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아스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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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4]
1.1. 선수 생활
1.1.1. 클럽
아스통의 아버지는 영국인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샹티이 지방은 축구보다는 경마가 인기있던 지역이었고 아스통은 어린 시절 승마를 배우기도 했다.
데뷔하기 전의 아스통은 축구 외에도 전보 교환원과 삼촌의 신발 가게에서 일했다. 아스통이 성인 무대에 데뷔할 무렵, 프랑스 축구계가 프로화되었다. 그에 맞춰 아스통은 그가 속해 있던 아마추어 클럽의 연고지인 우아즈(Oise)지방을 떠나 파리로 이사했고 월급 500프랑에 레드 스타 파리의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이 돈으로는 원하는 생활을 꾸리는 데에 모자르다 느낀 아스통은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1930년대의 레드 스타 파리는 아스통이 데뷔하기 전에도 쿠프 드 프랑스에서 4회 우승을 차지한 프랑스 축구계를 대표하는 강팀 중 하나였고 비록 1933년의 리그 개편 때[5] 레드 스타는 디비지옹 2로 떨어졌지만 이듬해 디비지옹 2에서 우승하며 1부 리그에 복귀했다.
레드 스타 파리는 이후 강호의 면모가 사라져서 1938년에 다시 디비지옹 2로 떨어졌고 아스통은 같은 파리를 연고로 하는 RC 프랑스로 이적했다. 여기서 RC 프랑스는 2회의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차지했지만 아스통은 우승의 기쁨을 같이 누릴 수 없었다. 1939년에는 결승전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1940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징집으로 결승전에만 결장했기 때문이었다.
1941년에 레드 스타 파리로 돌아온 아스통은 1942년에 드디어 FC 세트를 꺾으면서 쿠프 드 프랑스 우승컵을 직접 구경할 수 있었다. 아스통은 이 결승전에서 골을 기록하여 기쁨이 두 배로 컸다. 1946년 레드 스타 파리는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을 거두었고 새로운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뤼시앵 스콜라리에 점차 출전 기회를 잃어가던 아스통은 이 경기를 끝으로 레드 스타 파리를 떠났다.
그 이후에는 앙제 SCO, 스타드 프랑세를 거쳐 1948년 CA 파리에 선수 겸 감독으로 복귀했고 CS 퐁텐느블뢰, AC 앙브와즈, 투르 FC에서 선수 겸 감독직을 맡았다. 그의 선수 커리어는 44살까지 지속되었다.
1.1.2. 국가대표
아스통의 국가대표팀 첫 경기는 1934년 3월 11일, 스위스전이었다. 이 경기는 프랑스가 0대1로 패배했다.
아스통은 프랑스가 참가한 두 차례의 월드컵의 3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프랑스는 자국 대회의 8강에 만족해야 했다. 1938년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2대4로 패했지만 아스통은 스탠리 매튜스와 좋은 시합을 펼쳤다.
아스통의 마지막 A매치는 1946년 5월 19일에 열린 잉글랜드와의 홈경기였으며 이 시합에서 프랑스는 잉글랜드를 2대1로 꺾었다. 이 시합에서 아스통은 매튜스와의 재대결과 함께 빌리 라이트를 상대하기도 했다.
아스통은 31경기의 A매치에서 5골을 기록했다.
1.2. 이후
투르 FC에서의 커리어를 끝으로 일선 축구계를 떠난 아스통은 투르에서 머물며 스포츠 용품점을 개업했고 축구 경기를 종종 지켜보았는데 그 선수 중엔 레몽 코파도 껴있었다.
1952년에 개장한 그의 스포츠 용품점은 번창해서 1962년에는 보르도에 확장개업했다. 아스통은 1980년대까지 스포츠 용품점 경영에 참가했고 그 이후는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주었다.
아스통은 2003년, 칸#s-3에서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0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윙어. Feu-follet이란 별명으로 불렸으며 작은 체구를 이용한 민첩하고 현란한 움직임으로 상대 수비를 교란시키는 것과 크로스에 능했다.
3. 뒷이야기
- 아스통은 1938년 두 개의 손가락을 잃었다.
4. 사생활
아스통은 헬레네와 결혼했는데 아스통이 공장에서 그녀의 일을 도와주며 친분을 쌓았다. 슬하에 다니엘레(1939년생), 장피에르(1946년생) 두 자녀를 두었다. 레드 스타 파리 시절에 친구가 된 앙드레 시모니와 특히 친해서 1947년 스타드 프랑세에 가는 데에 시모니의 영향이 컸고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라울 디아뉴와 친했다고 한다.
5. 수상
5.1. 클럽
- 디비지옹 2 우승 1회: 1933-34(레드 스타 파리)
- 쿠프 드 프랑스 우승 3회: 1938-39, 1939-40(이상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 1941-42(레드 스타 파리)
-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 1회: 1945-46(레드 스타 파리)
[1] 175cm로 표기된 자료도 있지만 175cm로 알려진 로제 쿠르투아와 비교하면 확실히 작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5] 디비지옹 1의 팀 개수를 20개에서 14개로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