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레드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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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잉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7년에 버밍엄 시티 FC 감독을 맡았다.
프리미어리그의 여러 팀을 맡았는데, 그가 감독직이었던 639경기는 역대 3위이며 현역 감독중에는 벵거에 이어 2위이다.[1][2]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축구 감독.[3]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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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햄 유소년 시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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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햄 선수 시절.
1958년부터 토트넘 유소년팀에서 축구를 시작해 1962년부터 웨스트햄 유스팀으로 이적하고 1964년에 론 그린우드 감독의 부름을 받고 1군팀에 데뷔하였으며 웨스트햄에서 8시즌 동안 149경기 7골을 기록하였다. 1972년 본머스로 이적해 4시즌 동안 101경기 5골을 기록하였다. 이후 브렌트퍼드, 시애틀 사운더스를 거쳐 1982년 본머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2.2. 감독 경력
2.2.1. 본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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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머스 감독시절 모습.
현역 시절인 1976~1979년까지 시애틀 사운더스의 선수 겸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선수생활 은퇴 후인 1982년부터 당시 3부 리그 팀인 AFC 본머스의 코치로 시작하여 1983/84 시즌 도중에 돈 메그슨 감독이 물러나자 감독이 되어 감독 첫 시즌이었던 1984년 1월 4일 FA컵 3라운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2-0으로 꺾는 위력을 보여준 바 있었고, 1987년에 3부 리그에서 평균 97점을 올리고 우승하여 2부 리그로 승격했으나 한 번도 1부 리그에 승격하지 못했다. 1990년 5월 5일에 당시 승격을 앞둔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1-0으로 져서 3부 리그로 도로 강등당했다. 레드냅 감독은 1991/92 시즌을 끝으로 경질되었다.
2.2.2. 웨스트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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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햄 수석코치 시절. 오른쪽이 빌리 본즈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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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햄 감독 시절.
이후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에서 과거 친정팀 동료였던 빌리 본즈 감독 곁에서 수석코치로 일하면서 1993년에 팀의 프리미어리그 승격에 공헌하였고, 1994년부터 감독이 되어 프랭크 램파드, 리오 퍼디난드, 조 콜, 파올로 디 카니오 등의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여 프리미어리그에서 중위권을 유지했다.
2.2.3. 포츠머스 1기 ~ 사우스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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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만다리치 회장과 함께.
2002년 포츠머스 FC의 감독으로 부임해서 팀을 풋볼 리그1(현 풋볼 리그 챔피언십)에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시켰고, 2003-04시즌을 13위로 마감함으로써 중위권의 괜찮은 성적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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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당시 회장인 밀란 만다리치와의 불화 등으로 인해 포츠머스의 원수뻘 팀인 사우스햄튼 FC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사우스햄튼에서는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사우스햄튼의 강등에 일조하고 말았다. 그리고 포츠머스 팬들은 그를 '레드냅 요원' 이라면서 찬양하기 시작했다.(..)
2.2.4. 포츠머스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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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에 다시 포츠머스의 감독으로 복귀, 2006년부터 팀을 인수한 프랑스계 유대인 사업가 알레상드르 가이다마크 구단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솔 캠벨 등의 명선수들을 영입하여 전력을 다져 2008년 FA컵 우승을 이뤄내었다.
2.2.5. 토트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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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2무6패로 꼴찌였던 토트넘 핫스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4] 토트넘 감독 부임 첫 경기에서 볼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며 데뷔전에서 첫 승, 그리고 토트넘의 리그 첫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3일 후 아스날과의 북런던 더비였는데 난타전 끝에 4-4로 비겼다. 3일 뒤에는 무패로 리그 선두였던 리버풀에 2-1 역전승을 거두며 리그 첫 패배를 안겼다. 맨시티 원정에서도 승리하며 4경기 동안 3승1무를 거뒀고, 강등권에서 빠져나왔다. 토트넘에서 첫 시즌 전임 라모스 시절 흑역사인 초반 8경기 승점 2점의 암울했던 시기를 극복하며 유로파리그 마지노선인 7위 풀럼에 승점 1점 차로 뒤진 8위로 마감했다. 2009/10시즌 루카 모드리치나 가레스 베일[5] 등을 발굴하여 '''토트넘의 챔피언스리그 진출'''이라는 성과를 세운다. 그리고 2010/11시즌 조별 라운드에서 인터 밀란, 16강에서 AC 밀란을 차례로 꺾으며 8강에 진출했다. 아쉽게도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준결승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리그에서는 2월까지 4위권 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했으나 챔피언스리그와 병행하며 경기력이 지난시즌만 못했고, 리그 10경기에서 1승만 거두는 부진에 빠지며 5위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2011/12시즌 초반 2경기 맨체스터의 두 팀을 만나 각각 0-3, 1-5로 대패를 당했지만, 맨시티에서 임대로 데려온 아데바요르가 맹활약을 펼치며 전반기 20경기 동안 14승3무3패를 거두며 2위 맨유와 승점이 같은 3위를 기록했다.
토트넘에서의 성과로 인해 잉글랜드 감독 후보로도 거론되었고 본인도 잉글랜드 감독을 맡길 원했던 것 같지만 결국 2012년 4월 30일 웨스트브롬위치의 로이 호지슨이 선임되며 성사되지 못했다.[6]
25라운드 뉴캐슬에 5-0 대승을 거둘 때까지만 해도 4, 5위 권과 승점 10점 차로 넉넉하게 앞선 3위를 기록하며 챔스 직행이 유력했다. FA컵을 병행하기는 했지만 유로파리그에서 조별리그 탈락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여유가 있을 법했다. 하지만 아스날 원정 2-5 패배를 시작으로 9경기에서 1승에 그치며 같은 기간 7연승, 6연승을 거둔 아스날과 뉴캐슬에 밀려 5위로 내려갔다. 다행히 마지막 4경기를 잘 치러내며 4위를 기록하였으나 첼시 FC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인해 유로파로 밀려났다. FA컵에서도 준결승에서 첼시에 5:1 참패를 당했다. 시즌 종료 후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원한 토트넘은 후반기의 아쉬운 모습으로 인하여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목전에서 놓친 레드냅에게 한계를 느꼈는지 첼시에서는 실패했지만 한창 젊은 감독었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를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그와 결별을 선언한다.
2.2.6. Q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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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계약해지 이후 마크 휴즈 감독의 후임으로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레드냅의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 때의 화려한 족적은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2012-13 시즌을 참고하자.
이후 한 시즌 만에 승격 플레이오프를 통해 다시 팀을 1부리그로 승격시키면서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바로 강등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데다 타랍과의 갈등 등으로 시끄러워 다시 까인 채로 2015년 2월 3일 사임했다. 무릎 수술을 앞두고 있어서 팀 훈련을 매일 돌볼 수 없다고 사임 이유를 밝혔다.
2.2.7. 요르단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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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마추어 팀인 윔본 타운 FC의 단장과 더비 카운티의 고문으로 일하다 2016년부터 2018 러시아 월드컵 예선을 위해 요르단 국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3월 24일에 방글라데시를 8-0으로 꺾어 첫승을 거뒀지만 3월 28일 경기에서 호주에게 1-5로 대패당하면서 최종예선 진출은 실패했다.
2.2.8. 버밍엄 시티
버밍엄 시티 FC가 EFL 챔피언십 2016~17 시즌 3경기를 남겨 두고 강등권 근처에서 헤매자 지안프랑코 졸라 감독이 자진사퇴하였고, 구단은 이 공백을 메우고 강등권에서 탈출하기 위해 레드냅을 데려 온다. 레드냅은 강등당하면 감독 급여를 받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그의 지도 아래 버밍엄은 남은 경기에서 2승 1패를 기록하며 19위로 챔피언십에 잔류했다.
하지만 17/18시즌이 시작한 뒤 연패 책임을 물어 경질되었다. 이후 인터뷰를 통해 은퇴 의사를 내비쳤다.
3. 수상
3.1. 감독
- AFC 본머스
- 풋볼 리그 1: 1986-87
- 풋볼 리그 트로피: 1983-84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 UEFA 인터토토컵: 1999
- 포츠머스 FC
- 풋볼 리그 챔피언쉽: 2002-03
- FA컵: 2007-08
3.2. 개인 수상
-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감독: 2009-10
-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감독: 2004년 4월ㆍ10월, 2005년 3월, 2006년 4월, 2009년 8월, 2011년 11월ㆍ12월
4. 이야깃거리
- 프랭크 램파드의 이모부이다. 그래서 그가 웨스트 햄의 감독일 때 램파드는 빽(...)으로 경기에 나온다고 많은 비난을 받다가 레드냅이 경질된 후 첼시 FC로 이적하여 대성하게 된다.
- 웨스트 햄 시절 자신을 욕하는 관중에게 '답답하면 니들이 뛰든지'를 시전했다가 역관광 당한 전설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문서 참고. 다만 이후의 인터뷰에 따르면 반쯤은 장난겸 팬서비스에 가까웠다고 한다.
- 부업으로 축구 칼럼을 쓰고 있다.
- 토트넘 핫스퍼 유스 출신에 감독까지 역임했지만, 위에도 말했듯이 골수 아스날팬이다. 아들 제이미 레드냅 역시 아스날팬.[7] 폼피시절까진 칼럼이나 인터뷰에서 아스날과 벵거를 칭찬하는 일이 많았으나 토튼햄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로는 드물어졌다.
- 다수의 언론매체를 통해 감독이 뭘 어떻게 가르치든 싹수 있는 선수가 좋은 성적을 만든다는 지론을 고수한다. 그래서 어딘가 선수 폼이 떨어진 포지션이 생기면 그 선수의 폼 회복이 아닌, 즉전력감 대체자원의 영입을 더 선호하는 성향을 지속적으로 보였다. 이로 인해 베스트 11의 질을 유지하는데에는 정평이 나 있으나, 반대로 자기가 더 이상 주전급이 아니라고 판단한 자원, 또는 유망주들은 시즌 내내 기회를 받질 못해 폼이 떨어져버리는 경우가 많다[8] 그로 인해 시즌 초반에 베스트 전력을 필두로 승리를 차곡차곡 쌓다가 1군 몇몇 선수가 부상당하고 그 공백을 폼 떨어진 나머지 선수들로 메꾸느라 시즌 후반을 날려버리는 양상을 보인다. 한 경기를 이길 전력을 짜는 것에는 능하나, 한 시즌을 보면서 선수들을 관리하고, 미래를 위해 유망주를 육성하고 영입자금을 관리하는 면에서는 한계를 보이는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 238패로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패를 기록한 감독이다. 2위는 200패의 샘 앨러다이스
[1] 2017-2018시즌 1월 기준으로 역대 1위는 811경기를 감독한 아르센 벵거. 2위는 알렉스 퍼거슨의 810경기이다.[2] 중간중간 공백기가 있었고 QPR의 챔피언십시절은 프리미어리그 감독 기간에 당연히 포함이 안되므로 실질적으로 보면 더 많은 경기를 감독했다. 항상 잉글랜드 최상위권에서 머무르는 감독이다. 물론 나이가 꽤 있어서 오래전부터 활동했기에 역대 3위인 것이고, 7살 어린 샘 알라다이스나 16살이나 어린 데이비드 모예스, 마크 휴즈 등에게 밀릴 수도 있다.[3] 이는 EPL이 외국인 감독을 우대하는 풍토도 한몫한다. 스페인 라리가나 이탈리아 세리에 A가 자국 감독을 선호하는 것과는 대조적. 결국 이는 잉글랜드 감독들의 대륙경쟁에서 뒤쳐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탈리아나 독일 스페인등 연배 비슷한 월드 클래스 감독들과 커리어나 트로피 개수를 비교해보면 레드냅은 따위라 불러도 모자랄정도로 초라해진다. 예를 들어 아리고 사키, 조반니 트라파토니, 파비오 카펠로, 마르첼로 리피, 유프 하인케스, 오트마어 히츠펠트, 프란츠 베켄바워, 비센테 델 보스케, 알렉스 퍼거슨, 아르센 벵거 등. 사실 그렇게 아이러니하다고는 볼 수 없다. 막상 레드냅보다 뛰어난 잉글랜드 감독을 뽑으라면 의외로 찾기 힘들다. 상기했다시피 EPL은 예전부터 외국인 감독을 우대한터라 밥 페이즐리 이후 명장 계보가 끊겼다. 모예스는 스코티시고 마틴 오닐은 북아일랜드사람이다. 어찌됐건 레드냅은 토트넘을 최초로 챔스에 진출시켰고 챔스 8강은 포체티노가 부임하기 전까지 토트넘의 최고기록인데다가 프리미어리그 감독 경기수도 퍼거슨과 벵거에 이은 역대 3위이다. 항상 잉글랜드 국가대표 감독 후보에도 거론되는 인물. 사실 한국에서 유난히 빨간 돼지라며 비난받는 경향은 있다.[4] 그리고 그가 토트넘에 부임하면서 저메인 데포, 니코 크란차르 같은 포츠머스 선수들을 헐값에 다 데려가는 바람에 포츠머스의 다음시즌 강등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5] 원래 윙백이었던 베일을 수비력 문제로 인해 윙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했는데, 이게 '''대박이 터졌다.''' 그러나 그는 베일을 다시 윙백으로 돌리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현재로써는 정말 천만다행이다.[6] 사실 한참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을때 위에서 말했던것처럼 극도로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었는데, 이것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일 가능성도 있다.[7] 제이미 레드냅은 리버풀 레전드에다 토튼햄에서도 뛰어 아스날까스러운 발언을 자주 하는 편이다.[8] 가장 성공적이라는 토트넘 시절만 봐도 니코 크란차르, 베드란 촐루카, 지오반니 도스 산토스 등이 이 사례에 해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