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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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의 국왕. 그녀 이전에 잉글랜드의 왕좌에 아주 짧은 기간이나마 앉았던 여성인 마틸다와 제인 그레이의 경우 군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있기 때문에 보통 잉글랜드 왕국 최초의 여왕으로 인식된다.
헨리 8세의 적장녀로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의 딸이다.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 중 유일하게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은 자식이다. 헨리 8세의 장녀이자 첫째 아이로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이복 언니이기도 하다.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잉글랜드의 국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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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즉위 전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된 3남 3녀 중 다섯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위로 언니, 오빠들과 밑으로 여동생이 있었지만 모두 사산되거나 생후 몇 달을 못 넘기고 요절했다. 그래서 메리는 사실상 무남독녀로 자랐다. 비록 딸이긴 했지만 그래도 유일한 자식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헨리 8세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2]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소송 과정에서 꿋꿋히 어머니 편을 들었던 까닭에,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장기간의 이혼소송 끝에 결국 부모가 이혼하자, 메리의 처지도 위태롭게 되었다. 헨리 8세는 새로 사귄 연인이었던 앤 불린과의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의 적법성 확보를 위해 금지옥엽으로 여기던 메리를 사생아로 선포하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공주 작위와 왕위 계승권을 박탈해 버렸다. 이로 인해 메리는 왕실의 하나뿐인 적통 공주에서 사생아로 전락하여 왕위계승 일선 밖으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계모 앤 불린의 지시로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일하는 등, 상당히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당시 시녀는 일을 한다기보다는 모시는 사람과 수다 떠는 정도만 하는 편한 자리였고, 귀족영애들로 이루어져 '천한 것들'은 시녀로 둔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만큼 까다롭게 골랐기 때문에 같은 왕녀라도 서녀가 적녀의 시녀가 되는 것까지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외가 쪽으로 보면 스페인 왕가의 혈통을 타고난 메리가 상인 집안의 피를 물려받은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들어간 것은 격에 떨어지는 일이였다.[3][4]
다만 헨리 8세가 처음부터 이러려던 것은 아니었고, 캐서린 왕비에게 자식인 메리를 적통으로 인정하고 계승권도 부여하는 등 괜찮은 대가를 제시하고 평화롭게 이혼하고 싶어했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캐서린은 남편의 사탕발림에 굴복하기보다는 정당한 잉글랜드의 왕비로 인정받고 싶어했기 때문에 교황청 대사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 제시한 혼인적법성 재판조차 거부해 버리고[5] "남편이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서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 장가를 가려고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바람에 온 유럽에 소문이 쫙 퍼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헨리 8세는 캐서린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딸 메리를 박대한 것이다.[6]
헨리 8세가 메리를 견제한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종교 때문이었다. 당시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내'의 교회 수장을 '잉글랜드의 군주가 임명' 할수 있는 종교개혁을 선포한 걸 제외하곤 가톨릭 교리를 바꾸지 않아 잉글랜드의 주교들과 가톨릭 성향 신하들도 심하게 반대를 하지 않았다. 반면 대륙식의 완전한 교리개혁을 주장한 복음주의자들은 서로를 공격하며 국왕의 신임을 차지하려고 숙청-화형 병림픽을 벌였는데, 이 중에서 친가톨릭 성향 신하[7] 들이 메리 공주를 구심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내 가톨릭 복귀파 세력이 메리를 구심점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였고, 외부 가톨릭 세력이 잉글랜드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물 건너서 들어오는 메리의 혼사 제안을 모두 거절해 버린다. 그래서 메리는 헨리 8세가 죽을 때까지 노처녀로 남아 있어야 했다.[8]
하지만 상황은 계속 급박하게 바뀌었는데, 메리의 철천지 원수 앤 불린은 결혼 전 왕자를 낳아주겠다던 자신만만한 태도와는 다르게 딸(엘리자베스 1세)만 낳고 유산을 계속 하니 아버지 헨리 8세가 불륜, 근친상간 등 별의별 죄목을 갖다 붙여서 결국 처형해 버리고.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도 사생아로 전락해 자신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되었다.앤 불린 다음으로 들어온 새 왕비 제인 시모어는 아들(에드워드 6세)을 낳은 직후 산욕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유아사망율이 높은 시대에 아들이 하나인 것에 불안해진 헨리 8세는, 아들 에드워드가 일찍 죽거나 후사를 못 남길 경우에 대비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권을 복권했으나 적자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헨리 8세가 죽고 메리의 이복 남동생이 에드워드 6세로 즉위하자 메리의 지위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에드워드가 어린 탓에 에드워드 치세 초반에는 에드워드의 외삼촌 시모어가 섭정을 맡고, 시모어가 실각한 후에는 노섬밸랜드 공작이 정권을 잡아 섭정을 맡았다. 문제는 둘 다 개신교(그것도 칼뱅주의) 성향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인 메리는 경계대상 1호가 되었다.[11] 에드워드 6세는 어린 시절부터 신교도 교육을 받았기에, 이복누나 메리와 사적으로 친밀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그래서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메리가 왕위에 올라 가톨릭 회귀 정책을 펼칠 것을 우려한 나머지, 16세의 나이에 친척이자 신교도인 제인 그레이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고 중병으로 사망하였다. 제인 그레이는 노섬밸랜드 공작의 아들과 결혼한 상태라, 노섬벌랜드 공작은 메리를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정황을 미리 알아차린 메리는 일찌감치 지지자들 사이에 숨어서 가톨릭 교도가 뭉쳐있는 서퍼크의 요새로 피신해버렸고, 에드워드 6세가 죽자 본격적으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노섬벌랜드 공작은 반격을 시도했으나, 애초에 정통성에서 심각하게 밀렸기에 이탈자들이 속출하면서 반 메리 전선은 금방 와해 되었다. 이 기세를 타고 승기를 잡은 메리는 37세에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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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즉위 후
3.1. 결혼
어렵게 즉위한 메리는 37세의 젊은(?)[12] 나이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산 탓인지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다. 또한 작고 깡마른 몸매에, 오랜 고생 탓에 얼굴에는 주름이 많았고, 근시까지 겹쳐 항상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런 볼품없는 외모를 지닌 데다가, 왕의 딸인데도 17세에 사생아로 내쳐진 탓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학식도 높지 못했다. 또한 어머니가 이혼당하고 자신은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등 파란만장하게 살아서 가톨릭 신앙에만 매달리며 자신은 물론이고 남에게도 엄격한 생활양식을 요구하는 등 인간적인 매력은 별로 없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튜더 왕조의 정통성 있는 후손이기도 하고 불행했던 인생역전에 대한 백성들의 연민 때문에, 즉위 당시에는 거의 모든 세력의 지지를 받아서 한동안 왕권에 걸림돌이 될 문제는 없었다. 메리는 일단 왕권 확립을 위한 시범 케이스로 즉위 일주일만에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방해하고 살해하려 한 노섬벌랜드 공작을 처형했다. 레이디 제인(제인 그레이)과 남편 길포드 더들리는 일단 런던탑에 감금했다가 이듬해 초 헨리 그레이[14] 가 가담한 토마스 와이어트의 반란을 진압한 뒤 처형했다. 사실 메리는 신하들의 빗발치는 처형 요구에도 불구하고[15] 가까운 친척이며 나이도 어린 제인 그레이의 처형만은 피하려고 하며 보호하고 있었다.[16] 그러나 원래도 자식의 안위에 별 관심이 없던 헨리 그레이가 딸 제인 그레이가 감금되어 있는 와중에도 반란에 가담한 탓에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한편 메리가 미혼 상태로 즉위하자 신랑감들이 많이 거론되었다. 전술한 것처럼 부친 헨리 8세가 정치적 이유로 딸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고, 에드워드 시대에도 섭정들이 견제했기 때문에, 메리는 37살 때까지 노처녀로 지내고 있었다. 메리 입장에서는 자신이 후사 없이 죽으면 영국 국교회(성공회) 성향의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후계자가 되기 때문에, 어렵게 회복한 가톨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후사를 목적으로 결혼을 하려고 했다.
일차로 신하들이 추천한 사람은 레지널드 폴 추기경이었다. 추기경이라는 직책이 말해주듯 이분은 사제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교황청에서 특별 허가만 해주면 바로 환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추기경이라는 신분이 걸림돌이 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신분적인 문제와 별도로 레지널드 폴 추기경은 이미 나이가 50대였으며, 스타일도 완전히 학자 타입의 샌님이었기 때문에 여왕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두 번째로 여왕이 관심을 보인 사람은 여왕이 직접 데본셔 백작으로 봉한 에드워드 코트니[17] 였다. 코트니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라 왕가의 혈통이긴 했으나 신하들에게 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스페인에서 비밀리에 청혼이 들어온다. 청혼자는 나폴리 왕이며 밀라노의 공작이고, 스페인의 왕세자이기도 한 오촌 조카[18] 펠리페(펠리페 2세)였다. 펠리페는 무엇보다 자신의 외가 친척이며 가톨릭 군주 중에 가장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에 고려된 것이었으나, 1553년 여왕의 혼인 계획이 발표되자 큰 반발이 일어났다. 심지어 여왕의 골수 지지층마저 반발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조국인 잉글랜드 왕국이 스페인에게 혼수품으로 팔려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19] . 추밀원, 의회, 가톨릭 성향 신하들과 심지어 여왕의 최고 심복 스티브 가드너까지 모두 반대했다.
당연히 이런 반발을 배경으로 하는 음모도 생겨났다. 먼저 한때 여왕의 결혼 상대로 거론된 데본셔 백작 에드워드 코트니와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 엘리자베스를 결혼시키려는 시도가 추진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토마스 와이엇이 여왕의 결혼에 반대하여 병력 4천 명을 데리고 런던으로 쳐들어 오기도 했다. 와이엇의 반란은 막상 런던에 오자 겁을 먹기도 했고, 여왕을 몰아내기엔 명분이 좀 딸리도 해서 기껏 "여왕님을 잘못 보필한 추밀원 간신배를 척결" 드립이나 치고 진입을 머뭇거리다가 가차 없이 진압당한다. 이때부터 여왕은 자기 결혼에 극렬 반대한 세력들, 특히 신교도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훗날 "블러디 메리" 소리를 듣게 될 행동을 취하는데, 와이엇의 반란이 종결되고 펠리페와 결혼하기 전 사전 준비 작업으로 국교회 성향 사제와 복음주의자 약 300명씩 화형시킨다. 5년 치세 중 이 시기 6개월간의 처형자가 대부분이었고, 탄압을 피해서 숨거나 외국으로 도망가거나 해서 표면적으론 메리에 반대 세력은 없어졌다.
하지만 메리도 모든 신하들이 우려하는 상황을 무시할 순 없어서, 펠리페를 군주가 아닌 여왕의 부군(King Consort, 왕비의 남성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으로 삼으며, 둘 사이에서 합법적 후사가 없이 다음 세대로 넘어갈 경우 펠리페와 그 후계는 영국에 대한 권리가 없고 동군연합은 그대로 해소된다는 여러 조건에 동의한 끝에 결혼하게 된다. 이때 메리는 38세, 펠리페 2세는 27세였다.[20]
만약에 이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었다면 펠리페의 장자 돈 카를로스는 스페인과 나폴리를 물려받고, 메리의 아들은 잉글랜드와 펠리페의 대륙 영토 플랑드르를 비롯한 저지대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3.2. 가톨릭 복귀 정책
한편 결혼은 하였으나 아직 후계자는 없었기에 유력한 후계자 후보인 엘리자베스와 레이디 제인의 회유 시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레이디 제인의 운명은 개종과 상관 없이 노섬밸랜드 공작 일가가 처형당할 때부터 운명은 정해졌다. 어쨌거나 왕위를 참칭한 반역도였기 때문. 특히 제인은 끝까지 개종과 회유를 거부하여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처형된다.[21] 시골에서 병석에 누워 있던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병력 500명을 동원하여 끌어내서 런던으로 압송하여 런던탑 '반역자의 문(Traitors Gate)' 뒤에 감금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처형만은 매우 어려웠다. 엘리자베스가 그다지 종교에 열성적인 편이 아니라, 겉으론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으로 복귀한 것을 받아들여서 종교를 빌미로 처형할 명분이 없었다. 또한 튜더 왕조의 후손은 두 자매뿐인데 40이 가까운 여왕 메리는 후사가 없어, 아무 대책 없이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나면 후계자가 전무한 상황에서 귀족들끼리 차기 왕위 계승과 관련한 분쟁이 벌어질 게 뻔했다. 장미 전쟁 시즌 2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생긴 것. 가톨릭화를 추진하던 여왕의 심복 윈체스터 주교 스티븐 가디너가 엘리자베스를 공공연히 죽여야 된다고 선동했지만 이러한 이유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4달 동안 감금되었던 시기에 가짜로 개종하는 등의 노력을 보여 런던탑에서 해방되어 토머스 포프 경의 감독하에 해트필트로 거주지를 이전시켰다.
그리고 나서 메리는 일생의 숙원을 펴는데, 1520년대 이후 헨리 8세 시기와 에드워드 6세 시대 반포한 종교관련 법률을 모두 무효화시키면서 선대왕의 반가톨릭적 종교 정책을 바꾸려고 했다. 우선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한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전신)를 다시 가톨릭으로 복귀했다. 헨리 8세 시대의 종교개혁은 교회수장을 교황 대신 국왕으로 대체한 것일 뿐 교회 조직은 기존의 가톨릭 조직을 그대로 준용하였기 때문에 교회조직 자체는 남아있었으나, 헨리 8세 시절과 에드워드 6세 시기에 들어 새로운 종교개혁 세력들이 많이 성장한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메리가 가톨릭의 복권을 선언했으니 큰 소요 사태가 벌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여왕의 결혼과 더불어 20년간 교황청에서 생활한 레지널드 폴 추기경이 교황청 대사 자격으로 귀국했는데(이후에 가톨릭으로서 마지막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다), 교황청에서는 잉글랜드가 가톨릭 품으로 돌아온 것에 감격해서 기존에 강탈된 교회와 수도원 재산에 대한 현재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하며 귀족 젠트리들의 민심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여왕의 심복이던 스티브 가드너가 그간 쌓여왔던 한풀이를 하려고 신교도들을 계속 공격했다. 일단 사제 2천 명을 쫓아내었는데, 당시 잉글랜드 전체 사제의 1/4에 달하는 수치였다. 또한 주교 중에서 가장 개신교 성향이 뚜렷한 글로스터 주교 존 후퍼와 세인트 폴 성당 사제 로저스를 체포했다. 후퍼와 로저스는 예상대로 "가톨릭 미사는 사기다!" 라며 죽기를 자처했고 이들은 곧 화형에 처해졌다.
이제 표적은 기존 잉글랜드 교회 수뇌부로 옮겨갔다. 런던과 웨스트민스터 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로체스터 주교 휴 라티머를 체포하여 배교를 권유했으나 거부하였다. 이들 역시 화형을 당했는데, 리들리와 라티머 두 사람은 같이 처형되어 죽기 전에 "까짓 거 남자답게 화끈하게 죽읍시다"라 외치면서 장렬히 사망했다고 한다.
다음 표적은 기존 잉글랜드 교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였다. 켄터베리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 시절 왕의 폭주를 방지하는 회유책으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장을 수여 받았기 때문에 다른 주교들처럼 강압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다. 이에 미리 포섭된 지인들을 이용한 지속적인 회유책과 협박을 병행한 끝에 토머스 크랜머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크랜머가 성공회를 포기한다는 서명을 여러 차례 한 것을 보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를 설교단에 올렸는데... 크랜머는 조용하게 기도문을 읽고 예배를 진행하다 돌연 "이게 다 훼이크다!" 라며 "나는 협박에 넘어가 배교했고, 큰 죄를 지었다. 화형당하면 이 손모가지를 가장 먼저 태우겠다! 교황은 적그리스도다!"를 외쳐서 도중에 끌려나가고 만다. 나중에는 곧 평사제로 강등당하며 화형에 처해지는데 불길이 일어나자 역시 오른손을 내밀어 먼저 태웠다고 한다.
3.3. 말년
상황이 이러니 민심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즉위 초기에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메리의 인기는 나날이 떨어졌다. 더군다나 아래 서술된 일련의 삽질로 대외 정책까지 실패하며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메리의 대외 정책 기준은 유럽의 전통적인 부부 동군연합 개념에 가까운데, 남편인 펠리페 2세를 위해 친스페인 정책을 펼쳤다. 잉글랜드가 1556년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스페인 편으로 참전한 것도 펠리페 2세를 위해서였다. 물론 부부 동군연합이 전통적인 유럽의 개념이기는 하지만, 잉글랜드의 이익보다는 스페인의 이익을 위한 전쟁에 갑작스럽게 참여하기 위해 백성에게서 돈을 긁어 모으자 그녀의 평판은 끝을 모르고 추락하였다. 특히 의회에서도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메리는 이를 무시하고 참전을 강행했다. 그나마 전쟁에 승리해서 뭘 얻기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전세는 계속 불리하게 돌아갔고, 오히려 1558년 프랑스의 기즈 공작[22] 에게 참패하고 칼레를 빼앗기고 말아 잉글랜드의 마지막 대륙 거점을 잃는 결과만 초래했다.
게다가 펠리페는 부인 메리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잉글랜드가 잃은 칼레를 되찾으려는 시도도 전혀 하지 않고,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해버린다. 결국 잉글랜드는 스페인 때문에 괜히 전쟁에 끼어들어 병사들을 잃었을 뿐 아니라 세수의 30%나 차지하는[23] 중요한 영토까지 잃은 것이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전쟁에서 지고 손해만 본 충격 탓인지 메리는 1558년 여름부터 건강이 급속하게 악화되었으며, 결국 같은 해 11월 치세 5년 만에 향년 42세의 나이로 몇몇 시녀들만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쓸쓸히 사망한다. 사인은 난소 종양으로 추정된다.[24]
4. 개인사
메리는 개인으로서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대단하였는데, 메리 자신이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친 헨리 8세가 어머니를 축출하려고 잉글랜드 가톨릭 교회를 박살냈다는 것은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즉 메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성별이 간접적 원인을 제공하여 어머니는 축출되고 잉글랜드 교회가 박살나는 멘붕을 겪은 것이다.
또한 펠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어디까지나 잉글랜드의 여왕인지라 조국을 떠날 수 없었던 메리는, 스페인에 있는 남편에게 "잉글랜드로 좀 오라"[25] 고 애원하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펠리페는 온갖 핑계를 대며 요청을 묵살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오는 남편 마음을 얻으려고 온갖 마음고생을 하던 메리는 펠리페를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에도 가담했지만 패전하여 칼레를 잃고 민심을 잃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렇게 애를 태우다가 상상임신까지 하는 바람에 전 유럽에서 조롱당하는 망신까지 당했다.
워낙 심한 근시라 늘 눈살을 찌푸렸기 때문에, 얼굴에 주름이 많았다고 한다.[26] 건강이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는데, 특히 자궁이 고질적으로 안 좋아서 늘 고생했다고 한다. 자궁근종이 심해서 월경을 거르는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걸 임신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상 불임인데도, 자신의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 내친 앤 불린의 딸이자 자신의 이복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왕위를 주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자녀를 낳아 자신의 자녀로 하여금 왕위를 이어받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임신하기엔 나이가 상당히 많았던 데다가 자궁이 좋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남편도 아이를 갖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때문에 결국 그렇게 바라던 아이는 낳지 못했다. 그래서 임종을 맞던 순간에 엘리자베스 1세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해야 했다. 사실 지명하지 않았더라도 적법한 계승자나 튜더 혈통은 엘리자베스가 유일했기 때문에, 가톨릭 세력이 밀던 인물을 지명해도 성공 확률은 낮았다.
역사적 기록으로도 두 차례나 상상임신을 했다곤 한다. 첫번째는 남편 펠리페 2세와 스페인 왕실까지 왕자의 탄생을 기대했으나, 열 달이 지나도 출산 소식이 없었다. 산실과 필요한 아기용품까지 다 마련해 놓았는데도 출산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상태에서 왕자가 태어났다는 잘못된 소식이 런던에 퍼져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며 축제를 벌이는 소동이 벌어져서 왕실에서 사람이 나와 시정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출산이 예정일을 두 달이나 넘기고도 이뤄지지 않고, 메리가 다시 월경을 하자 그제서야 상상임신이라는 게 밝혀졌다고 한다.
상상임신인 게 드러나자 펠리페는 미련 없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가 한참 뒤에야 돌아와 잉글랜드에 잠시 머물렀다. 이때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그새 더 늙고 약해진 메리가 정말로 임신할 리는 없다는 걸 알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메리가 임신했다고 편지를 보냈음에도 펠리페는 또 상상임신일 거라 생각하고 메리가 그렇게나 애원했는데도 잉글랜드로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도 '''20달이 지나도 출산의 기미가 없어서''', '폐경을 임신으로 착각했다'는 조롱을 받았다고 한다. 펠리페 2세는 이후 임신이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했고, 메리가 자신을 두 차례나 망신시켰다고 생각해서 절대로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메리는 남편도 없이 상상임신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게다가 당시에 메리가 펠리페를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에 끼어드는 바람에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난 상태였다.[27] 그래서 메리 곁에 있어야 할 시녀, 시종도 제대로 고용하지 못해 거의 메리 혼자 절망하고 있었다고.
4.1. 가계
5. 블러디 메리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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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1세는 개신교에 대한 박해 때문에 전통적으로 블러디 메리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있다. 이 설명에 의하면, 메리가 국교를 가톨릭으로 되돌린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스른 것이며, 또한 펠리페 2세와의 부부동군연합은 스페인의 광신적 신앙에 잉글랜드를 무방비로 노출시킨다고 여겨진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전통적으로 영국 사학계를 지배한 휘그 사관(Whig history)에 기반해있다. 휘그 사관은 입헌군주제, 의회민주주의, 개인의 자유를 위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영국 역사를 바라보며 이의 원동력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로 해석한다. 스페인이 종교적 광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점, 메리 1세가 종교를 이유로 사형시킨 개신교 신자의 숫자(284명 처형, 34명 옥사)가 1534~1680년 사이에 종교를 이유로 사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숫자보다 많다는 점, 그리고 헨리 8세를 악당으로 엘리자베스 1세를 운이 좋은 군주 정도로 평가한 찰스 디킨스마저 메리 1세를 폭군으로 평가했다는 점, 1970년대에 쓰인 폴 존슨(Paul Johnson)의 명저 「기독교의 역사」에서 "메리 여왕의 의지는 반가톨릭적 국민정서에 부딪혀 무너지고 말았다"고 쓰는 등의 사례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사학계에서 메리 1세에 대한 휘그 사관적 해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의 기반이 된 휘그 사관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련의 비판으로 사실상 학계에서 퇴출되었으며, 현재 학계에서 결정론적 사관을 조롱하는 의미로까지 쓰이는 실정이다. 물론 학계를 벗어난다면 메리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폴 존슨은 대중 역사가이지 역사학자가 아니며, 소설가 찰스 디킨스 역시도 역사학자는 아니다.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였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메리를 역사 앞의 반동으로 보는 시각은 근래의 사학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Susan Doran&Thomas S. Freeman가 공동으로 편집하고 여러 학자들이[30] 공동으로 저술한 Mary Tudor: Old and New Perspectives의 소개글에서도 Bloody Mary는 신화임을 명시하고 있다.학자들은 각자의 문화적 편견을 부지불식간에 객관화하여 잉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승리는 불가피했고, 1550년대에 반전을 꾀한 메리 튜더의 시도는 역사의 조류를 거슬러 헤엄치는, 실패하기 마련인 시도였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메리의 치세에 장기적으로 가톨릭교회를 되살릴 토대가 놓였다는 주장, 잉글랜드가 훗날 신교 국가가 된 것은 잉글랜드인의 종교적 DNA가 아니라 여왕의 때 이른 죽음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널리 인정받고 있다.'''
피터 마셜, 「종교개혁」中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 때는 곧바로 개신교화를 추구할 만큼 개신교의 기반이 튼튼하지가 않았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메리 1세가 즉위했을 때, 잉글랜드에서 스스로를 프로테스탄트라고 여기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 프로테스탄트 비율이 가장 높은 런던과 남부 잉글랜드에서도.'''Mary Tudor, England's first sovereign queen, is arguably also England's most vilified and misrepresented monarch.''' For centuries, she has been branded in popular and academic works as a vicious failure and superstitious tyrant. Infamous for burning hundreds of her subjects at the stake in a futile attempt to undo the English Reformation and restore Catholicism in England, she is widely remembered today as 'Bloody Mary'. In this volume, an outstanding team of international scholars trace and analyse the growth of '''the Bloody Mary myth''', from the time of Elizabeth I through to the present day. Detailing the political, religious and gender assumptions on which the myth is based, they also attempt to recover '''the 'real' Mary - an educated, pragmatic and resourceful queen - underneath the myth of the villainous tyrant.''' Based on the very latest research, this book offers a truly revisionist and uniquely balanced portrait of Mary Tudor.
'''잉글랜드의 첫 여왕 메리 튜더는 또한 확실히 가장 비난 받고 잘못 표현되는 잉글랜드 군주일 것이다.''' 지난 수세기동안, 그녀는 대중 서적에서도 학술 서적에서도 사악한 실패와 미신적 폭군으로 낙인찍혔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철회하고 잉글랜드 가톨릭 신앙을 복구하려는 헛된 시도에서 수백의 신민을 화형시킨 것으로 악명이 높은 그녀는 '블러디 메리'로 오늘날 널리 기억된다. 이 책은, 세계적인 학자들의 훌륭한 언어로 '''블러디 메리 신화'''의 성장을 추적하고 분석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이 신화가 근거하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성(gender)적 억측을 설명하면서, 그들(학자들)은 악랄한 폭군 이면에 있는 '''교양 있고 실리적이며 영리한 여왕인 "진짜 메리"'''를 복구하려 시도한다. 최신 연구에 근거하여, 이 책은 진실로 재평가되고 전례없이 균형 잡힌 메리 튜더 그림을 제공한다.
이러한 경향은 메리 1세 치세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따라서 메리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대 초의 종파 국가(confessional state)는 본질적으로 한 국가에서 두 종파가 공존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고,[31] 엘리자베스의 궁극적인 목표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프로테스탄트화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엘리자베스 즉위 이후, 메리 1세가 임명한 신학 교수들과 각 사목구 사제들을 점차 프로테스탄트로 교체했는데, 이것 자체가 장기적인 프로테스탄트화 정책이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해 대중들의 최초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Peter Cunich 교수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수도원 폐쇄 및 옛 전례의 변화[32] 는 대중들에게 상당한 상실감을 남겼다. 이 영적 공허감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대체하기까지는 수십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1000년 가까이 믿어온 종교를 하루아침에 바꾸라고 한다면 그게 그 시대에 될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가 다소 온건한 방향으로 종교정책을 세운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특별히 그가 관용적인 성격이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 '온건한 방향'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즉위 초창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재위 10년쯤이 넘었을때, 가톨릭 세가 강했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엘리자베스는 대대적인 학살로 답한다.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과 그 지지자들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그 지역 민중들에게까지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700명 이상이 처형당했고, 당시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교수형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엘리자베스가 메리보다 종교적 이유로 사형을 덜 시켰다'는 주장은 이런 학살의 희생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주장이다(K. Kesserling, Northern Rebellion, 2007). 또한 엘리자베스는 라틴어 미사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척장분지형을 허가하고, 가톨릭 사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요크의 가톨릭 신자 여성의 허리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등(이 여성의 집은 현재 '순교자의 집'으로 지정되어 있어, 요크에 갈 경우 방문이 가능하다) 처형의 잔인성 면에서는 메리 시대의 화형보다 하등 나을게 없었다.
메리 1세의 종교 정책의 '잔인성'이나, 당대 잉글랜드인들이 여기에 불만적이었다는 후대 개신교 사가들의 서술이 크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은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제프리 파커 교수를 비롯한 많은 현대 학자들은 메리 1세의 가톨릭 부흥책은 많은 호응을 받은 성공적인 정책이었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실패한 것은 오로지 여왕의 때 이른 죽음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 종교 다툼을 넘어 반역행위는 왕이 명군이나 성군이였어도 반역자에게는 가혹하게 다루었으며, 반역자에 대한 가혹한 숙청행위는 꼭 메리 1세만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헨리 8세 시대에도 수도원 해체에 반발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엘리자베스 시대에도 반가톨릭 정책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지만, 대신 많은 개신교도들이 대륙(유럽)으로 도망갔는데 헨리 8세 시절 정치적으로만 헨리 8세를 인정하면 그다지 이견이 없었던 가톨릭 교회와는 대비된다(물론 헨리 8세 이후에는 에드워드 6세나 엘리자베스 1세가 강경한 개신교 노선을 취하면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대륙으로 망명해야 했다).
또한 눈에 띄는 치적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우선 재정 확대를 위해 교역을 장려했으며, 화폐 개혁 정책을 입안하였다(짧은 치세로 인해 그녀의 죽음 이전에 시행되지는 못했다). 흔히 영국이 세계 곳곳에 탐험가들을 보내 교역로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 엘리자베스 1세 때로 알려져 있으나, 이 역시 메리 1세 때 시작된 정책이었다. 또한 헨리 8세 이후로 자금 부족으로 인해 쇠락해가던 '''잉글랜드 해군을 재건한 것도 메리 1세의 업적이다.''' 제프리 파커 교수에 따르면, 이 정책은 부군이던 펠리페 2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추진되었다고 한다.
또한 잉글랜드가 이후 개신교 국가가 된 탓에,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저지른 대량 학살(특히 아일랜드에서의)이 메리의 처형보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마을 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지는 사적 제재와, 군대를 동원한 대규모 학살[33] 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도 억지다.
현대 역사학계는 메리 1세에 대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중립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Susan Doran and Thomas S. Freeman (eds.) Mary Tudor: Old and New Perspectives (London, 2011) 위와 같은 책들에서 메리 1세에 대한 최근 역사학계의 관점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메리 1세에 대해 현대 역사학자들은, '''"흔히 생각되어오던 것보다 덜 광신적이었고, 더 유능한 군주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메리는 신하나 시녀들, 백성들에게 매우 관대하고 자비롭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즉위할 당시만 해도 살해 위협을 피해 런던에서 도망쳤다가 다시 민중의 지지로 런던으로 재입성한 걸 보면, 일반 대중들의 충성도도 엄청나게 높았다. 즉위 이후 다시 터진 반란 때도 펠리페 2세와의 결혼 문제로 냉담했던 런던 시민들 앞에서 호소하여 수비대를 구축해 반란을 진압하는 등 민심이 그녀를 외면하지는 않았고,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보수적 성공회 신자들(반쯤은 가톨릭 신자)은 그녀에게 최소한 미온적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윌리엄 세실을 비롯한 극렬 개신교도 소수만 메리를 적극적으로 비토했으나, 그 세력은 미약해 반란은 계속 진압되었다. 이는 메리가 적장녀이며, 모계 역시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가로서 고귀했기에 정통성이 강했던 탓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당시에 메리 빼면 더 나은 후보가 없었다. 메리 아니면 그 다음은 엘리자베스였는데 어머니 앤 불린 (누명이나마) 죄악을 짓고 사형당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전왕 헨리 8세나 후임 엘리자베스 1세나 당시 가톨릭 vs 개신교 양극화 구도로 치닫는 유럽의 국제 관계에서 로마와 스페인, 독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국익을 챙긴 반면, 그 사이에 낀 메리 혼자 가톨릭으로 돌아서 친가톨릭의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이 점이 후대 역사학자들과 개신교인들에게는 영국 외교사의 '정상적' 흐름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여져 까였다. 이것은 20세기 초반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휘그 사관의 영향인데, 이 관점은 영국의 개신교화를 역사의 정상적인 흐름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에서 이런 결정론적 사관은 통하지 않고, 이 휘그 사관의 극복이 메리 1세 치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열었다.
메리 1세는 그렇게 나쁜 군주도 아니었고, 정치적으로도 외교적인 측면만 제외하면 딱히 처참하게 실패한 것도 아니다. 블러디 메리라고 할 만큼 잔학하고 사람을 많이 죽인 무시무시한 폭군은 확실히 아니었으며, 보수적이었던 가톨릭을 따르긴 했지만 그렇게 비평받아 마땅한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당시의 국왕 치고는 너그러웠으며 백성들에게도 관대하고 자비롭게 대했다. 이렇게 백성에게 관대했던 면모는 동생이자 후계자인 엘리자베스 1세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마 메리 1세의 이런 통치 면모를 보고 배웠을 가능성은 있어보인다.
역사적 연구 성과들이 보다 축적되면서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의 위상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표면적으로 강력해 보이는 왕권은 항구적인 재정적 기반이나 인적 기반이 허약했고,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무모하거나 과잉 반응으로 전란 및 재정 소모를 자초했다는 비판들이다. 메리는 (‘찬탈자’ 제인 그레이를 살려두려고 했듯이)[34] 오히려 사형에는 소극적인 편이었고, 고문을 많이 활용하지도 않았다고.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시대처럼 고문이 횡행했거나 귀족들이 음모에 말려 희생되는 일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메리의 숙청을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자행된 한풀이'라고 보는 견해는 16-17세기 유럽 정치역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17세기까지도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반란 세력과 국가 양쪽 모두에게 이용된 막강한 것이었고, 종교적 탄압은 정치에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메리 1세의 여왕 즉위 당시 아일랜드는 가톨릭, 잉글랜드와 런던은 성공회로 칼같이 나뉘지 않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메리 1세 즉위시 잉글랜드 인구는 여전히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인구는 가장 강성한 런던에서도 대략 3분의 1로 추정되며.[35] 켄트 지역에서도 개신교의 위치는 잘해야 상당한 규모의 소수파(significant minority)였다. 아직 성공회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고 헨리 8세가 매각한 수도원 토지를 구입한 귀족들은 성공회를 지지했지만, 인클로저 운동의 진행으로 땅을 잃고 수도원으로부터 구빈 등의 혜택을 받던 민중들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메리 1세 즉위 당시의 잉글랜드는 가톨릭 국가였다는게 현 학계의 중론이라는 점이다. 헨리 8세 말년에 벌어진 '은총의 순례' 같은 대규모 반란은 당시 전반적인 민심이 헨리 8세의 개혁에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최근의 연구들은 중세 말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가 필연적인 종교개혁으로 이어질 만큼 부패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J.J. Scarisbrick, Henry VIII (1997)).
그리고 블러디 메리론을 미는 쪽에서는 종교를 이유로 처형당한 숫자가 엘리자베스가 훨씬 적다면서 옹호하는데, 당대 잉글랜드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평가이다.
즉 공식적으로 이단 혐의로 처형 받은 숫자를 가지고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라고 보는 것은 말도 안되는 혐의이다. 이 논리를 똑같이 적용시킨다면, Ronald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37] 즉 '공식적인' 이단혐의로 몇명이 처형받았는지, '공식적인' 종교 슬로건으로 몇건의 반란이 일어났는지를 거론하며, 군주의 광신성을 논하기는 어렵다. 실질적으로 군주들의 신앙에 몇명이 이단 혐의로 처형되었는지는 여러 논란이 있으나,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근거는 없다. 오히러 Hutton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처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대다수는 단지 가톨릭 신앙을 지속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음을 지적한다.[38]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신자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다만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신교도들의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단'보다는 '반역죄'를 공식적인 처형 이유로 들곤 했다.
피터 마셜(Peter Marshall), 「종교개혁」 中[36]
제프리 파커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메리 1세와 펠리페 2세의 가톨릭 부흥 계획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메리 1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잉글랜드는 확고히 가톨릭으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높았다고 보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 이후 가톨릭에 대해 잔혹한 탄압을 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주장은 헨리 8세 시기와 엘리자베스 시기 종교개혁으로 순식간에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에서 벗어난 근거가 되기도 한다. Peter Cunich는 [39] 대중들이 느낀 상실감과 옛 전례에 대한 향수, 영적 공허감이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교리와 예정설 등으로 채워지기까지는 수십 년 세월이 걸렸음을 지적한다. 잉글랜드의 개신교화는 대단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메리는 단명하고 엘리자베스는 장수한 것이 잉글랜드가 성공회 국가가 된 주요 요인이다.
종교 외의 영역에서 메리의 가장 큰 업적은 헨리 8세 말년과 에드워드 6세 시대를 거치면서 엉망진창이 된 재정의 건전성을 회복한 것이다. 헨리 8세의 경우 수도원을 털어서 자금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이를 대외전쟁에서 탕진했고, 에드워드 6세 치세에 서머셋 공작은 이러한 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메리는 재정기구의 간소화를 실시하여, 헨리 8세가 남겨놓은 정부 부처들을 통합하고 재조직했다. 잉글랜드 왕실의 재정기구는 장미전쟁 당시 만들어진 임시 체제의 상설화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메리는 이 상황을 종식시켰고, 관세를 올려 수입원을 얻었으며 의회의 동의까지 얻어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늘어난 수입과 개선된 신용을 물려주는데 성공했다.
또한 부부 동군연합에 대한 무지 때문에 마치 메리가 펠리페를 위해 국익이고 뭐고 다 포기했다는 식으로 인식되고는 하지만, 메리의 결혼협상은 오히려 철저히 잉글랜드에 유리한 쪽으로 마무리되었다[40] .
또한 메리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런던 시민들은 횃불을 들고 나와 축제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메리 사후 잉글랜드인들은 "저 양반이 잉글랜드에 자주 오지 않는 바람에 폐하께서 상심하여 일찍 돌아가시게 했다"라며 펠리페 2세를 원망하기도 했다. 메리 역시도 현실을 살아간 정치가이고, 지지자와 비판자가 모두 있었다. 단편적인 일화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짜집기한다면, 1603년 엘리자베스의 사망 당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41] 등만 짜집기 하여도 블러디 메리 이야기와 비슷하게 블러디 엘리자베스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또한 메리의 시대에 스페인의 신앙이 광신적이였다는 말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반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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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Helen Rawlings의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표를 인용했다. 1540-1700 종교재판 통계를 보면, 루터교 이슬람교 유대교 유혹 중혼 교사죄 미신 등등 다 합쳐서 1604명이 종교재판으로 죽었고, 그 중 778명이 인형이고 826명이 사람이다. 물론 스페인 종교재판이 처음에는 중구난방이였고 그래서 사형 건수가 상당히 발생했으며, Rawlings는 같은 저서에서 (재판이 처음 시작된 1481부터) 1530년까지 사망자를 많게 잡아 2천 명이라고 추산을 했다. 그리고 사망자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유대인 출신 개종자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이 체계화된 시기, 그러니까 표에서 보는 통계의 시기이다. 그러나 최소한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시대의 에스파냐가 "그 나라 군주와 부부동군연합 맺으면 광신도가 되는 나라"로 취급될 이유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가 아니라 대중역사가이긴 하지만, 폴 존슨(Paul Johnson)의 「기독교의 역사」에 의하면 1590년부터 90년간 스코틀랜드에서 마녀라며 처형된 사람은 4400명으로 에스파냐보다 훨씬 심했다.[42]
블러디 메리 이야기에 대한 학술적인 반박은 이곳을 참조해보자.
6. 사후
한편, 죽으면서 자신의 장지에 대한 유언을 남겼다. 죽으면 피터버러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곁에 묻히고 싶다 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정말 남달랐음을 알 수 있는 부분. 사실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버림받는 경험과 자신까지도 버림받아 혼담이 깨지고 여러 고생하다가 복위된 후에 결국 숱한 위기 끝에 왕위에 오르나, 사랑하는 사람도 무관심했던 메리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유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언은 실현되지 못한 채 결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는데... 그 옆자리가 다름 아닌 그녀가 그토록 애증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엘리자베스 1세였다.
현재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 묘에 가보면, 두 자매의 애증이 드러나면서도 뭔가 초월한것 같은 비문을 발견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사후에 제임스 1세가 세우도록 한 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웨스트민스터 측에서 현대에 부착한 안내문도 찾아볼 수 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묘 앞에서, 종교개혁 당시 서로 다른 신념에 의해 갈라져서 그리스도와 양심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이들을 기억합시다." 종교개혁 당시의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굳이 어느 한쪽이 더 도덕적 우위에 있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모두를 기억하려고 하는 현재 영국 교회와 학계의 분위기를 어느정도 짐작하게 한다.Regno consortes et urna, hic obdormimus Elizabetha et Maria sorores, in spe resurrectionis
왕권과 무덤을 함께 공유한, 엘리자베스와 메리 두 자매가 여기 부활의 희망 속에 잠들었노라
7. 이야깃거리
- 흔히 "메리 스튜어트"라 불리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도 스코틀랜드 여왕으로서 부를 때는 "메리 1세"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묘하게도 두 명의 메리 1세는 재위 기간이 약간 겹치며 친척 관계다.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메리 1세(메리 튜더)의 큰 고모(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가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4세와 혼인해서 낳은 아들이 제임스 5세이고, 그 제임스 5세의 딸이 바로 메리 스튜어트이다. 즉, 메리 스튜어트는 메리 1세(메리 튜더)-엘리자베스 1세의 5촌 조카.
- 참고로 메리 1세의 본명은 메리 튜더인데, 작은 고모(헨리 8세의 여동생)의 이름도 메리 튜더(1496~1533)이다. 헨리 8세가 여동생과 사이가 좋아서 딸에게 메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하는데,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
- 조선의 경종과 비슷한 점이 많다. 어머니의 출신이 이복 동생의 어머니의 출신보다 좋았던 점, 어릴 적 잠깐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박대받게 된 점, 이복 동생에 대한 애증, 재위 기간이 짧으며 자식을 남기지 못해 이복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점이 주로 거론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아버지 헨리 8세는 숙종에,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는 영조에 자주 비유된다.
8. 현대 매체에서의 메리 1세
스퀘어 에닉스의 RPG 천지창조에서도 '블러디 메리'라는 이름의 보스 몬스터가 등장한다. 단, 이쪽은 잉글랜드의 여왕이 아니라 스페인의 여왕이었다고. 작중에서는 아들 3명이 탐험을 위해 떠났다 차례로 죽자 미쳐버렸다고 한다.
문피아의 대체역사물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 등장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선 호그와트를 다녔다고 한다. 기숙사는 불명. 영화에서는 그녀의 초상화가 등장.[43]
트리니티 블러드의 등장인물인 메리 스펜서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이복 여동생인 에스델 블랑셰는 역시 메리 1세의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에서, 친구이자 오촌지간인 제인 주디스 조슬린은 제인 그레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8.1. 튜더스에서의 메리 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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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배우 세라 볼거가 연기한 메리 튜더.
시즌 전체에 걸쳐 등장, 시즌 4에서는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드라마의 한 축은 메리 튜더의 성장기이고, 그간의 블러디 메리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동생 엘리자베스보다 비중이 크고 아름답고 영민한 공주로 묘사된다. 시즌 4에서는 본격적으로 오프닝 크레딧까지 차지하는데, 이 오프닝 크레딧에서 묘하게 어머니 캐서린과 겹치는 분위기다. 사실 오프닝 크레딧에서 메리가 들고 있는 묵주는 극중 어머니가 남긴 유품.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어머니 캐서린이 쫓겨난 후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다시 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유품을 받아들었을 때도 홀로 울다가 다시 자신을 다잡았고, 자신이 헨리의 사생아라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가 결국 서명을 하게 된다.[44]
이런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무슨 일이 있어도 당당하고 강단 있는 성격으로 그려지고, 극 중 왕비들과의 관계에서도 할 말은 하고 사는 공주. 특히 자신의 어머니를 내쫓은 왕비 앤 불린을 서녀 취급 받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그녀와 신경전을 벌였고, 4번째 왕비인 클레페의 앤과는 종교가 다른 것 때문에 탐탁치 않아 했지만 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다섯번째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가 왕비답지 않게 경박하다고 여겨 그녀에게 차갑게 대한다. 게다가 안나를 밀어내고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한 상황은 자신의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과 앤 불린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작 중 한 장면에서는 캐서린 하워드가 자신을 향해 '의붓딸' 운운하자 그녀를 노려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때 '''캐서린 하워드가 10대였고 메리는 20대 초반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계모가 어머니 대접을 받으려 하니 짜증나는 건 당연하다. 물론 우선은 왕비-공주 관계이기때문에 겉으로는 위해주는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 것이 옳다. 캐서린 하워드를 살갑게 대해준 엘리자베스와는 대조적인 태도. 또한 무척이나 총명해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프랑스 대사와 스페인의 공작과도 별 무리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버지인 헨리 8세의 애정을 되찾은 뒤에도 고난은 여전해서 여러 번 혼담이 오가지만,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국제관계와 헨리의 변덕 때문에 줄줄이 엎어진다. 그 중에서도 클레페의 앤의 사촌 바이에른 공 필리프가 메리에게 구혼을 하러 오고 서로 첫눈에 반하지만, 필리프의 종교(루터파)에 갈등하고 이미 앤과의 혼인을 무효화 시키려고 마음 먹었던 헨리가 그를 돌려보내고 만다. 그래서 자신과 필리프는 이어질 수 없을 것이라 안나에게 못박으면서도 슬퍼했다.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내심 결혼을 하고 싶은 소녀 같은 면모도 있는데, 위와 같이 계속 혼담이 파기되는 등 20대에 접어들어서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에 초조함을 느끼며, 이것을 가지고 캐서린 하워드가 막말을 퍼붓자 끝내 참지 못하고 차푸이스 대사에게 털어놓고 울어버리는 여린 모습도 있다.
그녀의 어머니가 스페인 공주 출신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점 때문에 정치적으로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진정한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은 잉글랜드 주재 스페인 대사인 차푸이스 대사다. 어머니 캐서린이 살아있을 때부터 이 모녀를 도우려고 동분서주했고, 여러 가지에 힘들어하는 메리를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시즌 4에서 건강 악화로 대사직에서 물러나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얼마 후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45]
그런데 차푸이스가 스페인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메리가 말리면서 하는 말 중에 '''"만약 제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아이였다면 이런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잉글랜드는 여전히 신심이 두터웠을 텐데"'''가 있다. 훗날 메리가 즉위한 후 행한 가톨릭 복권과 개신교 탄압, 즉 블러디 메리가 되는 복선이라고 할 수있다. 메리는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이 '''자신이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신 때문에 일어난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 차푸이스의 앞에서 '잉글랜드를 다시 신앙심이 강하게 만들겠다'라고 맹세한다.
이후 잉글랜드를 떠난 차푸이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자신이 완전히 홀로 남았다고 생각한 메리는 스티븐 가드너 주교 등의 조력자들을 만나게 되지만 이 때부터 이전보다 차가운 인상이 되어버린다. 한가지 예로 비교적 친하게 지냈던 헨리의 6번째 왕비 캐서린 파가 개신교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 뒤로는 냉랭한 기류가 감돈다.
하지만 여동생 엘리자베스와 남동생 에드워드에게는 계속 다정한 누이이자 언니인 면도 있다. 앤 불린의 핍박으로 엘리자베스의 시녀가 되었을 때에도 어린 아기인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었던 것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인 엘리자베스를 앤 불린과 연관지어 증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그리고 시즌 4에서 어린 에드워드 6세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자 울며 '제 남동생을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46] 그러나 차푸이스와 가톨릭 사제가 은밀하게 남동생 에드워드를 제치고 메리의 계승을 시도한다고 하자 묘한 웃음을 지으며 지지한다.[47]
개신교 성향 캐서린 파 덕분에 헨리 8세에 의해 계승권을 다시 회복했을 때에는 미묘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자신과 마찬가지로 너 역시 여왕이 될 것이라고 농담조로 다정히 말하기도 했다. 다만 결혼을 간절히 원하는 자신과는 반대로 엘리자베스는 '캐서린 하워드께 있었던 일 때문에 결혼하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진지하게 고백했는데 이 고백을 듣고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 담긴 표정을 짓는다.
8.2. 영화 엘리자베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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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배우 캐시 버크가 연기한 메리 튜더. 여기서는 블러디 메리 설을 차용해서인지 과대망상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중증의 살인광으로 그려진다. 덤으로 초상화처럼 주름투성이로 나온다. 본래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때도 지나친 반가톨릭주의적 묘사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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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한 뒤 그의 아이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나, 펠리페의 사랑을 얻지 못하여 정신병에 걸려버린 측은한 사정의 여왕으로 나온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도로 개신교를 믿는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탄압하고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까지 처형대에 매달려고 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간곡하게 용서를 빌어 차마 사형 집행장에 서명을 하지는 못한다. 이후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이 죽고 난 뒤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을 말살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보인다. 엘리자베스를 견제하는 노포크 공작 세력은 메리 여왕에게 엘리자베스를 처형할 것을 강력히 청원하나, 이를 기각하고는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사망하면서 엘리자베스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푼다.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때에도 지나친 반가톨릭주의적 묘사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감독은 처음에는 역사를 충실히 재현한 것이라고 강변하다가, 학자들의 비판까지 받자 "재미를 위해 각색한 면이 있다"며 슬쩍 빠져나갔다. 튜더시대사 전공자들은 2009년에 역사의 영화화를 다룬 책에서 다시 이 영화의 역사왜곡을 강력하게 비판한바 있다.
8.3. 드라마 울프 홀
3화에서 어머니와 딱 한 신 등장한다. 젊은 배우 릴리 레서가 맡았는데 본 드라마에서 토마스 모어를 맡고 왕좌의 게임에서 콰이번을 맡은 앤턴 레서의 딸이다. 실제 역사처럼 생리불순이 심해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황의 위치를 믿어 의심치 않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 생리불순에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꼿꼿이 서있는 메리를 위해서 주인공인 토마스 크롬웰이 의자를 권하고 메리는 그런 크롬웰을 좋게 보는 묘사, 그리고 이후 에피소드에서 메리가 토마스 크롬웰을 괜찮게 생각한다는 앤 불린의 대사가 나오는데 아마 실제 역사에서 토마스 크롬웰이 사형 당할 때 메리를 유혹했다는 죄목의 복선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