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불린

 

'''Anne Boleyn'''
<colcolor=#000>'''이름'''
앤 불린
(Anne Boleyn)
'''출생'''
1501년 7월 - 1507년
노퍽 블리클링 홀 또는 켄트 히버 성
'''사망'''
1536년 5월 19일 (28세 또는 35세)
런던 런던탑
'''장례식'''
1536년 5월 19일
런던 런던탑 성 피터 애드 빈큘라 교회
'''배우자'''
헨리 8세 (1533년 결혼 / 1536년 무효화)
'''자녀'''
엘리자베스 1세
'''아버지'''
제1대 윌트셔 백작 토머스 불린
'''어머니'''
레이디 엘리자베스 하워드
'''형제'''
메리, 조지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헨리 8세와의 만남과 잉글랜드 왕비
2.3. 파경, 그리고 사형선고
2.4. 앤과 캐서린에 대한 헨리 8세의 태도 비교
2.5. 앤은 왜 처형되어야만 했는가?
3. 여담
3.1. 일화들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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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왕비. 헨리 8세의 2번째 왕비이자 엘리자베스 1세어머니.

2. 생애



2.1. 유년기


아버지 토머스 불린은 외교관이었고 어머니는 명문 하워드 가의 영애 엘리자베스 하워드였다. 자매로는 메리 불린, 형제로는 조지 불린이 있다. 외삼촌이 대귀족이었던 노퍽 공작(Duke of Norfolk) 토머스 하워드였다.
불린 가문은 원래 상인 집안이었으나 점차 세가 강해졌고 그녀의 부친에 이르러서는 명문 귀족과 결혼할 수 있을 정도로 가세가 성장했다고 한다. 태생부터 범상치 않은 배경을 가지고 있던 셈이다. 노퍽 지방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프랑스에서 성장했는데, 이미 7세에 5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이 어학에 대한 특출난 재능은 능력 있는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던 아버지인 토머스 불린에게서 물려 받은 것으로 보인다.
15세에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궁정에 들어가 헨리 8세의 첫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의 시녀가 된다. 아버지 토머스 불린은 앤을 본래 불린 가문과 재산 분쟁이 있던 아일랜드의 버틀러 가문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서 분쟁을 종식시키려고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약혼은 흐지부지된다.
앤은 곧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가문인 노섬벌랜드 공작 가문의 아들 헨리 퍼시와 연애 끝에 약혼(precontract)하려 했으나, 퍼시의 가족과 헨리 8세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반대로 결혼은 무산된다. 후대에는 헨리 8세가 흑심을 품고 있던 앤을 차지하기 위해 토머스 울지 추기경과 짜고 앤과 퍼시를 갈라놓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미드 튜더스에서는 실제로 이 소문이 나오기도 하지만, 학자들 대다수는 "그렇다고 보기에는 시기가 너무 이르기에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앤이 퍼시와 약혼했을 때에는 헨리 8세와의 관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또한 퍼시의 가문인 노섬벌랜드 공작 가문은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대귀족 가문이기에 퍼시 역시 그에 걸맞는 지위와 재산을 지닌 가문 출신인 약혼녀 메리 톨벗이 이미 있었으며 귀족 청년이 왕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결혼한다는 것은 왕궁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죄였다.
그러나 앤은 이 사건으로 울지 추기경에게 앙심을 품고, "할 수 있는 만큼 복수해 주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후에 앤이 왕의 애정을 얻게 되었을 때, 울지 추기경은 아라곤의 캐서린헨리 8세 사이의 결혼 무효화 협상을 실패했고, 앤과 헨리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울지 추기경을 몰락시켰다. 왕의 오랜 심복이었던 울지 추기경은 시골로 쫓겨나 초라한 최후를 맞게 된다.

2.2. 헨리 8세와의 만남과 잉글랜드 왕비


드라마의 영향으로 세간에는 '유부남이었던 헨리 8세를 사로잡아 평민에서 왕비 자리까지 얻어낸 미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앤의 외삼촌은 방계 왕족 가문들을 제외하면 잉글랜드 내 유일한 非 왕족 출신 공작 가문인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라서 평민이라고 보긴 어렵다. 헨리 7세가 보즈워스 전투하고 귀족 가문은 고작 29개만이 남았으며 튜더 왕조 말기에도 남작 가문을 합쳐도 50여개에 불과했다. 불린 가문은 젠트리였는데, 잉글랜드의 귀족 제도 특성상 불린가도 평민이라기보단 양반처럼 사회 지도층에 해당한다. 그리고 시녀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유럽에서 궁중 시녀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앤 불린은 신분 때문에 살아있을 적에도 죽은 후에도 비난에 시달렸다. 국외혼의 전통이 없던 조선 왕조같은 경우 "왕의 배우자(왕비)가 양반 집안 출신이기만 하면 별 문제없다"고 여겨졌던 것과는 달리, 유럽 문화권에서는 "군주는 기본적으로 통치가문 출신의 여성과 결혼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즉, 잉글랜드의 젠트리는 다른 유럽국가의 귀족과 비슷한 사회적 입지를 차지한 신분이기는 하지만 유럽 기준에서 보면 왕이 자신의 신하인 귀족가문의 여식과 결혼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못한 일로 여겨졌다는 것. 그나마 잉글랜드가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귀천상혼에 많이 관대한 편이라 가능했던 일이긴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 극적인 신분상승의 예로 받아들여질만한 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앤 불린과 헨리 8세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울프 홀의 표현을 빌리자면, '''왕은 당연히 다른 나라에서 시집온 공주님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 이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었고, 국내의 사회지도층 가문의 딸은 이 기준으로는 왕비가 되기엔 신분이 낮다고 여겨졌다는 것. 더구나 이전의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은 아예 가 다 왕이라는 실로 럭셔리한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교가 됐을 것이다.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을 시도한건 캐서린이 더 이상 임신하지 못하던 1520년대 초반부터였다. 당시 유럽의 왕들은 적법한 결혼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면 후계 자리는 친척에게 넘어갔기에, 후계자가 없으면 조강지처를 수녀원으로 쫓아내거나 교황청에 로비를 해서 혼인무효를 얻어내거나 하는 식으로 새장가를 갔는데, 헨리 8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캐서린과 결혼 기간에도 숱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왕에게 아부하여 권력을 노리던 야심가들이 아내나 딸들을 상납해서 헨리 8세는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 상관없이 헨리 피츠로이라는 사생아를 낳았었다. 그래서 앤 불린에게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나 앤 불린은 더한 욕심이 있었다.
1520년대 중후반에 헨리 8세는 젊고 재치있는데다 매력적인 앤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헨리 8세는 앤에게 정부(情婦)가 되어 달라고 했으나, 앤은 왕의 사랑을 받은 당대의 여느 귀족 여인들과 달리 정부가 되기를 거부하여 헨리 8세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그의 애정을 부채질해 애태운다. 프랑스에는 공식 정부인 '메트레 상티트르'라는 지위가 있었는데,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궁정에서 전례가 없는 지위를 앤에게 약속했으나 앤은 거절했다. 앤은 결혼을 원했다.[1] 앤은 여자로서의 매력으로 헨리 8세를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재치있는 입담과 지성으로도 그를 매혹시켰다. 신학에 나름 관심이 있었던 앤은 [2] 헨리 8세와 신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몇 년간 알콩달콩 하던 헨리 8세는 "오랜 결혼생활로 감정이 소원해진데다 나이가 들어 이제 더는 자녀를 낳아줄 수 없는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헤어지고, 젊고 매력적인 앤과 결혼하여 적법한 아들을 낳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사실 앤이 헨리를 일방적으로 들볶아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헨리 또한 간절히 앤과의 결혼을 원했으며, 결국 이후 벌어진 사태에서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헨리였다. 앤이 헨리에게 동침을 허락한 후에도 헨리는 "사생아가 아니라 적법한 후계자를 낳아야 한다"며 거절하지 않았겠느냐고 설득했다.
아라곤의 캐서린이 카를 5세의 이모 였기에 당시 헨리 8세에게 이혼이 정치적, 법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혼, 혼인무효화[3]를 감행했던 것은, 왕이 그만큼 대단히 절박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튜더 왕가의 유일한 남성이었고, 그가 재위기에 적법한 남자 후계자를 낳지 못하면 헨리 7세가 세운 튜더 왕가는 겨우 2대 만에 끝날 터였다. 그리고 그렇다면 장미전쟁처럼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다시 한번 벌어질 위험이 있었다. 캐서린 왕비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메리 1세)를 두었지만, 당시 풍속에 의하면 왕족은 왕족끼리 결혼하는 것이다. 따라서 메리 공주가 고모들처럼 스코틀랜드프랑스 같은 다른 왕국의 왕족에게 시집가게 되면, 하나 남은 왕위 계승권은 외국에 팔려가는 격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조차 우려하고 있었다.[4]
이처럼 이혼 문제는 드라마나 소설상의 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스페인가톨릭 세력 VS 헨리 8세와 잉글랜드 정체성의 국교회 세력의 정치적 갈등의 대리전이었다. 역사적으로 선대 헨리 7세 시절 왕의 장자 아서 튜더아라곤의 캐서린은 약혼을 했고 캐서린은 지참금 20만 크라운을 챙겨서 잉글랜드에 왔다. 그러나 결혼 6개월만인 1502년 아서가 요절했고, 캐서린은 과부가 된다. 헨리 7세는 지참금을 반환하기 아까웠기 때문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과 지참금 문제로 다툼을 벌였고, 시아버지와 친아버지가 다투는 동안 캐서린은 몇 년 동안 과부 신세로 잉글랜드에 버려져 있었다. 대신 타협책으로 "캐서린을 아서의 동생 헨리와 결혼시킨다"는 둥의 협상이 있었으나, 좀처럼 성사는 되지 않은 채 7년을 끌었다. 헨리 7세가 사망하자 헨리 8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형수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교회법상 결혼할 수 없는 사유였으나 당시 교황 율리오 2세가 기독교 군주끼리의 결합은 대의로 인정하여 관면해 주었다.'''[5]
결국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그녀와의 혼인을 '''무효화'''(annulment)해줄 것을 교황에게 요구했다. 이유는 "캐서린이 헨리 8세의 형인 아서 튜더와 먼저 결혼한 몸이었으므로, 이는 구약성경 레위기에서 "형수를 취한 자는 자손이 끊어진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자신의 그 처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은 교회법상 무효 사유에 해당했다... '''
이후 캐서린은 줄줄이 낳은 자식들은 사산 내지 요절하며 외동딸 메리 1세만 남기었고, 헨리보다 6세나 연상이던 캐서린이 30대 중반이 되자 헨리 8세는 왕비 소생의 아들은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이혼을 시도했다.
아라곤의 캐서린이 헨리의 형 아서와 결혼한게 서로 16세였고, 중세 유럽에선 10대 중반에도 임신출산이 오히려 흔한 일이었고 10대 초반도 드문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로 봐서 6개월간 결혼생활을 했으면서도 처녀였다고 주장했던 건 당시 사람들에게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였던 것 같다.[6]
다만 아서와의 결혼은 시동생과의 새 결혼에서 명백한 혼인무효 사유에 해당하기 때문에 선행해서 아서와의 결혼이 무효임을 주장하여 헨리 8세와의 결혼이 적법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한 것이었다.
이미 헨리와의 결혼 이전 처녀라는 공식적인 증거가 잉글랜드 궁정에 제시되었고 헨리는 첫날밤에 "캐서린은 처녀였다"고 자주 자랑하곤 했다. 이는 애초에 헨리가 지참금을 많이 가져온 형수와 결합하려고 명분을 쌓은 성격도 있기에, 도리어 20년 후 자신을 옭아맬 불리한 증거이기도 했다.
게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캐서린은 아예 성경에 대고 "헨리 8세와 결혼할 당시에 나는 처녀였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헨리 8세의 요구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혼인무효 요청을 불허했다. 명목상으론 "전임교황 율리오 2세의 처분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실질적으론 캐서린의 조카가 당시 에스파냐(스페인)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였던 데다가, 교황 역시 전투에서 패망하여 사실상 황제의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황제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소 순종적이었던 아라곤의 캐서린은, 헨리 8세의 예상과는 달리 끝까지 "나만이 잉글랜드의 진정한 왕비이며, 나와 헨리 8세와의 결혼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버텼다.
7년에 걸친 긴 법적 공방과 로비 끝에, 헨리 8세는 마침내 수장령을 선포하고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부인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켜서 잉글랜드 판 종교개혁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를 출범했다. 당시 대륙의 유행하던 복음주의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앤은 잉글랜드 내의 종교개혁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연인 관계인 헨리 8세에게 영향력을 어느정도 미친걸로 보인다.
1533년 1월, 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이 강제로 추방된 상태에서 헨리 8세와 앤은 마침내 비밀리에 결혼식을 치뤘다. 이때 앤 불린은 이미 첫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으며, 그 해 부활절에 헨리 8세는 앤의 임신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7] 헨리는 앤이 임신한 아이가 그렇게나 고대하던 아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점성가들 대다수도 왕자의 탄생을 예고하여, 이미 궁정서기들은 왕자의 탄생을 알리는 공식 문서까지 작성해 둔 터였다.
같은 해 9월에 앤은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인 엘리자베스 1세출산했다. 앤이 왕자를 낳을 것이라는 예상이 궁정에 널리 퍼져 있어서 모두들 실망했으나, 정작 헨리 8세는 "왕비가 공주를 낳았으니 곧 왕자도 낳을 것이다."며 무척 기뻐했고, 딸을 낳아 실망하고 있던 앤에게 "곧 아들들도 태어날 거요."라고 자신있게 말했다고 한다.[8] 아이의 탄생을 알리는 공식 문서에 적힌 "왕자prince"에는 s를 뒤늦게 추가해 "공주princes"라고 표시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를 출산한 후로 앤의 운명은 빠르게 내리막을 걷게 된다. 자그마치 7~8년간이나 열렬히 사랑한듯 보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고작 2년 9개월여만에 파국을 맞고 만다.

2.3. 파경, 그리고 사형선고


두 사람의 파경의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해 왕의 애정을 잃은 것이었고,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이 지금까지 앤의 논란 많은 행보에 겹친 여러가지 불운이라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왕자를 낳지 못하고 엘리자베스 1세 이후로 가진 아이를 연달아 유산하거나 사산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고 여러 가지 설만 있다.
    • 일단 앤의 혈액형이 RH- 형이라 첫째인 엘리자베스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아서 무사히 낳을 수 있었지만 둘째부터는 항체가 형성되어 태아의 적혈구가 파괴되는 바람에 조기에 유산했다는 학설이 있다.[9] 앤의 유해를 연구한 결과도 이 학설을 뒷받침해 준다고는 하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헨리 8세의 모든 왕비들은 물론 정부들도 임신출산에 문제가 있었으며, 태어난 자식들 중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제외한 상당수도 요절한 것을 생각해 보면 헨리 8세에게 매독이 있었거나 그밖에 여러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 역시 아들을 비롯하여 많은 아이들을 낳았으나 메리 1세를 제외한 모두가 일찍 죽었다. 당시 영아 사망률이 높은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라지만, 그렇게나 많이 낳았는데도 하나같이 일찍 죽은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기는 하다. 3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가 낳은 그의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 6세가 요절한 것도 헨리 8세의 난잡한 성생활 때문에 발병한 선천성 매독 때문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다. 에드워드 6세를 낳기 전에는 엘리자베스 블런트라는 정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를 낳았는데 헨리 피츠로이 역시 1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자세한 의료 기록에 당시 매독의 특효법으로 여겨졌던 수은 치료를 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매독은 아니라는 설이 더 힘을 얻는다.
  • 앤 불린의 몰락에 결정적인 이유였던 아들을 못 낳은 것은 현대에는 남자에게서 유전되는 Y염색체 때문임을 사람들이 알지만, 중세 사회에서는 태아의 성별 등 임신출산의 모든 부분이 여자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계속 유산과 사산을 반복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자의 탓으로 여겨졌다.[10] 또한 감염에 대한 인식이 없어 아이를 받는 산파가 손을 씻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던 당대의 위생 관념이나 무엇보다도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는 스트레스가 유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 앤과의 사이가 시들해질 결혼 중반 무렵에 헨리 8세는 앤의 시녀로 있던 조용한 여인 제인 시모어에게 빠져 있었는데, 당대 기록에는 제인을 무릎 위에 앉히고 시시덕거리는 장면을 당시 임신 중이었던 앤이 보고는 충격을 받아 그 길로 남자아이를 유산했으며, 그 모습을 보고 헨리가 "하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려는가 보오."라고 발언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 헨리 8세는 전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캐서린이 오랜 법정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망신을 거하게 당하면서 체통을 크게 잃었다.[11] 앤의 전임자였던 캐서린 왕비는 왕자를 낳지 못했다는 유일한 흠만 빼고는[12] 워낙 모범적인 왕비의 전형인지라 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또한 "덕이 높은 조강지처를 여우 같은 젊은 여자가 내쫓는다"는 구도는 앤이 악녀라는 평판을 얻기에 충분했다. 또한 절대군주인 헨리 8세에게 직접 욕을 할 수 없었던 데서 비롯되어, 모든 비난의 화살이 앤을 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비난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캐서린의 친정인 스페인에서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에서조차 캐서린이 죽기 전까지 앤을 정식 왕비로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앤이 헨리 8세의 연인이었던 시절, "앤 불린이 왕비가 되고자 캐서린 왕비를 몰아내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분노한 백성들이 앤을 습격하려 했다는 비화가 있을 정도다. 여담이지만 후에 사람들은 앤을 '여섯 손가락의 마녀'[13]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데 물론 이는 후대의 전설이다.
  • 또한 앤은 신교도는 아니었으나 정치적, 개인적인 이유로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캐서린이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던 상황인 만큼 개혁신학 성향의 젠트리들을 조용히 지지하면서 보수적인 세력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앤이 사실상 잉글랜드와 교황청의 관계 단절의 동기 역할을 했으니 종교 갈등의 시대에 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앤과 불린 가문의 몰락을 바라던 정적들이 많은 상태에서 앤은 헨리 8세의 총애를 잃어 결혼의 조건이었던 적법한 아들을 그에게 안겨주는 데에 끝내 실패했고, 결국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 게다가 앤은 캐서린 왕비의 딸인 메리 1세와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앤은 메리에게 "나를 너의 새어머니로서, 잉글랜드의 왕비로서 인정해 달라"면서 화해의 손길을 몇 번 보낸 바 있으나, 친어머니가 쫓겨나는 과정을 다 지켜보며 계속 친어머니의 편을 들고 있던 메리는 끝내 앤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나는 우리 어머니 외의 잉글랜드 왕비는 모른다."며 저항했다.
이에 불같은 성격의 앤은 메리 1세를 당시 아기였던 친딸 엘리자베스 1세시녀로 삼아 기저귀를 가는 등의 일을 직접 하게 시켰고, "시종과 결혼시켜 버리겠다!" 등의 악담을 하기도 했다.[14] 이 때문에 메리는 앤과 원수지간이 됐으며, 상전으로 모셔야 했던 엘리자베스 역시 앤의 딸이라는 이유로 좋은 감정을 갖지 못했다.
단 앤 사후에도 메리는 끊임없이 엘리자베스를 경계하면서도 자매의 정을 주는, 일종의 애증을 보인다.[15] 엘리자베스가 어머니의 원수인 앤의 딸이어도, 죄 없는 엘리자베스까지 덩달아 미워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실제로 메리 1세는 자신이 즉위한 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자 처형할 수도 있었는데도 살려준 적도 있다. 물론 엘리자베스가 진짜 역모를 꾸민 게 아닌데다, 당시 튜더 왕가에 남은 직계 왕족이 얼마 없어서 내린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메리가 엘리자베스를 극렬히 증오했다는 증거도 없다.
  • 뿐만 아니라 자신의 편이었던 사람들과도 갈등이 생겨 다퉜고 결국에는 척을 지게 되었다. 자신을 지원해 주었던 토머스 크롬웰과 사이가 벌어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크롬웰이 헨리 8세가 믿고 있었던 최측근이었기 때문. 외가이자 잉글랜드의 명문 하워드 가문의 수장인 외삼촌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16]와도 사이가 틀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헨리 8세는 또 "하느님이 나와 앤의 결혼을 반기지 않는다"고 여기고, 앤의 시녀였던 순종적이고 조용한 제인 시모어를 왕비로 세울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 앤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려 한다.
앤은 그녀의 적마저 놀랄 정도로 신속하게 몰락했다. 그러나 앤은 진작에 다혈질적인 성격, 투기, 거기에 잇따른 사산으로 왕의 사랑을 잃었었다. 설상가상으로 앤의 젊은 시녀인 제인 시모어를 차기 왕비감으로 점찍은 헨리 8세는, 앤을 런던 탑에 가두고 그녀가 6명의 남자와 간통을 저지르고 특히 남동생[17]조지 불린근친상간을 했다는 누명을 씌운 뒤[18] 사형 선고를 받게 했다.
헨리 8세는 과거에 앤에게 주었던 불같은 사랑을 이제 와서 "마녀의 마법"이라며 애써 부정했다. 그래서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그랬듯이 이혼이 아닌 혼인무효화로 앤을 버렸고, 결국 당시에 고작 3세에 불과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를 잃으면서 사생아로 전락하며 계승권도 잃게 된다. 여담이지만 당연히 "엘리자베스 공주(Princess Elizabeth)"에서 "엘리자베스 아가씨(Lady Elizabeth)"[19]로 호칭도 바뀌었는데 영특했던 엘리자베스가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왜 이제는 나를 공주라고 부르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비화도 있다. 물론 나중에 헨리 8세의 분노가 풀리면서 계승권은 회복했다.
결국 앤은 36세의 나이로 런던 탑 내부 처형 집행장에서 참수형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헨리 8세는 처음에 앤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키려 했으나, 처형 직전에 그래도 한때 사랑한 여자에 대한 마지막 배려를 하고 싶었는지 빨리 죽을 수 있도록 참수형으로 처형 방식을 바꾸었고, 특별히 최고로 유능한 참수형 집행자프랑스 칼레[20]에서까지 데려왔다.
원래 참수형은 도끼로 집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날이 무딘 편인 도끼로 목을 자르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내려쳐야 하기 때문에 곱게 죽을 수가 없었다.[21] 하지만 칼레의 집행인은 검으로 한번에 깨끗하게 목을 벨 수 있었으니 그나마 편하게 갈 수 있었다.[22] 런던 탑에서 앤은 처형 방식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웃으며 "내 목은 가늘어서 빨리 끝날테니 다행입니다."라는 농담을 남기기도 했다고.
어쩌면 앤으로선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저 순간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결혼 전 무려 7년 동안 천하의 호색한인 헨리 8세의 애정을 움켜쥐고 있느라 끊임없이 마음 졸여야 했으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이고,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후 고작 2년 9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연달아 2~3번이나 5~6개월만에 유산했다 하니 육체적인 건강도 크게 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가 왕비로 있던 시절에 그녀를 본 외국의 한 대사는 '늙고 추레한 여자'라고 혹평했다.
앤은 처형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나는 정당한 이유로 처형을 당하는 것이며, 헨리 8세는 성군이니 그에게 충성을 다해 달라"는 간단한 연설을 하고 "예수님에게 내 영혼을 맡깁니다"라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참수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나 태도는 매우 의연했다고 한다. 집행인은 짚더미 밑에 칼을 감추어 놓았는데, 일부러 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손을 내밀며 "칼을 건네줘!"라고 외쳤고, 그 말을 들은 앤은 무의식적으로 목을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집행인은 칼을 들어 앤의 목을 내리쳐 단번에 잘라냈다.

2.4. 앤과 캐서린에 대한 헨리 8세의 태도 비교


역설적이지만, 헨리 8세가 앤에게 실망했던 것은 이혼한 아라곤의 캐서린과 그녀를 비교하게 된 탓도 있었다.
일단 캐서린의 부모는 둘 다 각자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23]이었고, 캐서린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궁정에서 어려서부터 받은 엄격한 교육 탓에 말 그대로 남편에게 철저히 순종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모양처였다. 그녀는 버림받은 상태에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을 소박놓은 남편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병에 걸려 외로이 죽어가는 그날까지도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에게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캐서린은 앤에 비해 여러 분야에 걸친 교양을 가지고 있었으며[24], 헨리보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어린 남편을 감싸주는 원숙함도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답답한 어머니 때문에 속이 터진 메리 1세가 한이 더 깊어졌다는 주장도 있는데 꽤 신빙성이 높다.
하지만 앤에게는 이런 장점들이 없었다. 헨리는 앤과 한창 연애할 때는 앤의 발랄하고 귀여우며 때로는 도발적인 속성에 매혹되어 정신을 못 차렸으나, 앤의 저런 속성들은 그녀가 헨리와 결혼하여 왕비로 즉위한 뒤에는 왕비 자리에 적합하지 않게 나타났다. 전임자인 캐서린처럼 왕비로서 무게를 잡고 신료들, 외교관들과 원만히 지내며 교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즐겁고 화려한 사교관계를 유지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위엄을 차리지 못한 점이 문제였다.
이렇듯 헨리는 캐서린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교양과 원숙함, 피로하면 기댈 수도 있는 든든함을 앤에게서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큰 오해였다.[25] 앤은 애초에 그렇게 키워지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연애하던 시절에 헨리 자신을 앤에게만 목매게 만들었던 앤의 밀고 당기는 연애술이, 결혼 후에는 바가지로 변하면서 헨리를 더 힘들게 했다.
결국 이런 데서 비롯된 실망 탓에, 앤에 대한 헨리의 사랑은 결혼 직후부터 급격하게 식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캐서린에게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다. 이혼하기 위해 국교를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꾸는 등 온갖 소동을 벌여 놓았으며, 캐서린이 나이가 들어 그에게 아들을 낳아줄 수 없는 몸이 된 것도 이혼을 결심한 큰 원인이 됐기 때문에, 만일 캐서린과 재결합한다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므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2.5. 앤은 왜 처형되어야만 했는가?


헨리 8세가 앤 불린에게 죄를 씌워 처형하기로 결심을 한 동기에는,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가 절대로 이혼을 해 주지 않고 버티느라 애를 먹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순종적인 캐서린 왕비가 저렇게 고집스럽게 버틴다면, 강한 성격의 앤은 얼마나 일을 피곤하게 만들지 상상하기 쉽다.
한편으로, 캐서린 왕비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왕의 딸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조카가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상당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막 세력을 얻기 시작한 불린 가문의 딸인 앤은 자신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지켜줄 세력이 없었다. 앤은 헨리 8세의 애정밖에 기댈 곳이 없었고, 애정이 사라진 지금은 간단하게 처리해 버릴 수 있는 존재였다.
씻을 수 없는 패륜인 근친상간이라는 충격적인 죄를 굳이 뒤집어 씌운 것도 앤을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앤과 소위 "간통을 저지른" 남자들을 잡아들여 조사하고 재판을 진행하는 데는, 한때 불린 가문과 협력했으나 이제는 시모어 가문과 손을 잡은 토머스 크롬웰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국 '''앤을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그 의지를 관철한 사람은 헨리 8세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앤이 아들을 낳을 수 없으므로, 빨리 다른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가장 손쉽게 앤을 몰아내고 후환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그녀를 죽이는 것이었다.
앤이 정말 간통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왕비의 간통은 반역이었기에''' 반대파가 눈에 불을켜고 있는상황에서 왕의 아들도 못 낳은 처지에 위험을 감수하고 간통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다. 앤은 처형이 확정된 상태에서도 끝까지 "나는 절대 왕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느님을 걸고 맹세했는데, 앤이 불같은 성격으로 왕을 유혹한 야심 많은 여성이라 해도 그 전에 대단히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음은 분명하기에 앤이 누명을 썼다는 설에 더 무게가 실린다.[26]
앤의 발목을 결정적으로 잡은 것은, 앤이 매력적이었으며 많은 남자들과 시시덕거린다는 평판이었다. 당시 여성은 일단 정숙하고 순종적이어야 하지만, 한편으로 신분 높은 여성은 궁정연애의 원칙에 따라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궁정의 여러 남성과 밀고 당기며("flirting") 교류를 하는[27]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왕비나 높은 신분의 여성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관습이었던 당시, 궁정 남성들은 왕비이자 궁정의 안주인인 앤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매혹되었다는 등의 아부를 했고 앤은 재치있게, 또는 이들을 희롱하는 듯한 태도로 응수했다. 이는 매우 일반적인 관습이었고 헨리가 앤을 사랑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앤은 이미 유부남인 왕을 사로잡았던 전력이 있었고, 앤의 매력과 적극성은 금방 "남동생을 포함한 6명의 남자와 잤다"는 추문에 힘을 불어넣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3. 여담


  • 의외로 딱히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앤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에 따르면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거뭇한 피부를 지녔다고 하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금발과 흰 피부를 미인의 조건으로 쳤기 때문에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상당히 이국적인 외모에 속했다. 금발에 푸른 눈이었던 언니 메리 불린이 더 미인으로 여겨졌다.[28] 그러나 유달리 반짝이고 표정이 풍부한 검은 눈이 매력적이었기에, 앤에게 적대적이었던 이들조차 그 아름다운 눈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춤도 잘 추고, 교양이 풍부한데다 화술도 뛰어나서, 남자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당시 유행의 최첨단이었던 프랑스 궁정에서 오래 교육을 받고 몸가짐을 익혔기 때문에 매우 세련되고 매력적이었으며, "잉글랜드 여성이 아니라 프랑스 여성 같았다"라는 감탄 섞인 묘사가 남아 있다. 앤 불린을 미인으로 여기는 이들이 생겨난 건 근현대 이후 서양인들이 동양적인 외모를 미의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 매우 지적이었으며 신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마르틴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던 당시, "앤은 종교개혁을 지지했다"는 카더라 소리가 있는데 잉글랜드헨리 8세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은 전혀 아니었다. (이 부분은 성공회, 헨리 8세 항목 참조) 앤의 외삼촌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잉글랜드 내 가톨릭 계열의[29] 수장급이었고,[30] 헨리가 수장령을 반포하고 잉글랜드 국교회를 출범시키긴 했지만 루터파는 잉글랜드에서 여전히 이단이었다. 루터파 신학에 영향을 받은 윌리엄 틴데일판 개신교 서적 반입시 반입자 소집자는 사형이었고 루터주의는 이단으로 선고되어 복음주의자들은 화형을 당하던 시기이다. 당시 잉글랜드 내에 잔존하던 가톨릭 세력들이 스페인 왕가의 혈통인 아라곤의 캐서린을 진정한 왕비로 여기고 앤 불린은 이세벨 급 마녀나 사탄으로 여겼기에 반동으로 개신교 세력과 정치적으로 호의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 결혼 후 처형까지의 약 3년 남짓 되는 시간으로 인해, 후대는 그녀를 '천일의 앤(Anne of Thousand Days)'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쥬느비에브 브졸드 주연의 고전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 아이러니하게도 앤 불린의 딸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빛나는 왕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1세로 즉위했고, 그 후 앤 불린의 이미지는 '여섯 손가락의 마녀'에서 '여왕의 어머니이자 신교의 성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딱히 어머니를 복권시키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초상화와 자신의 초상화가 함께 담긴 카메오 반지를 가지고 있었고, 궁정 사람들은 알아서 여왕의 어머니를 칭송했다. 탐욕스러운 토머스 크롬웰수도원에 해체에 대해 독실한 앤 불린과 대치하는 구도의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 조선시대 장희빈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왕에 의해 왕비가 되었다가 왕에 의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 딱 하나 낳은 자식이 왕이 되었으며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다는 것, 남편의 명령에 의해 죽게 되었다는 것, 둘 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나 현대에 들어선 당대의 평가만큼이나 악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알고보면 평가가 상당히 갈리는 것 등. 그리고 둘 다 아버지가 외교관[31] 출신이고, 집안이 잘나가는 외교관-상인 가문이었다는 점도. 심지어 여배우들이 캐스팅되길 원할 정도로 인기 있는 배역에 자주 영상화된다는 점도 닮았다.
  • 잉글랜드인들은 그녀가 참수된 날에 너무도 맑았던 하늘로 인해서 슬픈 푸른색을 'Anne blue'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그녀가 처형된 날이면 그녀의 고향 히버(Hever) 성과 런던 탑에서 자신의 잘린 목을 팔에 끼고 마차를 타고 달리는 그녀의 유령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런던 탑에서는 심심찮게 자신의 목을 들고 다니는 앤의 유령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1차대전 당시 런던 탑에서 간첩을 처형하기 직전에도 나타났다는 설이 있다.

3.1. 일화들


  • 푸르쿠아(Pourquoi: 프랑스어로 "왜?"라는 뜻)라는 하바니즈 개가 있었다. 하바니즈 개가 마치 질문을 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 앤 불린과 친해지고 싶었던 리슬 부인(Lady Lisle)이 선물했다. 리슬 부인은 그 후로도 앤에게 노래하는 을 보내는 등 여러 노력을 했지만 왕비와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아무튼 앤은 푸르쿠아를 무척 귀여워했지만, 1534년 12월 푸르쿠아는 "창문에서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녀들은 앤이 충격을 받을까 봐 헨리 8세에게 이 소식을 왕비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앤을 싫어했던 신성로마제국 대사 샤푸이(차푸이스)는 매우 즐겁게 이 소식을 편지에 전했다. 그 때문에 샤푸이가 푸르쿠아를 암살(...)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신빙성은 없다. 우리안(Urian)이라는 그레이하운드도 길렀는데, 앤이 행차하는 도중 우리안이 멋대로 뛰쳐나가 근처 를 물어뜯어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왕과 왕비는 소의 주인에게 보상금을 지불했다.
  • 헨리 8세가 앤에게 보낸 연애 편지는 남아 있으나 앤의 답장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
  • 앤의 시도서(the Book of Hours)에 앤의 친필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 최후의 심판에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삽화 밑에 "그 때가 올 것이다"라고 라틴어로 적었다. 그 다음 성모 마리아의 대관식 삽화 옆에는 "희망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라는 문구를 적었다.[32] 다른 시도서에는 헨리 8세가 여백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당신이 기도하며 내 사랑을 생각해 준다면, 나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헨리."라는 문구를 적었고, 그 밑에 앤이 답으로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상냥한 태도로 대한다는 증거를 매일 보실 수 있을 거에요"라고 적었다. 둘이 한창 연애할 때 적은 것일 듯.

4. 대중매체에서


  •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왕비로서 오래 전부터 영국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 캐릭터다. 비교적 최근작으로는 리처드 버튼, 쥬느비에브 브졸드 주연의 <천일의 앤>, 에릭 바나, 나탈리 포트만,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천일의 스캔들>, 나탈리 도머가 열연한 SHOWTIME 미드 <튜더스>,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BBC의 사극으로 클레어 포이가 앤으로 등장하는 <울프 홀> 등이 있다.
  • 앤 불린의 삶에 대한 책은 여럿이 있으나, 내용이 가장 충실한 전기는 에릭 아이브스(Eric Ives)의 <앤 불린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of Anne Boleyn)>이다.
  • 최근 BBC에서 제작하고 있는 헨리 8세의 전기 사극에서 앤 불린 역할을 흑인인 조디 터너 스미스가 맡게 되면서 역사고증 논란이 일었다.[33] 실존 인물이나 역사에서 모티브만 따와 만들거나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대체 역사를 가지고 만든 가상물도 아니고 실제 역사와 실존 인물을 왜곡한 것이다. 이 논란에 대해 담당 감독인 린지 밀러는 "조디는 이 역할의 최적인 여배우다. 나는 우리 일이 자랑스럽고 싫어할 사람은 싫어해라. 나를 포함해서 좋아할 사람들은 많다."라는 말을 했다. 사실 영국 사극에서 이런 식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고려해서 엄연히 백인이었던 실존 인물 역할에 흑인을 캐스팅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2012년 베네딕트 컴버배치, 톰 히들스턴, 벤 휘쇼 주연의 BBC 사극 텅 빈 왕관(The Hollow Crown)에서 프랑스 출신의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르그리트 역에 흑인 여배우 소피 오코네도를 캐스팅한 것. 당연하지만 실제 앙주의 마르그리트는 백인이었고, 극 중 시대적 배경이 되는 15세기는 아직 서유럽에 아프리카계 흑인이 존재 자체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5세기의 유럽 흑인들은 절대다수가 남유럽(특히 이베리아 반도[34])의 무어[35]이었고 본격적인 흑인 노예무역이 시작되던 때도 먼 훗날의 이야기다.

4.1. 천일의 앤


주느비에브 뷔졸드(Geneviève Bujold)가 연기했다. 프랑스계인 성씨에서 보이듯 캐나다 퀘벡 출신의 배우다.
전체적으로 나쁜 놈인 헨리 8세의 희생자 같은 느낌으로 그려졌다. 그렇다고 가련하고 착한 여인이라는 건 아니다. 성깔도 있고 이기적이기도 하고 왕에게 막 대들 만큼 겁 없이 당돌하기도 하다. 왕이 총애를 퍼주자 거기서 오는 권력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왕의 맘만 변하면 바로 날아갈 권력임을 알기에 정도 이상의 전횡을 부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미워하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곤경에 빠뜨리고 즐거워할 정도로 순진함과는 거리가 먼 여자다.
헨리 8세의 눈에 띄는 바람에 온 가족들에 울지 추기경까지 나서서 "헨리 8세의 애인이 되어라"라고 권하지만, 이미 집안에는 헨리 8세에게 넘어가 그의 아이까지 가지고도 버림받은 메리 불린이 언니였기에, 전혀 그럴 생각 따윈 없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을 약속한 헨리 퍼시를 다른 여자와 결혼시켜 버리고, 앤에게 "내 옆에 있으라"고 명령해서 앤을 묶어둔다. 하지만 앤은 헨리 8세를 미워해서 그의 구애에도 차갑기 그지없고 오히려 말대꾸를 하며 신경을 긁는다. 그러다가 나온 얘기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낳게 하고 싶다'는 헨리 8세와 '아들 낳아봤자 사생아에 불과하다'는 앤의 대답. 여기에 헨리 8세는 앤도 얻고 후계자도 얻기 위해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즉, 이 작품에서 앤은 왕비가 되려는 야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나 좋다고 내 사랑을 망친 이 남자가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정으로 충동질했을 뿐. "혼인무효 요청이 거부당했다"는 소식이 로마에서 도착하자 헨리는 분노하지만, 앤은 실망한 기색도 없이 "불쌍한 헨리!"라며 헨리를 비웃고 있었다. 그러나 헨리가 끝끝내 가톨릭교회와도 갈라서버리자, 자기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헨리에게 결국 넘어가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때만 해도 "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는 말라"고 하던 앤이지만, 엘리자베스 공주를 낳고 실망한 헨리와 사이가 점점 벌어지고 그가 한눈을 팔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애증이 깊어지면서 점점 표독해져서 "반대파들을 다 죽여서라도 내 딸의 계승을 보장하라"고 한다.
아들을 사산하고 나서 앤을 버릴 결심을 헨리에 의해 런던 탑에 갇힌 앤은 '그와 함께 한 천 일 동안 처음에는 그가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를 미워했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 시작하자 그는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한 기간은 천 일 중 단 하루뿐이었다.'는 독백을 한다. 헨리가 찾아와 "이혼만 해주면 살려주고 엘리자베스와 해외에 나가 살게 해주겠다"고 회유하러 오지만 앤은 "엘리자베스를 사생아로 만들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면서 "내가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었고, 바람 피운 것도 사실이고, 당신이 낳을 아들이 몇이든 위대한 왕이 될 것은 엘리자베스이니, 나는 기꺼이 피를 흘릴 것이다"라고 쏘아붙인다.
앤이 처형당하고 어린 엘리자베스가 왕궁 정원에 홀로 거니는 장면 위로, 앤이 "위대한 여왕이 될 엘리자베스를 위해 내 피를 흘리겠다"는 위의 대사가 흘러나오며 영화가 끝난다.
<천일의 앤>(Anne of Thousand Days)은 영화의 원작인 1948년작 연극의 작품의 제목이지 역사적 별명은 아니다. 영국 왕비로 재임한 기간이 1085일로 약 1천일이라는 뜻이다. 다만 다난했던 왕비로서의 생애가 짧고 덧없음을 강조하는 뜻.
특히 이 영화의 OST 가 가련한 여왕의 생애를 그린 애절한 곡으로 유명하다.


4.2. 튜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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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도머가 연기한 앤 불린. 시즌1, 2에 걸쳐 등장. 역사상처럼 검은 눈이 아니라 푸른 눈의 배우가 역을 맡았다.
사실상 튜더스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드라마에서 인기도 높은 캐릭터였다. 실제 역사 속의 앤 불린도 헨리 8세의 왕비들 중 가장 유명한 여인이기도 했고.
아버지 토마스 불린 못지 않은 야심가로, 연인 토마스 와이어트를 망설임없이 차버리고 헨리 8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노력한다. 천진난만한 인상이지만 계산적이고 야망을 위해 거리낌없이 나아가는 성격이다. 헨리에게 순종적이기보다는 자신의 태도를 굽히지 않고, 토마스 크롬웰과도 사사건건 충돌한다.
캐서린 왕비와, 자신에게 끝까지 굴하지 않는 메리 튜더를 위협으로 여기는데다[36] 점차 자신 역시 캐서린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으로 갈수록 정신이 짖눌려간다. 이미 앤을 아내로 맞은 왕은 다시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하고, 앤 불린은 결혼 후 달라진 왕의 태도에 더욱 정신이 예민해지는 악순환.
결혼하고 1달 뒤에 모두가 예상한 아들이 아닌 딸 엘리자베스 1세를 낳고 나서는 몹시 상심하지만 "다음에는 아들을 낳으면 된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이후 임신한 아이를 임신 초기에 유산하자 점점 신경질적이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렵사리 헨리의 애정을 붙잡아 셋째 아이를 가지지만, 2번째 유산으로 이 아이마저 잃게 된다.
그런데 2번째 유산은 임신 초기에 헨리가 시녀 제인 시모어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앤이 극도로 분노하여 스트레스를 받은 탓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됐다. 안 그래도 남편의 사랑을 잃고 있다는 불안감에 빠져 있었는데, 그때 남편이 다른 여자랑 시시덕대고 있는 걸 눈앞에서 봤으니 흥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러니까 이 건에 대해선 '''헨리의 잘못이 매우 크다.'''
하지만 모든 잘못된 일을 죄다 남 탓으로 돌리며 살아왔던 헨리는, 당연히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산하여 몸져 누운 앤에게 "내 아들을 잃다니?!"라며 질책하면서 "하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려는 듯하니, 그대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얘기하자"라고 하며 쌀쌀맞게 뒤돌아섰다. 이에 앤은 "제 잘못이 아녜요. 당신 잘못이에요! 제 사랑은 늘 당신께 있었는데, 당신은 제 앞에서 오입질을 하셨죠!"라며 절규한다. 그 와중에 남동생인 조지 불린과 다른 이들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시녀들이 오해하고, 앤을 모함하는 이가 거짓 자백을 하는 등 상황은 꼬일대로 꼬여간다.
이때 헨리는 "앤이 나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는 모함을 최측근인 찰스 브랜던 앞에서 언급하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그런 마음을 갖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연기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시즌 2 9화 참조)[37]
결국 헨리에게 버려져 런던 탑에 갇힌다. 남동생인 조지 불린이 참수를 당하는 장면을 창밖으로 목도하고 오열하는 모습은 애처로울 지경. 부친 토마스 불린은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만을 건진 채 밖으로 나오고, 앤은 창문을 통해 애써 웃어보이며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인사하지만 부친은 그녀를 외면하고 떠나버린다. 끝내 희미한 희망조차 잃고 체념한 뒤 사형대에 오른다. 그녀가 죽는 순간에 진심으로 울어준 남자는 다름아닌 옛 연인 토마스 와이어트였으며,[38] 헨리는 후련한 듯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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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아들을 원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낳을 수 있었던 하나뿐인 딸인 엘리자베스에게는 애정을 아낌없이 쏟았고, 자신의 상황이 위태롭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에는 딸의 안위를 무척이나 걱정했다. 그렇게 도도하던 그녀가 눈물짓던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도 딸 때문이었다.
최종 시즌인 시즌 4의 최종회에서는 헨리의 환각인지 아니면 정말 유령인지, 밤중에 헨리의 앞에 등장해서 "내게 죄가 없었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았나요?"라며 "총명한 엘리자베스를 좀 더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 말에 헨리가 괴로워하며 "하지만 그 아이는 당신이 내게 저지른 일을 생각나게 한다."고 하자 앤은 더 냉정하게 "난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다만 당신에게 정말로 아들을 낳아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라고 항변한다. 또 엘리자베스를 "제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것이었죠."라고 지칭한다.
더 나아가 자신처럼 왕비가 됐다가 불행한 죽음을 맞은 자신의 사촌 캐서린 하워드의 일을 언급하며 "불쌍한 아이"이라고 지칭함으로써 헨리를 더 괴롭게 하고는 사라지는데, 이때 짓는 차가운 미소는 참으로 섬뜩하다.

4.3. 천일의 스캔들


여기서 앤 불린을 연기한 배우는 나탈리 포트만으로,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메리 불린헨리 8세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내성적이고 조용하며 선량한 메리에 비해 야심만만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외숙부 노포크 공작과 아버지의 지시로, 불린 가를 방문한 헨리 8세를 유혹하지만 승마에서 헨리를 도발했다가 왕이 에서 떨어져 다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부상도 부상이고 왕이 여자 앞에서 낙마해서 체면을 구겼으니 유혹이고 뭐고 물건너간 상황. 그리고 왕을 간호하던 메리가 왕의 눈에 들어 온가족이 궁성으로 가게 되자, 여동생[39] 메리에 대한 미움이 조금씩 생긴다. 궁정에서 대귀족 헨리 퍼시를 꼬시는 데 성공해서 비밀리에 결혼하고 초야까지 치렀지만, 메리가 이를 부모와 외숙부에게 알리는 바람에 결혼은 취소당하고 프랑스로 쫓겨나자 본격적으로 메리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여동생 메리가 헨리 8세의 아이를 갖고 침대에 누워있음에도, 그리고 메리가 왕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대놓고 왕을 유혹해 메리를 버리게 만들고, 이어 자신은 아들을 낳아줄 수 있음을 어필해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도 쫓아낸다.[40]
그러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 온갖 정적을 만들고, 반대파를 사형시키고, 가톨릭과도 갈라선 헨리는, 그러느라 쌓인 분노와 스트레스를 앤에게 폭발시킨다. 캐서린을 떠나보내고 앤을 찾아온 헨리는 "너 때문에 내가 나라를 두동강내기까지 했으니, 너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라"며 그동안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아이를 가진들 사생아일 뿐"이라는 이유로 몸을 허락하지 않은 앤을 강간해버린다.[41]
그 직후부터 왕은 이미 앤에게 냉담해졌고, 결혼식을 올리고 왕비로 즉위했어도 결혼생활은 불행하기만 했다. 잠자리도 늘 거칠었던 듯 어두운 얼굴로 메리에게 "왕이 너하고는 어땠냐"고 묻기도 하고,[42] 나중에는 아예 헨리 8세는 앤과의 부부관계에서 발기도 안 될 정도였다.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만 했던 앤은 "어떻게든 왕을 흥분시키기 위해, 침대에서 수치스런 짓도 해야 한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점점 히스테리와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앤은 임신했던 아이를 사산하고, 남동생 조지와 동침해 다시 아이를 가질 생각까지 했다. 침대에 올라가기까지 했다가 결국 실행은 못 했다.[43] 하지만 안 그래도 조지와 사이가 최악이던 아내 제인 파커가 이를 목격하고, 남편과 손위 시누이의 관계를 왕에게 고해바쳐서 결국 조지와 함께 사형당한다.

4.4. 울프 홀


BBC 드라마 울프 홀에서의 앤 불린. 1984년생 배우 클레어 포이[44]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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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철저히 토머스 크롬웰의 시점에서 진행되다 보니, 상당히 차갑고 야심에 불타는 인물로 나온다.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성이지만 한편으로 폭언에 가까울 정도로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등 한 성깔하고, 남편의 정부였던 언니 메리 불린이나 자신의 몰락이 가까워지며 헨리 8세의 총애를 받는 시녀 제인 시모어에게 차갑게 굴기도 한다. 한편 튜더스에서처럼 색기로 남편 잡아먹을듯한 광기나 폭력성은 나오지 않는다. 매력적이지만 지성적인 모습. 몰락이 가까운 시점 헨리가 바람을 피는 것을 못 본듯이 애써 외면하고, 올케인 로치포드 부인이 대들자 분노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러나 때때로 자신이 휘말려 있는 권력 싸움에 대한 피곤함이나, 딸 엘리자베스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왕비로서의 절망이 뒤섞이는 시선이 언뜻 비치는 등 입체적인 인물. 결국 토머스 크롬웰의 적이 되지만 그가 존중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녀의 최후는 튜더스에서 나탈리 도머가 연기한 모습과 해석이 약간 다르다. 비교하면서 보는 것도 재미. 나탈리 도머처럼 클레어 포이도 푸른 눈이다. 한마디만 하자면, 울프홀의 처형 집행인이 훨씬 프로같이 능숙하게 처형했다.
프랑스 물을 먹었다는 점을 반영한 점인지 프랑스어도 자주 쓰고 은근히 발음이 불어스럽다. 크롬웰을 부를 때 Cromwell이 아니라 Cremuel이라고 하는 식.

[1] 유럽의 왕들은 동양의 왕들처럼 정식으로 혼인 관계가 인정되는 후궁을 둘 수 없었다. 법적인 부인으로 둔 왕비와는 보통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이며, 그 후에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만나면 정부(情婦) 혹은 애인(愛人)으로 삼았는데, 정부에 대한 총애가 지극할 경우 정부에게 귀족 부인의 작위를 내리곤 했다. 정부는 보통 유부녀인데,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공식적으로는 정부와 그녀의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처럼 보여서) 세례성사를 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 남편의 작위를 높여서 더 작위를 높여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정부가 왕의 아이를 낳는다 한들 왕자공주로 인정받을 수도 없고, 왕위 계승권도 당연히 없다. 이들은 사생아에 불과했기에 왕의 자식으로는 인정을 받으면 귀족으로 대우는 받으나, 법적으로는 왕의 적법한 결혼 관계에서 출생하지 못했기에 계승권은 없었다. 후궁은 커녕 천한 궁녀가 낳은 ~번째 딸/아들 조차 태어나기만 한다면 (심지어는 어머니가 계속 궁녀 신분이여도)엄연한 왕족으로 귀하게 대우받았던 동양의 왕실과는 극명히 대조되는, 유럽 왕실만의 특징이다.[2] 헨리 8세의 이름으로 발표한 신학 책들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처럼 헨리에게 연금을 타먹는 인문주의자나 잉글랜드의 주교들이 왕의 명의로 발표한 것들이다. 다만 유력자의 이름으로 발표하는건 원래 필자들도 선호하던 방식이고 그 당시 주장을 강화하는 도구이기도 했으며, 딱히 현대처럼 욕 먹을 일도 아닌, 흔히 사용하던 수법이었다.[3]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혼인무효'라는 표현을 쓰는데, 애초에 중세시절 자주 이용했기에 이혼이니 혼인무효니 용어는 중요치 않다. 현대에도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기에 '이혼'이라는 개념은 없다. 다만 '혼인무효'라는 것은 있다. 자녀에게 가톨릭 세례를 주는 것을 반대하거나, 결혼 전에 몰랐던 중대한 기만 사유가 있거나, 가톨릭 신앙생활을 반대하거나, 가톨릭교회의 허락(관면) 없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자와 결혼한 경우 등등 몇 가지 사유로 '혼인무효'를 할 수 있다. 이 '혼인무효'를 하지 않고 (세속 법으로) 이혼한 후에 재혼하면 '혼인조당'에 걸려, 정상적으로 성사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자세한 이야기는 혼인성사 참조.[4] 이 때문에 중간에 파기되었으나 메리 공주아라곤의 캐서린의 조카 카를 5세와의 약혼이 체결된 적도 있었고, 왕위 계승권 덕에 각국에서 혼인 상대로 인기가 많았다.[5] 이는 근친혼이 예사인 유럽 왕족의 다른 결혼에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법상 6촌(동양의 12촌)은 원래 결혼할 수 없는 사이이나, 귀족이나 왕족들은 상속과 계승권과 외교상 이유로 자주 관면을 요구하여 근친혼이 성행했다.[6] 하지만 결혼 6개월 만에 죽은 것을 보면, 결혼 기간 내내 몸이 좋지 않아 2세 계획을 회복 후로 미루고 잠자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7] 결혼식에서 헨리 8세가 "천 일 안에 아들을 낳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라는 소리를 앤에게 했다는 설이 기록되었는데, 역사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당시 헨리 8세는 앤에게 푹 빠져 있었으며, 한창 연애할 때에는 대단히 낭만적이고 정열적인 것으로 유명했던 그가 새 신부에게 그렇게 차가운 말을 했을 가능성도 희박하기 때문이다.[8] 엘리자베스 1세헨리 8세의 외모는 물론 성격도 가장 빼닮은 자녀로 평가된다.[9] 이를 신생아 용혈성 질환이라고 한다. 현재는 이러할 경우 첫째 자녀를 낳을 무렵 산모에게 Anti-D 항체를 주입하여 해결한다.[10] 여담이지만 필리파 그레고리가 집필한 천일의 스캔들 원작소설에서는, 앤이 가장 마지막에 사산한 아이가 기형아로 태어난 것이 앤이 마녀로 몰리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고 한다. 튜더스에서도 헨리 8세가 "사산한 아이는 기형아였으니 내 아이일 리 없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앤이 기형아를 낳았다는 설은, 후대에 신교도와 앤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을 싫어했던 반대파가 쓴 프로파간다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정말로 기형아를 낳았더라면 당시 궁정 기록이나 앤의 재판 기록에 전혀 언급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필리파 그레고리는 "나는 사학 전공이었으므로 역사를 정확하게 서술한다"고 주장하지만, 많은 면에서 부정확하고 재미를 위해 악의 넘치는 소문을 그대로 갖다 쓰는 등 악명이 높다.[11] 젠트리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아무리 절대 왕정의 군주라지만 손쉽게 조강지처를 내치고 그에 반대하는 교황청과 관계를 끊고 수장령을 선포하는 것은 어려웠다. 젠트리들도 헨리 8세와 마찬가지로 메리 공주가 당시 풍속에 따라 외국 왕족과 결혼하면 하나 남은 계승권이 외국 왕가로 넘어가는 것을 반대했기에 왕의 이혼을 지지한 것이다.[12] 사실 전근대에는 이것이 가장 큰 약점이다.[13] 앤의 손에 손가락처럼 보이는 혹이 하나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진위는 알 수 없다. 외모는 사람의 선악을 나타내며 기형이 악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에, 그렇게 눈에 띄는 흠이 있었다면 왕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는 반대 의견도 있다.[14] 일단 유럽에서 시녀나 시종은 하녀, 하인과는 달라서 기본적으로 지체 높은 귀족들이 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누군가를 모시는 일이므로 상대보다 신분이 낮다는 건 확실했다. 메리를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삼고 시종과 결혼시키겠다고 한 건 "엘리자베스는 적출 공주고 메리는 일개 사생아이므로 엘리자베스보다 비천한 존재다"라고 모욕하는 일이었다.[15] 미드 튜더스에서는 이를 반영해, 메리는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녀가 되는 굴욕을 겪으면서도 엘리자베스가 혼자 울고 있을 때 직접 안아 달래 주는 등 잘 돌봐 주었고,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도 잘 지내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16] 조카 앤 불린을 통해 세력을 강화했던 그는 다른 조카인 캐서린 하워드를 또 왕비감으로 밀게 된다. 그는 사태가 나빠지자 앤 불린을 버렸듯, 캐서린 하워드도 버리고 외면했다.[17] 불린 가문의 3남매의 나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게다가 영어로는 나이 상관없이 형제자매를 sister, brother라고 부르기 때문에, 누가 나이가 많은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메리 불린-앤 불린-조지 불린의 순서였다고 받아들이고 있다.[18] 영화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사산하는 바람에 극도의 절박감을 느낀 앤이 남동생 조지 불린을 침실로 끌어들이기까지는 하지만 둘 다 죄책감을 느껴 실행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앤을 감시하기 위해 몰래 따라다니던 시녀 제인 파커가 이를 목격한다. 제인은 조지의 아내, 즉 앤의 올케이다. 제인은 남편 조지에게 인격적으로 무시와 모욕을 당해 왔기 때문에 조지를 증오했다. 제인은 손위 시누이와 남편이 함께 침실로 들어가는 것까지만 목격하고는 그것을 헨리 8세에게 밀고하였고, 앤은 다음날 사산 사실을 고백하러 헨리 8세에게 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19] 참고로 lady는 백작 이상의 귀족의 부인이나 딸에게 붙이는 호칭이다. 왕족에서 귀족 신분으로 떨어진 것.[20] 이 당시 칼레는 중세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은 잉글랜드 영토였다. 나중에 메리 1세프랑스와 전쟁을 하다가 빼앗긴다.[21] 실제로 도끼로 참수당한 토머스 크롬웰, 스코틀랜드 메리 1세는 한 번에 목이 잘리지 않아서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했다. 여담이지만 크롬웰의 경우는 헨리 8세가 보복 차원에서 일부러 서투른 집행인을 썼다는 비화가 있다.[22] 아무리 사형당할 사람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다 해도 동서양을 망라하고 "죽더라도 곱게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던 듯 하다. 그 일례로 사형수의 가족들은 사형을 맡은 망나니에게 "제발 빨리 죽여달라"는 뜻에서 돈을 건네주기도 했고, 단두대 역시 목을 한번에 쳐서 죽이려는 뜻에서 만들어졌다.[23] 캐서린의 어머니인 이사벨라 1세 항목 참고.[24] 위에서도 나왔지만 앤이 무식했다는 건 아니다. 캐서린이 ‘더’ 교양이 높았다는 것이다.[25] 그나마 이런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은, 헨리 8세가 말년에 마지막으로 들인 왕비 캐서린 파뿐이었다. [26] 특히 헨리 8세는 토머스 크롬웰조차 그가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했는데도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27] 물론 말로만 이렇게 하는 것으로, 육체관계를 맺어서 선을 넘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28] 메리 불린은 유학을 간 프랑스 궁정에서 난잡한 성생활을 했으며, 잠깐 헨리 8세의 정부로 있기도 했다.[29]가톨릭도 아니라 가톨릭 계열이나면,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가톨릭 신자는 수장령과 반역법에 어긋나기 때문. 영국국교회 내부의 가톨릭 전통을 용인하려는 세력으로 보면 타당하다.[30] 그의 손자 동명의 토머스는 메리 여왕과 결혼하여 가톨릭 세력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려다 처형당한다.[31] 장희빈의 아버지는 역관.[32] 왕비가 되려는 야심을 보여준다고도 해석하기도 한다.[33] 앤 불린은 당시 사진 역할을 하던 초상화에서 백인으로 그려졌고 친자매인 메리 불린이 금발 벽안의 미녀로 아름이 드높았던 만큼 유색인종일 수가 없다. 또한 흑인을 심하게 멸시하고 유럽에 흑인이 흔치 않았던 그 시기에 흑인이 귀족 반열에 오르고 왕비까지 되었다면 분명 흑인으로 그린 그림이나 기록이 남았을 텐데 그런 기록이나 설 및 그림 등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34] 이베리아 반도 내 영국령 지역인 지브롤터도 영국령이 된 것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의 일이다.[35] 이마저도 대다수가 아랍인이나 베르베르인 같은 중동계 백인이었고 일부만 흑인이나 흑백혼혈이었다.[36] 메리 튜더가 계승권을 되찾아 왕이 되면 자신과 자신의 친정 불린 가문을 파멸시킬 것임이 뻔하기에 더욱 위협으로 여겼다.[37] 그러나 최종회에서 늙은 헨리가 왕비들을 회상하면서 앤 불린이 "나에 관련된 모든 고발은 거짓이고 당신은 알지 않았나요?"라고 물은 것을 보면, 헨리 역시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던 것으로 추정된다.[38] 와이어트도 앤과 간통 혐의를 받았지만, 그의 상관인 토마스 크롬웰이 손을 쓴 것인지 무사히 풀려났다.[39] 이 영화에서는 앤 불린이 메리 불린의 언니로 나온다.[40] 이 영화에서는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도, 종교개혁(성공회)도 모두 앤이 헨리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그를 조종해 이루어진 걸로 나온다. 그러니 에릭 바나가 아무리 무게를 잡아도, 여자랑 자고 싶어 그 난리를 일으킨 헨리 8세가 몹시 바보처럼 보인다.[41] 원작과는 전개가 다르다. 원작에서는 헨리가 캐서린을 쫓아낸 뒤 후련해하고, 앤이 먼저 헨리를 찾아가 동침한다. 그리고 둘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도 좀 더 뒤의 일이다.[42] 메리는 놀랄 정도로 부드러웠다고 대답한다.[43] 원작소설과 2003년에 BBC에서 만든 TV판에서는 진짜로 해서 아이를 가졌다. 그 아이는 기형으로 사산된다. 원작 소설에서 조지 불린은 동성애자로 묘사되는데, 그가 유일하게 성적으로 끌리는 여자가 누나 앤이라는 상막장 전개라고 한다.[44]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에서 엘리자베스 2세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