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5세
1. 개요
독일어: Heinrich V. (하인리히 5세)
이탈리아어: Enrico V (엔리코 5세)
라틴어: Henricus V (헨리쿠스 5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잘리어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감금하여 강제 퇴위시킨 후 제위에 올랐다.
아버지 시대에 이어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 및 제국내 반란으로 고군 분투했으나 아버지에 비해 현명하지 못한 판단력과 근시안적인 안목, 그리고 소심한 성격 탓에 결국 교황의 의도대로 놀아나며 사실상 서임권 투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보름스 협약이 맺어짐에 따라 서임권 투쟁이 잠정 종식되었으며, 이로 인해 황권이 약화되었다.
2. 생애
2.1. 반란과 즉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베르타 사이에서 다섯번째 자녀로 태어났으며, 유년기에 살아남은 아들 중에서 차남이었다. 살아남은 형제 중 장남인 콘라트[1] 가 후계자로서 제국을 물려받을 예정이었지만 섣부른 콘라트는 아버지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콘라트에게 실망한 하인리히 4세는 차남인 하인리히 5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하인리히 4세는 1099년 1월 6일 아헨에서 하인리히 5세를 독일 왕에 즉위시켰다. 하인리히 4세는 아들 하인리히 5세에게 자신의 치세 동안 제국의 일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5세는 변덕스러운 아버지가 자신에게 확실히 제위를 물려줄지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이때 하인리히 4세의 적들이 그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특히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투쟁을 벌이던 교황 파스칼 2세가 지원을 보장하면서 하인리히 5세를 교묘히 부추겼다. 결국 하인리히 5세는 황제인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를 감금하여 강제 퇴위시킨 후 정권을 잡았다. 하인리히 4세는 아들에 의해 유폐되었으나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그는 탈출에 성공하여 로트링겐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왕위를 거의 되찾을 뻔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가 급사하는 바람에 상황은 정리되었다.
독일의 질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쾰른의 시민들은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트 2세에 대항한 원정은 이 반역자들을 그의 무릎 앞에 꿇게 만들었다.
2.2. 동방
1107년에 하인리히 5세는 보헤미아의 공작 보리보주 2세를 복권시키기 위해 군사 원정을 실시했으며 불완전하게 성공했다. 그는 보리보주 공작을 붙잡고 있던 스바토플루크 사자공을 소환했다. 보리보주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석방되었으며 스바토플루크의 아들의 대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바토플루크가 보헤미아로 돌아오자, 그는 왕위를 맡게 되었다. 1108년에는 알모스 왕자를 대신하여 헝가리의 왕 콜로만과 전쟁을 했다. 폴란드의 왕 볼레수아프 3세가 공격해 왔고, 스바토플루크와 보리보주가 하인리히 5세에게 군사 작전을 그만두도록 압력을 넣었다. 대신에 하인리히 5세는 공물을 바치도록 하기 위해 폴란드를 침공했으나 글로고브와 헌스펠드에서 패배했다. 1110년에는 보헤미아 공작의 지위를 안전하게 물려받았다.
2.3. 서임권 투쟁
하인리히 5세의 치세에서 주요 관심사항은 아버지 때에 심각한 논란이 벌어졌던 서임권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인리히를 지원하는 교황 세력은 그가 파스칼 2세가 갱신한 칙령을 승인하길 원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주교를 계속 임명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이 독일에서 열리는 회의에 오는 것을 원했다. 파스칼 2세는 망설이다가 트와에서 열린 회의에서 서임식이 금지된 다음에는 독일보다 프랑스를 더 선호했다. 문제는 황제와 교황의 협상이 실패한 1110년까지 해결되지 않았고 파스칼 2세는 칙령을 새로 발표했으며 하인리히 5세는 이탈리아를 대규모의 군대로 침공했다.
3. 가족
1110년에 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와 결혼했지만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기 때문에 하인리히 5세의 사후 잘리어 왕가는 단절되고 만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