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곤의 캐서린

 


'''Catalina de Aragón '''
'''이름'''
카탈리나 다라곤
(Catalina de Aragón)[1]
'''출생'''
1485년 12월 16일
카스티야 왕국 알카라데에나레스 대주교의 궁전
'''선종'''
1536년 1월 7일 (향년 50세)
잉글랜드 왕국 킴볼튼 성
'''장례식'''
1536년 1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피터버러 대성당
'''배우자'''
웨일스 공 아서 (1501년 결혼 / 1502년 사망)
헨리 8세 (1509년 결혼 / 1533년 무효화)
'''자녀'''
헨리, 메리 1세
'''아버지'''
페르난도 2세
'''어머니'''
이사벨 1세
'''형제'''
이사벨, 후안, 후아나, 마리아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냉대받는 왕세자빈
2.2. 헨리 8세의 결혼과 사랑
2.3. 이혼
2.4. 복잡한 이혼 과정
2.5. 쓸쓸한 말년
2.6. 외로운 죽음
3. 대중매체
3.1. 튜더스에서의 캐서린 왕비
3.2. 카를로스 대제에서의 아라곤의 캐서린
3.3. 천일의 스캔들에서의 아라곤의 캐서린
3.4. 스페니쉬 프린세스(The Spanish Princess)에서의 아라곤의 캐서린


1. 개요


[image]
Catherine of Aragon
1485년 12월 16일 ~ 1536년 1월 7일(만 50세)
헨리 8세와의 결혼 기간 : 1509년 ~ 1533년
이사벨 1세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로,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다. 이 때문에 아라곤의 캐서린이라고 불린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이자 메리 1세의 어머니. 후에 신성로마제국스페인의 지배자가 되는 카를 5세의 이모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각자 왕국을 다스리는 군주였기 때문에 특별히 고귀한 혈통으로 여겨졌으며[3], 이에 대한 긍지는 후에 캐서린의 행보에도 영향을 끼친다.

2. 생애



2.1. 냉대받는 왕세자빈


어렸을 때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의 장남이자 헨리 8세의 형인 아서 튜더와 약혼했고, 15세가 된 1501년에 잉글랜드로 가서 1살 연하인 아서와 결혼했다.
아서는 헨리 7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왕세자였으나 유달리 병약한 체질이었고 결혼기간도 불과 몇 개월이었기에, 과연 부부관계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부부결혼 서약을 했더라도 동침을 하지 않으면 결혼이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부부가 동침하지 않았다면 진정한 결혼을 했다고 볼 수 없다.
후에 캐서린은 시동생이었던 헨리 8세와 결혼하면서 자신이 아서와 부부관계를 하지 않은 처녀의 몸이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을 교황청에서 받아들여서 결혼이 성사됐다. 일단 캐서린과 아서가 부부관계를 못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긴 하지만 이견도 있다. 즉, 결혼 기간이 대략 20주 정도인데 한번도 동침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아서가 그렇게까지 병약한 것은 아니고 캐서린과 동침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즉, 아서가 결혼식 다음날 친구들에게 "어젯밤 스페인을 정복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다만 이런 기록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시대상으로나 왕세자라는 신분상으로나 허약해서 여자와 동침을 못한다는 게 소문이 나면, 아서의 자존심과 위신에 큰 타격이 되고, 나아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아서가 주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4].
어쨌든 결혼하고 그 이듬해인 1502년에 어린 부부는 아서의 영지인 웨일즈로 여행을 갔다가 모두 병에 걸리는데, 캐서린은 회복했지만 아서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로써 캐서린은 16세에 왕세자의 미망인(Princess dowager)이 된다.
여기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헨리 7세는 사돈인 페르난도 2세가 지참금을 다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캐서린이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오랜 장미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터라,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는 다른 나라 군주들에 비해서 부유하지 못한 데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이 높았다.
헨리 7세의 지참금 지급 요청에 페르난도 2세는 "지참금을 다 보냈다"고 주장함으로써, 캐서린만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 사이에서 불쌍하게 애매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헨리 7세는 에스파냐와의 동맹 및 지참금을 놓치기 싫어했기에 차남이자 새로운 후계자가 된 헨리, 즉 미래의 헨리 8세와 큰며느리였던 캐서린을 맺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페르난도 2세에게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이 확정적이라는 답은 주려 하지 않았다.
지참금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헨리 7세는 낯선 나라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며느리 캐서린에게 "너는 내 식객이나 마찬가지다."라며 심하게 눈치를 주고 생활비까지 끊어버렸다. 실제로 이 시기에 캐서린이 친정아버지 페르난도 2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헨리 7세의 푸대접으로 대국의 왕녀라는 지위가 무색할 정도로 빈곤하게 지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시아버지의 궁정에서조차 소외된 상태였던지라,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들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은 고사하고 옷도 없어서 에스파냐에서 가져온 낡은 옷을 입고 지냈다. 사실 옷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조차 힘든 형편이었다. 그래서 캐서린은 지참금으로 가져온 보석과 식기를 팔아서 생활해야 했는데, 그래도 모자라서 결국 빚을 지게 되어 친정에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쓸 정도였다.
이 와중에 헨리 7세는 "캐서린을 차남 헨리와 약혼시키겠다"고 간을 보다가, "지참금을 다 못 받아냈으니 취소하자"는 등 계속 희망고문을 해댔다. 더구나 친아버지라는 페르난도 2세 또한 캐서린에게 생활비만 보내줄 뿐 딱히 돌아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먼 잉글랜드로 떠나보낸 딸의 안위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가 무려 7년이나 계속되었다.'''

2.2. 헨리 8세의 결혼과 사랑


다행히도 헨리 7세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왕위에 오른 10대의 헨리 8세프랑스나 다른 나라 왕녀들과도 혼담이 오갔지만 캐서린에게 청혼한다. 형수와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으로도 여겨질 수 있었지만, 캐서린이 자신이 아서와 합방하지 않은 처녀이므로 헨리의 형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절차를 거치자[5] 교황청에서는 둘의 결혼을 허가했다. 그래서 1509년에 캐서린은 23세의 나이로 18세의 헨리 8세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잉글랜드의 왕비가 된다.
많은 창작물에서 캐서린은 보통 검은 머리에 매력 없는 중년의 라틴계 스페인 여성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라틴계 여성과는 거리가 먼 외모였으며, 더구나 상당한 미인이기까지 했다. 키는 매우 작았으나[6] 고전적인 게르만계 미인의 조건인 새하얀 피부와 치렁치렁한 금발푸른 눈동자를 모두 갖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7] 더구나 캐서린은 대국의 왕녀라는 고귀한 신분이었기에, 낭만적이며 기사도를 좋아했던 젊은 시절의 헨리 8세는 '''7년이나 시련을 겪은 가엾은 공주'''를 자신이 구출한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
훗날 헨리 8세가 그 유명한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을 냉정히 내치는 방식으로 이혼을 강행한 것 때문에,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애정이 없는 철저한 정략결혼이었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결혼을 하던 당시만 해도 캐서린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대 무렵 쓴 시에서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캐서린을 골라 결혼할 것이다."라고 자랑하기도 했다.[8]
캐서린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순종적이고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한편으로는 7년에 걸친 시아버지의 핍박과 가난을 견딘 경험 덕분에 인내심도 대단했으며,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에스파냐의 왕녀 지위보다는 어렵게 획득한 잉글랜드의 왕비 지위에 더 높은 자긍심을 가졌다고 한다. 결혼 초기에는 부부 금슬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기에,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여러 차례 아이를 가졌다. 기록에 따르면 6번이나 임신을 하여 총 3남 3녀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모두 사산하거나 태어난 지 얼마 못 되어 숨졌다.[9][10] 물론 그 시대의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높은 사망률을 딛고 살아남은 자식이 딸인 메리 1세 뿐이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유일한 적자녀인 메리 1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2.3. 이혼


하지만 세월이 지나 캐서린이 나이가 들어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적어진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헨리 8세앤 불린에게 반하면서 캐서린은 헨리 8세에게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다. 헨리가 젊고 매력적인 앤에게 푹 빠져 있기도 했지만, 당시 헨리 8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에 오래도록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헨리 8세는 "나에게 아들이 안 생기는 것은, 형수와 결혼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벌을 내렸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튜더 왕가 이전의 왕가인 플랜태저넷 가문의 계승자들이 아직 있었기 때문에, 헨리 8세는 자신에게 적법한 남자 후계자가 안 생기면 자신의 사후에 튜더 왕가가 왕위를 찬탈당할까봐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즉 왕비가 왕자를 낳지 못해서 자기 대에서 튜더 왕가의 맥이 끊어질까 두려워한 것이다.[11] 그래서 왕자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형수와 결혼해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게 아닌가, 고민하던 찰나에 앤이 등장한 것이다.
전통적인 여성 캐서린과는 전혀 다르게, 젊고 세련되고 신선한 매력으로 무장한 앤 불린은 머리까지 좋았다. 다른 여자들처럼 왕의 정부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정식 결혼을 요구하며 육체 관계를 피했다. 자신에게 몸이 달아 있는 헨리에게 '왕자를 낳아드릴 수 있으니 왕비로 삼아달라.'고 끊임없이 결혼을 요구했다. 결혼하면 원하던대로 자신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유혹하면서.
헨리는 앤을 왕비로 책봉하기 위해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하기로 한다. 그녀가 원래 형인 아서의 아내였다는 점, 형수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구절을[12]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교황에게 이혼을 청구했으나, 교황은 당시 위세가 높던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의 압력[13] 때문에 이를 기각했다.[14]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 아들이 없다고 조강지처를 몰아낸대서야 어디 말이 되는고? ''''아들 딸 구별 말고 건강하게 잘 키우자''''는 표어도 모르는가? 더구나 가톨릭은 이혼을 금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뻔뻔하게 그런 신청을 해?![15]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2세: 뭐야? 내 딸을 몰아내려고 해? 고~얀지고! 로마 교황에게 압력을 넣어서 이 이혼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라![16]

'''먼나라 이웃나라 - 영국편'''에서 헨리 8세의 이혼을 불허하는 로마 교황과 에스파냐 국왕의 대사


2.4. 복잡한 이혼 과정


이 과정에서 무려 7년 간의 지루한 공방이 이루어진다. 캐서린은 자신의 유일한 자녀인 메리 1세의 신분과 안위를 걱정하여 이혼을 극렬히 거부했고, 앤 불린은 "나를 왕비로 세워달라"며 닦달하니, 헨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녹초가 돼버린다.
헨리는 자신에게 직접 찾아와 "혼인무효 신청을 거두어달라"고 간청하는 캐서린한테 "수녀원에 들어가라"고 했으나,[17] 캐서린은 단호히 거부했다. 캐서린은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는 것은 하느님이 내려주신 운명이라 생각하였으며, 왕은 앤 불린이라는 요부의 유혹에 넘어가 죄악에 빠져들었지만 결국은 진정한 아내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캐서린이 시아버지 헨리 7세에게 겪었던 냉대를 생각하며, 이것 역시도 그때처럼 하나의 시련이라 생각했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톨릭의 구원관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삼위일체 하느님이자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경험하고 승천한 뒤 재림할 구세주로 믿으며, 세상에 가득한 고난과 시련, 유혹을 견뎌냄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캐서린에게 이는 단순히 사제들의 강론에나 나오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캐서린은 이미 시아버지 헨리 7세에게 받은 7년간의 냉대라는 시련과 고난을 이겨낸 바 있었고, 그 대가로써 탱탱하고 남자다운 남편 헨리 8세와 (아들은 없지만) 귀여운 딸 메리 공주, 잉글랜드의 왕비라는 영광까지 크나큰 보답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이혼하자고 발광하는 남편을 보면서 '이 역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또 하나의 시련일 것이고, 이 시련만 이겨낸다면 더 큰 보답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라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었다.
  • 그리고 캐서린에게는 이러한 '보상'으로 간절히 원할만한 소망이 있었다. 바로 남편과 자신을 기쁘게 하고 튜더 왕조의 대를 이어줄 왕자였다.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격감하고 종교적 교리를 너무 깊게 신봉하는 것이 종종 빈축거리가 되기까지 하는 현대에서도 '간절한 소망' 이 있는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리는 경우는 흔히 있고, 신앙과 교리 내에서 자신의 소망에 대한 답을 얻은 사람들이 종교에 깊게 심취하는 경우 역시 드물지 않다. 하물며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중세~근세 유럽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즉 남편의 이혼 요구를 거부하고 압력을 견뎌낸 캐서린의 심정은 (남편에 대한 애정과 같은 개인적 감정의 측면 이전에) 현대인으로 치면 '반드시 주가가 폭등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저평가 우량주'를 꼭 쥐고 '당장 집안에 쌀이 떨어지고 애들 학원비가 없는데 그거 싼 값에라도 좀 팔아라'라는 소리를 들으며 '이거 조금만 더 버티면 대박날텐데 어떻게 지금 파냐'고 버티는 사람의 사고방식과도 비슷했다.
아무튼 캐서린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이모로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앤 불린이단으로 생각했기에, 앤이 왕비가 된다면 헨리 8세도 이단에 빠져들 것이라 생각했다.[18] 무엇보다도 자신이 왕비 지위에서 물러나면 사랑하는 외동딸이자 왕위 후계자인 메리 1세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만약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적법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 에스파냐의 왕녀이자 잉글랜드의 왕비였던 자신이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메리 공주는 일개 사생아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닌가? 과거에 캐서린은 아서가 죽은 후 7년이나 시아버지의 냉대를 버텼는데, 하느님은 그녀의 인내에 헨리 8세와의 결혼으로 보답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캐서린은 굽힐 생각이 없었다.
한편 헨리는 그저 순종적이라고만 생각했던 아내가 의외로 강하게 이혼은 거부하며 버티자, 대단히 화를 내고 그녀를 증오하게 된다. 나중엔 얼굴조차 보지 않고 근위병들을 시켜 궁정에서 내쫓은 후, 메리가 어머니인 캐서린과 만나는 것조차 막았으며, 앤에게 주기 위하여 캐서린이 지니고 있던 왕가의 보석들도 강제로 회수해 가져간다. 교황청에서는 헨리의 요청을 들어줄 듯 하다가, 결국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압박에 굴복하여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은 적법하다고 선언해버린다. 그러자 헨리는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를 설립함으로써 교황과 결별을 선언하고, 자신이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강수를 두면서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했다. 이 과정에서 토머스 크롬웰이 왕의 오른팔로 떠오른다.

2.5. 쓸쓸한 말년


"아서와 결혼했지만 처녀의 몸으로 헨리와 결혼했으므로 절대 혼인무효는 안 된다"고 버티던 캐서린은 결국 다른 궁인 킴볼튼 성으로 쫓겨났으며, 한때 왕비였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초라하고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혼인무효화에 저항하느라 헨리에게 미움을 산 탓에 생활비는 물론 연금 같은 게 일체 나오지 않다 보니[19] 시종들에게 급료를 줄 수 조차 없었기 때문에, 세간살이와 보석과 옷을 팔고 여기저기서 빚을 내기도 했을 정도라 한다. 게다가 저렇게 쫓겨난 후에 딸 메리를 그토록 그리워했는데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2.6. 외로운 죽음


일방적인 이혼을 당해 궁에서 쫓겨나고 메리와 생이별한 채 어렵게 지내다 수녀원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고, 2년쯤 뒤에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때 향년 51세. 사후 캐서린의 시신을 부검한 부검의가 "심장에 시커멓게 종양이 있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현대 의학 관점에서 보면 암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검게 변한 심장을 두고, "앤 불린이 캐서린을 독살한 거다", "캐서린이 자신을 버린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심장이 썩어 들어간 거다" 등의 소문이 돌았다. 캐서린은 생전에 신앙심 깊고 예의 바르며 가난한 백성에게 자선도 베푸는 등 백성들 사이에서 덕망 높고 인기 많은 왕비였기에, 많은 이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캐서린은 죽기 전 헨리 8세에게 "당신이 내게 저지른 모든 것을 용서하며, 우리 딸 메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자 합니다. 오직 당신만을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라고 애끓는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그러나 헨리 8세는 무관심했고, 끝내 캐서린에게 오지 않았다. 오히려 헨리는 메리가 어머니 캐서린의 장례식에 가지 못하게 했고, 캐서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앤과 함께 축하의 뜻을 상징하는 노란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20] 심지어 앤은 캐서린의 사망 소식을 듣자 "이제야 내가 진정한 왕비가 된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다녔다는 비화도 있다. 시신도 예를 갖추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하는 대신 피터부르 대성당에 매장했다.
한편 메리는 어머니의 이런 아픔을 보고 자라며 졸지에 공주의 지위를 상실하여 사생아가 된 데다가, 강제로 이복동생 엘리자베스시녀가 되는 수모를 당했고, 어머니의 임종까지 지키지 못했으며 장례식조차 가는것을 금지당했기 때문에, 새어머니 앤 불린을 매우 증오했다. 덧붙여 이 때문에 메리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를 싫어하고 경계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자매의 사이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선 엇갈리는 이야기가 있어서 확실하진 않다. 그 때문에 메리가 엘리자베스에게 느낀 건 애증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다. 확실한 건 메리가 즉위한 후엔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 탓에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유일한 피붙이이며 자식이 없는 자신의 후계자이기도 해서, 엘리자베스를 빌미로 수많은 반역 모의가 있었는데도 엘리자베스를 처형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설사 미워했더라도 죽일 정도로 미워하진 않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특히 메리는 상당히 정이 많고 무른 면이 있었기 때문에, 이복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애정과 미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가졌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한국사에 비유하면 경종영조의 관계와 유사하다.
캐서린은 순종적이지만 고집이 강한 성격으로, 6년이라는 긴 이혼재판 기간 동안 자신이 진정한 잉글랜드왕비라는 것을 주장했고 앤 불린이 잉글랜드의 왕비로 즉위한 뒤에도 자신의 모든 문서 서명을 'Katherine the quene'[21]으로 했다.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킬 수 없었던 딸 메리 1세는 어머니가 묻힌 옆에 묻히길 원하지만, 결국 그 꿈은 이뤄지지 못한다. 대신 메리의 옆자리는... 메리 1세 항목 참조.
여러모로 조선시대 인현왕후와 비슷하다. 남편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쫓겨나고, 민중들의 동정을 받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게 공통점. 그 외에도 왕인 남편에게 순종적이었지만 의외로 자신의 신념으로 버티는 뚝심 하나는 제법 있었다는 점. 몸이 병약했다는 점도 같다. [22]

3. 대중매체



3.1. 튜더스에서의 캐서린 왕비


[image]
마리아 도일 케네디[23]가 연기한 아라곤의 캐서린.
시즌 1, 2에 걸쳐서 등장, 극 중에서 발음이 심히 뻣뻣(?)한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스페인 공주다운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조카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런던에 왔을 때나 황제가 보낸 스페인 대사들과 대화할 때는 종종 스페인어를 사용하기도 하며, 헨리의 뜻에 따라 메리가 웨일스로 보내질 때도 스페인어로 메리에게 "너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아라. 너는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의 피를 이었으며 잉글랜드 왕의 유일한 딸이다, 언젠가는 여왕이 되거라."라는 당부를 말해주기도 한다.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의 왕비로 정말 답답할 정도로 헨리 8세에게 사랑을 쏟는다. 잉글랜드 자체와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도 커서 이혼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스페인 대사 차푸이스에게 "다른 건 몰라도 무력을 동원한 잉글랜드 침공은 안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헨리가 혼인무효 구상을 시작하고 이를 토머스 울지 추기경에게 지시했을 때, 토마스 모어는 "캐서린 왕비께서는 위대한 왕과 여왕의 딸인 동시에, 전 신민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다"고 일갈하며 "설령 하느님께서 이를 용납할지라도 백성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캐서린과는 척을 지고 사는 울지 추기경조차도 이에 대해 반박을 내놓지 못하고 끙끙거린다.
다소 중립적이거나 왕비와 적대적인 인사들의 평가마저 이러한데, 왕비에게 우호적인 서포크 공이나 스페인 인사들 쪽으로 가면 가히 성녀 수준으로 추앙받고 존경받는다. 백성들이 성당과 주점에서 "왕비님 만세!!"를 외치는 장면, 기어이 헨리에 의해 궁을 옮길 때 궁정 사람들은 전부 그녀를 My Lady라고 칭하는 와중에도, 연도에 늘어선 백성들이 그녀를 'Her Majesty'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인기 있었던 왕비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캐서린의 인기가 앤 불린의 죽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은 백성들의 지지, 부모 양쪽으로 모두 제왕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정통성과 위신, 레콩키스타로 무어인을 밀어낸 이사벨라의 전적 등으로 헨리는 왕비를 불편하게 여겼고, "메리가 아프니 간호를 하게 해달라"는 왕비의 주청에 대해서도 "캐서린은 마음만 먹으면 군대를 일으켜 메리를 여왕으로 세울 수도 있을 사람"이라며 딸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뿌리친다.
이후 캐서린은 병으로 죽어가면서도 하나뿐인 딸 메리를 볼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만 헨리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캐서린의 편지를 전해받은 헨리는 자신에게 끝까지 다정하게 대했던 캐서린을 떠올리면서 그녀의 죽음에 슬퍼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또한 캐서린의 독실한 신앙생활은 극중에 자주 나타나는데, 정작 그동안 남편은 캐서린이 의지한 시녀와 검열삭제를 벌여 시녀를 임신까지 시키는 바람에 나중에 이를 알고 상처받는다. 오프닝 크레딧에서도 묵주는 캐서린의 상징이고, 그 상징은 후에 그녀의 딸, 메리 튜더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폐하, 그간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을 돌아봐 주십시오. 부디 제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와 진실을 되찾아 주십시오. 폐하의 나라 밖에서 나 이곳에 온 일개 여인인 저를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 믿을 수 있는 이 하나 없이 무심한 시종들의 보좌를 받아야 하는 이곳에서 저는 이 땅의 정의이신 폐하 외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과 세상의 모든 이들을 청해 제가 폐하께 진실로 순종적이었으며, 오직 폐하의 뜻과 폐하의 기쁨에만 따라 살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아끼시는 모든 이들을 사랑했습니다. 그 어떠한 이유도 없이, 저 자신의 이해를 생각지 않고, 오직 폐하를 위해 그리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통해 많은 아이들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그 아이들을 데려가시긴 했지만, 그렇지만 폐하께서 저를 처음 취하셨을 때, 하느님 앞에 말씀드리건데, 저는 분명 그 어떤 이의 손길도 받지 않은 정결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폐하의 양심에 맡기겠습니다.
드라마 튜더스에서 아라곤의 캐서린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헨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성격은 앞서 말한 대로 현모양처이며 해바라기처럼 헨리를 사랑하지만, '잉글랜드의 왕비'라는 칭호를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역사 속의 캐서린처럼 튜더스에서도 왕비 직위를 결코 앤 불린에게 내주려하지 않는다. 이혼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설치된 법정에서도 캐서린은 무릎을 꿇고[24] 자신이 분명한 처녀로서 정결을 지킨 상태로 혼인했고, 그로부터 스스로 정당한 왕비이자 헨리의 아내임을 호소한다. 헨리 8세의 이야기는 워낙에 영상화가 많이 된 소재라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대사로 스스로를 변호하는 캐서린을 볼 수 있지만, 이처럼 헨리 앞에 무릎을 꿇은 것, 또 그 직후에 법정 밖으로 나아가며 몰려든 백성들의 박수와 환호, 지지를 받는 모습은 이 드라마에서 그려낸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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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4 마지막 화에서는 늙고 병들어 임종을 앞둔 헨리 8세 앞에 유령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때 생전에는 보이지 않던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하느님의 눈 앞에서는 자신만이 헨리의 진짜 아내임을 강조한다. 또한 하나뿐인 딸 메리와 함께 나타나 메리가 여태껏 헨리 때문에 약혼을 번복하고 결혼조차 하지 못한 채 쓸쓸히 나이 들어가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 아이는 진작에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어야 했다."며 분노를 표했다.

3.2. 카를로스 대제에서의 아라곤의 캐서린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일대기를 그린 스페인 사극 카를로스 대제(Carlos, rey emperador)에서도 황제의 이모로서 아라곤의 캐서린과 헨리 8세가 등장한다. 아라곤의 캐서린 역할은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의 배우인 멜리다 몰리나(Mélida Molina)가 맡았다.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 <튜더스>에서 영어를 기반으로 간혹 스페인어 대사가 등장한 것과 달리, 카를로스 대제에서는 영어 대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당연 헨리 8세나 토머스 울지 그리고 여타 잉글랜드 쪽 인물들 모두 스페인어로 대사를 친다.
카를 5세의 잉글랜드 방문 및 메리와의 약혼, 스페인잉글랜드 그리고 프랑스가 얽힌 외교전, 아들을 낳지 못한 캐서린과 헨리 8세 사이의 불화, 혼인무효화 과정, 캐서린의 죽음 등 캐서린이 등장하는 장면은 위의 <튜더스>와 유사한 편이다. 다만 <튜더스>에서보다는 조금 더 강하게 그려지는 면이 있는데,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캐서린에게 추기경이 "왕후 폐하께서는 스스로를 변호하실 만큼 법에 관해 잘 아십니까?"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에 대해 "나는 전쟁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지만, 내 남편이 프랑스에 있을 때 이 땅을 침공한 스코틀랜드군을 맞아 물리친 적이 있다."라고 되받아치는 것이 그 예.
튜더스에서는 기도하고 있던 캐서린에게 헨리가 찾아와 형의 아내와 결혼한 것에 문제가 있었음을 거론하며 혼인무효를 통보하지만, 카를로스 대제에서는 캐서린의 조카인 황제가 헨리 8세의 뜻과 대치되는 조약을 프랑스와 체결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혼인무효를 통보한다. 법정에서는 <튜더스>에서도 나온 바 있는 내용으로 스스로를 변호하지만 당연히 역사대로 혼인무효가 이루어졌고, 헨리 8세에 의해 궁정에서 쫓겨난다. 다만 <튜더스> 그리고 실제 역사와 달리 딸인 메리와 함께 물러나오게 되었으며[25], 이후 메리가 캐서린의 임종을 지켰다는 것이 차이점. 죽기 직전 헨리에게 편지를 보내고, 헨리는 이를 나름대로 착잡하게 읽어나가지만 끝내는 벽난로에 던져 태워버린다.

3.3. 천일의 스캔들에서의 아라곤의 캐서린


원작 소설에서는 인덕이 훌륭한 왕비로 묘사되며, 정치적 입장으로 캐서린을 적대할 수밖에 없는 메리 불린조차 개인적으로는 캐서린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꼿꼿하고 자존심이 강한 인물인 동시에 남편과 딸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으나,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정신적 학대에 가까운 심한 냉대를 당하다가 끝내 내쳐지고 만다.
영화에서는 아나 토렌트라는 배우가 연기했다. 초반, 아들을 사산하고는 어린 딸 메리 공주에게 "왕위를 이을 네 남동생을 낳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왕이 메리 불린, 앤 불린 자매에게 차례로 빠져들다가 마침내 자신을 내치기 위해 재판까지 열지만, 재판정으로 들어가기 직전 불린 자매를 만나 앤 불린에게 "나는 캐서린, 잉글랜드의 왕비이니라"라고 선언한다. 영화에서도 원작 못지않게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인물.

3.4. 스페니쉬 프린세스(The Spanish Princess)에서의 아라곤의 캐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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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송사 Starz에서 시즌 2까지 방영되었다. 기존 사극에서 주로 앤 불린과 대립관계에 놓여져 있는 조연으로 등장했다면, 이 드라마에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만큼 캐서린의 어린 시절부터 묘사된다. 영화 천일의 스캔들의 원작 소설 The Other Boleyn Girl의 원작자 필리파 그레고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로, 기존에 같은 방송사인 Starz에서 방영되었던 The White Queen, The White Princess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주로 스페인 출신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 흑발과 흑안의 외모로 묘사되었던 기존 사극과 달리, 실제 캐서린의 초상화 속 외모처럼 벽안과 조금 어두운 진저톤의 금발로 묘사된다. 연기한 배우는 왕좌의 게임의 미란다로 유명한 샬럿 호프.
[1] 아라곤어로는 카타리나 다라곤(Catarina d'Aragón).[2] 앤 불린의 언니.[3] 필리파 그레고리의 소설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메리 불린[2]이 캐서린 왕비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를 밀어넣으려는 집안 어른들에게 반발하면서 캐서린 왕비를 두고 '세 번에 걸친 공주'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이 고귀한 혈통을 두고 한 말이다. 아라곤 왕의 딸이자 카스티야 여왕의 딸이며, 잉글랜드 왕자와 결혼했으니, 세 나라의 princess인 셈이다.[4] 현대 사회에서도 남성이 성적 능력이 없다(=고자다)는 것은 당사자 입장에서 부끄럽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고, 적지 않은 남성들이 종종 뻥까지 섞어가며 자신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는 경우 역시 드물지 않다. 하물며 중세~근세 기준에서 신혼의 신랑이 친구들 앞에서 "나 어제 마누라하고 섹스 못했어"(=난 성적 능력이 부족해/난 아내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남편이야.)라고 대놓고 말하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며, 설령 못했다고 하더라도 허세로라도 했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5] 당시 관습상 부부가 첫날밤을 보내지 않으면 결혼은 무효였다.[6] 키가 작은 것에 대해서, 10대 중후반 동안 시아버지 헨리 7세에게 냉대받아 경제적으로 힘들게 지낸 탓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헨리 7세 때문에 경제난에 시달리느라 발육부진이 왔다는 것. 실제로 당시 캐서린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후일 캐서린이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여러 번 가졌지만 대부분 유산/사산한 것 또한, 이 시기의 어려운 생활의 후유증이라는 의견이 있다. 결국 튜더 왕가의 대가 끊긴 것은 결과적으로 헨리 7세의 잘못이 되는 셈. [7] 사실 족보를 따지면 어머니가 서고트에서 비롯한 게르만계 출신이고, 아버지도 어머니와 친가(트라스타마라 가문)로 6촌이라 혈통 면에서 대동소이하므로 이렇게 될 확률이 높다. 족보만 따지게 된다면 서고트 게르만계에 바스크와 라틴 혼혈이 살짝 가미되었다고 볼 수 있다.[8] 특히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헨리 8세가 '내가 왜 늙고 못생긴 형수와 결혼해야 하냐.'고 반발을 하는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물론 당시 캐서린은 '늙고 못생긴 형수'가 아니라 20대의 한창 나이였다.''' 그것도 고작 23세로 요즘으로 치면 아직 대학생 나이다. 이 책에 있는 숱한 고증 오류 중 하나.[9] 이 잦은 유산과 태아의 사망이 실질적으로는 헨리 7세 탓이라는 주장도 있다. 헨리 7세가 캐서린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냉대하면서, 신체적으로 한창 자랄 나이인 10대 중후반에 무려 7년 동안이나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의 어려움을 겪었으니 신체발육이 제대로 안 되었을 거란 추측을 할 수 있다.[10] 각종 창작물에서 이 상황이 더 극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튜더스 시즌 1에서 시녀에게 '아들을 낳았지만 태어난 지 엿새만에 내 품에서 죽었다. 아주 귀여운 아이였다. 그리고 그 후로 전하께서 내게 발걸음을 안 하신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 바 있다. 그러나 이후 헨리 8세는 이 시녀에게 눈독을 들이다가 검열삭제를 벌인다. 이와 비슷하게 영화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캐서린이 아들을 사산한 후 곁에 있던 아직 어린 딸 메리 1세에게 '왕위를 이어갈 네 남동생을 낳지 못했다.'고 울며 한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로부터 얼마 뒤에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이렇듯 실제로 캐서린이 낳은 아들이 생후 며칠만에 숨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훗날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가 낳은 에드워드 6세의 건강에 엄청난 신경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헨리 8세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6세 또한 왕이 되긴 했지만 몇년 안가 죽었다.[11] 헨리 8세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미혼으로 살다 죽은 후로 왕위계승자가 없어서 튜더 왕가의 맥이 끊어졌으니, 이 걱정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12] '레위기 20 : 21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자는 자식이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 드라마 <튜더스>에서는 헨리의 고해를 듣고 이 구절을 말해준 신부가 '자녀 분이 계시잖습니까?'라고 하자 심각하게 '아들은 없소.'라고 받아친다.[13]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카를 5세로 에스파냐 왕이며, 캐서린의 조카였다.[14] 이 역시 성경이 인용되는데, 신명기 25 : 5에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 형제를 남편으로 들여야 한다"는 역연혼의 구절이 반대파의 근거였다.[15] 더욱이 클레멘스 7세는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 사건을 겪은지 6년밖에 안 되었다. 교리상 이혼이 되건 안되건 상관없이 카를 5세가 무서워서라도 반대했을 것이다.실제로 이원복이 감수한 계몽사 학습만화세계사에서도 교리 뿐 아니라 당대 최강국인 에스파냐 국왕의 비위를 거스릴 수 없었다고 쓰여있다. 여기에 에스파냐 국왕이 하는 말 '''"너 이혼하면 왕 다한 줄 알아라!"'''[16] 다만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흔히 있는 오류 중 하나로, 페르난도 2세는 이때 이미 고인이었다. 따라서 카를 5세가 "죄없는 우리 이모를 몰아내려 한다고??" 정도로 바꿔야 한다.[17] 당연하지만 수녀는 독신으로 살아가야 한다.[18] 결국 이 사건이 성공회가 생기는 것에 영향을 끼쳤기에, 캐서린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19] 쫓겨나기 전에 헨리 8세가 "나와의 혼인무효를 인정하고, 앤 불린을 새로운 왕비로 인정하면, 생활비와 좋은 집을 제공해주고 메리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캐서린이 끝까지 거부하였기에 헨리 8세는 캐서린을 더욱 미워했다.[20] 농담이 아니고 조선시대에 헨리 8세와 비슷한 가정사를 가진 성종숙종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지만, 윤씨가 죽은 후에는 군관을 보내 장례를 돕게 했다. 숙종도 장희빈에게 사약이라는 극단적인 수를 쓰긴 했다만, 장희빈의 장례는 왕비에 준한 예로 지내주었다. 물론 이 둘의 경우엔 자신이 죽인 여자가 의 생모라는 점이 걸려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쳐도, 한때는 아내이며 왕비였던 여자가 죽었는데 슬퍼하는 척조차 하지 않은 것은 문제다.[21] 고어 표현으로 당시엔 여왕 또는 왕비를 나타내던 queen의 표기법이 quene이었다.[22] 인현왕후는 복위는 됐지만 몸이 너무 병약했던 탓에 다시 왕족이 된 메리트라곤 사실상 느껴보지도 못한 채로 고통스럽게 죽었다. 원래부터 튼튼한 몸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유배생활로 몸이 더 망가져 버린 것.[23] 아일랜드 출신 가수 겸 배우. 덱스터 시즌 5에서 아일랜드계 보모 소냐를 맡기도 했다.[24] 극중 그 분위기를 보면 상당히 돌발상황이었다.[25] 헨리 8세가 캐서린에게 찾아와 혼인무효가 이루어졌음을 알리며 메리 또한 사생아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마침 캐서린의 방으로 오던 메리가 이걸 들어버린다. 헨리는 메리가 온 것을 보고서도 기어이 "나의 새 아내가 곧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이만을 후계자로 인정할 것"이라 선언한다. 분노한 캐서린은 영국에 자신 이외의 왕비는 있을 수 없다고 외치고, 메리는 헨리를 가로막고 서서 '''"내 눈을 똑바로 보시고 나를 사생아라고 불러보세요"'''라고 말한다. 이에 헨리는 "너를 위해 기도할 테니 네 어머니를 따라가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메리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며 어머니와 함께 떠난다. 해당 장면의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