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폴

 

1. 생애
2. 반역죄로 몰리다


1. 생애


마거릿 폴 (Margaret Pole, 1473년 8월 14일 - 1541년 5월 27일)
가톨릭에서는 '마르가리타 폴'이라고도 한다.
잉글랜드의 귀족, 가톨릭 복녀. 요크 가문의 클레런스 공작 조지[1]와 이사벨 네빌의 딸. 본명은 마거릿 플랜태저넷 (Margaret Plantagenet).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후예였다.
결혼 전에는 요크 왕조튜더 왕조의 대립으로 인해 힘든 삶을 겪었지만, 결혼 후 안정된 생활을 보냈다. 튜더 왕조의 국왕과의 관계도 회복하면서 솔즈베리 백작 계승을 허용받아 여백작의 작위를 얻어 솔즈베리 부인이라고 불렸다. 헨리 8세의 딸 메리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국교회를 설립하면서 다시 관계가 악화되었고, 끝내 1541년 반역죄 혐의로 런던 탑에서 처형되었다.

2. 반역죄로 몰리다


마거릿은 헨리 7세의 사촌인 리처드 폴과 결혼하여 다섯 아이를 낳았으며, 1516년 42세의 나이로 메리 공주의 가정교사로 임명되며 메리 공주와 깊은 정을 나눈다. 한편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재혼할 것을 결심하면서 캐서린과의 혼인이 무효임을 입증하기 위해 마거릿의 둘째 아들인 추기경 레지널드 폴을 통해 파리 대학의 신학 교수로부터 혼인 무효라는 견해를 이끌어오도록 명했다. 레지날드는 신학 교수에게 혼인이 무효가 될 근거를 얻어왔으나, 본인의 신념에 따라 헨리 8세의 명을 어기고 보고서에 이혼을 반대하는 내용을 적는다. 이후 헨리 8세와의 관계가 악화된 레지날드는 1532년 이탈리아로 망명한다.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한 이후 메리 공주는 사생아의 신분으로 격하되었다. 마거릿은 이에 반발했고 1532년 가정교사 직위에서 해임된다. 마거릿은 급여 없이 메리 공주를 자신의 손으로 돌보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1536년 망명한 차남 레지널드가 가톨릭의 입장에서 '교회의 통일'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이에 분노한 헨리 8세는 마거릿의 장남 헨리 폴, 셋째 아들 제프리 폴 등 마거릿과 그의 가족들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공모하여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한다.
조사를 맡은 사우샘프턴 백작 윌리엄 피츠윌리엄과 엘리 주교 토마스 굿리치는 마거릿에게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지만, 마거릿은 런던 탑으로 이송되어 2년간 수감되다 1541년 5월 27일 반역죄의 혐의로 처형당한다. 끝까지 유죄를 인정하지 않아서 힘으로 처형대에 목을 올려야 했다. 특히 처형집행자가 매우 서툴러서 도끼를 10여번이나 휘둘러서야 겨우 목이 떨어져 처형이 참혹하고 엉망이었다는 목격기록이 있다.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순교자들을 시복할 때 마거릿 폴도 함께 시복한다. 축일은 5월 28일. 가톨릭 정보 : 마르가리타 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