루크, 예니체리 등 노예군을 상비군으로 유지한 이슬람 국가들의 경우에도, 결국 해당 군대가 실권을 잡고 왕조를 재창조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 정규군이라 하더라도 지휘관이 이를 이용해 나라를 접수하는 사례는 많다.'''"전쟁은 도적[25]
을 만들고, 평화는 그들을 교수형에 처한다."'''
'''마키아벨리'''
일반적으로 용병은 통제가 잘 안되기 때문에 약탈을 비롯한 잔혹행위를 심하게 저지른다.[26][27] 용병들은 약탈을 비롯한 잔혹행위를 고용주가 막으려 들면 오히려 고용주를 죽이고, 심지어 고용주의 가족들이나 그 영지의 사람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강간하고 약탈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서 고용주들은 용병들에게 승리하면 며칠간의 자유로운 약탈을 비롯한 잔혹행위를 통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등의 방법으로 용병들을 겨우 통제했었다. 그렇지만,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용병들은 약탈을 덜 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한데 여기서 계약이 끝나면 그 다음은 누가 그들을 고용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가 미래의 고용주가 될 수도 있는데 시덥잖게 약탈을 시도했다가 척을 지면 앞날이 보장되지 않게 된다. 그냥 당장 좀 벌어보고자 약탈하는 경우가 절대 다수였지만, 그래도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는 약탈이 비교적 적었다.
이것과 별개로 봉급이 밀리는 경우 이탈하거나 태업을 하며, 최종적으로 봉급을 고용주한테 강제징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건 고용주가 문제긴 하지만.
사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시민병들은 프랑스 본국의 혼란으로 원활한 보급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의 전적으로 그들에게 '해방된' 지역으로부터 보급을 의존했고 잔혹행위와 약탈이 용병들에 비해 적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런 면에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나폴레옹이 악인들을 뛰어난 군인으로 여겨 총애한 면도 있고 본인부터가 해적 가문의 후예[28] 라 그럴 수도 있다. 이러한 현지조달에 의존하는 방식은 비옥한 지역에서는 보급에 얽매이지 않는 기동으로 강한 힘을 발휘했지만 가난한 지역인 스페인과 러시아에서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현재의 PMC(Private Military Company)들은 이런 용병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직원들은 대부분 세계의 유명 특수부대 출신들인데다 대원 개개인 한명이 각자 전투의 프로다. 그러나 여전히 윤리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일례로 유명한 PMC '블랙워터'의 경우 이라크에서 자신들이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되게 하기도 했다. 제일 황당한 케이스는 이라크 시내에서 차타고 가다가 길이 막힌다는 이유로 도심 한복판에서 차에서 내려, '''인근 민간인들 상대로 무차별 난사'''를 한 사건이다. 이 일이 얼마나 황당했는지, '''미국 국회에서 청문회까지 열렸고''', 그 때 블랙워터 측에서 내놓은 주장이 '전쟁 중이었으니까 자기 보호를 했다'라는 주장이었다. 블랙워터는 2년간 195건의 총기사건에 휘말렸고, 이는 모두 블랙워터에서 먼저 발포한 사건이었다.[29]
5. 오늘날의 용병
현대에서는 인도주의의 기본이 되는 제네바 조약조차도 용병을 전투원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잡힐 경우 '''전쟁 포로로 인정해 주지도 않고 있다.''' 관련 조항은 제네바 협약 제1 의정서에 명시되어 있으며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30]
현재는 사적인 용병 조직은 표면상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민간군사기업(PMC)로 전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상 별 차이는 없지만. 여하튼 용병에 대해 돈받고 오는 녀석들이라고 나쁘게 보는 시각도 많아서인지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 전투 때 포로가 된 외인부대원들은 베트민에게 더더욱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프랑스군 포로들도 학대당했지만 외인부대는 따로 둬서 더 악랄하게 패고 학대했던 게 돈만 주면 싸우는 녀석들이라고 한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외인부대도 맹렬하게 싸워 무려 1만명이 넘게 전사했기에 베트민에게는 더더욱 이가 갈렸을 듯 하다.
물론 이런 규정이 있다고 해서 용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용병의 대부분이 활동하는 곳은 제네바 협약 따위는 무시하는 집단들이 분쟁을 벌이는 곳이라 정규군이 잡혔다고 해도 잔혹하게 살해되는 것은 똑같기 때문. 애시당초 용병으로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정규군이 제 기능을 못하고 전시국제법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자기 목숨을 담보로 큰 돈을 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국이 고용하는 구르카족 용병부대나 프랑스의 외인부대등은 일단 형식적으로는 용병과 다름없다. 다만 구성원들이 용병이고 핵심 지휘관을 자국인으로 쓰며 편제도 일단 정규군으로 운용하기에 국제법상으로는 정식 군인이나 외국인 의용병으로 취급되며 정식 민병대/의용병의 조직은 국제법상으로는 정규군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현대의 스위스 근위대는 본래 스위스 용병이었으나, 위의 국제법 뿐만 아니라 스위스 국내법에서도 용병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어서 형식상 '치안 경찰'로 분류하고 있다.
게임, 영화, 소설, 애니메이션 등에서 자주 나타나며 보수에 따라 바로 적이 되는 모습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용병대를 해산하고 새로 결성하지 않는 한, 한쪽의 용병대가 적측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30년 전쟁에서는 보수를 받지 못한 용병대가 고용주를 갈아타는 바람에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사례가 한 번 있었지만, 이조차도 보수를 주지 못한 고용주측의 문제였고 같은 신교도 진영 안에서 고용주를 바꾼 것이었지 적측에 붙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스위스 용병대는 뛰어난 전투력과 함께 충성도 높기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16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군이 로마를 공격하자 교황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괴멸된 스위스 근위대(Swiss Guard)는 지금도 회자되는 사례이다.
현재의 용병 또한 기본적으로는 이와 다를 바 없다. 특히 급여만 제대로 지급해주면 용병이 계약 중에 배신하는 경우는 손꼽아 셀 정도로 적다.
용병이 잘 관리되는가는 기본적으로 그 고용주인 정부나 전장이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상태인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는데, 현대에 용병을 고용하는 지역은 기본적으로 막장 그 자체니 난장판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31] 계약 만료 후 적대 세력에 고용되어 전 고용주에게 총부리를 겨눈 용병도 많으며 반대로 후환이 두려워 용병을 적에게 넘기거나 등 뒤에서 총을 쏜 고용주도 많다.
용병들이 전투 중, 또는 계약 만료 전에는 고용주가 먼저 계약을 어기지 않는 한 적에게 붙지 않으며, 계약을 어겼다 해도 바로 배신하는 일이 적은 이유는 용병 자체도 일종의 사업인 만큼 계약 엄수에 대한 평판이 곧 사업적 신뢰성이기 때문이다. 돈에 눈이 멀거나 고용주가 마음에 안든다고 고용주를 배신하는 행위는 해당 용병이나 단체의 경력과 평판에 큰 오점이 되어 새로운 고용주를 찾기 어렵게 하고, 설령 고용된다 해도 고용주측의 지속적인 의심의 눈초리를 사고 다음에 만난 동료들에게도 백안시당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배신당한 고용주가 완전히 몰락한 것이 아니라면 배신한 용병을 응징하려 시도할 수도 있다.[32] 특히 일부 창작물에서 용병단을 '오갈 곳 없는 떠돌이들의 모임' 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는 달리, 용병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철저한 신용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아무리 병력이 급하더라도 믿을 수 없는 자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자신의 안전을 맡기는 바보는 '''없다'''. 근대 이전까지는 주요 용병 수출국이라는 개념이 있던 것에서 알 수 있는것처럼 특정한 국가나 지역의 기존 공동체 단위로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았고[33] 여기서 계약을 위반하여 고용주측의 신뢰를 상실하는 행위는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평판까지 떨어트리는 행위로써 공동체 내부에서도 백안시당하는 행위였다는 것. 주요 용병 수출국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현대에도 주로 특수부대 전역자등이 용병의 주축을 이루면서 자신의 행동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평판과 직결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즉, 당장 몇 푼의 이익을 얻기 위해 바가지를 씌우는 장사꾼들이 장기적으로는 신용을 잃어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인 셈.[34]
대신 용병은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될 때, 항복 의사를 밝히면 어지간히 잔인한 적장을 만나거나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은 한 포로가 되어 몸값만 지불하면 풀려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때문에 용병이 돈만 밝힌다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빈사의 사자상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주요 용병수출국으로는 중세에서 근세까지는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등이 있었으며, 현재는 네팔의 구르카 족이 유명하다.[35][36] 다만 세계화로 빠르게 진행된 현대에 들어서는 '주요 수출국'이라는 개념이 희박해진 경향이 있으며, 특수부대를 전역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특수부대 출신자'''들이 프랑스의 외인부대 등에 지원하거나[37] , 큰 돈을 노리고 사설 용병업체를 통해 중동, 아프리카의 내전 현장으로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현대 용병의 '수출국'이라면, 고도의 특수전 훈련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미국, 러시아, 유럽 각국 등 군사 선진국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특수부대 전역자들은 국내 경호업체나 민간군사기업(PMC)[38] 에 취업하는 일은 많아도 외국의 외인부대 입대나 민간군사기업(PMC) 취업은 지극히 드물다. 일단 고강도 훈련은 받았어도 한국군의 특성상 실전 경험이 거의 없고, 무엇보다 '''외국어 회화'''가 가장 큰 문제다. 일부 네티즌들의 허풍(내가 아는 형님이 특전사 전역했는데 지금 블랙워터에서 일한다 등등 )때문에 많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나마 외국인이 들어가기 쉬운 프랑스 외인부대 레종 에트랑제조차 프랑스어 구사능력이 필수조건이다. 레종 에트랑제에 복무한 한국인은 찾아보면 그다지 드문 편은 아니지만, 이들 상당수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유학생 상태에서 지원했다. 국내 출간되거나 잡지에 연재된 외인부대 복무 수기 중에는 실전까지 겪었음에도 "상관이 어눌한 프랑스어만 해결되면 진급을 추천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해결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과는 달리 현대의 용병 대부분은 가난하고 내전에 시달리는 나라 출신이라 한다.
수호이 전투기 시리즈로 유명한 수호이사가 아프리카에 전투기를 팔면서 전투기를 조종할 조종사와 유지 관리 보수를 해줄 정비사를 포함한 부대를 아예 세트로 판매한 일도 있다. 덕분에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전쟁[39] 당시 러시아 출신과 우크라이나 출신 용병이 서로 수호이 전투기를 타고 격돌한 실화가 있다. 그 밖에도《에어리어88》수준의 제트 전투기 부대는 아니어도, 프로펠러기나 헬기 조종사를 구하기 어려운 나라들이 용병을 고용하고 있기도 하다.
쿠웨이트 공군에서는 F/A-18 전투기의 조종사는 쿠웨이트 공군이 직접 맡지만 정비사는 미국 해군에서 제대한 사람들을 고용해서 운용하고 있다.
또한 돈 많은 서구국가등에 고용된 용병들은 장비나 제대로 된 보급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 등에 고용될 경우 물론 그런 건 없고 본인이 알아서 다 챙겨야 한다. 그 경우에는 급료도 매우 짜서 그 돈을 가지고는 본국으로 돌아와서 넉넉하게 생활하는 것은 힘든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단, 전투는 물론 고용주측의 군대 양성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하거나, 다이아몬드 광산나 금광 등을 둘러싼 분쟁일 경우엔 이들보단 훨씬 많은 급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상대해야 할 적들이 많고 강하기 때문에 무사히 고향에 돌아갈 확률은 그만큼 떨어질 것이라는 게 문제이다.
현대에는 다른 나라 정부군이나 특수부대가 정체를 숨기고 내전지역에 용병으로 참전하기도 한다. 몇몇 사례는 확실히 드러났지만 공식적으로는 정부군이라는 증거가 없다. 이스라엘군이 앙골라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든지.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 내전의 경우 미국 특수부대가 쿠르드자치정부 무장조직인 페쉬메르가나 YPJ의 국기 패치를 성조기 대신 걸고 겉보기엔 용병인것처럼 참전하는 경우도 목격되고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 역시 이런 방식으로 시아파 민병대들 사이에서 목격되는 사례가 많다.
그 밖에 타카베 마사키(高部正樹)라는 사람이 항공자위대 출신으로써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첫 용병 생활을 시작한 이후 1990년대에 미얀마 민족분쟁(카렌 민족해방군), 보스니아 내전(크로아티아) 등에 참여했다가 2007년에 은퇴했다. 일본 밀리터리 창작물에서 용병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게 된 건 이 사람의 일대기나 회고록 등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6. 용병 목록
6.1. 현실
- 고중세의 용병
6.2. 창작물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용병/창작물 문서 참조.
7. 같이보기
8. 둘러보기
9. 외국인 선수를 일컫는 말
야구, 축구, 배구, 농구 등 단체경기를 하는 대부분의 프로 스포츠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프로와 아마추어 리그를 가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다만 '단순히 돈을 위해서만 싸워준다'는 용병의 부정적인 원래 의미와 맞물리기 때문에 현재는 '외국인 선수' 라는 말로 대체해 사용하는 쪽이 대세.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돈을 위해 싸우는 건 그 나라 선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소속팀의 진짜 정직원인 실업선수[45] 와는 달리, 법적으로도 일반적인 프로선수는 소속팀의 직원이 아니라 '개인 사업자'로서 돈을 받고 그 팀을 위해 싸워주는 것이니까 모두 용병이라고 봐야 한다.
저 위에서 말했듯이 일반적인 직업군인과, '용병'으로 칭하는 집단과의 차이는 소속의 유무라 할 수 있으며 용병은 보수만 주어지면 의뢰주와의 약속대로 의뢰 내용을 이행해준다는 것을 생각하자. 프로선수는 선수 본인 또는 소속팀의 뜻에 따라 이적을 해서 전 소속팀에 맞서기도 한다. 이런 의미라면 팀 소속의 프로선수라면 '''용병이 아닌 선수는 없다.''' 적어도 외국인 선수'''만'''을 용병이라고 말하려면 국내 선수는 고정된 소속 팀이 있어야 하고 이적은 거의 없어야 한다. 선수들이 출신지에 따라 그 연고지 팀으로 자동 편입되는 구조라면 외국인 선수만을 용병이라 할 수 있겠지만[46] 그 지역과 무관한 선수지만 전력강화를 위해 잠시 데려다 쓴 거니까 말이다.
이 명칭을 두고 1990년대부터 활성화된[47] 뒤로 '용병이라니? 스포츠 선수가 전쟁터 나가 사람 죽이는 일 하러 오는 거냐? 그럼 외국인 사원도 한국 회사에서 일하면 용병이냐?'며 명칭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고 '박지성이나 한국 선수들을 '해외진출 선수' 보통 이렇게 부르지, 한국 용병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해당 명칭이 유효한 것은 현실적으로 '''외국인 선수들이 대부분 소모품 정도로 취급을 받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느 프로스포츠 리그를 막론하고 외국인은 대체적으로 즉전감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군대에 비하자면 국내 선수들은 국내 훈련소에서 양성되고 관리받은 선수들이니 국내 선수 대부분이 국내리그에서 활약하는 특성 상 용병보다는 모병제 군인의 성격이 강하고, 외국인의 경우 이미 다른 곳에서 경력이 있는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인데다가 국내 리그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니 보다 용병의 성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모병제 체제의 군인이라면 큰 문제가 없는 이상 되도록 같이 가려고 하겠지만 용병은? 이용가치 없어지면 즉각 퇴출이다. 이런 측면에서 외국인 선수들의 처우가 용병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한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그렇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다르지 않다. 볼티모어 입장에서는 '''외국인에 불과한''' 김현수를 반쪽짜리 선수가 되든 말든 자기네들 유리한 대로만 운영하면 땡이다. 정 실력이 안되면 퇴출하면 그만이니까. 프랜차이즈로 키워본다고 해봐야 자국 선수를 키우는 게 낫지 앞날이 불투명한 외국인 키워봐야 이익되는 게 별로 없다. 게다가 자국인을 키우는 게 자국 스포츠의 발전이라는 그럴싸한 명분도 있고 말이다. 이적시 무조건 이적료를 물릴 수 있는 축구의 경우 그나마 덜하지만[48] , 엔트리 제한 등이 있는 경우 기왕 뽑을 거 뛰어난 실력의 즉전감을 뽑는게 이익이지 어중이 떠중이 데려다가 성장시키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 애당초 그럴 거면 차라리 국내 선수를 그렇게 성장시키는 게 더 싸게 먹힌다. 만일 외국인이고 뭐고 구분하지 않는다면, 자국 선수들이 바보가 되므로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해 마냥 개방적으로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필연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는 문제이며 이게 해결되려면 세계정부가 출범해 전 세계가 단일국가가 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결국 용병이라는 명칭도 이런 측면에서 사장되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그리고 사실 위에 용병이라는 말이 옳지 않다는 점(돈을 받고 싸우는게 용병이라면 국내 선수들도 다 마찬가진데?)하는 부분을 사람들이 다 몰라서 그렇게 써왔던건 아니었다. 다만 국내선수와 외국인 선수의 구분이라는 측면에서 또 보통은 프로구단에서 외국인 선수는 일종의 전력강화를 위한 히든카드 용도로 국내선수가 기본 주축이 된 상황으로 가기 때문에 "전력의 반짝 상승을 위한 일시적 외인 영입"이라는 측면을 "용병"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사용되어져 오다가 위에 언급했다시피 최근에서야 용병이란 단어의 부정적 측면이 굉장히 강조되면서 외국인 선수로 부르는게 낫다 이렇게 여론이 급 선회된 것이다.
10. 동음이의어: 用兵
병력을 부리는 일체의 행위를 가리키는 말. 쉽게 말해서 행보관이 병사들에게 땅을 파라고 시키는 것도 용병의 일종이다. 그러나 보통은 전시 병력의 전략, 전술적 운용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49] 예로부터 유능한 장수의 기본소양으로서 용병술이 부족하면 수천 목숨을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삼국지 시리즈 등 각종 전략게임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이다.
한국에선 위의 용병(傭兵)과 헷갈리는 것을 막기 위해 주로 '용병술'이라고 한다.
[1] 물론 이 경계는 상황에 따라 모호해지기도 한다. 가령 중근세에는 헤센병단처럼 군주의 직속 부대이나 해외에 용병으로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현대에도 어떤 국가들의 경우 자국의 이익을 위해 분쟁지대에 용병으로 투입되기도 한다.[2] 그렇게 한 진짜 이유는 페르시아의 대군을 그리스가 물리친 이유, 페르시아의 지배층들이 그리스 군사가 자기네 백성들보다 더 용감하다고 여겨서였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아나바시스 항목을 참조바람.[3] 이는 카르타고에서 시민권자들이 적어 시민권자 하나하나를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4] 국가재정의 악화, 인구의 감소로 인해 종전과 같은 직업군인 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말이다.[5] 게르만 관습법 시절부터 '40번의 밤이 지나는 동안' 으로 전해진 것이다.[6] 어원적으로는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어 com + '빵'이라는 의미의 어간 pan 으로 이뤄진 것으로, 함께 빵을 먹는 사람들, 즉 동료나 동업자를 뜻한다.[7]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스에 따르면, 바랑기안 근위대는 제국 토착 엘리트 병사들과 비견될 정도로 높은 충성심과 용맹함을 가지고 있으며, 황제 수호가 대대로 물려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하여 회유하기 몹시 어려우니 일찌감찌 그런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1세는 옆 성벽에 있던 독일 용병을 회유하여 간단히 수도에 입성해서 니케포로스 3세를 축출하고는 제위에 올랐다.)[8] 때문에 용병이 아닌 시민병들이 반란을 일으켜는 경우도 꽤 많았다.[9] 창기병 한명마다 여러 수행원과 보조원이 붙었기 때문에 정규 랜스 하나면 6명 정도로 이뤄진 기병 분대가 구성되었다.[10] 이러한 자유계약 용병을 지칭하는 단어가 오늘날에 와서는 계약직 노동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된 프리랜서(freelancer)이다.[11] 이때 르네 데카르트가 네덜란드에서 마우리츠 공의 휘하에 용병으로 있었다.[12] 입지전적인 용병이라면 단연 발렌슈타인이 꼽힌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사생아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부친부터가 당대의 유명한 용병대장이었고, 그 영향력으로 어린 시절에 나폴리에서 후작 작위까지 인정받았다. 그가 밀라노 공작이 된 것도 전임 공작이 후사 없이 사망한 틈을 노린 공화국을 밀어버린 결과였다. 이에 비해서 용병과는 아무 상관없는 하급귀족으로 시작한 발렌슈타인은 운 좋게 부유한 과부와 결혼해서 돈을 번 이후로는 바닥부터 용병대를 조직하고 황제와 딜을 하고, 당대 최강국들과 전쟁을 벌였다.[13] '''그러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용병으로 볼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한테만 충성을 바쳤고, 보상도 돈이 아니라 영지와 지위로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공식 직함은 용병대장 '''따위'''가 아니라 제국군 대원수 겸 프리드란트 공작 겸 메클렌부르크 공작이였다. 사비를 털어서 황제의 재정 지원을 거의 안 받으면서 활동한 발렌슈타인의 모습은 자신의 주군과 이권을 위하여 싸우는 '''제후'''에 훨씬 가깝다. 실제로 동시대 사람들은 발렌슈타인을 신성 로마 제국의 대제후이자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봤지 용병으로 보진 않았다.[14] '군략이나 군사, 장비 모두 서양에 떨어진 건 하나도 없었다. 총기들도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화약도 자체 수급하니 이걸 못 만들게 막을 수도 없다'라고 하면서 서술했다. 사실 무굴 제국은 유럽과 교류를 많이하였고 화약무기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화약무기로 무장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무굴 제국의 정복왕인 아우랑제브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에서 무기 기술자들까지 초빙해서 화약무기를 도입하고 개발했다.[15] 유비가 한때 객장신세였던 것으로 유명하다.[16] 1567년 헤센 방백국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둘은 합병해서 최종적으로는 헤센-카셀 방백국과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이 된다. 용병업은 헤센 카셀 방백국의 이야기지,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과 그 후신인 헤센 대공국과는 무관하다.[17] 헤센 병사는 한 달 급료로 소 한마리나 돼지 두 마리를 살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 일반적인 농민의 수입보다 훨씬 많았다.출처 하지만 지원병이 아니라 무려 24년의 징병제라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미국에 간 헤센인 중 상당수는 농지와 시민권을 준다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미국에 정착했다.[18] 헤센-카셀 방백국의 영주로는 빌헬름 9세지만 헤센-카셀이 헤센 선제후국이 된 뒤로는 빌헬름 1세(초대)이다.[19] 현대 용병전쟁의 갑중갑이라고 꼽히는 로디지아 내전에 참가한 로디지아군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밀덕중에서는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당시 로디지아의 상황과 이후 행동을 보면 단순히 피와 전쟁이 고파서 달려갔던 사람들 아니면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로디지아가 붕괴된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중이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몰려갔다.[20] 냉전을 비판하는 게임인, 팀포트리스 2에서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21] 만일 어떤 용병단의 병사가 비겁한 모습을 보이거나 계약상에 없는 민간인 약탈이나 학살을 벌인 경우엔 해당 용병단이 자체적으로 처벌을 가했다.[22] 프랑스 혁명 당시 '''다른 정규군은 모두 도망갔지만''' 이들만은 여전히 남아서 자리를 지켰다. 프랑스의 왕이자 고용주었던 루이 16세는 "그대들은 임무를 다했으니 철수해도 좋다."라고 했고 무장 시민들도 같은 가난한 월급쟁이 신세인 이들에게 동정적이었으니 물러서도 상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스위스 용병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성난 수만 명의 시민들을 막다가 대부분 죽고 그 결과 시민들의 화를 돋궈 시신도 처참하게 모욕당했다. 스위스의 루체른에 있는, 부르봉 가문의 문장인 백합이 그려진 방패를 껴안고 죽어가는 사자의 모습을 묘사한 '빈사의 사자상'은 이들을 표현한 것이다.[23] 이 쪽은 조금 모호한 게, 이들은 따르던 황제가 '죽을 때' 까지만 충성했다(...).[24] 블랙워터사는 4명의 용병을 작전지역으로 보내면서, 제대로 된 방탄차량은 커녕, '''지도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반 지프를 타고 목표지역의 정문을 찾아서 수차례나 빙빙 돌다가 수상하다는 것이 발각당해서 제압당했다. 더구나 이 사건의 경우는 알고봤더니 블랙워터가 받은 다음에 하위 용병 단체에 다시 하도급을 준 케이스라서, 갑을병정 놀이는 용병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25] 여기서 도적은 용병을 일컫는다.[26] 다만, 시민병이나 징집병 일부는 때로는 용병들보다 심한 경우도 가끔씩은 생기곤 했다. 대표적으로 마피아 정치를 하며 귀족들과도 패싸움을 벌이던 고대 로마의 시민병들의 잔인함(적의 시체를 잘 매장해 주는 대신 팔다리를 썰어댔다)이 용병과 용병 생활에 익숙한 그리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시민군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 독일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습적으로 민간인 및 포로 학살과 대규모 약탈과 강간을 했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의 사례'''이다. 대부분의 시민병/징집병들은 용병들보다 더 잘 통제됐고 전쟁범죄도 더 적었다.[27] 다만 잔혹행위를 심심하면 저지르던 용병들은 원래부터 그런 인간들로 유명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은 용병들의 경우는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행위를 어이없이 보기도 했다. 그냥 전쟁을 잘하던 인간들 중에 그런 인간들이 많아서 좋지 않은 이미지를 얻었을 뿐이다. [28] 나폴레옹의 야만성을 기존 귀족들은 외국은 물론 프랑스에서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29] 이 문제는 블랙워터가 특히 네이비 씰 출신이 많아서 심각하다. 그린베레 같은 경우 현지 우호 세력을 만드는 민사작전 등을 한다. 이는 겉으로 보이는 성과는 적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네이비 씰은 그냥 가서 다 때려 부수는 직접 타격을 많이 해서 눈에 보이는 전과는 많지만 민사 개념이 없어 적을 양산한다.[30] 단 현대 용병은 대부분 독자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정규군에 배속된 민간군사기업(PMC)부대원의 형태로 전투에 임하기 때문에 사실상 군인이나 다름없어 제네바 협약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도 있다.[31] 똑같은 용병 기업에서 똑같은 인물을 파견했다고 해도 치안이 정상적인 곳에서는 그냥 경비원이나 경호원이라는 직함을 받게 된다.[32] 용병의 고용 주체는 국가와 같은 거대한 세력인 경우가 많고, 이런 큰 세력은 어느 정도 세력 손실을 입더라도 쉽게 멸망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33] 말하자면, 용병 전통이 있는 마을이나 부족등의 단위로 경력자들이 마을의 젊은이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고, 이 단위로 부대를 이루어 계약을 맺고 참전하는 형태였다.[34] 더구나 이 거래가 국가나 단체의 안전과 존망이 달린 '전쟁'에 관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고용주는 그만큼 용병부대의 신용도를 철저히 따질 것이다.[35] SAS에서는 이들을 영국 시민 지원자와 동일한 정규군으로 취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네팔 현지인의 50배 이상의 월급을 노리고 건강한 구르카 마을 청년들이 매년 1000:1이 넘는 경쟁을 하는 실정에서는 '용병'으로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물론 빼어난 신체능력과 끝없는 책임감으로 돈값의 몇 배를 해내니 특별한 케이스이긴 하지만.[36] 하지만 이건 틀린 말로 이들은 용병이 아니라 엄연히 '''외인부대'''다. 외국인으로 구성되었을 뿐 한 국가의 정식 부대라 용병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인 셈. 그리고 이들에게 고액의 봉급을 받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국과 네팔의 경제력 차이로 인해 벌어진 결과일 뿐 어디까지나 봉급 자체는 일반 모병제 부대와 큰 차이가 없다.[37] 급료도 급료지만, 일정 기한을 복무하면 프랑스 시민권과 프랑스에서의 복리후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여기를 지원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38] 한국에도 PMC가 있다. 다만 간접적인 군수지원일 뿐 전투에 개입하지는 않는다.[39] 1998~2000년 사이 벌어진 전쟁. 양측의 국경 문제가 무력 충돌로 번진 결과인데 둘 다 가난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전투 양상은 화력과 기갑전력이 총동원된 대공세가 아니라 어설픈 포격을 등에 업고 보병이 투입되는 한국전쟁 초기에나 볼 법한 형태의 전투를 치렀다. 사망 및 실종자가 수만 명에 달했지만 다만 전선 쟁탈전 위주였기에 민간인 피해는 크지 않다.[40]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 때,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용병들. 주로 약탈을 노리고 참전했기 때문에 약탈을 하는 입장인 잉글랜드의 편에 서서 싸웠다. 병사들 개개인은 잉글랜드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등 다양한 출신이었으나 지휘관들은 대부분 잉글랜드인들이었다. 이들은 농민과 교회를 상대로 무자비한 살인과 강도와 강간을 저질렀으며, 이들의 포악함에 질린 프랑스 왕실은 이탈리아나 카스티야 같은 다른 나라로 보내버리려고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횡포로 인해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잉글랜드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졌으며, 결국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몰아내는 계기로 작용하였다.[41] 이름처럼 오늘날 스페인 동부 카탈루냐 지역 출신들로 이루어진 용병 부대로 원래는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아라곤 왕조가 북아프리카 원정을 하러 만들었는데, 원정 계획이 취소되면서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가 전직 성당기사단 출신의 용병 대장인 루지에로가 시칠리아를 방문하자,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여 동로마 제국과 용병 계약을 하여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이들은 매우 용맹스러워서 동로마를 위협하던 소아시아의 투르크족들을 크게 무찔렀으나, 너무 잔인하고 탐욕스러워서 동로마 주민들을 마구 약탈하고 심지어 동로마 황제를 위협하여 급료를 뜯어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영토까지 달라고 윽박지르는 바람에 동로마의 반발을 사서 결국 동로마와 싸움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루지에로가 죽는 바람에 동로마 영토를 돌아다니며 미친듯이 살육과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다가 남쪽의 도시인 아테네로 달아나 그곳에 아테네 공국을 세워 지배하던 프랑스인 귀족들을 죽여 없애고 80년 동안 아테네를 지배하였다.[42] 이들은 아부레모노토모(溢物共)라고도 부르는데, 14세기 일본의 남북조시대 무렵에 정해진 주인이나 영지가 없이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면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던 일본의 무사들이었다. 1370년에 나온 일본의 문헌인 태평기에 의하면, 이들 아부레모노들이 수천 척의 배를 타고 원나라와 고려의 여러 항구로 쳐들어가 명주(明州)와 복주(福州)의 재보를 빼앗고, 관청과 사원을 불태웠지만 원나라와 삼한(三韓: 고려)의 관리와 백성들이 아부레모노를 막지 못해 포구와 가까운 수십 개 지방이 모두 사람들이 못 살게 되어 황폐해졌다고 한다. 즉, 이 아부레모노들이 바로 고려말 왜구들이었던 것이다.[43] 그 동기가 한황실에 대한 충성심이든, 아니면 정치적인 욕망이든간에, 이들은 형식적으든 한황실의 신하이고, 실질적으로도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으므로 용병으로는 볼 수 없다.[44] 로디지아군이 용병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용한 용병부대가 유명하다.[45] 요즘은 계약직이지만 과거엔 '''정규직'''이었다. 그래서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초창기에는 은퇴 후의 안정성을 생각해서 실력이 됨에도 프로로 가지 않고 실업선수로 계속 뛰다 은퇴하고 일반 사원이 된 선수들도 있었다. 그걸 택해서 성공한 선수가 남우식이다. 반대 사례로는 은퇴 후 일반 사원으로 일하다가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사직하고 은퇴를 번복하여 프로팀으로 간 천보성이 있다. 2014년 현 시대 일본의 사회인 야구 역시 이런 원리로 운영되기 때문에, 고시엔에서 아무리 날고 긴 선수라도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사회인 야구로 가는 선수들이 적지 않다.[46] 이걸 할 수 있는 팀은 프로스포츠계에 '''없다고 봐도 된다.''' 아틀레틱 빌바오 같은 아주 특수한 팀 외에는...[47] 사실 1980년대 프로스포츠 시작과 같이 축구에서 외국선수 영입을 시작한 게 있지만 야구와 농구가 90년대 후반부터 외국선수들을 영입하면서 더 활성화되었다고 봐야 한다.[48] 덕분에 FC 포르투같이 선수 팔아서 연명하는 구단이 나올 정도다.[49] 스포츠 감독의 선수 기용과 활용도 일종의 용병술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