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

 



'''Henry VIII'''
<colcolor=#000> '''왕호'''
헨리 8세 (Henry VIII)
'''출생'''
1491년 6월 28일
켄트 그리니치 그리니치 궁전
''' 사망 '''
1547년 1월 28일 (55세)
런던 화이트홀 궁전
'''장례식'''
1547년 2월 16일
버크셔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재위'''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의 왕
1509년 4월 22일 ~ 1547년 1월 28일
'''신장'''
188cm
'''배우자'''
아라곤의 캐서린 (1509년 결혼 / 1533년 무효화)
앤 불린 (1533년 결혼 / 1536년 무효화, 사형)
제인 시모어 (1536년 결혼 / 1537년 사망)
클레페의 앤 (1540년 결혼 / 1540년 무효화)
캐서린 하워드 (1540년 결혼 / 1540년 사형)
캐서린 파 (1543년 결혼)
'''자녀'''
헨리, 메리 1세, 헨리 피츠로이,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
'''아버지'''
헨리 7세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
'''형제'''
아서, 마거릿, 메리
'''종교'''
가톨릭성공회[1]
'''문장'''
[image]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초기 통치
2.2.1. 수장령
2.3. 후반 통치
3. 평가
4. 기타
5. 가족
5.1. 헨리 8세의 왕비들 (결혼 기간)
5.2. 자녀들
6. 창작물에서의 헨리 8세
6.1. 1969년 영화 <천일의 >
6.5. 미스터 피바디와 셔먼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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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의 왕.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의 죽음으로 왕좌에 올랐고, 자녀 은 모두 왕이 되었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간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장미 전쟁으로 완전히 도륙난 랭커스터 왕조요크 왕조의 피를 모두 이어 받았다.[2]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과 결별당하고 잉글랜드에서 독립시켜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전신)를 설립함으로써, 이후 잉글랜드는 물론 유럽 기독교권의 판도 자체에도 무시 못할 영향력을 끼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잉글랜드 종교개혁, 그와 관련해 국내외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 그리고 6번의 결혼 생활 중 2명의 왕비가 그에 의해 처형되는 등 요란하기 그지없는 사생활. 그의 재위 기간(1509∼1547)은 여러 모로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가득하여 오늘날에도 곧잘 회자되고 여러 창작 매체 등에서 다뤄지는 등 이래저래 인기 많은 왕. "허세왕 할(Bluff king HAL)", "건장한 왕 해리(Burly king Harry)"라는 애증 섞인 별명이 있을 정도.

2. 생애



2.1. 초기 통치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자 왕위 계승자인 아서가 15살에 요절하여 새로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509년 아버지 헨리 7세가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을 때 18세였는데, 헨리 7세가 가혹한 징세로 인기를 많이 깎아 먹었던 탓에 젊은 국왕 헨리 8세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헨리 8세도 그런 민심에 부응하여 헨리 7세 시절 악명 높던 징세관 에드먼드 더들리와 리처드 엠프슨을 체포, 런던 시내에 조리돌림 후 처형하며 인기가 많이 올랐다.
젊어서부터 사냥, 마상 창시합 등 야외활동을 정사 돌보는 일보다 더 좋아했으며, 여색도 엄청 밝히며 문란한 성생활을 일삼았다. 사실 헨리 8세가 마상 창시합에서 계속 이긴 건 참여한 다른 사람들이 왕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져준 것이었고, 젊어서 놀기 바빴기에 실제 정사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에게 일임하였다. 그러니 치세 초반의 업적은 상당수 울지 추기경의 공인 셈이다.
헨리 8세 초기 치세에는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한창이었다. 교황 율리오 2세교황령을 회복[3]하려고 전쟁이었고 이에 서로 이탈리아 내 권리를 주장한 프랑스합스부르크가 전쟁중이었는데 헨리 8세는 교황에 맞선 프랑스에게 '''"모든 기독교인의 아버지이며, 신성하신 그 분에게 감히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경고했다.
당연히 프랑스는 씹었고 분노한 헨리 8세는 프랑스와 전쟁에 들어간다. 이때 합스부르크 가문스페인과 결혼으로 동맹이었고 (곧 카를 5세에 의해 통합될 처지였기에) 스페인은 프랑스와 단독강화하고 언제든지 잉글랜드를 통수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쳐서 프랑스의 대서양 함대 기지인 브레스트를 함대를 파견하여 선공격했으나, 실패... 결국엔 헨리가 직접 대륙으로 친정에 나서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합류했는데 그의 꼬임에 넘어가 신성로마제국과 연합해 프랑스와 일전에서 선봉으로 나서 운좋게 이겼다. 그러나 전쟁 자체는 별 성과가 없었고 재정만 엄청나게 탕진한다....
대륙에서 원정은 실패했으나, 국내에선 만회는 한다. 같은 브리튼섬의 스코틀랜드 왕국은 왕 제임스 4세가 헨리 8세의 누나와 결혼하여 사돈이면서도 프랑스 편을 들어서 잉글랜드와 전쟁 중이었는데 국경지대 플로든 평원에서 스코틀랜드와의 전투 끝에 제임스 4세를 전사시키고 귀족들 상당수 포함 1만 명을 전사시키며, 스코틀랜드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에든버러까지 약탈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은[4]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국력 격차를 실감하며 종래의 '잉글랜드 적대-프랑스 우호' 정책에서 잉글랜드 주화파가 생겨나는 계기가 된다.
정통성 위협에 시달려 플랜태저넷 혈통들을 많이 처형했다는 말이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을 오인한 면이 있다. 이미 플랜태저넷 혈통은 리처드 3세 때 10여명 남은 부계 혈통 중 8명을 죽였고, 남은 서넛은 헨리 7세 때 죽이거나 외국으로 도망갔다. 사실 랭커스터 가문이나 요크 가문이나 본래는 플랜태저넷 가문이고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이 각각 시조로 실제 성은 플랜태저넷이다. 그러니 후대 구분상 랭커스터니 요크니 하는 거지 서로 정통 플랜태저넷이라 싸웠고 에드워드 3세의 장손이자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사촌 랭커스터 공작에 폐위되자 요크 공작이 반발하며 정통성을 내세웠고[5] 랭커스터 가문 헨리 6세가 정신병으로 폐위되고 그의 장자가 전투 중에 사로잡혀 요크가에 살해당하며 랭커스터 계열도 끊겼다.
그리하여 랭커스터 지지 가문들은 숙청당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의 희망은 헨리 6세의 이부동생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며 모계로 플랜태저넷(랭커스터) 혈통을 이어받은 헨리 튜더(헨리 7세)가[6] 돼버린 데다가 전쟁에 승리한 요크가에서는 또 내분이 일어나 에드워드 4세 시절 두 동생 클래런스 공작, 글로스터 공작이 네빌가와 손잡고 반란을 하다 둘째 클래런스 공작은 처형당하고, 글로스터 공작만 용서 받았다. 글로스터 공작은 조카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 리처드를 살해하며 스스로 리처드 3세가 되었는데 이에 반발한 요크 지지자들이 쪼개지면서 헨리 튜더를 지지하고,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 시킨 것... 그러니깐 헨리 8세는 완전히 명맥이 끊긴 랭커스터 혈족을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데다가, 요크 가문 혈통으로 봐서도 에드워드 4세의 적통이며 에드워드 4세의 장녀가 모후였기에 장손자이기 때문에 요크 잔당들이 반란 명분으로 내세운 인물들 워릭 백작(클래런스 공작의 아들)이나 존 드라폴[7]보다 정통성에서 더 앞서 있었다. 게다가 워릭 백작은 헨리 7세 때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성인이 돼서 탈옥하고 간수들을 매수하려다 처형, 드라폴은 반란군을 이끌고 전사해서 헨리 8세의 정통성을 위협할 만한 인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리처드 3세의 형 클래런스 공작 또한 형 에드워드 4세가 왕이 된 공로로 왕족이 된 것이지, 실제 계보는 에드워드 3세의 고손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형에게 반란 일으켰다 폐위된 클러랜스 공작의 후손이나 에드워드 4세의 누이의 아들보다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아들인 헨리 8세의 요크 혈통이 더 우선이었고''', 그나마도 헨리 7세 시기 요크 잔당들이 대거 숙청되고, 헨리 8세가 거의 나머지도 숙청해서 기존 튜더 가문보다 한참 멀게 어설프계나 모계로 그나마 방계로 까마득한 가문 몇개나 살아 남았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헨리 8세의 숙청은 혈통을 가리지 않았다.''' 왕가 혈통이 섞이지 않은 전통 대귀족들도 대거 숙청해냈는데, 이 결과 엘리자베스 시절 전통 귀족 가문은 남작까지 합쳐야 수십 개 가문에 불과했고 공작 가문은 장자 서리 백작을 처형하고 손자도 훗날 처형당하는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 하나만 남을 정도.

2.2. 이혼과 잉글랜드 종교 개혁


헨리 8세의 이혼과 종교 개혁의 원인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따랐다.[8] 마침 헨리 치세에는 종교개혁 열풍이 대륙에서 불고 있었는데,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시기 발표한 논문에 대한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기도 하는 등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며 교황의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다.[9] 이 공로로 1521년 8월에 헨리 8세는 레오 10세에게서 '신앙의 수호자(Fidei Defensor)'[10]라는 칭호를 받았다.[11]
훗날 그가 잉글랜드 국교회를 세웠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헨리 8세의 수장령 선포와 일련의 종교개혁 조치는 사실 교리, 교회 조직, 7성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2.2.1. 수장령


헨리 8세의 수장령을 비롯한 일련의 조치는 '''잉글랜드에서''' 교회의 수장 직위를 교황 대신 국왕으로 교체한 것에 불과하다. 대륙의 종교개혁처럼 로마 교황의 권한을 적극적으로 부인한 게 아니라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는 로마의 주교일 뿐, 관할권을 벗어난 초법적이며 불법적인 통치를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더 이상 잉글랜드 교회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에 불과했다.
따라서 잉글랜드 교회(Chuch of England)를 로마의 지휘에서 분리하여 독립한 것이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을 탄압하게 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성공회 문서 참고.
헨리 8세는 부친 헨리 7세의 장남이자 본인의 형인 아서 튜더의 약혼자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다. 캐서린은 헨리의 형 아서가 결혼한지 20주만에 병에 걸려 죽었지만 계속 잉글랜드에 남아있었다. 아버지 헨리 7세가 캐서린의 지참금 20만 두카트를 스페인으로 반환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차남 헨리가 형의 약혼자와 결혼하는 것은 당시 윤리로도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 교회법상으론 근친혼에 해당했기 때문. 사실 유럽 왕실들은 촌수로는 거의 죄다 근친혼이었지만 교황청에선 거의 예외없이 '''기독교 군주끼리의 결합을 대의로 인정했기에''' 이번에도 교황의 면책이 뒤따랐다. 헨리 8세는 즉위한 지 2달 만에 교황 율리오 2세의 면책으로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둘 사이에서 아들들은 줄줄히 요절이나 사산이고, 딸 하나 메리 공주만 살아남게 된데다가, 캐서린은 더 이상 아이 낳기 어려운 나이가 되자 문제가 생겨났다. 메리 공주를 당시 풍속대로 외국 왕가에게 시집보내면 하나 남은 계승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셈이고, 아들 없는 상황에서 헨리가 죽을 경우 헨리 7세 시기 이전 100여 년간 왕위 계승 다툼 병림픽이 재현될 지경에 이른 것. 단순히 아들을 보고 싶은 것 뿐이었다면 정부#s-3를 두면 될 일이고, 실제로 1519년 정부(첩) 엘리자베스 블런트에게서 헨리 피츠로이라는 남자 사생아를 얻어 공작 작위 2개와 백작 작위 1개를 퍼주었지만, 사생아는 사생아일 뿐 왕위계승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고 헨리 피츠로이도 요절했다.
중세 시절 자식이 없어서 왕조가 끊기거나 아들 없이 딸만 있어서 가문의 영지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일이 없던건 아니다. 그러나 여계 계승은 남자 계승자가 없을 경우 예외적으로 두는 수단이고, 그나마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건 보기 힘들었다. 일단 대륙의 프랑크 왕국 계통의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왕국은 살리카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남계가 절손되면 상위군주에게 영지가 몰수되거나 아주 먼 친척에게 새로 분봉되었고 프랑크 왕국 계통이 아닌 유럽에서도 딸에게 무사히 물려주는 경우보다 후계자가 어리거나 여성인 경우 무력으로 찬탈당하는게 다반사였다. 혹자는 물론 카스티야와 아라곤처럼 동군연합을 예로 드는데 아라곤의 페르난도왕은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 통치자로 명목상 인정받긴 했지만 어떠한 권력도 누리지 못했고, 페르난도가 이세벨라 여왕 사후에도 재혼했음에도 아들이 요절하여 외손자에게 계승권이 넘어간 것일뿐 당시 풍속에선 여성 승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합스부르크만 봐도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과의 결혼을 통해 해당 왕가들의 대통이 끊어진 경우 정당한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으나, 이 경우에도 헝가리 귀족들은 왕위 계승을 인정치 않아서 결국 전쟁을 통해 극히 일부의 영토만 가져올 수 있었고, 보헤미아에는 여러 이권과 자치권을 퍼줘야 했다. 부르고뉴의 예도 용담공 샤를이 전사하고 외동딸만 남은 상태에서 여계 승계를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근거로 프랑스 왕이 상위군주의 권한으로 영지 몰수를 시도하자 당시 부르고뉴 궁정에서 막시밀리안 1세에게 SOS를 쳐서 무력으로 저지한것이지 결혼으로 온전히 왕국이 상속되는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았다.[12] 더군다나 '''잉글랜드는 역사상 헨리 1세가 자신의 외동딸 마틸다에게 물려주었음에도 여계승계에 부정적인 신하들 덕에 쫓겨났고 이후로도 여왕이 없었다.''' 게다가 100여년간 왕위 계승을 두고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었기 때문에 신하들도 하나 남은 왕위 계승권이 외국으로 유출되는것에 극도로 염려하고 있었으며, 여자 군주의 통치는 남편의 강력한 영향력에 놓일것[13]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헨리의 새 장가를 찬성한 것이다. 물론 보통은 혼인무효를 교회에서 승인받으면 기존 자식들에게는 계승권을 인정하고 기존 왕비에게는 막대한 재산을 하사해서 좋게 내보내거나, 쫓아낸 경우라도 수도원으로 유폐하고 끝냈는데 헨리 8세처럼 무일푼으로 쫓아내거나 목을 쳐버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잉글랜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이미 국왕의 나라가 아니라 잉글랜드 자체로서의 국가 정체성이 뚜렷해진 상황이라 외국 왕이 들어앉아서 잉글랜드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펴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아라곤의 캐서린의 친정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메리의 지지 기반은 종교적으로 가톨릭 세력과 외세인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메리에게 왕위가 넘어갈 경우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과 결혼할 확률이 높았으며(실제로 그러했고) 그렇게 된다면 잉글랜드는 국익과 무관하게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의 대외정책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게 되는 형편이 될텐데 잉글랜드 내부에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리는 만무한 것이다.
결국 헨리는 중세 왕들이 이혼을 원할 때처럼 교황청에 혼인 무효를 요청했으나, 교황청에선 헨리 8세의 요구를 들어줄수 없는 상황이었다. 명분으론 전임 교황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아라곤의 캐서린의 친정 조카가 에스파냐 국왕이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로스 1세였기 때문이다.
결국엔 이 문제가 소송전으로 옮겨졌는데, 헨리는 캐서린이 전 남편 아서와 부부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자신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했고, 캐서린은 전 남편 아서와 부부관계를 맺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 결혼은 정당한 사유로 무효가 되었으며 따라서 헨리와의 결혼 역시 적법하다고 주장했다. 레위기가 어쨌니 저쨌니 하는 지리한 재판 끝에, 교황청에선 결정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들어 재판을 무기한 연기하거나 로마에 와서 시비를 가리라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이는 합법적으로 이혼이 불가능해졌다는 걸 뜻했다.
1529년 8월. 이혼이 무산된 책임을 물어 재상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궁정에서 쫓아내 요크로 돌려보내고[14] 토머스 모어가 대법관에 임명된다. 그리고 이혼에 이론적 근거[15]를 제공한 종교개혁 성향의 신하들을 총애하기 시작하는데 마침 켄터베리 대주교가 사망하자 대륙 신학을 공부하고 와서 교황청과 단절을 주장한 토마스 크랜머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한다.[16] 최후의 시도로 교황청에 영국 대사를 보내보지만 이미 이 시기에 교황카를 5세에 사로잡혀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어 있는 처지라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마지막 시도까지 빗나가자, 1534년 11월. 헨리는 이미 잉글랜드 교회에서 싹튼 종교개혁 성향 성직자 귀족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수장령(Acts of Supremacy, 首長令)을 선포한다.[17] 그리고 나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후속조치로 수장령에 이어 반역법(Treason Act)을 제정하여, 잉글랜드 통치자에게 나온 처분을 외국에 상소하는 것을 반역으로 선언했다. 더불어 이런 권한을 부인하는 것까지 반역으로 선언한다.
잉글랜드 교회 내부의 전통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은 일단 수장령에 몇몇 조건을 거는 정도로 반항시도를 하다, 왕의 뜻이 워낙 강경했기에 수장령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 당시까지도 독실한 가톨릭 성향 교도들은 "왕이 교황과 싸우다 그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 강했다. 중세 유럽 군주들도 일시적으로 난리치다가 교황청과 화해하던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종교개혁 성향의 젠트리 계층은 왕의 조치를 완전 환영한다.)
그러나 수장령을 죽어라고 거부한 신하들이 둘이나 있었다. 1명은 헨리 8세의 심복이자 대법관으로 대륙 신학영향을 받은 신교도 성향 신하들을 탄압하는데 등용했던 토머스 모어[18]와 존 피셔 주교[19]를 1535년에 처형하고 수도원을 파괴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38년 12월에 헨리를 '''파문해 버렸다.'''[20]
헨리 8세는 후속 조치로 뜬금없이 1538년에 죽은지 360년이 넘은 토머스 베케트(1118~1170)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모 혐의로 고발해 법정에 출두하도록 30일의 기간을 주었다. 물론 당연히(...) 베켓은 나타날 리가 없고, 이에 따라 베켓에게 유죄를 선고한 다음 켄터베리 대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을 부수고 유해를 불태운 뒤 무덤을 찾는 순례객들이 바친 막대한 보물을 몰수하기도 했다. 이는 헨리가 가톨릭 신앙일 때에도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영향으로 성유물이나 성해 공경 전통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던 영향도 있다.
그리고 수도원 해산령을 내려서 수도원의 토지와 자산들을 모두 국유화한다. 그 와중에 교회니 수도원에서 성혈이 발현했다니 하면서 순례자들을 꼬이던 곳의 비밀이 알고 보니 모두 닭이나 염소피(...)란 걸 낱낱히 폭로되면서 분노한 농민들까지 수도원을 때려 부쉈고, 잉글랜드 토지의 1/6을 차지하던 수도원은 '은총의 순례'[21]라는 대규모 저항을 끝으로 완전히 작살난다.
그런데 신앙의 수호자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 교황님에게 개기지 말라"고 말해서 교황청에 칭찬(?)받은 헨리가 왜 이리 갑자기 변하여 여자 하나에 빠져 교황에 뒷통수를 쳤나 의문점이 들 수도 있다. '''당연히 앤 불린보다 아들 낳기 염원이 큰 것이고, 원래 헨리 8세 이전의 역대 잉글랜드 국왕과 로마 교황와의 사이는 그다지 사이가 원만한 편은 아니었다.''' 존 왕 시기에도 수도원과 교회를 털고 성직자들 수입을 가로챘다가 파문당하기도 했고, 헨리 3세 시기 토머스 베켓을 죽이고 용서받음에도 막후 타협으로 대부분의 실리 특히 성직자 처분권은 잉글랜드 왕이 가져갔고, 에드워드 1세 시절에도 교회와 수도원 재산을 놓고 교황과 한바탕 싸웠다. 아비뇽 교황 시절에는 교황들을 프랑스의 앞잡이로 생각하여 무시했으며, 백년전쟁 시기 실제로 아비뇽으로 대포를 끌고가서 교황청을 협박해서 돈을 뜯기도 했다. 또한 아비뇽-로마 교회 분열기에도 역시 대립교황들 사이에서 간을 보면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헨리 8세 또한 교황청에 그다지 고분고분한 편은 아니었다. 헨리 8세는 즉위 초부터 잉글랜드 교회를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했고, 재상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영국 내에서 '교황청의 사절'로 인정해달라고 계속 주장했으나 번번히 거부당했다. 교황청에서 보기엔 울지를 교황청 사절로 인정하면 사실상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대리인이 되는 것인데, 울지는 헨리의 충실한 신하이니 헨리 8세가 울지를 핑계삼아 잉글랜드 교회를 마음대로 다룰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 거기다 1516년 라이벌 프랑수아 1세가 교황군을 격파하고 볼로냐 화약으로 프랑스 교회에서의 실질적인 권한을 취득하자 고까운 탓도 있었다. 교황청에서 세세한 명분들을 얻은 대신 프랑스 내 9개 대주교 자리를 포함하여, 주교, 수도원장 수녀원장 등 600여개 성직 임명권과 교회 수입을 프랑스 국왕에게 양도하는, 사실상 완전한 항복에 가까운 조치였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결과인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전신)의 역사는 해당항목 성공회의 잉글랜드 교회의 역사 참조 바람.

2.3. 후반 통치


앞서 서술했다시피 헨리 8세는 대륙의 종교개혁에 편승하여 잉글랜드 교회를 교황청 휘하에서 잉글랜드 내에서 교회를 자신의 지도권 아래로 돌리는데는 성공했으나, 루터의 주장인 "해당지역 군주가 해당 교회를 보호할 의무를 가진다" 정도를 빼면 대륙의 새로운 신학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루터주의 각 지역 군주가 세속과 교회의 최고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것까지는 좋아했으나 그에 더 나가서 기존 교회 체제의 7성사, 주교제도 등 기존 가톨릭 교리는 건드릴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헨리 8세의 종교 취향은 가톨릭도 루터주의도 칼뱅주의도 아닌 온건한 가톨릭 개혁 성향의 인문주의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가 왕의 취향이었으나 로마 교회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늘어나면서 기존 가톨릭 관습들을 공격하자 왕의 책이라는 어용문서를 배포하여 7성사 등을 옹호하고 대륙의 루터주의, 칼뱅주의는 이단으로 선언하며 탄압에 나선다. 특히 루터주의 신학에 영향받은 윌리엄 틴들의 영어 성경은 반입자 소지자 가리지 않고 참수하며 도리어 신교도 박해에 나서기도 하는데,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개혁이었지 실질적인 교회개혁이나 종교 개혁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렇다고 기존 가톨릭에 관대하지도 않았다. 수도원 몰수는 대체로 환영받았으나 자신을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은 토마스 모어와 존 피셔 주교를 처형한데 이어서 가톨릭 신자들을 '로마 추종자'로 선언하며 수장령과 반역법 준수를 강요했다.
즉위 초에 야외에서 즐기는 여러 스포츠는 물론 춤과 음악과 같은 예능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당시 왕족들치곤 공부도 상당히 해서 라틴어스페인어, 프랑스어가 유창했고 당대의 석학들과 천문학과 신학을 토론했다고 한다. 당대 최고 지성이던 네덜란드에라스무스조차 칭찬할 정도였다.
그러나 중년에까지 마상 창시합을 하다 낙마하는 사고를 당하며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장애가 생기면서 예전과 달리 야외활동을 마음껏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생활태도가 방종해졌고 과식을 일삼아 고도 비만이 되어 버렸다. 말년에 그가 입던 겉옷에는 일반적인 체격을 지닌 성인 남자 셋이 들어갔을 정도라고 한다.[22]
이때문에 독일의 화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헨리 8세의 초상화를 보면 잘생긴 외모...는 신하들과 아첨꾼들의 입에 발린 소리인 걸 쉽게 알 수 있다.[23][24] 스포츠에서도 마상경주 경기 챔피언이라곤 하나 실제론 왕의 기분을 맞추려고 신하들이 손을 쓰거나 알아서 져 준 것이다. 프랑수아 1세와 연회를 열 때는 마상시합까지 열고 직접 참가하여 겨루었는데 두 왕이 쌍으로 지랄을 해서 신하들이 11번이나 연속으로 져 주느라 고생(?)했다는 기록도 있다.
개인적 성격도 복잡하긴 마찬가지여서 기분이 좋을 땐 매우 너그럽고 호탕했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후로는 짜증을 잘 내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왕비를 둘이나 참수시키고 중용했던 관리들의 목까지 베어댔기 때문에, 신하들은 언제 목이 날아갈까 두려움에 떨었다.[25] 정서적으로도 굉장히 불안정했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병으로 인해 않아눕는 일도 많았고 몸 곳곳에 종기와 수포가 자라 보기에 몹시 흉했으며, 악취도 지독했다.
그가 말년에 들인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도 아내라기보다 까다로운 환자가 되어버린 늙은 남편의 실질적 간병인이었다. 지금에야 영화나 드라마로 많이 미화되기도 해서 드라마틱한 삶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의 재위 말년 즈음에는 궁정의 모두가 '''미친 왕'''이 빨리 죽기만을 기도했다고 한다.
그냥저냥 재위했다면 군사적 진흥 외에 대체로 허랑방탕하고 포악하게 재위하다 간 국왕 이상이 되지 못했을 그를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군주로 만든 결정적인 전환점은, 아마 코냑 동맹을 결성해서 카를 5세에 대항한 것이었다. 이미 라이벌인 프랑수아 1세를 견제하고 잉글랜드의 염원인 대륙 영토 확보를 위해서 반프랑스 정책 노선이었지만 카를 5세가 멋대로 프랑수아와 화해하고 마무리짓자[26] 전비만 잔뜩 탕진하여 닭 쫓던 개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카를 5세도 생각보다 멍청한 사람이라...
헨리 8세는 원래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을 통치하며 프랑스와 대치하는 젊은 황제 카를 5세를 지지했지만, 카를 5세가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를 캐바르고 프랑스 왕을 사로잡는 등 지나치게 잘 나가는 바람에 그만 경각심을 느꼈다. 그래서 '''잘 나가는 놈은 일단 패고 본다'''는 유럽의 빛나는 전통[27]에 입각해 프랑스와 교황 편에 붙어 코냑 동맹을 결성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상전에서 교황-프랑스 연합군이 개발살나면서 카를 5세에 대한 동맹은 와해 되었고[28], 이후 반프랑스 정책으로 돌아서 수장령 이후에도 카를 5세와 화해하여 프랑수아 1세에 맞섰다.[29]
이전의 헨리 7세 시기와 자신의 치세 초반에 확보해 놓은 왕실 토지와 재산은 말년에 본인의 궁궐 건축과 보석, 향연, 의상 등의 낭비와 전쟁비용으로 대부분 써버려 자식들은 궁핍한 국고에 시달리게 된다. 몰수 토지들도 총신들한테 거의 하사하거나 매각하여 낭비해버렸다. 더불어 헨리가 불하한 토지를 매입해 신흥 지주층으로 젠트리 세력들이 종교개혁을 지지하며 왕의 대외 정책에 전폭적인 찬성을 하며 친위 세력이 되었으나 엘리자베스 시기를 지나며 스튜어트 왕가 시절에는 반대로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자의적인 과세와 재산권 침해에 반발하여 왕권에 대한 강한 반대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하지만 헨리 8세 생전에는 공포정치로 인해 고위 귀족들도 하루아침에 투옥되거나 처형당하는지라 젠트리들도 이때는 '''무서워서''' 그냥 버로우 상태... 그러나 이런 평가가 전적으로 옳지 못한 게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처럼 탄탄한 재정이 없었다. 헨리 7세의 풍부한 재정은 장미전쟁으로 플랜태저넷 혈통인 요크가 랭커스터가 왕족들이 몰락하고 그를 추종하던 대귀족 이하 귀족가문들이 서로 죽이고 지면 숙청당하고 해서 헨리 7세 등극 전엔 유력귀족들은 거의 몰락하고 남작작위라도 가진 귀족가문 수십 개 밖에 남지 않을 정도여서 몰락한 귀족들의 토지를 왕이 모두 차지한 덕이고, 헨리 8세는 많이 쓴것도 있지만 말년에 토마스 크롬웰을 덜컥 처형하고 나자 재정이 개판이 되버렸고 뒤늦게 그의 공백을 실감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도 엘리자베스가 재정문제를 해결한것이 아니었고, 과세 문제를 의회나 젠트리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주로 왕실 토지나 국유재산 매각을 통해서 왕실 자금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왕실의 재정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때문에 후대 왕실인 스튜어트 왕가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처럼 돈을 펑펑 써서 쪼들린 게 아니라 제임스 1세가 즉위했을때부터 근위대는 커녕 수십 명의 왕실 경호 병력도 못 꾸릴 정도로 재정난에 시달려서 이를 해결한다고 제임스 1세는 재위기간동안 골머리를 않았다. 특히 후임왕들은 헨리 8세 때문에 독박쓴 게 아니라 애초에 프랑스처럼 관료화된 징세조직을 갖추지 못한 잉글랜드 왕실의 재정이 자력으로 해결하기엔 구조적으로 상당히 취약한 상황이었다.
이후 헨리 8세 때 성장한 신흥 계층 젠트리들은 일정 재산과 학식을 갖춘데다가 대륙의 개혁신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했고, 왕실의 자의적인 과세에 반발했기 때문에 헨리 8세 시절 이미 스튜어트 왕가시절의 청교도들과의 갈등의 씨를 뿌렸다고 보면 된다.

3. 평가



저렇게만 적고 보면 그냥 정신병자처럼 보이지만, 그 긴 치세기간 동안 저렇듯 막장으로 일관했다면 영국 국민들에게 '해리 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나름대로 인망을 얻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주변인들과 신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궁정의 일을 알리가 없는 백성들에게는 호탕하고 강한 왕으로 여겨졌다. 이런 면에서 약 150여 년 후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역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철권 통치를 휘두르며 수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을 남긴 어느 왕과 많이 비교되곤 한다.
헨리 치세는 평가는 많이 갈리지만 잉글랜드가 최초로 열강의 위치에 오른 시기로 통치에선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시대에 흐름에 맞춰 귀족들보다는 학식으로 무장한 신규 계층을 등용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평도 받고 있다. 앞서 토머스 울지 추기경은 푸주간 백정의 아들이고 토머스 크롬웰은 대장장이 아들 출신이었으나 고등교육 하나로 재상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다.
또한 헨리 8세는 집안에서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과의 연이은 충돌이나 아일랜드 원정을 비롯해,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오랜만에 출현한 대외정책과 외교에 굉장히 적극적인 왕이었다.[30] 위에서는 삽질의 연속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헨리 7세가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즉위하기까지 장미전쟁과 요크 가문 출신 왕들의 불안정한 치세를 거치며 집안싸움에 박터지던 기억이 남아있던 당시 잉글랜드로서는 헨리 8세의 저런 적극적인 대외정책에 대해, 잉글랜드 또한 나름대로 국제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열강 대열에 합류했다는 인상을 받을 만도 했을 것이다. 비록 대륙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지만, 튜더-스튜어트 왕조 시절의 잉글랜드는 이후에도 유럽 정세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계속 관여하며 열강 행세를 하여 유럽에서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는데, 그 시초는 헨리 8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헨리 8세는 즉위 초부터 선왕 헨리 7세 시절부터 추진[31]되던 해군증강 정책의 기조를 이어 조선시설을 정비하는 등 해군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는 헨리 8세의 최대 치적으로 꼽힌다. 헨리 8세는 (울지의 공도 크지만) 즉위 초 5년 만에 해군 규모를 선왕 때보다 4배나 증강 시켰고, 이를 발판으로 대륙에서 잉글랜드가 열강으로 인정받기 이른다. 1546년에는 해군청을 신설하여 영국이 해양강국으로 뻗어나가는데 정책적 발판도 만들어낸다.
이런 의도에서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한 강력한 전함(카락선의 끝판왕 격이다.)인 메리 로즈호를 만들었다. 이 전함을 건조한 목적은 헨리 8세가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심혈을 기울여 만든 메리 로즈호는 프랑스를 침공하기도 전에 헨리 8세가 보는 앞에서 홀라당 가라앉고 말았다.
후에 수백 년이 지나서야 인양에 성공했는데 인양해놓고 보니 실로 공을 들인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메리 로즈호의 대포는 당시 유럽에서 제일가는 대포장인에게 의뢰해서 사정거리가 다른 대포보다 월등히 나은 것이었고 배의 설계구조도 이전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것을 시도해서 어느 배보다도 거대하고 초강력한 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포 포문을 배 밑까지 설치하고 이 대포가 너무 무거웠던 데다가 진수식에 너무 많은 병사를 태운 탓에 침몰하고 말았지만... 전문가들은 메리 로즈호가 위력을 발휘했다면 엄청났을 거라고 추정한다. 무게중심 불량은 카락선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으며 이 문제를 개선시키기 위해 갤리온으로 발전한다.
메리 로즈호는 홀라당 가라앉았지만 헨리 8세는 그외에도 재위기간 내내 전함 건조에 공을 들여서 헨리 8세가 사망할때 50여척에 달하는 신규 전함을 건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당장 그와 같이 해군을 증강했던 헨리 8세의 목표는 결국 실현되지 못한 대륙 공격이었을런지 모르나 이런 해군력 증강과 조선시설의 기반 정비는 결과적으로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상대하는데,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훗날 세계최강으로 불리게 될 영국 해군의 전통 마련에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헨리 8세의 공은 상당히 큰데, 당시 스페인-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우수한 화기의 운용으로 프랑스를 격파하면서 유럽 최강국의 자리를 차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화기의 도입과 화기에 대한 대처 방안의 마련에 적극적이기도 했다.[32] 이 일환으로 신개념의 방어시설을 건축하기도 했는데 원형의 탑들을 두른 독특한 포대를 해안 방어용으로 만들기도 했다. 원형으로 탑을 만든것은 적의 포격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군사적 중흥이 비록 프랑스나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같은 대륙의 강적들 상대로는 헨리 본인의 치세 중에서는 투자한 것에 비해 큰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저런 르네상스의 기술적 진보에서 낙후돼 있었던 스코틀랜드 상대로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1513년엔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전쟁할 사이에 스코틀랜드가 뒷치기로 침략했지만, 잉글랜드군은 플로든 전투에서 귀족들을 포함한 스코틀랜드의 군사 1만 명과 제임스 4세마저 전사시킨 뒤 에든버러를 약탈했다. 이 여파로 제임스 4세의 아들이자 헨리 8세의 조카이기도 한[33] 제임스 5세가 생후 18개월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스코틀랜드는 한동안 내부 권력다툼으로 인해 잉글랜드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제임스 5세는 헨리 8세의 누이의 아들, 즉 외조카임에도 스코틀랜드가 반잉글랜드-친 프랑스 정책을 펴자 1542년엔 3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의 오라버니 시모어를 파견하여 솔웨이에서 전투를 벌인 끝에 겨우 3천 병력으로 5~6배의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며 제임스 5세를 전사시킨다. 이로 인해 제임스 5세의 유일한 적자녀인 메리 스튜어트가 생후 9일만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스코틀랜드는 또 한번 혼란에 빠진다. 스코틀랜드가 이렇게 또 다시 허무하게 패배한 이유는 여전히 스코틀랜드가 각 클랜들을 소집하여 냉병기, 단병전, 닥돌 중심으로 돌아가는 중세적 인프라를 버리지 못한 탓도 있었다. 헨리 8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에딘버러를 또 한번 약탈하며 승리한 뒤 스코틀랜드와의 화약 끝에,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와 메리 여왕의 결혼을 강요했기에 이 전쟁을 '거친 구혼'이라는 뜻인 'Rough Wooing'이라고 부른다. 이후 역사에서 메리는 외가인 프랑스[34]로 도망가서 조약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두번에 걸쳐서 스코틀랜드 병력을 싹싹 털어 먹었기 때문에, 이때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완전 점령하는데 거의 성공할 뻔했다.
비록 프랑스의 개입으로 스코틀랜드를 복속 시킨다는 전략적 목표 달성은 실패했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스코틀랜드에서는 더이상 자국이 잉글랜드와 1대1로 대결하기에는 국력의 차이가 너무나 벌어졌다는 걸 통감하며, 이는 종교개혁을 통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쪽 모두 개신교로 이념적 동지가 되자 스코틀랜드 측에서 더이상 대립을 그만 두고 잉글랜드와 관계를 개선한 다음 결국 연합왕국으로 나아가는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1536년에는 웨일즈를 완전히 잉글랜드 왕국에 흡수 시켰고 1541년에는 대대로 아일랜드 총독을 독점하며 반 독립상태였던 킬데어 가문을 소환숙청하고 아일랜드 반란을 평정. 더블린 의회에서 '아일랜드의 왕' 칭호를 수여 받았다. 사실상 브리튼섬과 아일랜드 섬을 평정하고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격.
당연히 이런 군사력 증강에는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헨리 7세가 재건한 건전 재정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때문에 수장령 선포의 이면에는 면세혜택을 무기로 엄청난 부를 쌓아왔던 수도원을 장악해서 그 부를 털어먹으려는 숨은 계산도 깔렸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신규 건함 건조와 방어시설 구축등의 재원은 상당부분 이런 수도원에서 몰수한 재산을 투입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교리상 갈등보다는 정치적 갈등이 원인이었다.
처음 이혼요구를 강하게 요구하고 교황청의 특사에 의해 영국에서 공판이 진행될 때까지는 거기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혼인무효의 가망이 없자 저지르다시피 나간 것인데, 토머스 크롬웰을 비롯하여 젠트리 계층은 대륙의 개혁신학을 지지해서 가톨릭에 별 미련이 없었고, 더불어 헨리 8세가 교회까지 완전히 자신의 수하에 놓으려는 야심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헨리 8세 자신은 교황지상권을 제외하면 가톨릭 교리를 고수하면서 자의적으로 신학적인 교리를 수정하기도 했고, 이로 인해 복음주의파인 캐서린 파 왕비를 가두기까지 했다.

4. 기타


  • 파란만장한 사건들로 가득한 헨리 8세의 치세기는 후세의 창작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제공하여, 오늘날에도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실제보다 많이 미화되고 있기도 한 인물이다. 또한 6명의 부인에 관한 일화와 영국에 별로 없는 절대군주의 이야깃거리를 남겨서인지 오늘날 영국에서도 사극이나 역사소설에서도 인기가 많은 시대가 헨리 8세 시대이다.
  • 한국에서는 조선숙종과 닮은 면이 많다고 거론된다. 비정하고 다혈질스러운 성격, 절대왕권을 바탕으로 한 통치, 변덕스런 숙청, 여성 편력과 이로 인한 자손들의 편애와 냉정함, 후계 다툼 등 군주로 보면 명군이나 가정사나 개인의 인격 등을 보면 긍정적인 측면은 없고 가장으로써의 자격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두 왕의 후계자들의 행보나 성격에도 닮은 점이 있어서 메리 1세는 경종의 위치에, 엘리자베스 1세는 영조의 위치에 매치되기도 한다.
  • 사생아로 리치먼드, 서머싯 공작 헨리 피츠로이가 있었으나, 그 역시 16세에 요절한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처럼 17세쯤에 요절했다.
  • 잉글랜드의 느슨한 관습법으로 존재하던 소도미법을 본격 공식화하여 동성애를 한 귀족을 교수형에 처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 영국의 로열메일과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를 창립하기도 했다.
  • 엄청난 미식가이자 대식가였다고 한다. 특히 식사를 하면 하루에 접시를 20개나 비웠을 정도라고 한다. 한 귀족이 헨리 8세의 변을 치우는 일을 했는데 다른 귀족들이 그런 영광스런(…) 일을 해서 어떠냐[35]고 묻자 뭐 왕이 대식가인건 알겠다고 답했을 정도. 워낙 많이 먹다보니 용변을 보는 횟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젊은 시절에는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나름 체중관리를 하였으나 마상시합중 낙마사고로 다리를 다친 이후에는 운동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탓에 점점 살이 쪄서 노년에는 허리둘레가 50인치에 가까웠다고 한다.
  • 6명에 달하는 아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기묘하게도 일정 부분의 패턴이 있다.
    • 이혼→ 처형→ 병사의 단계를 반복하였다.
    • 이혼한 왕비들과 처음 결혼할 때는 둘다 정치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게 작용했다(아라곤의 캐서린-스페인과의 관계 문제, 클레페의 앤-독일의 개신교 제후들과의 동맹 시도).
    • 처형당한 왕비들의 처형 명목은 둘 다 다른 남자와 놀아났다는 간통죄였다.
    • 병사한 아내들의 사망 원인은 모두 출산 후유증으로 인한 산욕열이었다. 단, 마지막 아내인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사망한 후에 재혼했다가 출산한 것.
  • 헨리 8세의 전신 초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간의 볼록 튀어나온 것은 코드피스라고 부르는 당대에 유행하던 패션이다. 본래 실용적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나중엔 저렇게 처럼 쓰이게 되었다. 아들 에드워드 6세의 초상화에도 볼 수 있다.

5. 가족


부모나 형제자매는 헨리 7세 참조.

5.1. 헨리 8세의 왕비들 (결혼 기간)



5.2. 자녀들


  • 적장녀 메리 1세 : 1516년 2월 18일 ~ 1558년 11월 17일(42세)
  • 서장자 헨리 피츠로이 : 1519년 6월 15일 ~ 1536년 7월 23일(17세)[36]
  • 적차녀 엘리자베스 1세 :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69세)
  • 적장자 에드워드 6세 : 1537년 10월 12일 ~ 1553년 7월 6일(15세)
이 중 적자녀 셋은 모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비교적 천수를 누린 사람이 엘리자베스 1세밖에 없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1세 역시 자손을 남기지 못해 헨리 8세의 직계는 끊어졌다.

6. 창작물에서의 헨리 8세


  • 대항해시대2에서 영국 국왕으로 등장. 그런데 저 초상화와는 얼굴이 전혀 딴판이다. 옷토 스피노라로 진행 시 옷토에게 스페인 함대를 나포하는 사략함대의 결성을 명령하며 지원금을 대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길버트라는 오만한 감독관의 농간으로 옷토가 받는 왕의 돈은 고작 3백 닢.
  • 토머스 모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37] <사계절의 남자>에서는 비열하면서 카리스마 있는 군주로 나온다. 배우는 로버트 쇼, 발지전투의 전차장 헤슬러 바로 그 사람이다.
  • 노래 <푸른 옷소매>(그린슬리브즈의 잘못된 번역)는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위해 쓰여진 곡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작곡시기가 맞지 않다.
  • 심슨 가족에서는 영국 역사에 관한 에피소드에 등장하며 헨리 8세가 후계자 만드는 내용을 일부 다뤘다. 이 때 헨리 8세는 호머 심슨이 역할을 맡았고, 호머 심슨의 성격을 그대로 뒀는데 놀랍게도 성격이나 행동만큼은 고증오류가 거의 없다.(...) 윗 내용을 보고 난 뒤 시즌 15의 에피소드 11 편인 Margical History Tour를 보면 참으로 기가막힌다. 물론 내용은 사실과 다르게 개판이다.

6.1. 1969년 영화 <천일의 >


배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두 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것으로 유명한 리처드 버튼.
헨리 8세의 전형적인 이미지인 변덕스런 호색한을 연기한다. 아들을 낳지 못한 캐서린 왕비는 이미 냉대하고 있고 궁정 무도회에서 만난 앤에게 반해 그녀와 헨리 퍼시의 결혼을 막고 어떻게든 꼬셔보려 하지만 차갑기만 한 앤을 어찌 할 줄 모른다. 급기야 앤에 대한 욕망에 더해 남자 후계자를 얻어야겠다는 강박으로 캐서린 왕비를 내쫓고, 가톨릭 교회와도 갈라서서 마침내 의 마음을 얻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에게 실망해 애정이 식어간다. 그리고 캐서린 때와 똑같은 구도로 제인에게 눈이 돌아가 앤과 갈등하다 결국 을 처형시킨다.
그야말로 진퉁 나쁜 남자다. 나쁘지만 매력적인 남자가 아니라 그냥 나쁜 놈. 자신을 거부하는 에게 거의 강압에 가까운 애정공세를 퍼붓는데, 그게 매력으로 보이기에는 치사한 짓도 많이 했다. 자신을 왕이 아닌 사랑에 빠진 남자로 보아달라고 앤에게 작업을 걸다가도 앤에 계속 거절하자 왕의 권위를 내세워 궁정에 붙들어두고, 눈독들인 제인 시모어를 앤이 궁정에서 추방해버리자 제인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앤을 협박한 카드가 자기 말 안 들으면 엘리자베스의 계승을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앤이 끝까지 거부하며 성질을 긁자 손찌검까지 했다.
자기 정당화에도 능해서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을 내쫓고 제인를 들이기로 마음먹고 어떻게든 핑계를 찾아내라고 크롬웰에게 윽박을 질러놓고는, 재판에서 (고문과 협박으로 조작된) 불륜 증언들이 나오니까 거기에 스스로 넘어가 감옥에 있는 앤을 찾아와 불륜을 저질렀나 아닌가 확인을 받고 싶어한다.(그러면서 "네가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나는 알 수 없겠지."라고 자신이 정말 불륜의 피해자인 양 행세를…) 악에 받친 앤이 바람도 피웠고 당신을 사랑한 적도 없다고 발악하자 돌아와서는 "앤은 불륜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내게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면서 집행 명령에 서명을 한다. 그러고는 이 처형되자 바로 제인에게 간다.

6.2. 튜더스


[image]
배우는 조너선 리스 마이어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원래 초상화보다도 잘생겼으나 행실은 매우 나쁘다. '''본 작의 주인공'''이다 보니 당연히 비중이 크다.
튜더스 초반 시즌에서의 헨리 8세는 젊고 패기 넘치며 잘생긴 왕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가끔씩 안습한 장면이 보인다. 나도 할 수 있다며 홧김에 말을 타고 제방을 뛰어넘으려다 진흙속에 거꾸로 빠져 질식사할 뻔했으며[38], 마상창시합 중에는 보호구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서 머리를 잘못 맞아 사고사할 위험에 처하는 등, 가끔씩 유치하고 경솔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은근히 소심하며 하찮은 일로 화를 잘 내는 신경질쟁이라서 보는 내내 그의 행각에 휘둘리는(ex: 토머스 크롬웰이라든가, 메리 공주라든가.) 주변인들을 보면 가엾을 지경이다.
앤 불린을 처형했을 때 후련해진 듯이 웃던 모습은 정말 그간 사랑하기는 한 건지 비정하게 느껴지는 모습. 곧바로 제인 시모어와 혼인하면서 제인의 사려깊은 행동을 통해 가족이 생기지만 그에게 인간성을 준 제인은 얼마 안가 사망한다. 어찌보면 '''캐서린을 버리고 앤을 죽인 징벌'''과도 같은 느낌. 하지만 그녀의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앤이 죽고 나서는 다른 이의 아이 취급하던 엘리자베스와 외면하고 있던 메리[39]에게도 애정을 쏟는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변하는 외교관계 때문에 메리가 약혼을 번복하는 사태가 이어지는 등 좋은 아버지라고 하기엔 뭐하다.[40]
딸 엘리자베스가 총명함을 드러낼 때는 딸에게 다정히 대해주면서도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했는데, 마지막 화에서 엘리자베스를 볼 때마다 앤 불린을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앤을 처형했던 일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떠올랐기에 어느정도 엘리자베스를 냉대했다는 것도 밝혀진다.
에드워드에 대해서는 그토록 원하던 아들이었기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게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지극정성을 다하지만 때로는 그런 모습이 과해보일 지경이다.[41] 에드워드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엔 스코틀랜드에서 달려와 밤새 병상을 지키기도 했다.
항상 안하무인이고 거침이 없던 그였지만 결국에는 나이가 들고, 마지막에는 병이 들어 무력하기 짝이 없는 왕으로 전락한다. 그런 그의 눈앞에 캐서린, 앤, 제인이 환각인지 유령인지 알 수 없는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찌보면 '''가장 헨리를 사랑했을 아내들은 헨리에게 차가운 비난을 가한다.''' 캐서린은 자신이야말로 헨리의 진정한 아내였으며 그가 자신을 내친 뒤 딸 메리도 냉대하여 시집을 못 가게 함 것을 질타한다. 앤은 자신이 결백했음을 헨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캐서린 하워드의 처형에 대해 말하며 냉소를 짓는다. 그에게 가장 순종적이었으며 그의 오랜 소망을 이뤄준 유일한 아내였던 제인마저 헨리의 잘못으로 자신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일찍 죽을 것이라고 원망하며 사라져, 헨리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든다.
마지막 시즌에서 늙고 병들어 죽음을 눈앞에 둔 헨리는 가장 절친했던 친구이자 한때 매형이기도 했던 찰스 브랜던(헨리 카빌 분)과 오랜 세월 동안의 냉랭함을 풀고 간신히 화해한다. 그러나 그때 브랜던은 중병을 앓고 있었기에 헨리와 화해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하고, 이로써 유일하게 남은 친우마저 잃게 된 헨리는 크게 상심하며 친우의 장례를 챙겨준다.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모어 등 자신을 생각하던 신료들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린 대가인지, 그는 결국 홀로 남아 쓸쓸한 말로를 맞는다. 엔딩에서는 죽음을 준비하며 마지막 아내인 캐서린 파, 그리고 메리를 비롯한 자녀들을 다른 궁으로 보낸 뒤, 이 문서 맨 위의 초상화[42][43]를 헨리가 지켜본다. 이후 뒤돌아가면서 초상화를 배경으로 헨리 8세의 죽음과 그의 후계자들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의 간략한 후일담이 자막으로 나오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6.3. 울프 홀


배우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 홈랜드 시청자에게 익숙할 대미언 루이스. 헨리 8세가 살이 찌기 시작한 시점 전[44]이라 날씬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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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스러운 왕. 매력적이며 쾌활하고 너그러운 호인처럼 보이다가도, 금방 잔인하고 매정한 면을 드러낸다. 천한 신분 출신의 토머스 크롬웰을 마치 형제처럼 살갑게 대하다가, 어느 날 "내 말대로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식이다.
젊은 시절부터 절대적인 군주로 군림해 온 탓인지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야만 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경우 용서가 없다.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경우 오랜 세월 동안 지금까지 왕을 충직하게 섬겨온 인물이나 바티칸 교황청을 상대로 한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화 협상에서 실패하자 바로 팽해버린다. 그 빈 자리에 들어앉힌 사람이 토머스 크롬웰.
튜더 왕가가 끊길까봐 걱정하고 있으며, 아직은 유럽에서 소국인 잉글랜드의 군주로서 늘 전전긍긍하고 있다.
드라마 시작점에서는 앤 불린에게 푹 빠져 있으나[45], 앤이 딸을 낳고 유산을 거듭하자 사랑은 금방 식고 열렬하게 사랑했던 그녀에게 무서울 정도로 냉정해진다. 이제는 조용한 시녀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힌 이후 크롬웰에게 앤의 숙청을 명령한다. 첫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그랬듯이 앤에게 작별인사도 고하지 않고 그녀를 런던 탑에 가둬 놓고서는, "저 여자는 아마 수백 명이랑 잤을 거다" "분명 근친상간도 했을 거야"라고 태연하게 말할 정도. 앤이 처형된 후 토머스 크롬웰을 환하게 웃으면서 포옹하는 모습, 그리고 왕에게 안기면서 크롬웰이 짓는 착잡한 표정에서 그의 무시무시함의 진가가 드러난다.

6.4. 대항해시대2


옷토 스피노라의 이벤트에 중요한 인물이다. 처음 시작할 때 에스파니아 함대를 섬멸하라는 명령과 함께 윤택한 자금을 대준다면서 이 일처리를 길버트 남작에게 모두 위임하는 바람에 꼴랑 금화 300닢에 심플튼호(카라벨 라티나)로 안습하게 시작하게 만든다. 엔딩도 에제키엘 사령관을 꺾은 옷토가 헨리 8세를 알현하면서 보게 된다.

6.5. 미스터 피바디와 셔먼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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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매정하고 호색한 사람으로 나온다(...).

[1] 본인의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서 성공회를 창시하고 성공회로 개종하였다.[2] 할머니 마거릿 쪽으로 랭커스터 왕조랑 프랑스 발루아 왕조, 어머니 엘리자베스 쪽으로 요크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3] 교회 분열시기 로마와 가까운 지역을 제외한 교황령은 거의 반독립 상태로 떨어져 나갔고, 로마로 교황이 귀환했어도 세금 내기를 거부하고 프랑스나 합스부르크나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과 연맹하여 간섭을 거부했다.[4] 특히 플로든 전투에서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4세가 4만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고 주요 귀족들이 참전하며 이탈리아에서 갑주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귀족들과 병사들을 무장시키는 등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했다.[5] 초대 요크공은 5남이나 에드워드 3세의 2남 라이오넬이 여자 후손만 남겼는데 요크가와 결혼했기에 왕위 계승 우선순위가 더 앞선다고 주장했다.[6] 에드워드 3세의 현손, 초대 랭커스터 공작의 고손자. 사실 랭커스터나 요크나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므로 튜더가도 까마득하게 멀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덕에 랭커스터 가문이 절손되자 꿩 대신 닭 격으로 추대된 것.[7] 에드워드 4세의 누이의 아들 리처드 3세가 왕비와 외아들이 죽자 일단 추정 상속자로 지명함. 새 장가 가기 전에 쫓겨나고 사망한다.[8]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유럽은 살리카 법에 의하여 여성이나 여계 후손은 왕위를 이을 수가 없었는데, 캐서린 사이에서 낳은 3남 3녀 중 훗날 메리 1세가 되는 메리를 제외한 모든 자식이 일찍 사망한다. 거기다 정부나 후처에게서 나온 자식 역시 왕위를 이을 수가 없기에,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무조건 아들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헨리 8세가 40을 넘은 나이였고, 헨리 8세보다 6살 많은 캐서린 역시 더 이상 후사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기에, 헨리 8세는 새로운 왕비를 들여 아들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9] 사실 논문은 잉글랜드 주교들이 쓴 것을 헨리의 명의로 발표한 것. 당시 풍속에선 발표자의 명의가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중요했기에 흔한 일이었다.[10] 영문으로 바꾸면 'Defender of Faith'[11] 그리고 이 Fidei Defensor라는 칭호는 현재 엘리자베스 2세에 이르기까지도 국왕의 공식 타이틀로 유지되고 있다.[12] 그나마도 절반은 프랑스에 뜯겼고, 손자대인 카를 5세 시절까지도 전쟁 상태였다가 결국 카를 5세가 프랑수아 1세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북이탈리아 지배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몰수된 영토는 포기했다.[13] 사실 메리 1세의 경우에도 펠리페 2세와 결혼시 펠리페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돈 카를로스가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물려받고 결혼 사이에서 적자가 태어날 경우 저지대와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지 통합될 예정은 전혀 아니었다.[14] 울지는 원래 요크 대주교다. 추기경임에도 켄터베리 대주교가 왜 못 되었냐면, 울지 이전에 취임한 켄터베리 대주교가 80살 넘게 장수해서. 그리고 이 시기엔 주교들이 임지에서 벗어나서 여러 교구를 소유하며 빨대만 꽂고 다른 곳에서 수입만 차지하는 경우가 잦았다.[15] 단순 어거지가 아니라 이미 교회법상으로 명백하게 근친상간이었다. 때문에 결혼 당시에도 이런 의견이 없는 게 아니었다. 또 개혁성향 개신교 신학자들은 당연히 교황의 권위를 인정치 않은데다가, 개신교 신학에선 결혼은 교회에서 주관하는 성례와 상관없다는 게 통설이었기 때문에, 주저없이 주장한 것.[16] 교황청은 헨리 8세가 막 나갈 걸 방지하려고 했는지, 예상 외로 크랜머에게 임명장까지 보내준다.[17] 현재 수장'령'은 실제론 의회에서도 통과되어 령이 아니라 법으로 잘못 번역된 것으로, 수장법으로 바꿔 불러야 하지만, 워낙 수장령으로 자주 쓰였기에 보통 수장령으로 씀.[18] 헨리는 절친 토마스 모어를 시켜서 대륙 신학에 영향받은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교수 40명을 체포하여 6명을 화형시켰다. 그리고 헨리가 이혼을 밀어부치자 반대하며 1532년 5월에 대법관에 사임한다.[19] 교황청에서는 피셔 주교가 헨리 8세에 의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설마 추기경을 처형하랴 싶어서 옥중에서 추기경으로 임명했으나 헨리 8세는 개의치않고 피셔를 처형했다.[20] 관점을 완전히 돌린다면, 1000년 이상 가톨릭 국가였던 잉글랜드를 한 순간에 반(反) 가톨릭 국가로 만든 왕의 명령에 대해 단 두 명(그것도 성직자는 오직 피셔 추기경 하나)만이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는 것은 또 다른 면을 시사한다. 그만큼 잉글랜드 내에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는 것. 튜더스같은 작품에서 수장령을 반대하는 신하가 둘 밖에 안 나오는 것이, 대표적인 인물 둘만 넣은 게 아니라, 정말로 둘 밖에 없었다...[21] 사실 신앙이라기보단 경제적 이유가 컸다고 한다. 해산당한 수도원의 남녀 수도자(수사, 수녀)들은 완전히 거지가 되었고, 고위 주교들의 재산으로 수도자들을 먹여살리라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여러 교구를 소유하던 주교들은 한 교구 빼고 수입을 완전히 몰수당하고 기존 교구 수입의 10%를 또 바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반발한 주교들이 수도자들과 수도원 땅을 소작하던 농민들을 부추겨 대규모 저항이 일어났다.[22] 당시 상류층이었던 왕족들과 귀족들은 육식 위주로 과식을 하는 과시적인 식사를 했는데 당연히 이는 건강에 좋지 않았다. 헨리 8세도 그가 먹는 식사중에서 야채가 20%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섬유질이 많은 야채, 생선, 을 먹던 서민층의 식사가 건강에 좋았다. 야채는 당시 상류층 사회에서는 '하층민이나 먹는 것'으로 취급당해 귀족들은 잘 먹지 않았고, 잉글랜드는 과일 등의 생산도 부족하여 결과적으로 상류층의 영양섭취의 불균형을 초래했다.[23] 특히 화가 한스 홀바인도 최대한 위엄있게 그린 이유가 작품이 왕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형당할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24] 즉위 원년인 18세 시절에 그린 날씬한 초상화도 남아있는데, 이때 모습을 보면 선왕인 헨리 7세와 상당히 비슷하게 생겼다.[25] 물론 그만큼 헨리 8세 때 영국의 왕권이 강력하며 정점에 달했다는 뜻이 된다.[26] 다만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국내 사정이 좋지않았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도 있었기에 프랑스와의 계속 싸울수가 없었다.[27]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를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란 용어로 표현한다.[28] 잉글랜드는 지상전에 개입하지 않았기에 그다지 피해랄것도 없는건 그나마 다행이었다.[29] 단, 이 시기엔 카를 5세는 독일 내에서 루터파 탄압, 헨리 8세는 가톨릭 탄압을 열심히 하던 시기였지만 국제 정세에선 그 정도는 무시했다.[30] 비단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체계적이고 법치에 기반한 관료제와 중앙 정부 체제는 떠오른지 얼마 안 됐고, 여전히 정치는 나라를 가족이나 사람 신체에 비유하며 국왕을 아버지이자 머리로 생각하고, 국왕 개인의 카리스마와 능력, 상징성이 더 중요하던 시대다. 이 시대 국왕들의 사치와 과시는 단순한 개인적 허영이 아니라 저런 권위와 통솔력을 발휘하는 통치 이데올로기 강화의 중요한 과정이었고, 이런 면에서는 당연히 아직 기사도적 가치관이 강렬하던 시기이니 헨리 8세와 같이 대중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고, 놀기 좋아하며 호탕하고 호방한 인물상이 크게 유리했다. 반면에 부왕인 헨리 7세는 수전노에다가 뒷공작을 좋아하고, 내성적이고 과시욕이 없는 사람이라 이런 면에서 국왕 답지 않은 좀생이 같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31] 다만 헨리 7세는 짠돌이였기 때문에 상설적으로 유지되는 해군 자체를 증강하기보다는, 유사시에 해군으로 징집할 수 있는 민간선의 건조 및 임대를 통한 수익 확보에 더 치중했다. 전투용 시설을 평시에는 철거하고 상선이나 수송선으로 쓰다가 전시에는 전투용 시설을 급히 설치해서 해군으로 징집하는 형식.[32] 당시 영국은 아직까지도 화승총보다는 장궁을 무기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과는 별개로 헨리 본인은 장궁을 가장 잉글랜드적이고, 나라의 상무정신을 상징하는 물건이라고 크게 평가하며 본인도 사냥과 활쏘기 시합을 통해 장궁술을 계속 연마했고, 병과에서 도태시키지 않았다. 기술적으로도 16세기 초중반이라면 여전히 우천이나 화승총으로 대응할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 등에서 여전히 활이 의미 있는 보충 전력이 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33] 제임스 4세의 왕비이자 제임스 5세의 모후가 바로 헨리 8세의 누나 마거릿 튜더였다.[34] 제임스 5세의 왕비이자 메리 여왕의 어머니는 마리 드 기즈인데, 그녀의 친정인 기즈 가문은 프랑스 궁정에서 준왕족 취급을 받아 왕족과의 동등결혼이 가능했다. 또한 기즈 가문은 프랑스 왕실에서도 경악할만큼 골수 가톨릭이였기에, 성공회 성향의 잉글랜드와는 견원지간이였다.[35] 현대인에겐 무슨 비아냥처럼 들리지만, 전근대에 왕과 같은 권력자의 배설물을 치우는 것은 농담이 아니라 아주 높으신 분들이나 맡을 수 있는 일이었다. 어의처럼 국왕의 몸에 손을 댈 수 있고(이럴 수 있는 보직이 의외로 흔한 게 아니다!) 국왕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는고로 국왕과 왕실의 개인사와 비밀, 정치·행정 업무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으며(헨리 8세의 담당관도 무려 후작), 누릴 수 있는 권세도 대단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부왕 헨리처럼 귀족에게 용변을 맡겼고, 헨리 8세의 이후 시대 인물인 루이 14세의 경우에도 그의 요강을 담당하는 일은 고위 귀족이 맡았다. 조선에서도 왕의 변을 내의원에서 맛보고 연구했을 정도.[36] 사실 헨리 8세에게는 적장녀 메리 1세, 적차녀 엘리자베스 1세, 적장자 에드워드 6세를 제외하고도 많은 서자녀들이 있었지만 일단 제일 유명한 헨리 피츠로이만 기재한다.[37] 동명의 연극으로도 유명하다. 영화는 연극의 명성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작품. 시대극의 측면에서도 볼만하며, 주인공의 연기가 일품. 1967년 아카데미 작품상 및 남우주연상 포함 6개부문 수상.[38] 이때 신하들은 머리가 진흙속에 박혀 다리를 버둥거리는 헨리 8세를 보고 재미있다고 깔깔 웃다가 뒤늦게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고 사색이 되어 뛰어간다.[39] 프랜시스 브라이언을 보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고 캐서린과 자신의 결혼이 무효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서류에 겨우겨우 서명했기 때문에 누그러진 점도 있었다.[40] 실제로 메리에게는 전혀 좋은 아버지가 아니였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한 후에는 메리를 딸 대우도 안 해줬으며 결정적으로 혼사도 나몰라라 해서 혼기도 놓치게 만들어 버렸다.[41] 이 과보호가 도리어 에드워드 6세의 면역력을 떨어뜨렸다는 주장도 있다.[42] 얼굴은 배우 조너선 마이어스의 얼굴이다. 따라서 원본보다는 훨씬 슬림하게 그려졌다.[43] 이보다 앞서 그렸던 초상화가 있는데, 자신을 단순히 쇠약해진 노인의 모습으로만 묘사한 것에 못마땅해 하면서 다시 그리도록 명했던 것이다. 실제 역사대로,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한스 홀바인으로 설정되었다.[44] 1536년 1월 24일 열린 마상시합에 참가했다가 낙마한 후 2시간이나 의식을 잃었다. 원체 대식가인지라, 운동으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 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된 후,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2시간이나 무의식 상태였다는 것은 뇌손상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의 성격이 이 사고로 인한 뇌손상으로 잔학무도해졌지 않을까 하는 설도 있다. 이 당시 왕비는 앤 불린이었는데 남편의 사고 소식을 들은 충격으로 유산했다.[45] 앤을 생각하면 욕망에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