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파블류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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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로만 파블류첸코는 러시아의 축구선수로 포지션은 공격수다. 2020년부터 러시아 프로페셔널 풋볼 리그의 FC 즈나먀 노긴스크에서 뛰고 있다.
2. 커리어
1998년 디나모 스타브로폴에 입단하여 1999년에 데뷔하였다. 2003년에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 입단하여 2006시즌 득점왕, 2007시즌 공동득점왕을 찍으며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에선 먹어주는 공격수가 되었다.
클럽과는 달리 러시아 국가대표에선 중용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주전 스트라이커 파벨 포그렙냐크의 무릎 부상으로 기회를 잡게되고, 유로 2008 E조 예선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후반 교체투입되어 후반 24분의 페널티킥 골과 후반 28분 결승골을 넣으며 러시아를 승리로 이끌어 거스 히딩크 감독의 눈도장을 받아냈다. 이후 유로 2008 본선무대에서 총 3골을 넣으며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거듭났다.
이때의 활약이 계기가 되어 유로 2008 종료 후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의 이적 문제로 인해 합류 시점이 프리시즌이 한창이던 시기가 아니라 여름 이적시장이 닫히기 직전에 사실상 패닉바이로 영입되어 적응에 애를 먹어야 했다.
2008년 9월 15일 아스톤 빌라전에서 데뷔한 후 9월 24일 칼링컵 3라운드 뉴캐슬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 리그에서 좀처럼 득점하지 못하며 시즌 초반 2무6패로 최하위로 떨어진 토트넘 부진의 원흉으로 비판을 받다가 2008년 10월 27일 프리미어리그 9라운드 볼턴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프리미어리그 첫 골을 넣었지만 이후에도 골을 잘 넣지 못하면서 리그에서는 28경기 5골에 그치며 매우 부진했다. 결국 겨울 이적시장에서 로비 킨과 저메인 데포가 컴백하며 후반기에는 벤치로 밀리는 일이 많아졌다.
리그와는 정반대로 컵대회에서는 밥값을 했다. 칼링컵 6경기 6골에 FA컵 2경기 3골을 기록하며 국내 컵대회에서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며 토트넘을 2년 연속 칼링컵 결승으로 이끄는 1등 공신이 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칼링컵 결승에서만 득점하지 못하고 나머지 경기에서는 모두 득점했다.
영국 생활에 대해 많이 힘들어하는 듯 하였다. 러시아어만 할 줄 알았던 당시 파블류첸코는 영어 정도야 6개월이면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중에 같은 동유럽 권인 네마냐 비디치와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비디치가 "6개월 같은 소리하네" 라고 말해서 멘붕에 빠졌다고 한다.[1] 해리 레드냅 감독의 영어 지시를 이해 못해서 그라운드에 고립된 상황에 놓이는 상황이 자주 보였고, 그리고 또 무엇보다 가족들도 영국에서 적응을 못했다. 특히 아내가 러시아를 무척 그리워 했다고 한다.
2009년 5월 16일 토트넘의 시즌 마지막 홈경기였던 맨체스터 시티전에서 종료 15분을 남기고 교체되었는데 벤치로 합류하지 않고 곧바로 터널으로 직행해 해리 레드냅 감독으로부터 경기를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한 팬들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공개적인 디스를 받았다. 이에 대해 파블류첸코는 사과를 했고 교체 지시가 아닌 자신의 플레이에 화가 나서 그랬다고 해명했다.
2009-10 시즌 피터 크라우치가 영입되며 파블류첸코는 공격수 4옵션으로 전락했다. 전반기에는 칼링컵 아니면 벤치에 있거나 명단제외를 당하며 거의 경기에서 보이지 않았고, 겨울 이적시장에서의 이적설이 끊이지 않았다. 로코모티브 모스크바,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AS 로마, AC 밀란, 헤르타 BSC, 버밍엄 시티,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그리고 친정팀인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로의 이적설이 나왔다. 파블류첸코는 구단이 왜 자신을 이적 명단에 올리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2010년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크라우치가 적은 득점으로 비판받고 로비 킨이 셀틱으로 임대가고 아이두르 구드욘센이 임대온 가운데 1월 23일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FA컵 32강에서 교체출전하여 득점했다. 그리고 2월 21일 프리미어리그 위건 원정에서 교체출전하여 팀 승리의 쐐기를 박는 2골을 터뜨렸다. 2월 24일 볼튼과의 FA컵 16강 재경기에서는 간만에 선발출장하여 2골을 터뜨렸고 토트넘을 8강으로 이끌었다. 2월 28일 에버튼과의 리그 경기에서 크라우치를 제치고 시즌 첫 리그 선발출장해 선제골을 터뜨려 2월에만 3경기 5골을 기록하며 단숨에 토트넘의 난세영웅으로 등극했다.
점차 선발출전 비중이 늘어난 파블류첸코는 상승세를 이어가며 3월에는 리그 블랙번전에서 2골, 풀럼과의 FA컵 8강전 재경기에서 1골을 터뜨렸다. 4월에는 득점은 없었지만 첼시와의 홈경기에서 도움 2개로 팀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파블류첸코의 활약에 힘입어 토트넘은 4위로 시즌을 마쳐 48년 만에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다.
그럼에도 2010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리버풀 FC의 요시 베나윤과 맞트레이드당할 뻔하기도 하였으며, 포르투갈 축구팀인 스포르팅 리스본 임대설까지 나도는 등 그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10/11 시즌 토트넘 핫스퍼의 공격수들이 하나같이 골을 못넣고 있던 상황에서 그나마 그들중에는 골을 나름 넣어주고있어서 입지를 다시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레드냅 감독과의 불화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으며, 언론에 대놓고 토트넘과 계약은 없을 것이라고 선포를 했다. 덩달아 레드냅 감독은 내가 활약을 하든 뭘 하든 신경을 안 쓴다라고 말했다. 당시 파블류첸코의 성적은 18경기 (선발은 9경기) 5골이라는 불화를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리그에서 총 10골 4도움을 기록했다.
결국 11/12 시즌중 맨체스터 시티에서 임대되어온 엠마누엘 아데바요르에게 주전 원톱 자리에서 밀리고 코치진과 불화를 겪은끝에 고국인 러시아의 FC 로코모티브 모스크바로 750만 파운드(약 120억원)에 이적이 확정되었다. 그는 토트넘에서 총 111경기에서 40골을 넣었다.
2013년 7월 24일 국가대표 은퇴를 확정했다.
2015년 7월 15일 쿠반 크라스노다르 이적이 확정되었다.
2016년 6월에 우랄 예카테린부르크에 입단하였다. 2017년 5월 30일 러시아 3부리그의 아라라트 모스크바로 이적하였다. 2017년 11월에 상호계약 해지를 하였다. 이후 2018년 8월 31일 러시아 4부리그의 즈나먀 노긴스크로 이적하였다. 프로 선수가 아닌 파트-타임 선수로 뛸 것이며, 홈 경기에서만 뛸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3달간 다시 아라라트로 이적하였다가 다시 즈나먀로 돌아왔다. 2020-21시즌 즈나먀 노긴스크가 3부리그로 승격하자, 프로무대로 복귀하게 되었다. 러시아 국대에서 활약하던 추억의 선수인 알렉산드르 사메도프, 레나트 얀바예프, 알렉산드르 셰슈호프와 같이 뛰게 되었다.
3. 기록
3.1. 우승 기록
'''2회 우승'''
- 러시안 컵 (2): 2003, 2015
3.2. 개인 기록
-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2): 2005-06, 2006-07
4. 경기장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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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남으로 아내의 이름은 라리사이다. 그리고 딸이 한 명 있는데 이름은 크리스티나이다. 전형적인 딸바보로 축구 훈련이 끝나자 마자 딸을 보러 가는 게 하루 중에 제일 행복한 일이라고 한다.
2008년에 블라디미르 푸틴이 이끌던 통합 러시아당 후보로 출마해서 68%의 지지율을 받고 당선이 됐다. 파블류첸코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유일한 이유는 국제 경제로 인해 자신의 연봉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본인의 당선 선언문을 보면 "제가 축구 선수이기 때문에 법안을 제출하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일을 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으나 축구와 관련한 스포츠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언제나 곁에서 도울 준비가 돼 있습니다"라고 한다.
5. 관련 문서
[1] 비디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적 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서 뛰었는데 이는 당시 파블류첸코의 소속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