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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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3]
1.1. 어린 시절
렌스는 콜리우르에서 태어났지만 7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의 어머니와 함께 세트 지방으로 이주했다. 세트 지방을 연고로 하는 FC 세트는 당시 프랑스 축구계에서 강팀이었고 렌스는 이 팀에 입단해서 축구를 배웠다.
1.2. 선수 생활
1.2.1. 클럽
렌스는 1932년 FC 세트 1군에 들어왔고 같은 해 프랑스 축구계가 프로화가 되면서 새로운 리그인 디비지옹 1이 창설되었다. 당시 세트에는 렌스 외에도 이반 베크같은 선수들이 있었고 1933-34 시즌에 세트는 프랑스 축구계 최초로 더블#s-7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 이후 세트의 전력은 계속 약해졌다. 렌스는 1938년까지 세트에 머물렀고 34년의 더블 이후의 리그 최고 성적은 3위였다.
1930년대엔 많은 프랑스의 프로 축구 선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렌스는 숙련된 노동자들과의 그것과 비교하면 2배 정도의 수입을 벌어들였지만 지금의 축구 선수들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였다. 렌스도 광고 출연을 통해 추가 수입을 꾀했고 1936년에는 대표팀 동료 에티엔 마틀레르, 에드몽 델푸르, 라울 디아뉴, 알프레드 아스통, 자크 메레스 등과 함께 선수 노조의 초창기 형태 중 하나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1937-38년에 벨기에와의 경기를 거부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결국 실패했고 1960년대가 되어서야 다시 이런 움직임이 나타났다.
1938년, 세트는 렌스를 AS 생테티엔에 팔았다. 이 때의 생테티엔은 디비지옹 2에서 갓 올라온 팀이었고 렌스의 세트 시절 동료이자 친구인 이반 베크가 1935년부터 뛰고 있어서 렌스가 새로운 팀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생테티엔은 4위로 시즌을 마쳤다.
하지만 전쟁이 터졌고 렌스도 전쟁에 끌려가느라 1942년이 되어서야 다시 생테티엔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 리그는 진행되지 않았고 생테티엔은 지역 리그에서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정식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생테티엔에는 1945년까지 머물렀다.
1.2.2. 국가대표
1934년, 렌스의 소속팀 FC 세트가 더블#s-7을 달성하고 디비지옹 1 최소 실점팀이 되자 렌스는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렌스는 프랑스의 2차례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월드컵 경기를 실제로 뛰지는 못했다. 1934년에는 알렉스 테포, 1938년에는 로랑 디로후토에 밀려 서브 골키퍼의 자리에 머물렀다.
렌스는 1935년 2월에서야 이탈리아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고 프랑스는 1대2로 패했다.
1939년까지 렌스는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고 총 11경기에 참가해서 16실점을 기록했다.
1.3. 이후
렌스는 은퇴 이후 오랫동안 세트의 알루미늄 공장에서 체육 교사로 일했다.
2013년, 렌스는 당시 살아있는 프랑스 국가대표팀 선수 중 최연장자라서 100세 기념식을 세트 지방에서 개최하려 했지만 렌스가 거동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2014년 3월 12일에 렌스는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4] 2차 대전 이전의 월드컵 출전자 중 마지막 생존자로 기록되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 당시의 고전적인 골키퍼들답게 렌스도 고양이처럼 점프하며 크로스를 처리하고 주먹을 이용해 공을 처리하는 플레이를 펼쳤다.
3. 뒷이야기
- 렌스는 이반 베크와 수즈(Suze)[5]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 이 광고에서 '저는 저의 피레네로부터의 꽃향기가 풍기는 수즈를 제일 좋아합니다.'라는 카피를 렌스의 대사로 처리했고 그는 모델료로 수즈 6병을 받았다.
- 렌스의 롤모델은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였다. 렌스는 플라니치카를 친선 경기에 만나서 그의 플레이를 보고 감동받았다고 한다.
4. 수상
4.1. 클럽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초대 월드컵 출전 선수 중 최후의 생존자로 유명한 프란시스코 바라요보다 36일을 더 살아 100세 242일을 살았다.[5] 노란색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아페리티프용 술. 알콜 도수 15도로 맛이 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