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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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리처드 3세
(Richard III)
'''출생'''
1452년 10월 2일
노샘프턴셔 파서링게이 성
'''사망'''
1485년 8월 22일 (32세)
레스터셔 보즈워스 필드
'''장례식'''
2015년 3월 26일
레스터셔 성당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483년 6월 26일 ~ 1485년 8월 22일
'''신장'''
172cm[1]
'''배우자'''
앤 네빌 (1472년 결혼 / 1485년 사망)
'''자녀'''
에드워드, 존, 캐서린
'''아버지'''
제 3대 요크 공작 리처드
'''어머니'''
세실리 네빌
'''형제'''
앤, 에드워드 4세, 에드먼드, 엘리자베스, 마거릿, 조지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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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의 문장
1. 소개
2. 즉위 이전
3. 찬탈
3.1. 왕위에 오르는 과정
3.2.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을 죽였다는 정황
4. 즉위 후
4.1. 외아들의 죽음
5. 사망
6. 튜더 왕조의 시작
6.1.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결혼
6.2. 헨리 7세의 숙청
7. 유골 발견
7.1. 무덤의 유실
7.2. 리카디언(Ricardian)과 필리파 여사
7.3. 유골 발굴
7.4. DNA 유전자 검사
7.4.1. 부계 Y 염색체 비교 분석/영국 여왕 정통성 문제
7.4.2. 모계 미토콘드리아 비교 검사
7.5. 재장례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장미전쟁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재위기간은 겨우 2년에 불과했다. 에드워드 4세의 동생으로 조카들이었던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섭정(Lord Protector)[2]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돌변해서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됐다.

2. 즉위 이전


1452년 10월 2일 포더링헤이(Fotheringhay) 성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의 13남매 중 12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웬즐리데일에 있는 미들햄(Middleham) 성에서 보냈는데, 그 성은 사촌형이기도 한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소유였다. 그곳에서 리처드는 워릭의 딸들 이사벨과 앤, 그리고 워릭의 피후견인 프랜시스 러블과 친하게 지냈고 이후 그 친구 관계는 평생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와 둘째 형 에드먼드가 죽자 어머니가 바로 윗형 조지와 함께 저지대 국가들로 보내어 1년간 피난 생활을 했다. 그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한 큰형으로부터 글로스터 공작위를 받았다. 다만 아직 나이가 어려 어린 시절 살던 미들햄 성으로 보내져 12살까지 기사 훈련을 받았다.
사춘기를 겪는 동안 리처드는 선천성 척추측만증으로 고통받았다는 것이 유골 검사 결과 밝혀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사생아 2명(내지 3명)을 낳았는데 그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옹립공신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을 계기로 반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왕비가 되기엔 신분이 낮았는데도[3] 그녀의 미모와 재산에 혹해 즉흥적으로 비밀 결혼을 했기 때문이였다. 당연히 대부분의 귀족들은 물론 추밀원까지도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에 반대했고 여론도 그닥 좋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공주와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을 추진했다가 에드워드의 갑작스런 결혼으로 부랴부랴 혼인동맹을 수습하느라 대외적으로 명예가 크게 실추당한 워릭 백작의 불만이 가장 컸다. 게다가 엘리자베스의 첫째 남동생 앤서니는 별다른 능력 없이 오로지 누나의 후광만으로 짧은 기간에 그와 맞먹는 힘을 지녔기 때문에 워릭 백작은 개인적인 자존심까지 상처입었다.
결국 1470년 10월, 리처드는 작은 형인 클러렌스 공작 조지와 함께 랭커스터파로 전향하여 헨리 6세와 앙주의 마르그리트에게 갔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켜 순식간에 런던을 점령하였고 에드워드 4세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워릭 백작이 클러렌스 공작 조지를 왕으로 밀고 자신을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취급하자 리처드는 다시 뒷통수를 치고 이중첩자 노릇을 하다가 에드워드 4세의 진형에 합류하게 된다. 이때 서둘러 잉글랜드를 빠져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의 모피 외투로 뱃삯을 지불하려고 하자, 리처드가 상륙지의 토지 관리인에게 서둘러 달려가서 3파운드를 빌려와 뱃삯을 내 주었다고 한다. 에드워드와 리처드 형제는 자신들의 누이인 요크의 마거릿이 시집갔던 부르고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요크의 마거릿의 남편인 부르고뉴 공 샤를(용담공 샤를)은 처남들의 망명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지만, 나중에는 군사 1200명과 배 36척을 지급해서 에드워드 4세의 귀환을 도와주었다.
1471년 3월 11일 부르고뉴를 출발한 에드워드와 리처드는 요크 파에 동정적인 동앵글리아에 상륙하려 했으나 폭풍 때문에 3월 14일, 홀더네스 지역에 상륙했다. 그 지역은 처음에는 그들의 진입을 거부했지만 에드워드가 '왕위가 아닌 그저 요크 공작령만 돌려받으러 왔다.'고 주장하여 겨우 문을 열어주었다.[4] 형제는 조지의 지지를 되찾았고, 1471년 4월 14일 바넷 전투에서 리처드는 17살의 나이에 군대의 선봉에 섰다.
이 전투의 승리에 그가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같은 해 5월 4일 튜크스베리 전투에서는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리처드는 두 전투 모두에서 선봉에 섰지만, 튜크스베리 전투가 끝난 뒤에는 마셜 백작(이후 노퍽 공작) 존 하워드와 함께 포로로 잡힌 랭커스터 파 주요 인물들을 재판했기 때문이다. 형인 클러렌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에 반역죄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는데 훗날 리처드가 포도주 통에 넣어서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에드워드 4세는 1472년 북부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을 높이고 경제적, 행정적으로 낙후한 북부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북부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리처드에게 잉글랜드 북부의 통치권을 주어 자신의 대리로서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리처드는 그때부터 1483년까지 북부를 다스렸는데, 요크 시를 중심으로 북부 전역에서 인기가 높았는데, 북부자문위원회의 최고 민사법원장으로 일하면서 공정한 법 집행을 했기 때문이다. 북부자문위원회는 요크셔와 북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토지 분쟁을 해결하고 왕의 평화를 지켰으며 범법자를 처벌했다. 그 결과 북부의 치안은 이전에 비해 크게 좋아졌고 경제적으로도 점차 나아졌다.
하지만 1470년대 중반부터 스코틀랜드의 잦은 침입이 문제되었고, 1480년에는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전쟁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게 위아래에서 협공당하는 막장 상황이 도래할 것이었다. 이에 리처드는 그해 5월 12일 북부 군대 사령관이 되어 노섬벌랜드 백작과 함께 맹렬한 반격을 했고 11월 왕과 자문위원회가 공식 선전포고를 하자 본격적 공격에 돌입하... 려고 했지만 왕이 제때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지 못했고 스코틀랜드 역시 지도부의 분열로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1482년 8월 초까지 간헐적인 접전만 계속해야 했다.
8월 초, 리처드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들어가 스코틀랜드 왕의 남동생 올버니 공작이 화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공격을 늦추지 않아서 수백 년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서 주인이 바뀌어 왔던 버윅-어펀-트위드(Berwick-upon-Tweed)를 8월 25일 비로소 손에 넣었다. 리처드의 점령 이후 다시는 버윅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없었고, 바로 그날 에드워드 4세로마 가톨릭 교황 식스토 4세에게 리처드가 에든버러와 버윅의 시민들을 모두 살려주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3. 찬탈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낚시 여행을 떠났다가 뇌졸중으로 나이 40살에 급사하고 말았다. 원래 그는 즉위 전부터 여색을 극도로 밝혔는데, 나이가 들고서도 거듭된 폭식과 폭음으로 건강이 망가진 다음에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은 에드워드 4세의 유언장에서 남동생인 리처드를 섭정으로 지명해놨기에, 그가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 되었다.
하지만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이는 물론 왕의 죽음조차(!) 리처드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 남동생인 리버스 백작 앤서니에게 무장한 군사 2천 명을 주어 왕세자를 런던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알려지지 않은 경로로 이 소식을 접한 리처드는 버킹엄 공작을 비롯한 신사 6백 명과 함께 약간의 호위병력만 대동하고 내려갔는데, 런던 근교에서 무장한 앤서니의 군대와 마주쳤다.
이때 군사적 교전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리처드는 앤서니는 물론 그 동료 토머스 본,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사망한 첫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리처드 그레이를 체포하여 며칠 후 처형했다. 에드워드 왕세자와 함께 런던으로 들어간 뒤에 리처드는 섭정(호국경)이 되어 조카의 대관식을 준비했지만, 얼마 뒤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정도 소문이 퍼지고 난뒤 에드워드 5세와 그 남동생 요크 공작을 신변 보호를 명목으로 런던탑에서 보호(?)하겠다며 본색을 드러냈고, 곧 사생아설을 정당화 하며 자신이 적법한 에드워드 4세의 계승자로 선언하고 왕위에 올랐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에드워드 4세가 자신을 옹립한 네빌 일가를 견제하기 위해 처가인 우드빌가 형제들을 중용하면서 평민 출신이었던 우드빌 가문은 하루아침에 외척으로 크게 출세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드빌 가문은 부정부패 등으로 워낙에 악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에드워드 4세 사후 그들을 내쫓는건 큰 무리가 없었다. 앞서 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재산과 미모에 반해(?) 덜컥 결혼했고, 수많은 애첩들을 후렸는데, 호색한 에드워드 4세에게 잘 보이고자 자신의 아내나 딸들을 상납(?)하는 경우도 잦았다. 특히나 우드빌 가문은 왕비의 빽을 믿고 수많은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에드워드 4세도 런던시티의 상인들에게 독점권과 이권을 퍼주는 대가로 미녀들을 상납받아 후리고 다녔기에 악평을 들었다. 에드워드 4세와 우드빌의 결혼 때 추밀원에서도 왕비의 혈통이 낮음을 근거로 우려를 표명하고 잉글랜드 주교단도 낮은 혈통에 대한 우려는 표명했지만 국왕의 바람이었기 때문에 적법한 결혼이라 승인했고 에드워드 5세가 12살이 될 때까지 아무 말이 없다가 에드워드 4세가 죽고 나서 사생아 타령을 하는 거 보면 어찌됐거나 정치적 이유라는 게 설득력이 있다.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인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의 음탕한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꾼을 고용하여 6명의 사생아를 둔 것을 런던 도처에 선전했고 윤리와 도덕을 드높이고자(?) 에드워드 4세의 애첩과 애첩을 상납한 남편을 처형했고, 에드워드 5세가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썰을 열심히 퍼뜨렸다. 실제로 에드워드 4세는 6명의 사생아를 두기도 했기에 사생아설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3.1. 왕위에 오르는 과정


  • 우선 사전 작업으로 에드워드 4세의 충신이었던 헤이스팅스경을 마법(?)으로 우드빌 왕대비와 자신을 저주했다는 구실로 체포하고 재판없이 반역죄로 참수했다.
  • 우드빌 가문은 몇몇은 해외로 도망갔는데다가 악평이 높았기 때문에 쉽게 무너졌다.
  • 6월 22일 세인트 폴 대성당 밖에서 자신의 고해신부 샤 박사(Dr. Sha)가 에드워드의 자녀들이 사생아이며 그가 적법한 왕이라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 런던 시민들은 리처드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고, 6월 26일 그는 받아들여 7월 6일 왕위에 올랐다.
이 조치의 근거는 바스와 웰즈의 주교 로버트 스틸링턴(Robert Stillington)의 증언 때문인데, 스틸링턴은 리처드에게 나아가 '에드워드 4세는 전에 엘리너 버틀러(탤벗, Lady Eleanor Talbot) 부인과 결혼했고 나는 그 결혼의 주례를 섰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의 미모에 반해 엘리너 부인을 버리고 그녀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비록 스틸링턴의 증언 당시에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너 버틀러 모두가 죽었기에[5] 증언의 사실 여부는 검증되지 못했다.

3.2.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을 죽였다는 정황


리처드 3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폐위된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 형제를 런던탑에 두었다. 물론 나중에 찰스 2세때 런던탑 계단를 보수하다가 상자를 발견했는데 안에는 유골들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유골들의 사망 연대가 언제인지도 불분명하거니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어,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유골들을 꺼내 정밀 검사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다만 2017년 1월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국교회와 영국왕실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망자의 안식을 방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골의 발굴과 정밀 검사를 허락하지 않았다.[6] 그런데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이나 문제제기와 달리 리처드 3세가 에드워드 4세의 두 아들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을 죽인 건 거의 확실하다. 에드워드 5세 항목 영문 위키디아의 주석근거< Horrox, Rosemary. "Edward V of England".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Retrieved 25 August 2013>,는 물론이고 국내 발간된 서적 중에서도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앙드레 모르네의 영국사, 서울대 라종일 교수의 <영국의 역사>, 역시 서울대 박지향 교수의 <영국사>에서도 '''일부''' 학자들의 다른 주장도 있지만 리처드 3세가 두 조카를 죽였음이 확실하거나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한다.
에드워드 4세도 헨리 6세 부자를 런던탑에 감금한 뒤 죽였지만, 에드워드 4세가 발표한 공식사인은 '극심한 우울증의 고통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당시 랭커스터 지지자들은 왕에 걸맞지 않은 대우를 받다가 구타당해 죽었다고 주장했고, 현재에도 헨리 6세는 에드워드 4세가 죽였다고들 보며 별다른 부정설도 없다. 리처드 3세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매우 부정적 인물로 묘사되었음에 반발로 500년이나 지난 사건을 현대 형사법상 증거 타령 운운하며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두 조카를 죽였음은 정황상 거의 확실해 보인다.

4. 즉위 후


1483년 10월 한때 리처드의 지지자였던 버킹엄 공작이 에드워드 5세 형제 살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진압되고 버킹엄은 참수했으나 민심 안정이 필요해졌다.
1484년 1월 23일, 리처드는 재위 기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회를 열어''' 27일 동안 사법 18개조, 공법 15개조를 통과시켰다. 18가지 사법들은 전년 10월 반란을 일으킨 버킹엄 공작 일당을 단죄하고 존 하워드를 노퍽공작으로 승진시키고 북부 지역의 유력 귀족인 스탠리 가문에 토지와 벼슬을 퍼주면서 왕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목적에서 만들어진 <Titulus Regius(왕의 권리)> 라는 문서는 상술한 에드워드 4세의 혼인 문제를 근거로 리처드 3세의 계승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정리했다. 이후 헨리 7세는 이 문서의 원본을 포함한 모든 사본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7], 크로일랜드 수도원에 한 부가 살아남아 현존한다.
15가지 공법들은 덕세를 폐지하는 등 사법 체계를 개혁하고 잉글랜드 상인과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힘없는 평민들에게 유리한 개혁이었기에 프랜시스 베이컨 경을 포함한 후대 학자들에게 호평받는다. 아래는 15가지 공법의 구체적인 내용.

1조 - "이제부터 모든 토지 양도, 토지 선물과 그와 같은 행동들은 판매자와 그 자손이 아니라 구매자에게 유리한 조건이어야 한다."

2조 - "이 왕국의 백성들은 어떠한 덕세도 부담하지 않는다."

3조 - "모든 치안 판사는 죄수에게 조건부 석방 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 죄수가 사권을 박탈당할 때까지 어떤 공무원도 그의 재산을 빼앗을 수 없다."

4조 - "신용과 토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주 장관의 순회 때에 배심원을 선정해야 한다."

5조 - "1조는 오랫동안 내려오던 규정을 바꾼 것이 아니며, 왕은 영지 수령권을 유용할 수 없다."

6조 - "모든 파이가루 법정에서 원고 혹은 그의 변호사는 반드시 선서해야만 한다."

7조 - "개인은 민사법원의 재판관들 앞에서 부과된 재산 양도 민사소송(fine)과 그 선언서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

8조 - "브로드[8]

는 팔리기 전에 반드시 완전히 세탁되어야 하고 길이는 24야드, 너비는 2야드여야 한다. 직물 거래에 어떤 부정직한 일도 있어서는 안 되고, 하얀 직물에는 분필로 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

9조 - "이탈리아 상인들이 상품을 파는 방식에 어느 정도의 외국인 규제가 필요하다."

10조 - "비단 레이스, 리본, 가위, 방울, 못 따위의 수입을 금지한다."

11조 - "이탈리아 상인들은 포도주 1통당 10개의 좋은 활을 만들 막대를 가져와야 한다."

12조 - "이 왕국에 특정한 상품들을 들여오는 걸 금지한 이유는 그것들이 초래할 결과 때문이다."

13조 - "포도주와 기름은 양을 재기 전에는 용기에 담아 판매할 수 없다."

14조 - "성직자의 십일조(dismes)를 걷는 회계사는 재무부에서 진행되는 다른 사람의 소송에 증인으로 불려나오지 않는다."

15조 - "전임 잉글랜드 왕비 엘리자베스 그레이에게 국가에서 내려준 모든 것과 영지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이중 4조는 악용의 가능성이 많았고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개인의 돈이 많을수록 지닌 미덕도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작정 욕할 것이 아니라 의도는 좋았던 사례로 보아야 옳음 직하다.
그러나 이전 랭커스터 왕들이 부족한 정통성을 의회의 도움으로 통치하려던것과 달리 요크 가문 왕들은 의회를 무시하고 상속권으로만 통치하려 했던게 실책으로 보인다. 뒤늦은 조치와 달리 요크 가문의 통치는 의회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리처드 3세가 급속하게 민심을 잃고 몰락한 것도 이것과 영향이 있다. 물론 이 시절 의회는 지금과 달리 상하원을 막론하고 귀족과 젠트리들이 좌우했다.

4.1. 외아들의 죽음


그런데 리처드에게 큰 타격을 준 사건은, 1484년 후계자인 외아들의 죽음이었다. 리처드는 두 조카를 죽이고 나서도 뻔뻔했다. 리처드 3세의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가 죽고나자 후계자가 없었고 일단 자신의 누이의 아들인 외조카 존 드 라 폴을 추정상속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왕비 앤 네빌이 아이를 못 낳자 '왕비가 2월까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며 소원을 빌고 다녔는데 왕비는 4월에 기적적(?)으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할 때까진 그나마 괜찮았지만, 유일한 적자가 죽은 데다가 두 조카를 죽인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리처드는 30살 넘고 후계자도 없는 데다가 장애인이었고, 조카들까지 살해했기 때문에 후계자도 없어졌으므로 왕권의 지지기반이 흔들렸다. 요크 가문 지지자들은 두 조카를 죽인 것에 반발했고, 리처드도 민심을 수습하고자 자신이 '''사생아라고 격하시킨'''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문제는 리처드와 에드워드 4세는 이복형제도 아닌 친형제고 엘리자베스는 친조카라는 점이다.''' 당연히 신하들과 성직자들은 '사촌이면 몰라도 친삼촌-조카는 개족보'라며 극렬반대했다. 리처드는 치욕스럽게도 스스로 이런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며 공개 해명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 당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두 동생을 죽인 익명(?)의 범인은 극렬 저주하면서, 리처드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공개 응수했다.
두 사람이 결혼설이 퍼지자 비밀리에 우드빌 왕비와 동맹을 맺었던 헨리 튜더가 급히 프랑스의 지원과 랭커스터 지지자와 요크 지지자들 중 리처드에 등돌린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상륙하자 전투에 나섰다.

5. 사망


1485년 헨리 튜더는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2천 병력을 끌고 웨일스의 밀포드 헤이븐에 상륙했다. 튜더 가문은 웨일스 출신이었기 때문에 웨일스는 헨리 튜더를 전폭 지지하여 헨리의 군대에 합류했고, 리처드 3세도 잉글랜드 전역의 귀족들을 소집하여 진압에 나섰다. 3주 후 잉글랜드 중부 레스터 지방 보스워스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양측의 병력을 살펴보면 튜더 가문의 병력이 많아야 5천을 넘지 않았고, 리처드의 병력도 많아야 1만 2천, 보통 1만 선으로 보는데 에드워드 4세가 1461년 타운턴 전투에서 3만 5천 병력을 이끌고 5만 병력의 랭커스터군을 격파하며 왕위를 얻었다는 점과 비교해 보자. 이때 리처드가 소집한 귀족들의 5명 중 4명이 소집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리처드의 권력 기반이 심각하게 흔들렸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잉글랜드 북부의 귀족 가문인 스탠리가 변수였다. 리처드 3세도 스탠리 가의 지지를 얻으려고 그에게 토지와 직위를 퍼주다시피 하사했지만 스탠리는 헨리 튜더의 모친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하여[9] 헨리의 의붓아버지 격이 되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리처드 3세의 뒷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 전황은 리처드에게 유리했는데 리처드는 군대를 이끈 지휘경험이 있고, 무예도 할 줄 아는 전사였지만, 헨리는 4살 연하였으나 도망다니던 신세였기에 군대 지휘 경력은 전혀 없어서 후방에서 대기했고 그의 삼촌이 실제로 군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게다가 전투가 시작될 당시만 해도 리처드 3세의 군대는 언덕 위를 점하고 있었던데다 머릿수도 헨리의 군대의 2배였다.
리처드는 노련한 장군 노퍽 공작이 맡고 있던 그의 오른쪽 날개를 먼저 출격시켜 언덕 아래 있던 헨리의 군대를 치도록 했다. 하지만 상대편 지휘를 맡고 있던 역시 노련한 장군 옥스퍼드 백작의 책략에 빠져, 노퍽 공작 존 하워드는 전사했고 먼저 출격한 오른쪽 날개는 진창에서 백병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에 리처드는 왼쪽 날개를 맡고 있던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에게 노퍽 공작을 도우라고 명령했다.[10] 하지만 그는 명령에 불복종함으로서 사실상 배신했고, 어떤 사료에서는 심지어 헨리 7세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까지 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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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소집병력들까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투에 매우 소극적으로 나섰고 대놓고 이기는편 우리편이라며 관망분위기를 보이자 리처드 3세는 측근들의 후퇴 요구를 거부하고 왕인 자신이 직접 전투에 앞장 섰다. 특히 후방에 있던 헨리 튜더는 전황을 지켜보기 위해 전선에 가까이 오기 시작했고 그의 깃발이 가까운 곳에 휘날리는 것을 보고 리처드 3세는 기사들만 최소 1백 명을 불러모아 함께 언덕 아래로 승부를 건 기병 돌격을 시도했다. 이 기병 돌격에서 리처드 3세는 랜스로 헨리 튜더의 기수 윌리엄 브랜든[12]을 찔러 죽이고[13] 헨리 튜더의 호위 기사들과 싸웠다. 예상 못한 돌격에 헨리 튜더는 당황하여 호위 기사들이 교전을 벌이는 틈을 타 피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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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헨리 튜더의 친위 병력에 더해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스탠리 가문이[14] 개입했고, 결국 리처드는 몸소 앞에서 지휘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에게 적대적인 튜더 왕조의 사가들조차 '리처드 3세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데에는 견해를 같이한다. 언덕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국왕군 병사들은 왕이 전사하자 겁에 질려 도망쳤고, 헨리의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죽였다.

6. 튜더 왕조의 시작


전투가 끝난 뒤 헨리 튜더의 의붓아버지 스탠리가 리처드 3세의 왕관을 발견하고 이걸 헨리 튜더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정통성이 약했던 헨리 7세 이후 튜더 왕조에서는 리처드 3세를 찬탈자, 조카 살해자, 같은 음흉한 이미지로 퇴색시켰고, 엘리자베스 시대 셰익스피어의 희곡으로 이런 이미지가 굳어졌다. 그러나 현대에 와선 유능한 행정가고 전투에선 용감한 사람이었고 즉위 전에도 잉글랜드 북부를 그럭저럭 잘 통치했다는 평을 받는다. 왕이 되고 나서 치세 2년으로 평가하기엔 좀 짦은 시간이다.

6.1.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결혼


헨리 7세는 이미 규합한 요크 지지자들을 회유하고자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강화했다. 1499년 헨리 7세가 요크 왕가의 유일한 남계 후손이자 에드워드 4세의 동생 클라렌스 공작의 아들이었던 워릭 백작 에드워드를 처형하면서 요크 왕가는 단절되었다. 이미 리처드 3세의 외아들 미들헴의 에드워드는 1484년 11세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가렛은 에드워드 3세의 4남이며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로 사실 헨리 7세는 왕가에서 매우 멀었다.[15] 다만 요크 가문이 찬탈하고서 헨리 6세와 그 왕세자는 살해당했고, 랭커스터 가문은 완전히 멸족했기 때문에 랭커스터 가문 지지자들은 헨리 6세의 이부동생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자 모계로 랭커스터 시조인 곤트의 존의 혈통을 물려받은 헨리 튜더를 랭커스터 가문의 후계자로 밀었다.

6.2. 헨리 7세의 숙청


헨리 7세는 리처드 3세를 교훈 삼아 리처드가 적장자 에드워드가 사망하고 당분간 추정상속자로 남겨 놓은 존 드 라 폴과 리처드 3세의 조카 워릭 백작을 살려두었다. 11세의 워릭 백작은 런던탑에서 성년까지 살아남았으나 성년이 되어 간수들을 매수하고 탈옥하려다 적발되어 처형되었으며 존 드 라 폴은 1487년 반란군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헨리 7세가 반란으로 찬탈했다 한들 어설프게나마 절멸한 랭커스터 혈족이고,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의 맏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정통성 시비는 있어도 에드워드 4세 시절 왕권의 위협이 된 헨리 6세와 그의 적장자 웨스터민스터의 에드워드와 같은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왕족은 거의 남지 않았다.
존 드 라 폴은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누이의 아들일 뿐 왕족은 아니었고,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며 리처드 3세의 형인 클라랜스 공작은 에드워드 4세에게 반역 혐의로 죽었기에, 클라랜스 공작의 아들인 워릭 백작은 왕위 계승권 자체가 없었다. 설령 계승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1485년 런던탑에 투옥될 당시 겨우 11살로 너무 어린 나이였고, 이후 죽을 때까지 감옥 밖으로 나가지 못했기에 정신병까지 있어 왕위를 계승할 상태가 아니었다. 헨리 7세시절 반란은 가짜 워릭 백작이나 가짜 요크공들을 참칭한 야심가들이 판을 쳤지만 아주 큰 위협이 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존 드 라 폴은 헨리 7세가 석방해줬음에도 보스워스 전투가 끝나고 2년 뒤인 1487년, 퍼킨 워벡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스토크 평원 전투에서 전사했다.
1499년에는 가짜 워릭 백작을 주장한 반란들도 거의 분쇄되고 왕권이 안정되었다. 가짜 워릭 백작을 사로잡은 헨리 7세는 그가 가짜임을 입증하려고 런던탑에 갇힌 진짜 워릭 백작을 꺼내서 인증도 시켜줬으며, 가짜는 죽이지 않고 궁정에서 부엌데기로 삼아 부렸다. 진짜 워릭 백작은 헨리 7세의 왕권이 안정권에 들자 꼬투리를 잡아서 22세였던 그를 런던탑에서 꺼내 참수형에 처했다.
이 일은 역시 리처드 3세 처럼 당대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대표적으로 헨리 7세의 며느리 아라곤의 캐서린은 자신이 그토록 많은 유산과 사산을 거듭한 이유가 시아버지가 죄 없는 워릭 백작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워릭 백작의 죽음으로 요크 가문 남계혈통은 완전히 끊겼고 에드워드 4세의 외손인 아서와 헨리 8세가 태어남으로써 헨리 7세 이후 튜더가의 왕권은 강력해졌다.
그 당시로 치면 권력간의 다툼은 아버지-아들, 남편-아내끼리도 서로 죽였기에 조카들을 죽인 건 크게 튀는 악행은 아니었으나, 장미 전쟁 이후 등장한 튜더 왕가가 등극하면서 정통성을 위해 깎아내려 흑역사가 되었다. 2의 작품에서 검은 머리의 꼽추이자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악인으로 묘사되면서 현재까지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7. 유골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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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색은 상단 이미지처럼 좀 더 밝은 갈색일 가능성이 꽤 높다.[16]

7.1. 무덤의 유실


영국의 앙주 왕조존 왕이후 모든 영국 왕, 여왕의 무덤은 모두 영국 국내에 존재 하는데[17] 그중 레스터지역의 리처드 3세의 무덤만 유실되어 없어졌다. 이유는 헨리 8세잉글랜드 종교 개혁 당시 수도원 철폐령 당시 리처드 3세가 묻혀 있던 '그레이 수도원(Greyfriars)'이 일반인에게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수도원 자리가 과수원으로 개발 되고 다음엔 빅토리아 여왕 시기에 재건축이 되면서 리처드 3세의 무덤은 영영 유실된것으로 전해져 내려왔고 그래서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골과 관련한 민담이 레스터 지역에 내려오게 된다. 후대의 역사 학자들이 레스터지방을 다시 찾아 유실된 리처드 3세의 무덤을 찾기 위해 노렸했지만 내전의 패배자였던 리처드 3세의 무덤을 요크 왕조에서 특별히 신경 쓴것도 아니고 무덤이 있었다던 수도원 자리도 세월이 지나 흔적도 찾기 힘들게 되자 몇 가지 추측 결론을 내리게 된다.
  • 수도원이 없어지고 주변이 풍경이 바뀌고 재개발 되었을 뿐 수도원이 없어지기전 리처드 3세의 무덤을 방문했던 한 학자가 리처드 3세는 수도원 경당내 양 성가대 단상 위치의 정중앙 바닥에 묻혀 있다고 기록을 남겼는데 아직 수도원 자리에 묻혀있을 가능성도 있다[18]
  • 잉글랜드 종교 개혁당시 수도원 철폐령 이후 당시 같이 묻혀 있었던 유골들과 수습되어 이후 실종되었을 가능성
  • 레스터 지방에 대대로 내려 오는 잉글랜드 종교 개혁당시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무덤에서 꺼내 주변 강에 버렸다는 민담
세간에서 가장 큰 가능성중 하나로 봤던게 가장 마지막의 민담으로 이후 레스터 지방 정부에서는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버렸다고 알려진 다리 주변에 사적 표지말까지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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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 대학에서 화가에게 의뢰한 수도원 성가대 구역 복원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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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리처드 3세의 유골을 버렸다는 민담이 내려오는곳의 표지말 오른쪽은 리처드 3세 리카디언 협에서 후에 세운 표지말[19]

7.2. 리카디언(Ricardian)과 필리파 여사


장미 전쟁에서 튜더 왕조헨리 7세가 즉위한 이후 리처드 3세를 지지했던 세력은 목숨 부지를 위해 당연히 숨죽이고 살았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에 이르러서는 세익스피어등을 포함해 이후에 다시 그려진 초상화까지 리처드 3세를 준 악마급으로 승격시켜 버린다. 현존하는 리처드 3세의 사후 초상화를 평가한 미술전문가들은 전쟁터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진 전투군인의 모습보다는 의도적으로 음흉하고 음모가 가득차 있게 그렸고, 특히 리처드 3세의 척추측만증을 일부러 더 과장해서 그렸다는 견해를 보였다.[20] 예를 들자면 군인의 모습인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을 강조하려 손가락을 보면 상당히 갸날프게 그렸고,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척추측만증을 과장해 곱추등을 그렸는데[21][22], 평상복을 입고 있는 척추측만증 환자는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지 않고선 일반인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리차드 3세는 왕족으로서 일반인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었을터이니 더 눈치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리처드 3세의 척추측만증은 아마도 직계 왕족이나 옆에서 시중을 드는 몸종이 아니면 모르는 비밀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장미 전쟁에서 사망하고 후에 서술될 고인능욕을 당하면서 척추측만증이 세상으로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리처드 3세의 척추측만증을 조롱하기 위해 세익스피어의 극 리처드 3세에는 심각한 꼽추이면서[23] 함께 왼팔 전체가 오른팔보다 짧고 마른것으로 묘사하기도 했고 이후 세간의 인식도 그렇게 전해저 내려 왔다.[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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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의 극 리처드 3세의 일반적인 연출 모습
그러다 튜더 왕조가 끝나고 스튜어트 왕조를 잠시 거쳐 장미 전쟁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하노버 왕조가 들어서면서 서서히 튜더 왕조의 리처드 3세에 관한 서사가 잘못 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1700년대부터 리처드 3세를 공개적으로 변호하고 나온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통칭해서 리카디언(Ricardian)이라고 부른다. 1700년대의 리카디언의 시작은 장미 전쟁 이후로 보이게 안보이게 차별받아 왔던 리처드 3세를 지지했던 지방에서 새로운 왕조에게 좀 잘보이고자 시작한 경향이 크다. 이 리카디언들은 현대에도 자기들끼리 협회를 조직하고 리처드 3세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리처드 3세의 유골 재발견에 지대한 공을 세운 협회가 1924년에 시작한 '리처드 3세 협회(Richard III Society)'이다. 서문이 거창해서 이 협회가 무슨 저명한 고고학 학회 같이 들리지만 사실 현재의 리카디언들은 일반 동호회와 다를봐 없다. 물론 고고학을 전공한 향토사학자들도 리카디언 협회에 회원들이지만 막상 토론의 내용을 까놓고 보면 끼리끼리 모여서 리처드 3세의 입장에 몰입해서 튜더 왕조세익스피어를 까고 리처드 3세를 신처럼 떠받든다.[26] 1700년대의 리카디언들이 리처드 3세를 지지했던 자신들의 처우 개선을 위했다면, 현대의 리카디언들은 취미인 실제 역사전공을 공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리처드 3세의 입장에 과몰입한 열정적인 사람들이라는것.
그중의 백미중 백미가 2012년 리처드 3세의 유해를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리카디언중의 리카디언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스코트랜드 출신 대영제국 기사단 5등급[27] '필리파 제인 랭리(Philippa Jayne Langley MBE, 1962년 6월 12일생~)'여사이다. 취소선이 쳐져 있긴 하지만 이미 90년대 이전부터 리처드 3세의 유해를 찾기위해 동분서주했고[28] 반대 급부로 레스터 대학교 고고학부에서는 골치아프고 상대하기 싫은사람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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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의 유골을 바탕으로 복원한 두상과 함께 포즈한 필리파 여사
이제는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굴돼서 당연히 레스터 대학교 고고학부의 자랑이자 대표하는 프로젝트지만, 유골 발굴 이전만 하더라도 대학에서 이미 진행중인 여러가지 중요한 학술 프로젝트들이 있었고, 그렇기에 '필리파' 여사의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의뢰는 웬 듣보잡 아마추어가 스님앞에서 염불을 외고 있는 꼴이였다. 아마추어라서 꼭 '필리파' 여사의 의뢰를 계속해서 거절했던건 아니다. 레스터 대학측에서도 이 리카디언중에 향토사학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걸 인식하고 있었고 '필리파' 여사가 대학측에 제공했던 자료도 구글같은 곳에 검색해서 모은 자료가 아닌 향토사학자들이 연구하고 정리한 학술적 정보를 가지고 발굴 의뢰를 했던 것이였다. '필리파' 여사도 어느정도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아니 어느 발굴이던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돈이다. 장비 동원부터 시작해서 정부 허가[29], 현존하는 건물의 유무 등[30] 말그대로 삽을 꽂은 순간부터 돈이 들어가게 되는데 자금 조달의 문제로 차일 피일 밀리게 돼서 결국 2012년까지 오게 된다.

7.3. 유골 발굴


결국 2012년 필리파 여사는 Channel 4 라는 케이블 방송국으로부터 리처드 3세 유골 발굴을 위한 자금을 지원 받는다.[31][32] 발굴 현장에서 먼저 Channel 4가 전과정을 독점 촬영하는것을 조건으로 약 4만 파운드를 기본 자금으로 필리파 여사와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에 지원하게 된다. 다만 4만 파운드로 리처드 3세 매장 추정 수도원 전체를 발굴 할수는 없으므로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보이는 유력한 곳 두곳에 참호를 파서 발굴 하고 결과물이 시원치 않으면 3번째 참호를 고르기로 했다. 현재의 지도와 중세 시대때 수도원을 포함한 지역 측량 지도를 근거로 첫번째 참호는 리처드 3세가 왕족이나 귀족들이 특권으로 누리는 수도원이나 교회 경당내 매장, 특히 기록에 나오는 리처드 3세의 유해는 합창대 근처에 묻혀 있다는걸 주목하고 경당내 합창대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으로 참호를 팠고 두번재 참호는 역시 유력한 매장 후보지인 경당 더 안쪽 제단근처로 추정 되는곳에, 세번째 백업 참호는 수도원의 건물 안쪽으로 참호를 파기로 결정했다. 첫번째로 발굴팀에게 찾아온 행운은 수도원이 위치하고 있는 레스터 시 소유의 건물이[33] 재건축 대상이 되면서 건물이 이미 비워져 있었고 거기에 더해 참호를 파기로 결정한 세군데 모두 큰 건물이 없는 주차장이라 발굴팀에서는 꺼리낌없이 발굴을 진행할수 있었다. 참고로 시청 부속 건물들이 비어 있긴 했지만 원래 수도원 자리의 약 83%를 차지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발굴할수 있는곳은 약 17% 불과 했고 그중 약 1%정도만 발굴할수 있는 자금만 확보해서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해를 찾는건 로또 1등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2012년 9월 레스터 대학의 고고학장 '리처드 버클리(Richard Buckley)'를 수장으로 레스터 시 주차장에 첫 삽을 떴다. 리카디언들은 600년 왕의 숙원을 풀 기회라며 흥분했고 반대로 레스터 대학교를 대표로 한 고고학팀은 이 발굴에 있어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그저 장미 전쟁 당시의 수도원을 발굴하는데 의의를 뒀다. 유적 발굴 할때 역사의 한 인물을 특정해 목표로 발굴하지 않는건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그것을 목표로 발굴이나 연구를 진행 하면 후지무라 신이치같은 발굴이 아닌 주작에 능한 학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34] 그러다 보니 고고학장이던 '리처드 버클리'는 이 발굴이 성공하면 내 모자를 먹겠다며 이 발굴이 너무 허왕된 꿈을 가지고 진행하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첫번째 참호를 파기로한 주차장의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조심스레 흙을 파 내려가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빅토리아 여왕시대즈음에 재개발된 흔적으로 보이는 지반이 나타났고 그 밑을 더 파내려 가자 이곳이 옛 수도원터 였다는게 금방 드러났다. 중세시대의 벽돌부터 바닥에 깔린 타일과 유리 파편등등 첫번째 참호가 정확히 수도원을 파고 들었다는걸 레스터 대학 연구진들은 금방 알아 차렸다. 수도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참호를 더 팠는데 그때 삽질과 동시에 양 정강이 뼈가 파손됐고 [35] 순간 1번 참호의 발굴은 엄춰 버린다. 거기에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소낙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골을 찾는 확률은 너무 낮았고 그덕에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에서 정부에 발굴 허가증을 받을때 유골 수습 허가는 따로 받아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변하는 날씨와 허가증의 부재로 어쩔수 없이 유골은 혹시 있을수도 있는 유전자 오염[36]을 막기위해서 다시 흙으로 덮고 그 위로 비닐을 감싸는 등 응급 보존 처리를 하고 유골 발굴 허가증을 긴급하게 신청 한다. 유골 발굴 허가가 약 10일 정도 걸리는 관계로 그 동안 2번 참호를 파서 수도원의 정확한 모형을 파악하기로 결정한다.
발굴팀은 2번 참호를 파서 수도원의 위치를 확인하자 해당 지역은 수도원의 부속시설임이 확인되어 나머지 수도원의 위치가 대강 파악됐다. 그 결과 1번 참호의 위쪽, 예비 후보였던 3번 참호 구역을 발굴해 수도원내 경당의 위치를 더 명확하게 하기로 한다. 3번 참호가 경당내 제단 한가운데를 가로 질러 간다는걸 확인했고 예상했던 1번 참호가 파인 수도원의 위치도 같이 확인됐는데 특히 정강이뼈가 발견된 부분이 수도원 경당내 성가대 단상 근처임이 확실해졌다. 정강이 뼈 주변을 더 파서 정리를 하자 주변의 성가대 단상 위치가 드러났는데 이 뼈가 리처드 3세의것이 확실하다면 성가대 단상 근처에 묻혀있었다는 기록이 확인된 순간이였다. 정부에서 유골 발굴 허가증이 나오고 전문가를 초빙해 정강이뼈 근처를 더 파서 나머지 유골을 발굴 하는데 골반뼈를 발굴하자 양쪽 손팔뼈가 X로 겹쳐서 골반뼈 왼쪽에 뉘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37]
골반뼈에서 꼬리뼈를 발굴해내고 척추 뼈를 발굴해내기 시작하자 점차 뼈가 이상한 방향으로 휘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흙의 압력이 아닌 병증으로 휘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했다. 레스터 대학 고고학팀은 조심히 나머지 유골들도 수습했는데 양쪽 발 유골은 결국 수습하지 못했다. 발굴팀의 의견에 의하면 매장층 윗쪽에 보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건축물의 지반 공사 흔적을 근거로 해당 유골이 소실되었으며, 당대에 조금만 더 기초 공사를 했다면 유골이 모두 소실되었을 확률이 높다고 파악했다.
유골의 전체 모습은 생각보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처음에 발견된 해골은 몸의 유골에 비해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건 장지가 정식으로 준비한게 아니라서 시신을 구겨 넣었다고 추측했다. 이외에도 유골 외에 다른 매장품이 발견되지 않은 점, 수의를 착용했다면 발견되었을 섬유 조직도 발견되지 않은 것을 근거로 나체의 시신이 수도원 한가운데에 매장됐을 것으로 추측했다. 유골을 조심스럽게 수습하자 유골 전체에서 무기로 공격받은 자상이 확인됐고 등에서는 화살촉으로 보이는 쇳조각도 발견됐다.[38] 이 전과정을 지켜보던 필리파 여사는 발굴내내 감정의 기복을 감출수 없었고 끝내 눈물을 보였다. 유골이 박스에 담겨 참호를 나오자 필리파 여사와 같이 발굴에 참가했던 향토사학자는 리처드 버클리 학장에게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 가능성이 상당이 높다는 동의와 함께 리처드 3세의 국왕기를 둘러 레스터 대학교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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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 대학에서 화가에게 의뢰한 수도원 성가대 구역에 매장되는 리처드 3세 상상도
참고로 수도원 경당내 제단으로 확인된 3번 참호에서도 관과 함께 앏은 납으로 감싼 높은 신분을 암시하는 유골이 수습되었는데 이후 검사에서 40대 후반의 여성임을 확인했고 레스터시에 남아있는 장례 기록에 따라 대략 누구였는지 귀족 부인의 신분도 추측해냈지만 유전자 검사를 해서 비교해볼 후손이 없어 추측으로 남았다.[39] 거기에 3번 참호의 유골이 먼저 수습되었다면, 그 고위 신분을 암시하는 매장 방법때문에 리처드 3세의 유골로 착각하고 나머지 참호는 그냥 내버려뒀을 가능성이 높다고 '리처드 버클리' 고고학장이 덧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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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같이 발견된 납관에 싸인 유골
유골이 수습되고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잃어버린 유골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뉴스가 전세계로 대서특필되고 그와 동시에 레스터 고고학부는 검증에 들어갔다. 먼저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 덕에 한꺼번에 여러가지 정보가 밝혀졌다. 탄소 연대 측정으로는 리처드 3세의 시대 보다 약 100년정도 더 빠른 약 1300년대의 유골로 결과가 나왔지만 육식과 특히 해산물을 많이 섭취하는 귀족이나 왕족등 고위층의 유골은 평민들이 주식으로 먹었던 곡물과는 다른 계통의 탄소가 뼈에 축적되기에 그 오류치를 감안하면 해당 유골은 리처드 3세의 활동 시기인 1400년대 즈음의 유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같이 행한 안정 동위원소 분별법을 통해 유골의 거주 지역과 식생활도 엿볼수 있었는데 이는 문헌에 전해지는 리처드 3세의 거주지역과 거의 일치했기에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이라는 증거중 하나로 제시되었다.
유골의 상태는 리처드 3세가 맞은 참혹한 죽음을 잘 보여주는데,런던의 저명한 법의학자들을 초빙하여 조사한 결과 리처드 3세가 머리 쪽을 송곳 단검[40]으로 강하게 찔리고 핼버드(미늘창)에 머리 뒷부분이 잘려나가 죽었다고 설명하는 사료와 거의 일치함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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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그의 뼈에서는 많은 상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상처는 후두부에 있는데, 도끼(할버드, 빌, 폴암 등. 전승에 의하면 왕을 처치한 것은 웨일스인이라고 하므로 웰시훅일 가능성도 있습니다)로 보이는 흉기가 후두골을 강타하여 즉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후두부에는 상처가 하나 더 있습니다. 검이나 창 같은 흉기에 찔린 것으로, 뇌를 관통하여 반대편 뼈까지 도달한 깊은 상처(깊이 10.5㎝)입니다. 당연하지만 이것도 즉사할 정도의 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밖에 몸 전체에 보이는 여러 무기에 찔린듯한 흔적들은 전투 당시 입은 상처라기 보다는 사망후 고인능욕을 위해 고의로 시신을 훼손시킨 흔적으로 파악됐다. 다만 고고학팀이 눈으로 보기에도 심한 척추측만증을 앓은 환자가 격렬한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 할 때, 도미닉 스미(Dominic Smee)라는 남성이해당 유골과 거의 유사한 척추측만증 환자이고 보스워크 전투장의 재연 배우로 일하는 것을 입증하여, 연구 결과 전투 능력에 큰 불편함이 없었을 것을 판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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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실제 리처드 3세의 척추뼈 정면의 모습, 오른쪽은 노미닉 스미가 척추측만증을 물리사로 부터 확인 받는 방송 캡쳐
'도미닉 스미'덕에 훌륭한 고증 샘플을 얻은 고고학팀과 법의학자들은 바로 리처드 3세의 운동신경에 관해 연구를 시작했다. 먼저 유연성과 근력 테스트를 했는데 같은 연령의 또래 남자들 보다 오히려 몸이 유연해 다향한 몸의 움직임을 재빠르고 날렵하게 선보으며 근력 또한 자신의 근육량에 알맞는 정도였고 일반인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지구력 테스트로 들어가자 일반인들과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는데 척추가 크게 휘었기 때문에 갈비뼈의 모양도 기형이어서 숨이 차서 숨을 크게 내쉴 때 폐가 정상인만큼 부풀어 오르지 못해 제한된 산소 호흡량으로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판단했다.
'도미닉 스미'의 육체적인 한계를 확인한다음 연구진들은 리처드 3세의 기마창술 능력 확인을 위해 먼저 그를 데리고 스웨덴으로 가서 플레이트 갑옷을 제작 한다. 먼저 '도미닉 스미'의 몸에 맞는 수치의 미리 제작 되어 있던 플레이트 갑옷을 입혔는데 스웨덴의 갑옷 대장간측과 레스터 대학의 연구진은 척추측만증 장애인이 일반 갑옷을 착용해서 발생하는 문제를 발견 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제작한 플레이트 갑옷은 꼬리뼈 근처 허리로 갑옷의 하중을 착용자가 떠바치게 되어 있는 구조를 하고 있는데 '도미닉 스미'나 리처드 3세처럼 척추측만증 환자는 굽어진 척추뼈 방향에 따라 몸의 중심이 기울어져 있고 한쪽 어깨가 조금 높다보니 허리로 갑옷의 하중을 떠바치는게 아니라 골반 한쪽으로 갑옷의 하중을 바치게 된다는걸 알게된다. 그러다 보니 '도미닉 스미'에게 간단하게 무기를 휘두르게 했을때 갑옷을 입지 않았을때보다 움직임의 제한을 가져왔고 결국 스웨덴 갑옷 대장간측과 레스터 대학 연구진은 몸이 갑옷을 무계를 지탱하는 포인트가 중심부 꼬리뼈쪽 허리가 아닌 어깨쪽으로 올리고 굽어진 척추뼈의 곡선대로 갑옷을 재단하듯 새로히 제작 하기로 한다. 플레이트 갑옷 경우 개개인의 몸에 맞춰서 제작하게 되는데 그렇다 보니 값이 높을수 밖에 없으며 왕자였고 왕까지 했던 리처드 3세의 장애를 고려한 맞춤 재단 갑옷을 만들어 입었을 가능성이 높기에 고증에 알맞는 처사.
플레이트 갑옷을 스웨덴에서 주문하고 영국에 돌아와서는 바로 기마술 연습에 들어간다. 먼저 현대의 말 안장에 올라탄 '도미닉 스미'와 레스터 대학 고고학팀은 승마에서도 곧 바로 문제를 발견 했다. 척추측만증으로 인해 몸의 중심이 중앙에 있지 못하다 보니 어느정도 말의 기수를 돌리다 보면 '도미닉 스미'가 한쪽으로 자연스럽게 쏠렸다. 즉 낙마의 위험성이 컸던 것이다. 이렇다 보니 실제로 기사들을 이끌고 기병돌격으로 리처드 3세가 직접 적을 몇 명 베어 넘겼다는 기록에 의구심이 생기게 되는것. 뭔가 좀 찜찜한 가운데 중세시대 말 안장을 꺼내 오기로 한다. 현대의 말 안장을 쓰고도 아슬 아슬 했는데 통나무를 말위에 얻고 타는것 같다고 평가 받는, 당대의 리처드 3세가 사용한 중세시대의 말 안장을 '도미닉 스미'가 사용할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연구진들, 특히 중세 기마술 전문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데 '도미닉 스미'가 현대의 말안장을 사용했을때보다 오히려 말을 정확하게 제어 하고 있었다. 일반인들에겐 불편하게 느껴지는 유연하지 않은 중세시대 말 안장이 '도미닉 스미'같은 척추측만증 환자들에겐 하체를 안장에 고정시켜줘 오히려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할수 있는 안정적인 플랫폼로 만들어줬던 것. 의도치 않았던 결과에 놀란 중세 기마술 전문가는 바로 기마 창술도 연습 시켰는데, 여기서도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 바로 하루 훈련으로 마상창기병의 주스트팅(Jousting) 창을 가지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타격하는데, 과연 '도미닉 스미'가 과연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까지 들게 만들었다. 거기에 척추측만증을 감안하고 새로 제작한 갑옷이 몸의 균형을 잡아주자 무기의 숙련도까지 오르는 등 약 한달간의 훈련을 거쳐서 다른 중세 기마술 전문가와 함께 전통적인 마상창기병 돌진을 선보이며 리처드 3세의 보즈워즈 전투의 기마 전투 능력은 의외로 손쉽게 고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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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연한 중세시대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있는 도미닉 스미. 허리가 아니라 어깨로 갑옷의 무게를 지탱하게 돼있어서 평상복을 입었을때와는 달리 말에서 내렸을때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척추측만증 증세가 보인다.
단 하마해서 백병전을 치르면 척추측만증 때문에 지구력 저하가 나타나는데 , 이때문에 리처드 3세가 금방 적들에게 둘러싸여 전사했을 거라는 것이다. 또한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는 투구 위에 왕관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41], 기사들이 말을 타고 왕관을 쓴 왕을 자신들의 시야 안에 넣고 보호하기 더욱 쉬웠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42] 즉 그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낙마한 순간 그의 죽음은 예정되었다는 것.
이 사실을 염두하고, 셰익스피어의 연극인 리처드 3세에 나오는 리처드의 명대사인 '''"말을 다오, 말을 다오. 말을 가져오면 내 왕국을 주리라." (A horse, A horse, My Kingdom for a horse.)'''를 보면 그 처절함이 이해가 된다. 말 위에서만 그 무예를 보일 수 있던 리처드 3세 입장에서 다시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말을 가져다오라고 악을 쓰는 것도 당연하다. 결국 리처드 3세는 낙마해서 제대로 싸울 수도 없는 상태에서 분투하다가 결국 전사하고 만다.

7.4. DNA 유전자 검사


모든 연구 결과가 주차장에서 수습한 유골의 주인이 리처드 3세라는걸 가르키고 있었던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리처드 3세와 친척관계에 있는 후손들의 DNA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골을 정확히 확인하기로 한다. 그래서 부계쪽 후손들과 모계쪽 후손들의 유전자 검사를 시행하게 되는데 결과는 아래와 같다.

7.4.1. 부계 Y 염색체 비교 분석/영국 여왕 정통성 문제


리처드 3세가 후사 없이 죽고 그의 형제들도 후사를 남기지 못한 관계로, 가장 가까운 부계 후손을 찾아야 했다. 리처드 3세의 고조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Edward III)의 아들인 '곤트의 존(John of Gaunt)'의 후손들의 유전자 정보가 필요했다. 연구에 제공된 유전자 정보는 '곤트의 존'의 13대손 '5대 보포드 공작 헨리 서머싯(Henry Somerset, 5th Duke of Beaufort 1744-1803)'에게서 파생되어 나간 7대 후손 형제 2명, 5대 후손 남성 1명 그리고 4대 후손 형제 2명, 총 5명에게서 왔다. 검사 결과 형제 관계에 있는 유전자 정보중 한 쌍은 아버지가 일치 하지 않았고 거기에 나머지 4명의 후손도 리처드 3세의 부계 Y 유전자 정보와는 일치하지 않았다.[43] 즉 현재 살아있는 서머싯 가문의 남성들은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 아니라고 판명난 것이다. 거기에 에드워드 3세의 6대조 할아버지 '앙주 백작 조프리(Geoffrey Plantagenet, Count of Anjou 1129-1151)'쪽에서 내려오는 부계 후손도 유전자 검사를 받았지만 마찬가지로 리처드 3세의 유전자와 일치하지 않았다.
영국 왕가의 복잡한 결혼 관계와 부계 후손의 유전자 불일치는 여러가지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먼저 플랜태저넷 왕조의 남자 혈통 문제가 제기되었고, 나아가 현재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정통성 문제까지 야기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틀렸다.
현재 영국의 왕사는 노르만 왕조윌리엄 1세(William I)를 시작으로 보고 있으나, 왕조가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어가면 적통을 이어 받을 왕자가 없었던 관계로 1-2백년을 꼴로 왕조가 바뀐다. 동양권의 경우, 조선 왕조는 방계가 조선 후기에 왕으로 즉위했지만 입양하는 방식으로 왕통을 이어[44] 왕조의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서양은 같은 가문의 시조를 중심으로 적통 혈통이 아닌 형제나 방계가 이어 받으면 왕조의 이름이 바뀌기도 했고, 거기에 살리카법을 국법으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45] 여왕의 즉위나 외가 후손의 왕위 계승을 인정했기 때문에 남편의 성을 따라가는 서양권 문화상 한 갈래에서 시작은 되었으나 여왕의 남편의 성에 따라 왕조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영국 왕실이 좋은 예.[46] 예를 들어 조선 왕조도 이성계를 조상으로 두고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방계 왕가들이 왕위를 계승하여 왕조의 성씨인 이씨(李氏)는 안 바뀌었지만, 영국의 왕조들은 왕자의 씨가 말라(?)버려 흡사 이성계 형제의 후손이나 혹은 딸의 후손을 중국땅에서 찾아와 조선의 국왕으로 옹립하는 꼴이 되었는데, 영국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노르만 왕조 4대 스티븐 왕이 선왕의 조카로 왕가가 한번 바뀌고 일명 앙주 왕조라 불리는 플랜태저넷 왕조가 들어서고 안정이 되나 싶었는데 리처드 3세때 플랜태저넷 왕조의 방계 튜더 왕조로 왕위가 넘어 갔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튜더 왕조는 끝이 난다. 영국의회에선 계속해서 리처드 3세의 누이의 후손들을 초청해 국왕으로 옹립했는데 그래서 리처드 3세와 그의 형제 그리고 후손들을 플랜태저넷 왕조에서 따로 분리해 요크 왕조라고 부른다.
한동안 이 요크 왕조 계열 모계 후손[47]을 초빙해 영국왕으로 섬겼는데 가장 마지막에 옹립한 왕조가 현 영국 왕실의 본류가 되는 하노버 왕조이다. 하노버 왕조는 독일로 시집간 요크 왕조 공주의 후손이다 보니 [48] 원래 영국 왕위계승에선 거리가 있었고, 혹 데려온 하노버 왕조 후손들이 영국에서 후사 생산을 못한다면, 영국에선 다시 다른 왕조에서 국왕으로 빌려와야 하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혹 하노버 왕조가 끝이 나서 영국 내 여러 다른 방계 왕족들이 서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는 전 국토 내전화 상태가 될 수도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제정한 법률이 영국 왕위계승서열 법이다.[49] 다행히 하노버 왕조가 안정화 되면서 우려했던 왕위계승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50][51] 현 영국 왕실은 요크 왕조의 후손이긴 하고 왕조의 직접적인 혈통은 하노버 왕조에서 온 것이지만, 법적인 정통성은 앞서 말한 왕위계승서열법에서 찾고 있다.
검사로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은 것은 검사를 받은 보포드 공작의 후손 서머싯 가문의 후손들이었고, 이걸 이유로 검사도 받지 않은 나머지 보포드 공작 후손들이 요크 왕조의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엔 어폐가 있다. 거기에 추가 검사로 밝혀낸 건 '5대 보포드 공작 헨리 서머싯'의 4대 후손즈음에 일어난 일이란 것 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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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와 현대 서머싯 가문의 관계를 보여주는 족보
위의 결과를 토대로 '서머싯' 가문의 조상이며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는 '곤트의 존'과 그의 아버지 형제가 모두 플랜태저넷 왕조의 혈통이 아니게 된다는 해괴한 논리가 도출되었다. 이에 따라 튜더 왕조의 정통성은 무너졌고 튜더쪽과 혼인관계가 있었던 하노버 왕조의 정통성도 무너져서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왕위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도 나왔다.
예를 들어 김해 김씨의 문파중에 유명한 사람의 유골이 하나 발굴 되었다고 치자. 유골의 주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알려진 남성 후손의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일치하지 않았다. 검사로 밝혀진건 후손이라고 알려진 남성이 김해 김씨의 문파 후손이 아니라는것 까지다. 이 결과만 가지고 이 남성이 소속되어 있는 김해 김씨 문파 전체의 혈통성을 부정할 수 있을까? 더 나가아 신라왕들의 정통성까지 부인할 수 있을까? 달 보라고 손가락을 가르키고 있는데 손가락만 보고 달이 없다고 부정하는거랑 똑같다.

혹 부계 정통성이 깨어지게 되는 확실한 결과물이 나와도 바뀌는건 없다. 영국의회에서 새 왕조를 빌려올 때 아무나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하노버 왕조의 경우 이미 독일 소국의 왕으로 요크 왕조의 모계 혈통이 흐른다고 봐서 모셔 온 거다. 즉 요크 왕조쪽 혈통이 부정되도 이미 하노버 왕조의 왕가 혈통이다... 결정적으로 영국 국왕의 정통성은 앞에서 지적한 '영국 국왕 승계법(Act of Settlement 1701)'에서 나오고 그 다음이 혈통의 정통성으로 요크 왕조 모계에서 나온 하노버 왕조인 것이다.
#튜더 협회[52]의 유전자 분석정보 해설

7.4.2. 모계 미토콘드리아 비교 검사


부계족 유전자 검사가 리처드 3세의 유골임을 증명할 수 없게 되자 모계 미토콘드리아 검사쪽으로 시선이 몰렸다.[53] 부계쪽 유전자 검사는 이른바 '가짜 부모 현상(Fasle Paternity Event)'이[54] 자주 일어나 원래 미토콘드리아 검사에 비해서는 신뢰성이 떨어졌으며, 특히 리처드 3세가 후사 없이 전사해서 리처드 3세와 똑같은 미토콘드리아를 유전받은 리처드 3세의 누이들의 후손들을 검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리처드 3세 누이들의 여성 후손들이 자연스레 주목을 받았고 생존해 있는 후손들을 찾아 검사를 하면 됐는데..
이미 2004년에 리카디언계 향토사학자들은 요크 왕조의 방계, 특히 리처드 3세의 누이 '앤 공주(Anne of York)'의 후손들을 주목했고 의외로 생각보다 쉽게 족보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유는 문서가 부족한 중세시대였지만, 앤공주와 그 일가가 왕가/공작가의 귀족 신분이라 분할해야 하는 유산이 많았기 때문에 유산 관련 문서를 남겼으며, 따라서 현존하는 중세시대 유서를 통해 족보를 구성할 수 있었다. 또한 교회에서 세례증명서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영국에 거주하면서 목수로 일하고 있는 캐나다인 남성이자 16대 후손 '마이클 입센'(Michael Ibsen)을 찾게 된다.[55] 모계 미토콘드리아 검사를 하는데 왜 남성인 마이클 입센을 검사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 마이클 입센의 어머니 '조이 입센'씨가 바로 리처드 3세의 누이 '앤 공주'로 부터 내려오는 여성 직계 후손이여서 마이클 입센도 리처드 3세와 같은 미토콘드리아를 가지고 있었던 것. 뭐 당연히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발견되자 마자 레스터대학 고고학부에서는 마이클 입센을 초대해 신문사와 방송사 앞에서 유전자 채취를 하게 된다.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몰라도 마이클 입센은 평생 독신으로 살아서 더 이상의 후손은 기대할 수 없고 그의 형제자매 역시 독신이거나 결혼을 했어도 아이가 없어, 만일 마이클 입센 사망 후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발견됐으면 유전자 검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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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3세의 유골을 바탕으로 재현한 두상과 리처드 3세 누이의 모계 후손 마이클 입센씨
그런데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여러 방송사가 입센을 찾아가 그를 귀찮게 하였다. 이를 먼 거리에서 지켜 보던 제 3자도 있었다. '웬디 덜디그(Wendy Duldig)' 여사는 바로 '앤 공주'의 또 다른 여성 직계 후손으로 입센과는 18촌 숙부 조카 정도 되는 사이이다.[56] 리카디언계 향토사학자들도 이 3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입센이 황색언론의 먹잇감 정도로 다루어지는 것을 본 덜디그 여사가 무명의 제보자로 남기를 원했다. 덜디그 여사는 어느 정도 대중과 언론의 관심이 시들고 제 3의 후손으로 대중 앞에 나왔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덜디그 여사 역시 독신에 미혼이라 리처드 3세의 유해가 2-30년만 늦게 나왔어도 생존 후손의 유전자 검사가 무척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레스터대학 고고학부에선 최적의 유전자 검사 시료를 얻게된거나 마찬가지. 일단 같은 조상을 두었다고 추정만 할뿐 거의 남이라고 봐도 되는 이 셋의 유전자 정보가 일치할 확률은 무척 낮았다. 리처드 3세 추정 유골과 입센의 유전자 비교 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 터인데 여기에 입센과는 조상만 같을 뿐 전혀 관계 없는 제 3의 추정 친척의 유전자 정보까지 같이 비교할 수 있다면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입장에서는 부정할수 없는 스모킹 건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결과는 '''99.99% 확률로 이 세명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정보가 일치함을 확인했다.'''[57]
더해서 유전자 분석결과 들어난 특이점은 리처드 3세의 미토콘드리아가 하플로타입 J1C2C라는 굉장히 희귀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였다는 것. 이는 유럽 인구 전체에서 겨우 1~2%밖에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검사로 드러난 위 세 명의 미토콘드리아 일치는 발굴된 유골이 리처드 3세의 것이라는 증거에 무게를 더했다.

7.5. 재장례


원래 레스터대학교 고고학팀은 유적 발굴을 끝내고 나서 어떤 유골이라도 발굴하게 되면 영국 고고학 발굴 법령에 의거하여 교회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골인 만큼 현재 운영하고 있는 인근 기독교계 묘지로 재매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유골이 확실해지면서 재매장이 아닌 재장례에 관해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생겼다.
  • 먼저 왕의 유골이었기에, 먼 친척인 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게 혹 영국 왕실에서 리처드 3세의 재장례를 주관할 것인지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영국 왕실은 리처드 3세 재장례에 관해서 공식적으로 관여하지 않기로 한다.
  • 그 다음 언성을 높인 곳은 영국 국회로 각각 레스터 지방 국회의원과 요크 지방 국회의원들이 서로의 역사적 관련성을 주장하며 논쟁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이 의회 논쟁은 싱겁게 끝나 버렸다. 레스터시 시장이 내 시체를 밟고 리처드 3세를 유골을 요크로 가져가라고 한 것.
  • 세간에 알려진 레스터 시정부와 요크 시정부의 법적분쟁은 도시 대 도시의 소송이 아닌 '플랜태저넷 연합(Plantagenet Alliance)'이라고 불리는 리카디언계 협회에서 장지를 문제로 레스터 시와의 법적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 '플랜태저넷 연합'의 회원들은 이른바 플랜태저넷 왕조를 조상으로 하는 후손들의 모임으로 정통 리처드 3세파를 지칭했는데 이 소송때문에 장례식이 약 1년가량 연기되었고 거기에 레스터 시에선 소송비로 원래 발굴비의 약 6배 이상, 즉 25만 파운드까지 쓰게 되는 등 골머리를 앓게 된다. '플랜태저넷 연합'이 법정에서 주장한 것은 자신들은 플랜태저넷 왕조를 조상으로 하는 후손들이므로 플랜태저넷 왕조 출신인 리처드 3세의 장례에 관한 일체 권리는 자신들에게 있으며, 따라서 리처드 3세의 유골을 요크 지방으로 모시겠다는 것이다.[58] 결과는 양쪽 다 돈만 깨지고 '플랜태저넷 연합'은 망신을 당했으며[59][60] 법정은 이 사안에 대해 판결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레스터대학에서 뭘 하던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
장지가 레스터 지방에 재매장 하는걸로 결정되고 나자 장례식을 누가 주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영국 성공회 측에선 성공회식 국왕 장례식을 주장했고, 카톨릭측에선 잉글랜드 종교 개혁튜더 왕조헨리 8세때의 일이므로, 개혁 이전 카톨릭 신자로 살았던 리처드 3세는 카톨릭식 장례식이 알맞다고 맞섰다.. 결국 영국법 문제와 영국 왕실의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 그리고 판결에 의해서 이 재매장과 장례식에 관한 모든 권한은 레스터대학 고고학부에 돌아갔다. 고고학부측에선 고증에 따라 카톨릭 식으로 성공회 레스터 대성당에 재안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기사 40억 원 가량의 장례식 비용 대부분은 레스터 시가 부담했다. 레스터가 리처드 3세로 벌어들이기 시작한 관광수익이 천문학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 영국 왕실이 주체가 된 장례식은 아니었지만 국왕의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통해 리처드 3세의 유해는 레스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리처드 3세가 새로 안치될 관은 유전자 검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우연치 않게 목수였던 후손 마이클 입센이 제작하였다. 입센은 오크나무로 관을 짜고 요크 가문의 장미 문양을 새겨넣었다. 장례 행사는 발굴과 연구를 주도한 레스터대학에서 시작했다. 리처드 3세의 유골이 안치된 관은 국왕기를 두르고 국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깃발과 현직 군인들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리처드 3세가 전사한 보스워스 전투지로 옮겨졌으며, 이후 예포 발포 및 그의 넋을 달래는 카톨릭 행사를 진행했다. 그 후 실제 장례식이 거해질 레스터대성당으로 향하였다. 일반시민들이 경의를 표할 수 있도록 리처드 3세의 관은 4마리의 말이 이끄는 특별한 마차에 실려 운구되었고, 여러 영빈과 호위병들이 따르는 가운데 레스터 시내를 행진했다. 관이 지나갈 때마다 시민들은 리처드 3세 국왕기를 흔들고 요크 가문의 상징인 흰장미를 던지며 리처드 3세를 기렸다. 레스터 지역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형형색색 깃발을 흔들며 왕의 귀환을 반겼다.
레스터 시가 행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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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보스워스 전투지 행사, 시가 행진, 시가행진중에 잡힌 리처드 3세의 관, 장례식 전에 레스터 대성당에 공개된 리처드 3세의 관과 장례 왕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며느리이자 찰스 왕자의 아내 웨식스 백작부인 소피 리스존스와 여왕의 사촌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왕가를 대신해 장례식에 참석했다. 리처드 3세의 후손인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영국 계관시인 캐롤 앤 더피의 시 '리처드'를 낭독했으며[61] 유전자 연구에 결정적 역할을 한 후손 마이클 입센, 또 다른 후손 웬디 덜디그도 참가했다. 발굴을 처음부터 주도했던 필리파 제인 랭리, 레스터대학 고고학장 리처드 버클리가 상주 역할을 했으며, 레스터대성당 교주 입회 하에 카톨릭식으로 재장례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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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전 행사에 요크 가문의 흰 장미를 헌화 하는 리처드 3세 누이의 후손 마이클 입센씨(왼쪽)와 웬디 덜디그여사
이렇게 1485년 전사하고, 2012년에 발굴되었으며 법적 분쟁을 거치기까지 600년에 가까운 한많은 시간을 보낸 리처드 3세는 2015년 3월 26일, 영면에 들었다.
그리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장례식이 끝나기 무섭게 이 지역의 축구팀은 왕의 은총을 받았는지, KING POWER를 뽐내며 유례없는 대기록을 세우는데...[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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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번 발굴로 업적으로 기사단에 임명되는 필리파 여사, 리카디언 향토사학자로 모계 족보를 구성해 후손을 찾아낸 존 애쉬다운힐 박사, 기사 서임후 둘이 찍은 사진
유골발견과 관련된 웹툰 1편 / 2편
유골발견 및 유전자 분석에 관한 첫 다큐멘터리 영상
유전자 분석도중 고증한 척추측만증 환자와 전투 신경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상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과학적 결론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유골 발굴지 보고 영상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리처드 3세 발굴 학술대회-DNA검사와 결론 영상[63]
#레스터 대학에서 네이처(Nature) 지에 공개한 리처드 3세 유전자에 관한 논문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BBC에서 80년대 초에 방영한 로완 앳킨슨 주연의 역사 시트콤 블랙애더 시즌 1에서는 첫편부터 자신을 말도둑으로 오해한 애드문드의 칼에 맞아 목이 잘려나간다(...).[64] 이후 유령이 되어 애드문드의 앞에 나타나 멘붕시키고 욕설을 퍼붓는다.
  • 조세핀 테이(Josephine Tey, 1896.7.25 - 1952.2.13)의 추리소설 《시간의 딸(The Daughter of Time)》[65]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뤄진다. 이 소설은 수사 도중 맨홀에 빠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된 주인공 그랜트 형사가 병실에 걸린 리처드 3세의 초상화를 본 것을 계기로 런던탑에 갇혀 있던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에드워드 5세 등)을 살해한 자가 그때까지 알려진 대로 리처드 3세인지 병실 안에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추리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 2013년부터 영국 BBC에서 셰익스피어 희곡들을 원작으로 방영하는 연작 시대극 <할로우 크라운>[66]의 후속작 장미전쟁 편에서 셜록(드라마)에서 셜록 홈즈로 출연했던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이 리처드 3세 역을 맡았다.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방영되는 것이라 어떻게 묘사될지 주목받았다. 덧붙여 셜록에서 짐 모리어티로 출연한 앤드류 스콧이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 역으로 출연했다.

[1] 증거 유골 조사 결과에서 나온 키이다.[2]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번역되어서 호국경으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는 왕비왕세자 같은 직계 왕족이 아닌 섭정을 로드 프로텍터라고 한다. 직계 왕족의 경우 Regent라고 한다. 1811년에서 1820년 당시 프린스 오브 웨일스 조지 4세가 정신병이 발작한 조지 3세 섭정을 할 시기는 Regency(섭정시대)라 하기도 한다.[3] 정확히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이 기사계급 출신이였다. 특히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Jacquetta of Luxembourg)는 무려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 가문 출신인 왕족으로, 헨리 6세의 숙부인 배드포드 공작 존과 결혼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2년만에 배드포드 공작이 사망하면서 자퀘타는 과부가 되었고 시조카 헨리 6세의 명으로 잉글랜드로 돌아오던 중에, 전남편의 시종 무관이었던 리처드 우드빌과 사랑에 빠져 국왕의 허락도 없이 귀천상혼으로 결혼했다. 하지만 자퀘타가 헨리 6세와 그의 왕비인 앙주의 마르그리트 모두와 인척 관계였던 점 덕분에 그들의 결혼은 정식으로 인정받았고, 리처드 우드빌은 세습 귀족인 리버스 남작(이후 백작으로 승격된다) 작위까지 받게 되었다. 즉, 완전히 농부나 하층민 집안 출신은 아니였지만 에드워드 3세의 혈통을 물려받은 다른 잉글랜드의 귀족들에 비해 신분이 낮은 건 확실했다.[4] 헨리 4세가 예전에 썼던 그 레퍼토리다.[5] 엘리너는 에드워드가 엘리자베스와 결혼한 얼마 뒤에 수녀원에 들어갔고, 얼마 안 있어 그곳에서 죽었다[6] 1900년에 영국에 유학온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가 자신의 런던탑 관광기를 단편소설화한 런던탑에서 두 왕자 형제가 갇혀있는 모습을 상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7]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으므로, 만약 엘리자베스가 사생아라면 헨리 7세의 왕위 계승권도 큰 타격을 입는다[8] 폭이 넓은 셔츠드레스의 옷감[9] 법률상만 결혼이고 실제 부부 생활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마거릿 보퍼트에겐 스탠리가 벌써 4번째 결혼이었다.[10] 이때 헨리 퍼시는 4천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11] 다만 현대에서는 대부분 학자들이 명령 불복종설을 지지한다.[12] 훗날 1대 서포크 공작이 되는 찰스 브랜던의 아버지다. 윌리엄이 전사할 당시 아들 찰스는 1살 정도에 불과했다.[13] 위의 그림이 그 상황을 나타낸다. 오른쪽에서 왕관 쓰고 랜스차징하는 인물이 리처드 3세, 이 공격을 받은 기수가 윌리엄 브랜든이다. 들고 있는 깃발이 헨리 튜더의 깃발.[14] 이 중 형인 토머스는 헨리 튜더의 양아버지[15] 요크 가문의 시조는 에드워드 3세의 5남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시조이고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는 에드워드 3세의 4남 곤트의 존이 시조이다. 가문 구별을 위해 랭커스터니 요크니 할 뿐이지 정작 두 세력은 자신들이 진정한 플랜태저넷이라고 주장했다.[16] DNA 조사 결과 리처드 3세는 어렸을 때 금발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금발을 유지했거나, 혹은 흔히 '더티 블론드'라고 부르는 밝은 갈색으로 변했을 것이라고 한다.관련웹툰 [17] 그중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의 시신은 삼촌이었던 리처드 3세가 살해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진뒤 탑 내에 암매장 후에 사라졌다고 전해젔는데, 1674년 런던탑 수리중에 두 소년 유골을 발견했고 이후 이 유골을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요크 공작 리처드'의 사라진 유골로 보고 왕과 왕자의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 지냈다. 현대의 DNA 검사로 재확인하면 되긴 하지만 두 형제에 얽힌 사연 때문인지 아니면 후술된 정통성 문제 때문인지 혈연 관계에 있는 영국 왕실의 공식 입장은 없다.[18] 이 기록과 레스터 지방의 향토사학자들이 발견해낸 당시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는 측량지도를 발견해 이 두 근거를 바탕으로 현대에도 계속 주장했고 이후 2012년 발굴로 사실임이 확인됐다.[19] 리처드 3세 유골을 발굴하고 나서 발굴됐다는 새로운 표지말을 세웠다고 한다.[20] 연구과정에서 발굴해낸 튜더 시대에 다시 그린 초상화의 원본이 되는 리처드 3세가 살아 있을 때 그린 초상화를 보더라도 일부러 어깨를 과장해서 그리지 않은 그냥 일반적인 초상화라는 걸 알 수 있다.[21] 위에 초상화를 다시 확인하면 알겠지만 왼쪽 어깨가 오른쪽 어깨보다 두드러지게 높게 그려져 있다[22] 세익스피어나 튜더 왕조의 프로파간다와는 별개로 리처드 3세 당시 그를 실제로 만나보고 남긴 기록이 몇개 내려오는데 그중에 하나만 한쪽 어깨가 다른쪽보다 좀 높았다라는 기록 말고는 리처드 3세의 체구를 모사한 다른 기록은 현재로썬 없다.[23]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등에 베게를 넣은듯한 꼽추.[24] 유골 측정 결과 척추측만증 외에 별다른 장애는 없었다. 다만 유골이 상당히 여성성을 띄고 있어 초반에 연구진들을 긴장시켰었다. 세익스피어 극 리처드 3세의 모습이 심히 과장은 되었지만 매우 마른 체형을 가진 리처드 3세의 체구가 어느정도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것도 확인했다.[25] 임금님이 꼽추라고 소문이 세간에 돌아도 눈에 보이기엔 잘 차려 입고 거기에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 전투에 임해 전공을 세우는 모습을 본 백성들은 심각한 장애로 여겨졌던 곱추설을 부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인능욕 이후로는 얘기가 틀려지지만.[26] 본문에 있는 리처드 3세의 악행들을 튜더 왕조의 날조라고 생각한다. 조카들을 죽인 친족살해 혐의까지 리처드의 부하가 왕명도 없이 조카들을 살해한걸로 본다.[27] 1,2등급만 Sir/Dame의 칭호를 붙일수 있다.[28] 레스터 지방에선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이전부터 이미 유명인사였다.[29] 영국에서 유적 발굴시 유골 발굴 허가증을 유적 발굴 허가증과 따로 받아야 한다. 즉 유골을 예상하지 않고 발굴을 하다 주요한 유골이 나오면 다시 허가증을 받아야 하는 등, 시간이 들게 되고 당연히 돈은 돈대로 들어가게 된다.[30] 현존하는 건물이 있으면 보상을해야 하니 돈이 또 깨진다.[31] 거기에 리처드 3세 협회의 열정적인 모금도 있었고.[32] 케이블 채널 교양국의 단발성 역사 발굴 프로그램으로 편성하려고 했었던것으로 보인다.[33] 우습게도 레스터시에는 이 건물을 아동복지국 건물로 사용하고 있었다. [34] 학자 개인의 엄척난 명예도 명예지만 학계에서도 부장품이 없이 유골만 있어도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인물을 찾아내면 엄척난 양의 연구자료를 쏟아낼 수 있으며 기존의 학설들도 순시간에 뒤집어 버릴수 있을정도이기 때문이다.[35] 위치를 예측 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유골에 파손이 일어났다. 당시 촬영을 하고 있어서 유골의 파손을 지적하자 당황해서 말을 더듬 거리는 발굴팀원은 덤.[36] 동식물, 사람이 사망하면 그 순간 부터 유전자는 파손되기 시작되는데 발굴 당시의 보존 상태에 따라 유골에서 수습할수 있는 유전자 정보의 손상 비율이 달라진다. 그래서 유골의 여러곳에서 유전자 샘플을 수집해 증폭하는 과정을 다음 비교 과정을 거처 퍼즐 맞추듯 파손된 유전자를 복원하게 되는데, 이때 유골을 수습한 현대인의 입김이 뼈에 닿으면 현대인의 완벽한 상태의 유전자가 고대 유전자 증폭 과정에서 오염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다.[37] 레스터지방과 영국 중세 시대 유골을 발굴했던 발굴팀은 이 매장 방식은 귀족이던 평민이던 일반적인 중세시대 장례법이 아님을 지적했다.[38] 이후 이 쇳조각은 X선 검사를 통해 로마시대의 못이라 리처드 3세의 사인과는 관련이 없고 그냥 우연히 섞여 들어간것으로 추측했다.[39] 묘비나 명문은 같이 발견되지 않았다.[40] 여러 용도로도 쓰이지만 리처드 3세의 경우엔 한손으로 잡고 다른 한손으로 머리 위에서 눌러 넣는, 확인 사살 용도라고 봤다.[41] 사실 리처드 3세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의 군주들이 무장을 했을때 진중에서 군주임을 알리기 위하여 흔히 이렇게 하고 다녔다.[42] 당시 영국 기사들이 착용한 고딕 양식 플레이트 아머는 시야가 매우 크게 제한된다.[43] 대중에 개인 정보는 공개하지 않고 유전자 정보가 리처드 3세와 일치 하는지 안하는지만 공개했다.[44] 조선의 경우 왕이 후사 없이 죽어 방계 왕족이 즉위하는 경우에는 기존 왕, 또는 새 국왕보다 한 항렬 높은 이전 왕의 양자로 입적시키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가령 명종의 조카였던 선조는 즉위하면서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철종은 한 항렬 높은 순조의 양자로, 고종은 역시 한 항렬 높은 효명세자(추존왕 익종, 뒷날의 추존황제 문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단, 인조는 광해군을 쫓아내고 즉위한 탓에 이전 국왕의 양자로 입적되지 않고 왕위를 계승했다.[45] 하노버 왕조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원래 근대의 독일 통일 이전의 여러 소국의 왕가 중 하나였고 영국의회에서 하노버 왕조조지 1세를 영국왕으로 옹립하면서 한동안 영국 왕위와 하노버 왕위의 동군연합이 있었다. 다만 하노버쪽은 그놈의 살리카 법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동군연합이 깨지고 작은 삼촌에게 하노버 왕위가 넘어가게 된다. 역사학자들의 만약 시나리오 중 이 시대에 만약 영국왕가에서 계속해서 독일의 심장부를 직접 다스리고 있었으면 과연 양차 세계전쟁이 일어났을까 하는 시나리오.[46] 다만 이것도 여왕에게서 왕위를 이어야 하는 찰스 왕세자의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쳐진 성이 아닌 '윈저'로 고정. 자세한 사연은 엘리자베스 2세를 참조.[47] 그냥 이 말만 보면 거리감이 좀 있겠지만, '''헨리 8세'''부터가 이에 해당되고, 튜더 왕조 이후에 스튜어트 왕조는 헨리 7세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장녀인 마거릿 튜더외증손자를 데려온 것이다. 하노버 왕조 또한 제임스 1세의 후손이긴 하다. 즉, 하노버 왕조와 그 이후의 왕조들도 튜더 왕조의 혈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48] 물론 영국에서도 아무 방계나 모셔온건 아니고 모계쪽으로 왕위와 가장 가까운 왕족을 찾다보니 찾은게 하노버 왕조다.[49] 리처드 3세의 누이 '앤 공주'의 후손들에게 먼저 영국 국왕 승계권을 주게 되는 법. 혹 '앤 공주'의 후손이 끊어지게 되면 그녀의 혈통의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왕족이 영국 국왕 승계권을 받게 된다.[50] 윌리엄 왕자의 아내 캐서린 미들턴 왕자비가 첫째 아이를 임신하자 갑자기 영국의회에서 성별에 상관 없이 첫째가 무조건 왕위를 계승하는 조항을 넣었다. 물론 결과는 조지 알렉산더 루이가 태어나서 법이 바뀐 것과는 상관없게 되었지만 어쨌든 이 영국왕실 계승법은 이 요상한 근래의 경우를 빼곤 제정 이후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51] 물론 남성후사가 없어 빅토리아 여왕 승계,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가 각각 왕위를 계승해서 왕가의 이름이 좀 바뀌긴 했지만 하노버 왕조로부터 내려오는 정통성은 유지되었다.[52] 위의 리카디언들과 비슷한 협회로 이쪽은 튜더 왕조와 앤 볼린에 꽂힌 사람들.[53] 사실 연구진들은 초반부터 부계쪽 유전자 검사 결과는 기대도 안했다.[54] 남편 귀족이 여기저기 다니며 서자를 낳는 것처럼 부인 귀족도 남편들만큼이나 즐겼다고 보는게 타당할 듯.[55] 엘리자베스 2세의 40촌(!) 동생 정도 된다.[56] 즉 같은 조상을 둔 남남이라고 봐도 무관하다.[57] .01%를 넣지 않는 이유는 학자들의 특성상 뭐든 100% 될수 없다는 기조아래 .01%의 오류로 일어날수 있는 문제를 회피하고자 하는 일종의 학술적 표현.[58] 앞에서 지적했듯 요크 왕조이후로 영국 왕/여왕의 무덤중 유일하게 유실된 무덤이었고, 리처드 3세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재발견까지 드라마틱한 얘기로 구성되면서 관광 상품으로 팔아 먹기엔 최고의 먹잇감이 나타났으니, 역사적 근거를 떠나 요크 지방에서는 못먹는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법적 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59] 이 협회에서 주장하는건 흡사 경주 고분군 발굴과 관련해 경주 김씨 종친회가 나선게 아니라 경주 김씨 동호회가 나서서 북치고 장구친 꼴이라 하겠다.[60] 한 수학자는 통계 확률상 현재 플랜태저넷 왕조를 조상으로 두고 있는 후손이 영국내에서만 백만명이 훌쩍 넘어갈 것이라고 지적했다.[61] 공교롭게도 당시 컴버배치는 할로우 크라운이라는 드라마에 리차드 3세 역으로 캐스팅되어 있었다.[62] 행운이라고 계속해서 취초선이 처져 있는데 정말 행운에 행운이 겹친 발굴이 아닐수 없다. 정말 600년 왕의 한이 2000년대를 살고 있는 후손들로 하여금 풀게 만들고 그 왕의 영혼이 자신이 영면한 자신의 도시를 축복했다는 웬지 판타지 동화 같은 이야기가 리처드 3세 유골 발굴 내내 실제로 펼처졌다.[63] 이번에 새로 추가된 유골 재발굴에 관한 모든 내용은 양 다큐멘터리와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학술대회를 요약한 내용이다. 이들 모두 영어로 나오니 시청에 유념할 것.[64] 골 때리게도 목이 잘려 나갔을 때가 리처드 3세가 실제로 최후를 맞은 보즈워스 평원 전투이다. 즉 블랙애더에선 리처드 3세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팀킬(...)로 가정하는 것이다.[65] 요네자와 호노부의 추리소설 빙과의 부제가 The Niece of Time(시간의 조카딸)인데, 이 소설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다.[66]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를 주인공으로 한 편들이 방영된 상태다. 덧붙여 헨리 4세로 제레미 아이언스가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