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메레스

 


[image]
이름
자크 데지레 메레스
(Jacques Désiré Mairesse)
생년월일
1905년 2월 27일
사망년월일
1940년 6월 13일
국적
[image] 프랑스
출신지
파리
포지션
라이트 풀백
신체조건
174cm / 71kg
등번호
-[1]
소속팀
FC 세트 (?-1932)
레드 스타 파리 (1932-1935)
ASVEL 리옹빌루르반 (1935-1936)
RC 스트라스부르 (1936-1940)
국가대표
6경기 / 0골 (1927-1934)
1. 생애[2]
1.1. 선수 생활
1.2. 이후
2. 뒷이야기
3. 수상
3.1. 클럽


1. 생애[3]



1.1. 선수 생활



1.1.1. 클럽


메레스의 초기 선수 생활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920년대 초반에 알자스와 알제리에서 활동했다는 말도 있는 식이다.
그나마 1932년에 FC 세트를 떠나 레드 스타 파리에 입단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레드 스타 파리는 1933-34 디비지옹 2 우승을 차지하고 바로 디비지옹 1으로 올라갔다. 메레스는 디비지옹 1에서 레드 스타 파리가 치른 30경기 중 27경기에 출전했지만 팀은 12위에 그쳤다.
메레스는 ASVEL 리옹빌루르반(Lyon-Villeurbanne)을 거쳐 RC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했다. 하지만 1936-37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 출전 명단에서 메레스의 이름은 없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유가 명확하진 않지만 출장 정지의 징계도 떨어졌다. 메레스는 1939-40 시즌이 끝날 때까지 스트라스부르 소속으로 남아 있었다.

1.1.2. 국가대표


메레스의 첫 A매치 상대는 포르투갈이었다. 1927년 3월의 이 시합에서 프랑스는 포르투갈에 0대4로 깨박살이 났다.
메레스는 프랑스 대표팀의 일원으로 총 6경기에 출전했으며 1932년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선 주장 완장을 차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A매치는 이탈리아 월드컵 오스트리아전이었다. 메레스는 쥘 반도렌을 밀어내고 에티엔 마틀레르의 풀백 파트너로 출전했다. 경기는 오스트리아의 3대2 역전승이었고 메레스는 이 경기를 끝으로 대표팀 경력을 추가하지 못했다.

1.2. 이후


메레스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가했다가 1940년, 독일 국방군에 체포되었고 탈옥(혹은 반란)을 계획하다 6월 13일에 총살당했다.

2. 뒷이야기


  • 메레스는 상당한 지능과 높은 레벨의 헌신을 갖춘 사람이란 평가를 받았다. 1933년에는 그의 스포츠에 대한 열정과 프로화된 프랑스 축구계의 물질적 상황에 관해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 지성은 그가 죽고 3일 후에 태어난 아들 자크 메레스[4]도 물려받았다. 아들 메레스는 재정경제학의 대가이다.
  • 1936년에는 대표팀 동료 에티엔 마틀레르, 에드몽 델푸르, 라울 디아뉴, 알프레드 아스통, 르네 렌스 등과 함께 선수 노조의 초창기 형태 중 하나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1937-38년에 벨기에와의 경기를 거부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결국 실패했다.

3. 수상



3.1. 클럽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