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가메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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丸亀城(1597 ~ 1615년, 1641 ~ 1869년). 일본 100명성 중 하나이며, '''현존 12천수(現存12天守) 중 하나.'''
카가와현 마루가메시에 있는 사누키노쿠니의 성. 와곽식(渦郭式) 구조의 평산성(平山城)이다.
근세 사누키의 통치자 이코마 치카마사가 서부 지역을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다카마쓰 성의 지성으로 축성한 것이 현재 마루가메 성의 시초다.
본래는 1615년의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이 실행되어 얼마 못가 폐성되었으나, 이후 1640년 이코마 가문이 가문 내 정쟁으로 인해 카이에키 당하여 야지마로 전봉된 뒤로 1641년 에도 막부에서 이코마 가문이 다스리던 타카마츠 번 서부를 쪼개 새로운 영지를 만들어 야마자키 이에하루(山崎家治)를 번주로 입봉시켰다. 사누키로 영지를 옮긴 이에하루는 마루가메 성을 거점으로하였고 마루가메 번을 탄생시켰다.
메이지의 시대가 오자 마루가메 성은 판적봉환을 거쳐 1876~77년 사이에 텐슈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해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루가메 성의 뼈대가 되는 카메야마(亀山)는 중세 시대에 호소카와 사천왕이라 불리는 나라(奈良) 가문이 성채로써 이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 근세가 되자 사누키노쿠니 전역은 이코마 치카마사가 지배하게 되었다. 치카마사는 동쪽에는 히케타 성을, 중앙에는 다카마쓰 성을 거점으로 삼아 통치를 하였고 서쪽에도 거점을 만들 생각을 가져 1597년이 되자 아들과 함께 카메야마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1602년이 되자 치카마사에 이어 당주가 된 이코마 카즈마사(生駒一正)는 마루가메 성이 완공되자 본성인 타카마츠 성으로 이동하였고 타카마츠 번 서부는 마루가메 성을 중심으로 통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도 막부가 오사카의 진 이후 1615년에 일국일성령을 발표하게 되며 이코마 가문은 이 지시에 따라 타카마츠 성을 제외한 타카마츠 번 내 모든 성의 정치적 기능을 정지, 폐성시켰다.
1640년 이코마 가문이 내분과 문란의 죄로 데와노쿠니로 전봉당하며 타카마츠 번은 번주를 잃게 되었다. 이코마 가문의 사태를 본 막부는 사누키의 영토를 동, 서로 양분하여 각각 다른 가문을 입봉시키려 하여, 결국 1641년 막부는 히젠노쿠니의 야마자키 이에하루를 서 사누키로 입봉시켰다. 이에하루는 폐성된 마루가메 성으로 입성하여 '''마루가메 번'''을 창설하고 번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마루가메 번이 성립된 이후 이에하루는 성을 본격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나와바리와 이시가키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야마자키 가문은 3대 당주가 8세의 나이로 사망해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야마자키 가문은 단절되었고 남은 일족들은 빗츄노쿠니로 전봉되었다. 막부는 야마자키 가문의 후임으로 하리마노쿠니 쿄고쿠 가문의 쿄고쿠 타카카즈(京極高和)를 마루가메 번에 입봉시켰다.
쿄고쿠 가문은 입봉 뒤로 현재 남아 있는 텐슈를 만들고 오테몬을 옮기는 등 마루가메 성의 수리와 번의 통치에 힘썼다. 이후 마루가메 성은 판적봉환에 의해 다시 한번 정치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고텐은 소실, 텐슈를 제외한 야구라는 모두 해체되었다. 이후로는 우치보리(内堀) 안의 구역을 공원으로 정비하였고 소토보리(外堀)는 메워졌으며 성터는 국가사터(国史跡)로 지정되었다.
성터로 가는 방법은 매우 쉽다. JR 시코쿠의 마루가메역 플랫폼에서도 텐슈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눈에 잘 띄기 때문. 역에서 나와 약 10분간 직진하면 성의 우치보리에 도착할 수 있다. 성터의 높이는 66M 정도 밖에 안되지만 성 전체가 이시가키에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상당히 웅장한 편이다. 마루가메역 방면의 입구인 오테몬은 현존하는 유적이며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오테몬으로 들어가면 공원과 기념품샵이 나오며 산노마루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길은 꽤나 경사져있으며 산노마루의 이시가키를 감상하며 올라갈 수 있다. 산노마루에는 근왕비(勤王碑)와 츠키미 야구라 터(月見櫓跡)가 남아 있으며 사누키 후지라고 불리는 이이노야마(飯野山)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니노마루로 올라가면 벚꽃이 심어져 있고 65 m의 깊이를 자랑하는 우물이 남아있다.
니노마루에서 한번 더 올라가면 혼마루와 텐슈에 들어갈 수 있다. 텐슈의 입장료는 성인 200엔,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마루가메 성의 역사와 쿄고쿠 가문에 대한 역사와 사료를 전시해 놓고 있다.
이외에도 현관문(玄関先御門), 번소(藩所), 저택(長屋)이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615년에 일국일성령이 실행되어 폐성되었으나 당시 당주였던 이코마 마사토시(生駒正俊)가 나무로 성 건물을 가리고 출입금지를 시키는 등 온갖 공정을 거쳐 성이 해체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1]
한국어가 표기된 몇 안 되는 일본의 성 중 하나이다. 모든 안내판에 한국어가 쓰여있진 않지만 공원 지역에 있는 안내판에 마루가메 성의 역사, 유적에 대한 설명과 유적의 위치가 있는 지도에 한국어가 쓰여있기에 한국인도 무리없이 지식을 얻어갈 수 있는 성 중 한 곳이다.
텐슈는 1943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의 해체 수리 이후로 문화재 개정에 의해 중요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마루가메 성의 텐슈의 높이는 14.5 m로 역대 텐슈들 중에서도 상당히 작은 크기를 자랑한다. 참고로 이요 마츠야마 성 텐슈는 15.4 m, 고치 성의 텐슈는 18.1 m, 토요토미 오사카 성 텐슈는 29 m, 히메지 성 텐슈는 31.5 m, 토쿠가와 에도 성 텐슈는 44 m에 달한다.
성터 내에는 마루가메 시립 자료관(丸亀市立資料館)이 위치해있다. 마루가메 성에 대한 전시는 텐슈가 맡고 있으므로 시립 자료관에서는 주로 사누키의 민속, 고대 역사 등을 다루고 있다. 가격은 무료.
丸亀城(1597 ~ 1615년, 1641 ~ 1869년). 일본 100명성 중 하나이며, '''현존 12천수(現存12天守) 중 하나.'''
1. 개요
카가와현 마루가메시에 있는 사누키노쿠니의 성. 와곽식(渦郭式) 구조의 평산성(平山城)이다.
근세 사누키의 통치자 이코마 치카마사가 서부 지역을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다카마쓰 성의 지성으로 축성한 것이 현재 마루가메 성의 시초다.
본래는 1615년의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이 실행되어 얼마 못가 폐성되었으나, 이후 1640년 이코마 가문이 가문 내 정쟁으로 인해 카이에키 당하여 야지마로 전봉된 뒤로 1641년 에도 막부에서 이코마 가문이 다스리던 타카마츠 번 서부를 쪼개 새로운 영지를 만들어 야마자키 이에하루(山崎家治)를 번주로 입봉시켰다. 사누키로 영지를 옮긴 이에하루는 마루가메 성을 거점으로하였고 마루가메 번을 탄생시켰다.
메이지의 시대가 오자 마루가메 성은 판적봉환을 거쳐 1876~77년 사이에 텐슈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해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2. 역사
마루가메 성의 뼈대가 되는 카메야마(亀山)는 중세 시대에 호소카와 사천왕이라 불리는 나라(奈良) 가문이 성채로써 이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 근세가 되자 사누키노쿠니 전역은 이코마 치카마사가 지배하게 되었다. 치카마사는 동쪽에는 히케타 성을, 중앙에는 다카마쓰 성을 거점으로 삼아 통치를 하였고 서쪽에도 거점을 만들 생각을 가져 1597년이 되자 아들과 함께 카메야마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1602년이 되자 치카마사에 이어 당주가 된 이코마 카즈마사(生駒一正)는 마루가메 성이 완공되자 본성인 타카마츠 성으로 이동하였고 타카마츠 번 서부는 마루가메 성을 중심으로 통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도 막부가 오사카의 진 이후 1615년에 일국일성령을 발표하게 되며 이코마 가문은 이 지시에 따라 타카마츠 성을 제외한 타카마츠 번 내 모든 성의 정치적 기능을 정지, 폐성시켰다.
1640년 이코마 가문이 내분과 문란의 죄로 데와노쿠니로 전봉당하며 타카마츠 번은 번주를 잃게 되었다. 이코마 가문의 사태를 본 막부는 사누키의 영토를 동, 서로 양분하여 각각 다른 가문을 입봉시키려 하여, 결국 1641년 막부는 히젠노쿠니의 야마자키 이에하루를 서 사누키로 입봉시켰다. 이에하루는 폐성된 마루가메 성으로 입성하여 '''마루가메 번'''을 창설하고 번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마루가메 번이 성립된 이후 이에하루는 성을 본격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나와바리와 이시가키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야마자키 가문은 3대 당주가 8세의 나이로 사망해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야마자키 가문은 단절되었고 남은 일족들은 빗츄노쿠니로 전봉되었다. 막부는 야마자키 가문의 후임으로 하리마노쿠니 쿄고쿠 가문의 쿄고쿠 타카카즈(京極高和)를 마루가메 번에 입봉시켰다.
쿄고쿠 가문은 입봉 뒤로 현재 남아 있는 텐슈를 만들고 오테몬을 옮기는 등 마루가메 성의 수리와 번의 통치에 힘썼다. 이후 마루가메 성은 판적봉환에 의해 다시 한번 정치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고텐은 소실, 텐슈를 제외한 야구라는 모두 해체되었다. 이후로는 우치보리(内堀) 안의 구역을 공원으로 정비하였고 소토보리(外堀)는 메워졌으며 성터는 국가사터(国史跡)로 지정되었다.
3. 유적과 관광
성터로 가는 방법은 매우 쉽다. JR 시코쿠의 마루가메역 플랫폼에서도 텐슈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눈에 잘 띄기 때문. 역에서 나와 약 10분간 직진하면 성의 우치보리에 도착할 수 있다. 성터의 높이는 66M 정도 밖에 안되지만 성 전체가 이시가키에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상당히 웅장한 편이다. 마루가메역 방면의 입구인 오테몬은 현존하는 유적이며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오테몬으로 들어가면 공원과 기념품샵이 나오며 산노마루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길은 꽤나 경사져있으며 산노마루의 이시가키를 감상하며 올라갈 수 있다. 산노마루에는 근왕비(勤王碑)와 츠키미 야구라 터(月見櫓跡)가 남아 있으며 사누키 후지라고 불리는 이이노야마(飯野山)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니노마루로 올라가면 벚꽃이 심어져 있고 65 m의 깊이를 자랑하는 우물이 남아있다.
니노마루에서 한번 더 올라가면 혼마루와 텐슈에 들어갈 수 있다. 텐슈의 입장료는 성인 200엔,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마루가메 성의 역사와 쿄고쿠 가문에 대한 역사와 사료를 전시해 놓고 있다.
이외에도 현관문(玄関先御門), 번소(藩所), 저택(長屋)이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4. 일화
1615년에 일국일성령이 실행되어 폐성되었으나 당시 당주였던 이코마 마사토시(生駒正俊)가 나무로 성 건물을 가리고 출입금지를 시키는 등 온갖 공정을 거쳐 성이 해체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1]
5. 기타
한국어가 표기된 몇 안 되는 일본의 성 중 하나이다. 모든 안내판에 한국어가 쓰여있진 않지만 공원 지역에 있는 안내판에 마루가메 성의 역사, 유적에 대한 설명과 유적의 위치가 있는 지도에 한국어가 쓰여있기에 한국인도 무리없이 지식을 얻어갈 수 있는 성 중 한 곳이다.
텐슈는 1943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의 해체 수리 이후로 문화재 개정에 의해 중요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마루가메 성의 텐슈의 높이는 14.5 m로 역대 텐슈들 중에서도 상당히 작은 크기를 자랑한다. 참고로 이요 마츠야마 성 텐슈는 15.4 m, 고치 성의 텐슈는 18.1 m, 토요토미 오사카 성 텐슈는 29 m, 히메지 성 텐슈는 31.5 m, 토쿠가와 에도 성 텐슈는 44 m에 달한다.
성터 내에는 마루가메 시립 자료관(丸亀市立資料館)이 위치해있다. 마루가메 성에 대한 전시는 텐슈가 맡고 있으므로 시립 자료관에서는 주로 사누키의 민속, 고대 역사 등을 다루고 있다. 가격은 무료.
[1] 헌데 후대의 마루가메 성의 높이가 60m가 넘는데다, 번조 치카마사가 이시가키의 설계자를 떨어뜨려 죽였다는 니노마루 우물의 깊이도 60m가 넘는다. 거기에 마루가메 성은 평야지대에 위치하는데 이것을 바쿠후 감찰사에게서 지키려면 도대체 어느정도의 위장공작을 펼쳐야하는지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는다... 마루마게 성을 소개하는 공식 문구에서도 마사토시의 성 감추기 일화가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순한 일화 내지 전설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