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마

 



[image]
'''마나마'''
''المنامة[1]
Manama''


'''국가'''
<colcolor=#000000> 바레인
'''지역'''
수도 주
'''면적'''
30km²
'''시간대'''
UTC+3
'''인구'''
15만 명
'''인구 밀도'''

1. 개요
1.1. 역사
2. 갤러리


1. 개요


[image]
바레인의 수도이자 최대도시. 아랍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인구는 약 15만 7천명이며 면적은 30 km²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39.55 km²)보다 좁다. 옛부터 호르무즈와 함께 걸프 지역의 무역 중심지였고 석유 시대 전에는 진주 채취가 흥하였다. 그 때문에 포르투갈이란 등 외세의 침공이 잦았으나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보호를 받아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23년 기존 중심이던 이웃 도시 무하라크 대신 수도가 되었다. 2012년 마나마는 아랍 문화 수도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2014년에는 아시아 남자 핸드볼 선수권 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대학교로는 마나마 대학교가 있다. 항구로는 미나 살만항이 있다. 해당 항구에 영국이 50년 만에 해군기지를 개설하였다. 시간은 한국보다 6시간 느리다.

1.1. 역사


작은 섬나라[2]인 바레인의 특성상 마나마의 역사가 사실상 바레인의 역사이다. 마나마 일대는 기원전 3000년 경부터 딜문 문명의 중심지였다. 수로를 통해 식수와 농업용수를 제공받는 고도의 문명을 지녔다. 그러던 기원전 700년경 아시리아에게 정복되었고, 이후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제국을 거쳐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인들이 정착해 틸로스를 세우기도 하였다.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는 틸로스에서 생산되는 진주와 목화밭에 대해 기술하였다. 기원후 무렵 바레인은 파르티아사산 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 시기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전래되어 흥성하였다. 현 무하라크 북쪽 앗 다이르에 경교 주교좌와 수도원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러던 628년 사산 제국의 바레인 총독 문지르 이븐 사와 앗 타이미가 무함마드의 서신대로 개종하면서 이슬람화되었다. 632년 무함마드의 사후 바레인의 주민들은 배교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부 바크르에 의해 파견된 알 알라 알 하드라미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그는 바레인 총독이 되었으나 639년 파르스 원정에 실패한 후 해임되었다. 그의 후임자로서 파르스를 정복한 이는 바로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8세기 초에는 칼리파 우마르 2세에 의해 바레인 최초의 이슬람 사원인 마스지드 알 카미스가 세워졌다. 이슬람 제국의 평화 시대에 바레인은 걸프 무역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마나마에서 발굴된 당나라 ~ 송나라 대의 중국 동전들이 원거리 무역의 증거이다. 10세기부터 바레인은 토착 베두인 왕조들인 카르마트, 우윤 왕조 등의 지배를 받았다. 12세기의 지리가 알 이드리시는 '아왈 (바레인의 옛 지명)의 수도는 인구가 많고 그 주위가 비옥하며 곡물과 대추야자가 많이 난다.'고 기록하였다.
[image]
[image]
포르투갈에 의해 세워진 바레인 요새
그러던 1330년 자르완 왕조 때에 바레인은 호르무즈 왕국의 속국이 되었고, 이란에서 온 쉬아 울라마 (지식인층)가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마나마라는 현 지명은 1345년에 처음 언급되었다. 그러던 1521년 걸프-인도양 무역을 독점하려 하던 포르투갈이 바레인을 장악하였다. 포르투갈 인들은 마나마 외곽에 바레인 요새를 세웠다. 여러 현지인 반란에 시달리던 포르투갈은 1602년 사파비 제국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란의 지배기에 총독들은 빌라드 알 카뎀에 머물렀다. 사파비 시대에 마나마는 이란 시장에 많은 진주와 곡물을 수출하며 번영하였다. 특히 약 2천척의 선박이 동원되어 수확된 그 진주는 연간 60만 두카트의 수입을 창출하였다. 농업에 있어서도 순니인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알 하사와 카티프에서 박해를 우려해 이주해 온 쉬아 세력 덕에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사파비 조를 멸한 나디르 샤는 1740년경 오만 원정 전에 마나마 남쪽 외곽에 요새를 세웠다.
걸프에 대한 페르시아 패권은 18세기 후반 쇠퇴하였다. 카자르 왕조 시대에 바레인은 파르스 지방의 부셰르 후국에 속해 있있다. 그러던 1783년 카타르 북부에 있던 바니 우트바 계열의 알 칼리파 가문이 쿠웨이트의 도움으로 마나마를 공격, 이란 총독 나스르 알 마드쿠르를 축출하였다. 이로써 바레인에 자리잡은 칼리파 왕조는 부셰르를 비롯한 이란과의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이란 시장의 상실과 19세기 정치, 종교 상의 불안정은 바레인의 경제를 파탄내었다. 그에 더하여 1800년에 오스만, 1810년에 사우디와하비 세력이 침공해왔고 1842년 발발한 칼리파 왕조의 내전에서 마나마는 주요 전장이었다. 연이은 전란으로 항구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자, 상인들은 쿠웨이트나페르시아 해안으로 피신하였다가 내전이 끝난 후에야 돌아왔다. 1862년 마나마를 방문한 영국인 지포드 팔그레브는 도시에는 파손된 몇몇 석조 건물들과 가난한 어부 및 진주 채취꾼들의 움막만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1820년의 해상 조약에 이어 1861년의 우호 조약으로 바레인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영국은 바레인의 외교권을 가져가는 대신 그를 외세의 해상 침공으로부터 보호해 주기로 했는데, 바레인은 섬이었기에 사실상 완전한 안전 보장 약속이었다. 19세기 후반 마나마는 영국의 걸프 경영의 중심이 되었고, 상업과 진주 수출로 마나마 경제는 어느정도 부흥할 수 있었다. 1900년 마나마에는 영국 정치국이 세워졌고,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바레인을 기반으로 오스만령 이라크를 공격하였다. 이후 석유가 발견되자 영국은 1919년 바레인을 해외 영토에 포함시켰다. 1923년 칼리파 왕조의 하킴 하마드 이븐 이사는 기존 수도 무하라크에서 바로 건너의 마나마로 천도하였다. 1932년 석유 채굴과 함께 마나마는 현대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3월에는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반영 독립 시위가 열렸고, 마침내 6년 후에 바레인의 독립이 이루어지자 마나마는 그 수도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2. 갤러리


[image]
마나마의 랜드마크인 바레인 국제 무역 센터
[image]
2011년 시위 이전의 진주 교차로. 시위 후 구조물이 철거되고 회전 교차로 대신 일반 교차로로 변형되었다.
[1] 아랍어[2] 부산광역시 크기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