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3세
독일어: Konrad III. (콘라트 3세)
이탈리아어: Corrado III (코라도 3세)
라틴어: Conradus III (콘라두스 3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첫 독일 왕이다. 아버지는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였으며, 어머니는 하인리히 4세의 딸 아그네스였다.
1115년 삼촌 하인리히 5세에 의해 프랑켄 공작으로 지명되었다. 1년 뒤에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독일의 섭정으로 활동하였다.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할 때 콘라트 3세는 독일 왕위에 대해 프리드리히에게 지원을 받지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콘라트의 왕위 계승을 금지했고 콘라트 3세는 프리드리히가 수도자일 때 프랑켄과 브루고뉴 왕국을 빼앗겼다. 그러자 제국 도시들과 슈바벤, 오스트리아 공작의 도움으로 그는 1127년 12월 뉘른베르크에서 대립왕으로 선출되었다. 콘라트는 밀라노의 대주교에게 이탈리아 왕관을 받기 위해 신속하게 알프스 산맥을 건넜다.
그러나 2년 뒤에 콘라트는 이탈리아에서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채 1130년 독일로 돌아왔다. 그를 지원하는 뉘른베르크와 슈파이어가 로타르 3세의 손에 떨어진 다음이었다. 콘라트 3세는 로타르 3세에 계속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그와 프리드리히는 1135년 로타르 3세의 황제 즉위를 인정해야 했다. 그 동안 콘라트 3세는 자신의 이탈리아 왕 직함을 포기했다. 이 다음 그와 프리드리히는 용서를 받아 다시 자신들의 영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
1137년 12월 로타르 3세가 죽자 콘라트는 교황의 특사가 있는 코블렌츠에서 1138년 3월 왕으로 선출되었다. 6일 뒤에 아헨에서 왕관을 받고 남독일의 제후들에게 밤베르크에서 인정을 받았다. 로타르 3세의 사위이며 계승자고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제후인 하인리히 거만공이 선출에서 제외되어 콘라트 3세의 선출 자체를 거부하자 콘라트 3세는 그의 모든 영지를 빼앗았다. 빼았은 영지 중에서 작센 공작령은 알브레히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에게 주었고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에게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하인리히 거만공에게 많은 신하들이 충성하고 있었다.
확장된 이탈리아 남쪽에서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 간의 대립으로 내전이 발생했다. 1139년 하인리히 거만공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사자공과 형제인 벨프 6세가 작센을 지원하면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콘라트 3세는 오랜 포위 끝에 1140년 바인스베르크에서 적을 패배시켰고, 1142년 5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평화 조약을 맺었다. 같은 해에 그는 처남인 블라디슬라프 2세를 왕으로 복위시킬 목적으로 보헤미아에 갔다. 콘라트의 또다른 처남인 폴란드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도 같이 복위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작센, 바이에른 및 다른 지역이 반기를 들었다.
1147년 콘라트는 클레블로의 베르나르 수사가 슈파이어에서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조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성지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갈 목적으로 프랑스의 루이 7세와 같이 참여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귀족들이 아들 하인리히 베렝거를 왕으로 선출하도록 했다. 안전하계 승계를 마무리짓고 콘라트 3세는 원정 준비에 착수했다. 2만 군사를 이끌고 헝가리를 통하여 1147년 7월 프랑스 군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1150년 콘라트 3세와 하인리히 베렝거는 플로크베르크 전투에서 벨프 6세와 벨프 7세를 이겼다. 그런데 하인리히 베렝거가 1년 뒤에 죽어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어졌다. 이 와중에 벨프 가와 호엔슈타우펜 가가 1152년 화해했고 콘라트의 가족 중에 누구나 평화롭게 왕위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콘라트 3세의 군대는 아나톨리아를 건너왔으나 1147년 10월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대 셀주크 제국 군대에게 패했다. 콘라트와 대부분의 기사들은 탈출했으나 병사들은 죽거나 붙잡혔다. 남은 2천 명의 군대는 생존자들이 있는 니케아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콘라트 3세는 프랑스군에 의해 호위를 받으며 프랑스군 본대가 집결해 있는 로파디움으로 가야했다. 그리고 그는 에페소에서 심각한 병에 걸려 치료받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후송되었다. 그는 회복된 다음에 아크레로 배를 타고 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다마스쿠스 포위전에 동참했으나 또 실패로 끝났다. 아스칼론을 공격하는 것이 실패한 뒤에, 콘라트 3세는 독일로 돌아왔다.
콘라트 3세는 황제의 관을 절대 받지 못했으며 죽을 때까지 계속 독일 왕의 칭호만 사용하였다. 콘라트 3세가 죽을 때에 병상에는 사촌 프리드리히와 밤베르크 주교 2명만이 그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콘라트는 자신의 6살짜리 아들보다는 사촌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프리드리히를 왕으로 지명했다. 그가 사망한 뒤에 프리드리히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