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태저넷 왕조

 




'''House of Plantag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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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기원
2.2. 잉글랜드 왕위
2.3. 앙주 제국
2.4. 잉글랜드의 왕조
2.5. 단절과 분열
2.6. 튜더 왕조로의 계승
3. 전설
4. 프랑스와의 연관성
5. 계보
6. 기타


1. 개요


영국의 역대 왕조 중 하나. 1154년에서 1485년까지 잉글랜드의 왕가였다. 프랑스어로는 '플랑타주네(Plantagenêt)' 다.
플랜태저넷 왕조도 부계 때문에 플랜태저넷 왕조라 이름 붙혀졌으나 실질적으론 노르만 왕조적녀를 통해 계속 이어진 노르만계의 왕조이다. 그럼에도 이 왕조를 기점으로 잉글랜드 국왕이 기존 프랑스의 노르망디뿐만 아니라 앙주 영지를 얻게 되었으니 주요 분기점으로서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플랜태저넷 왕조라고 구분지어 이름 붙혀졌다.
본가에서 8명, 랭커스터 왕조에서 3명, 이후 요크 왕조에서 3명이 즉위해 총 14명의 군주를 배출했다.
'플랜태저넷'은 사실 헨리 2세의 아버지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플랑타주네가 항시 투구에 금작화의 가지(라틴어: Planta Genista)를 꽂고 나섰던 것에서 유래해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1] 플랜태저넷이라는 말 자체는 조프루아 이후에는 쓰이지 않다가 1460년경 요크 공작 리처드[2]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자신의 별칭으로 썼다. 즉 리처드 1세 같은 이전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들은 딱히 플랜태저넷 왕가라는 정체성보단 노르만 왕조의 정체성이 컸으며 왕가 휘장도 노르망디의 사자 휘장을 썼다.
플랜태저넷 왕가 출신인 유명한 사람은 리처드 1세, 존 왕, 흑태자 에드워드 등이 있다.

2. 역사



2.1. 기원


편의상 앙주 백작가라고도 불리는 플랜태저넷 왕조는 본래는 루아브 계곡의 영주 중 하나로 좀 더 계보를 올라 간다면 본래는 서프랑크의 초대 국왕이었던 대머리왕 샤를 2세에게 예속되었던 사냥터지기였다. 이후 세력을 확장해 10세기에 백작위를 얻었고, 헨리 2세의 조부였던 풀크 5세의 경우 1131년 예루살렘의 멜리장드와 재혼해 예루살렘 국왕으로 즉위하기까지 했다. 이때 전처인 멘의 상속녀인 아렝뷔르가 사이에서 난 장남 조프루아에게 앙주 백작위를 물려주고 중동으로 건너갔다.[3]

2.2. 잉글랜드 왕위


헨리 1세 사후 그의 외조카인 스티븐이 즉위하는데 사실 헨리 1세가 생전에 정한 후계자는 '''딸 마틸다'''였다. 하지만 봉건 영주들은 마틸다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스티븐과 마틸다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두고 전쟁(무정부시대)이 일어났다. 일단 스티븐이 승리했으나, '''스티븐의 맏아들이 죽어 계승자도 없었고'''[4] 후에 마틸다와 화해하면서 스티븐은 '''마틸다의 장남 헨리'''를 후계자로 삼는다. 스티븐의 사후 헨리가 헨리 2세로 즉위, 플랜태저넷 왕조가 열렸다.

2.3. 앙주 제국


현대 역사가들은 헨리 2세 및 그의 아들들인 리처드 1세, 존 왕을 별도의 왕조로 구별하여 앙주(Anjou) 왕조로 분류한다. 우선 헨리 2세가 외할아버지 헨리 1세의 노르망디[5]와 아버지 조프루아의 앙주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키텐 공작 기옌 10세의 유일한 상속녀였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아키텐, 가스코뉴, 푸아투 등을 가지게 되면서 대륙 쪽에 광활한 영토를 가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브르타뉴까지 가지게 되면서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 이상을 잉글랜드가 차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왕은 원래 노르망디 공국 시절부터 프랑스 내의 영토에 관해서는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지만 그 봉신이 프랑스 왕보다 영토가 컸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 서부를 지나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자랑했으며, 이를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4. 잉글랜드의 왕조


하지만 필리프 2세의 공격을 받아 대륙 내 영토(프랑스 서부)를 존 왕이 대거 상실하면서, 진정한 플랜태저넷 왕조는 잉글랜드로 본거지를 삼은 헨리 3세로부터 시작된다.

2.5. 단절과 분열


플랜태저넷 왕가의 본가에선 리처드 2세가 마지막 후손이 아니다. 에드워드 3세는 비교적 아들들을 많이 남겼는데 적자 출생은 장자가 흑태자 에드워드이고 차남은 영아 때 죽어서 다음 아들은 클러렌스 공작 라이오넬, 4남이 랭커스터 공작, 5남이 요크 공작이다. 삼남 라이오넬은 딸 하나만 남기고 죽었고, 적장자 흑태자 또한 에드워드 3세보다 일찍 사망해서 적장손 리처드가 리처드 2세로 즉위한 것이지. '''플랜태저넷 혈통이 단절된 게 전혀 아니며''' 랭커스터나 요크나 작위명이지 두 왕족의 본성은 플랜태저넷이었다. 리처드 2세가 어렸기에 2대 랭커스터 공작이 섭정하다 찬탈하여 헨리 4세가 되었고, 헨리 5세, 헨리 6세를 거쳐 헨리 6세가 정신병이 있어서 사람 구실을 못 해서 3대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의 장자 에드워드가 왕위를 찬탈했다. 이 과정에서 구분을 돕기 위해 랭커스터, 요크 하는 것이지 '''이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플랜태저넷 혈통'''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삼촌에서 육촌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본가는 1399년 리처드 2세가 사촌형 헨리 4세에게 폐위된 후로는 방계인 랭커스터 왕조요크 왕조로 이어진다.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에드워드 3세에게는 아들들이 8명이나 있었는데 그중에 적자 아들은 5명씩이나 장성한다.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지만 이미 뒤를 이을 아들인 리처드가 있었다. 에드워드 3세의 나머지 아들들은 영토와 공작의 지위를 하사받고 분가하였는데 사남인 곤트의 존이 랭커스터를 하사받고 제1대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으며 5남인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요크를 하사받고 제 1대 요크 공작이 되었다. 다행히 리처드 2세의 즉위 초에는 곤트의 존이 섭정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이미 청원파의 수뇌부 중 한 명으로서 리처드 2세와 꾸준히 반목하고 있었고, 곤트의 존이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사촌형인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영토와 작위를 박탈하고 추방시켰는데 방심하고 아일랜드를 방문해서 궁전을 비웠다. 이때 헨리가 반란군을 조직하고 귀국한 뒤에 왕위를 찬탈하고 리처드 2세는 항복한 뒤 유배당하고 얼마 뒤에 사망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헨리 4세가 된다.
백년전쟁요크 가문랭커스터 가문 사이에서 내전인 장미전쟁이 벌어진다. 요크 가문의 요크 공작 리처드는 부계 쪽으로는 에드워드 3세의 5남의 후손으로 4남의 후손인 랭커스터 가문보다 계승권이 낮았지만, 모계 쪽으로 에드워드 3세의 3남 클라렌스 공 라이오넬의 후손임을 내세워 왕위를 주장했다. 요크 공 리처드는 랭커스터 가문에 패배, 처형당했지만 이후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6세는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 4세에 의해 폐위되고 그의 장자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도 사로잡혀 처형되어 랭커스터 왕조는 혈통이 단절된다. 이후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여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즉위해야 했지만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가 에드워드 5세의 계승을 부정하고 스스로 리처드 3세로 즉위한다. 인심을 잃은 리처드 3세는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패배, 사망하여 요크 왕조도 끝나고 플랜태저넷 왕가는 튜더 왕조로 교체된다.
리처드 3세는 유일한 적자 에드워드가 일찍 사망해서 자식이 없었고 전임 에드워드 4세의 아들 에드워드 5세와 요크공작 리처드는 리처드 3세가 살해했기 때문에 요크 가문은 에드워드 4세 시절 반란을 일으켰다 처형당한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자 리처드 3세의 형인 클라렌스 공작 조지의 아들 워릭 백작 에드워드가 남았으나 정작 리처드 3세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누이의 아들 존 드 라 폴을 추정상속자로 삼았다. 클라렌스 공작은 역적이었기 때문에. 클라렌스 공작의 아들 워릭 백작 에드워드는 헨리 7세 시절 런던탑에 감금 되었다가 1499년 처형되어 요크 가문도 남계혈통이 단절된다.
랭커스터파의 지지는 헨리 6세의 이부형제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며 모계로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인 헨리 튜더(헨리 7세)가 이어받았고, 요크 가문의 혈통은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가 물려받았는데 그녀가 헨리 7세와 결혼하여 후대 헨리 8세 시절에는 어느 정도 혈통상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2.6. 튜더 왕조로의 계승


장미전쟁이 끝난 후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사실 방계라고 부르기도 어려운데 헨리 7세 본인은 부계로는 잉글랜드 왕가의 피가 섞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잉글랜드는 여계승계와 외손승계를 허가하기에 외가인 보퍼트 가문의 혈통으로 에드워드 3세의 사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이었는데 보퍼트는 세 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식으로 리처드 2세에게 적자로는 인정되나 왕위 계승권은 주지 않았었다. 이렇게 애매한 보퍼트 가문이었지만 랭커스터가의 헨리 6세가 폐위되고 그의 유일한 아들이 요크가에 잡혀 처형되자 헨리 6세의 이부형제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이며 보퍼트 가문의 후손인 헨리 튜더가 랭커스터 지지자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왕위를 주장하게된다.
헨리 튜더가 즉위해 튜더 왕조가 열렸다. 튜더가는 본래 웨일즈듣보잡 가문이었지만 헨리 튜더의 조부였던 오웬 튜더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 샤를 6세의 딸이자 헨리 4세의 아들 헨리 5세의 미망인인 캐서린을 부인으로 맞이하면서 듣보잡에서 벗어났다.
헨리 튜더의 아버지였던 에드먼드 튜더는 이부 형이었던 헨리 6세가 형제임을 인정했고 거기에 장미 전쟁으로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자들이 모조리 작살나면서 왕위를 이을만한 사람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헨리 튜더의 왕위 계승이 가능했다. 그리고 헨리 7세는 부족한 정통성을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채웠다. 즉, 랭커스터의 어설픈 방계 따라지였던 헨리 7세가 요크 가문과 정략 결혼을 하면서 간신히 왕권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3. 전설


앙주 백작 가는 악마의 자손이라는 전설이 있다.
12세기 무렵에 떠돌던 전설에 따르면 앙주 백작들 중 한명이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멜뤼진이란 여인을 데려왔고, 그녀에게서 4명의 자식들을 보게 되었지만 항상 아내가 미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이 때문에 백작은 비밀리에 기사 네 명에게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내의 외투 자락을 밟고 있으라고 명령했고, 명령을 받은 기사들을 그것을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이에 신부가 멜뤼진에게 성체를 갖다댄 순간 뒤에 서있는 기사들을 밀쳐내고 아직 어린 두 아이를 안고 창문 밖으로 날아 갔다. 멜뤼진의 정체는 악마의 딸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체를 바라 볼 수 없기 때문에 미사 때 밖으로 나가려했다는 것으로 끝난다.
이같은 전설이 나올 정도로 포악하고 호전적이며, 폭력적인 행동과 끝을 보고 마는 성미를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왔고, 1154년 헌팅던의 헨리는 '앙주 혈통이 다혈질이고 호전적인 통치자 아래 번성했고, 사람들을 공포로 다스렸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며, 그 힘으로 주변국들을 파괴하고 영토를 복속시켜 온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기록했다.
이런 앙주 가문 말고도 그 통치하의 앙주 주민들도 이웃의 노르망디 주민들로부터 교회를 모독하고, 사제 살해와 역겨운 식사예절을 가졌다는 이유로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풀크 2세처럼 성인에 가까운 평화주의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가계 구성원들은 잔인했고, 풀크 5세처럼 다섯 번이나 결혼하는 엉망인 결혼생활, 방탕, 집안 불화들이 꼬리표로 따라다녔다.
한편으로 당시 중세유럽의 기준으로서는 지적이고 교양있는 영주들도 많았다. 앞서 언급한 풀크 2세의 경우 그 자신도 대단힌 학식이 있는 인물로 자신의 주군인 프랑스 국왕 루이 4세를 글도 읽지 못하는 왕관을 쓴 당나귀라고 대놓고 조롱까지 했으며, 이외에도 미남들이 많은 편으로 큰 키와 다부진 체격, 황금빛 붉은 머리카락이 특징적이었다. 물론 헨리 2세처럼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고 전혀 상반된 특징을 가진 가진 인물들도 많았다.

4. 프랑스와의 연관성


앙주 백작 가문은 기본적으로는 프랑스인 귀족 가문으로써 시작한 집안이다. 조프루아 플랜태저넷 때 앙주, 노르망디, 투르, 멘의 영주였다. 헨리 2세 즉위 이후로 결혼 및 정복을 통해 아키텐, 가스코뉴, 푸아티에, 브르타뉴 등을 ... 존 왕이 많이 털리긴 했지만 아케텐 서부, 즉 가스코뉴는 헨리 3세가 1259년의 파리 조약으로 회복하였고 이것이 백년전쟁을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 내 영토 문제와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고 한때는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시원하게 물리쳤고 그 뒤 샤를 5세에게 밀리는가 싶었지만 다시 헨리 5세가 이끈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대승으로 파리까지 장악해버리고 프랑스 공주와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잉글랜드 왕은 물론 프랑스 세자 샤를 7세를 제치고 프랑스 왕까지 한다는 트루아 조약을 맺어 프랑스 왕위 계승과 영토 전역의 장악이 눈 앞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헨리 5세가 갑자기 죽고 갓난 아기인 헨리 6세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이렇게 불안해진 와중에도 섭정공인 베드포드 공작이 잘 지휘하여 계속 우세하게 이끌고 마침내 오를레앙을 포위하여 샤를 7세를 몰아붙여 프랑스 정복의 꿈이 현실로 이뤄질 무렵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아 프랑스를 구하러 왔다는 잔 다르크가 등장, 그녀에게 오를레앙을 비롯한 결정적인 여러 전투에서 치명적으로 패배, 원래 점령하고 있었던 대관식이 열리는 랭스까지도 그녀에게 빼앗기고 샤를 7세가 먼저 프랑스 왕에 정식으로 즉위하는 바람에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기 힘들어져버렸다.
결국 동맹하고 있던 프랑스 내 친잉글랜드 세력 부르고뉴 공작의 도움 및 프랑스의 배신 덕분에 잔 다르크를 포로로 손에 넣어 이를 갈면서 그녀를 엉터리 종교재판으로 마녀와 이단자라고 억지로 몰아붙여 화형 시켰으나 그짓도 소용없이 부르고뉴 공작과 그 휘하 영주가 안 그래도 우세해진 프랑스 편에 붙은데다가 오히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잉글랜드에 적대하는 감정이 프랑스에 퍼져나갔고 이후로도 쭉 전세가 밀려 결과는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잃는 것으로 끝났다.
최절정기에는 피레네 산맥에서부터 아일랜드를 포함해 스코틀랜드와의 국경까지 앙주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또한 플랜테저넷 가문 사람들은 왕실 용어로 프랑스어를 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잉글랜드보다 프랑스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단정짓기도 또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당시는 현대와 같은 식의 국민국가적 정체성이 있던 때도 아니고, 잉글랜드 왕으로서의 정체성과 노르망디 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학자들이 지적하는 점이지만, 플랜테저넷 왕들은 프랑스 땅에서는 일개 공작이며 프랑스 왕의 봉신일 뿐이지만,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프랑스 왕과 대등한 서열에 서게 된다. 본인들도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국제무대에서 프랑스 왕과 맞먹는 위상을 주는 잉글랜드를 결코 소홀이 여기지 않았다.
일단 문화적 정체성 면에서는 리처드 1세 정도의 시기에야 자신들의 근원인 프랑스인으로써의 정체성도 상당히 잔존했으리라 추정되지만 잉글랜드 왕가라는 자각도 분명히 있었고 에드워드 1세 시기로 접어들면 확실하게 잉글리쉬로써의 정체성을 가문 단위로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백년전쟁 당시 플랜테저넷 가문이 집요하게 프랑스 왕위를 원했던 것처럼, 프랑스를 일종의 고토로써 회복하려는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5. 계보


헨리 2세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
헨리 3세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2세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리처드 2세
곤트의 존
(랭커스터 왕조)
에드먼드
(요크 왕조)

6. 기타


  • 엘리스 피터스의 역사추리소설 수도사 캐드펠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바로 2.2에 해당하는 스티븐 왕과 모드 황후의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이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에서는 어린 헨리 2세가 잠깐 등장하면서 오랜 전쟁이 끝나고 새 시대가 열릴 것을 예감케 하는 장면이 나온다.
[1] 당시의 별명이 아니라 후대에 셰익스피어가 붙인 별명이라는 말도 있다.[2]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아버지[3] 이때 재혼한 아들 중 차남인 아모리의 외동 아들이 킹덤 오브 헤븐에 등장했던 보두앵 4세다.[4] 3남은 살아있었으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작위를 이어 불로뉴 백작이 되었다.[5] 영문 위키에서는 헨리 2세의 아버지 조프루아가 1144년에 노르망디 공작에 올랐다고 기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