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1. 개요
近世 / Early modern period
중세 말기~근대 초기의 시기. 중앙권력의 안정으로 공권력의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 동서양 전부 해당 사항이다.[1]
2. 상세
'근세'(近世)란 중세와 근대 사이라는 개념으로 쓰이는 시대 구분으로서 특히 로망스어군 언어권에서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영미권과 독일어권을 위시한 게르만권에서는 'Early Modern/Frühmoderne, Frühe Neuzeit(근대 초기)' 등을 쓴다.
사실 동양에서 부르는 명칭인 '近世(근세)'의 기원은 일본 사학자들[2] 이 마르크스식 시대 구분론[3] 을 도입하면서 일본사에 적용한 때 에도 시대를 어디에 넣을지 생각하다가 근대는 아닌데 중세로 보기엔 좀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어의 'Époque moderne'(에포크 모데른)을 직역하여 '긴세이(近世)'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사에서 근세는 곧 에도 시대이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중앙집권제가 일찍 정착한 특성상 왕조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풍토가 강한 데다 여타 학술적, 정치적 문제 때문에 근세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단, 한국 사학계에서는 조선시대를 근세로 보는 경우가 많다.[4] 고려시대를 중세의 끝으로, 그 이후의 조선 시대를 근세로 보는 관점. 그리고 구한말부터는 근대로 보는 경우가 많다.
중세의 끝과 함께 시작이 애매한 편인데, 대개 동로마 제국의 멸망,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근세의 시작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5] 하지만 '근세(近世)'나 '근대 초기(Early Modern)'라는 시대 구분 대신으로 그냥 '중세 말기'로 보는 경향도 있다.[6] 그래서 이 시기의 애매함으로 인해 현재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고대, 중세, 근세의 시대 표기는 안 하며, 시대 명칭이 확실한 근대[7] 부터 시대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 기간에 벌어진 대표적 시대상이라면 르네상스, 종교 개혁, 대항해시대, 절대왕정, 30년 전쟁 등이 있다. '해적'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또한 근세의 해적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대항해시대가 속해 있기에 그런 듯. 유럽인들에겐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허벌나게 잘나가기 시작한 시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해안가 왕국들과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끌려간 아프리카 내륙과 유럽의 정복이 시작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린 시대이기도 하다.
관(官)과 민(民)의 개념이 대두하기 시작하고 공권력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앙세력이 지방세력을 억누르고 서민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시작한 시기이도 하다. 민권이 토대로 성장한 왕권인 만큼 유지하고 행사하기 위하기라도 서민들을 지원해주어야만 했다. 서양사의 사례를 보아도 영주와 기사 중심의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동시에 왕권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중세에만 해도 변변치 않던 왕권이 민간의 힘을 안 시기이며, 소위 왕권에 해당하는 '관권'과 서민에 해당하는 '민권'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조화를 모색하였다. 대표적으로는 영국의 명예혁명시기, 프랑스의 절대왕정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단 이 왕권은 왕 독단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이 아니라 상권, 즉 민권을 대변해주어야 유지되고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마르틴 루터 등의 종교개혁가들, 니콜로 마키아벨리, 토머스 홉스의 왕권신수설 등이 괜히 등장한 게 아니다. '근세'하면 떠오르는 르네상스 시대, 대항해시대 역시 '왕권을 중심으로 한 무역과 상업 확장'이라는 전제가 반드시 들어간다.
동양사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 게 한중일 모두 이전 시대에 비해 관과 민이 조화를 이루었으며, 이는 근대사회에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중국은 장기간의 분열기가 종식되고 통일왕조의 형태를 성숙하게 운영해 나가는 시기이며 이는 중앙과 지방세력, 이민족과 한족이 비교적은 균형있게 정계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성행한 성리학과 과거제, 은(銀)을 중심으로 한 경제개혁의 운영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계급이 사실상 유명무실화되는 시기였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은 비록 지배계층의 위치는 유지했지만, 중앙정부와 민간(특히 부를 이룩한 부농이나 거상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막부와 지방세력, 성장하는 상인들의 상호 견제는 나중에 근대 일본이 탄생하는 데 기본적인 틀이 되어주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왕들은 강한 왕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남용하면 바로 신권의 견제로 이어지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에 발생한 사건인 반정이나 조선시대의 사관들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왕이어도 신성불가침한 권력의 영역이 존재했던 것이다.[8]
즉, 다시 말하면 중세의 혼란기를 이겨내고 왕권과 신권, 민권이 상호 견제를 통해 균형을 이루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력 양상의 반복은 잘 알다시피 이후 근대 자본주의, 민주주의로 이어지게 됐다.
중동 및 이슬람 역사에서 또 하나의 유의미한 시대 구분으로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압바스 칼리프가 분권화의 압력에 사실상으로 해체되고 그런 대로 잘 짜진 법률 체계와 종교 및 민간 부분을 관료제로 포섭하면서 주변 지역을 왕성하게 정복하는 국가들이 이슬람권의 핵심 지역을 장악하면서 이 시기를 이전의 '중간 시대'와 구분해 '화약 제국의 시대'라고 하는 '근세'로 파악한 것이다. 그 나라들이 바로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인도의 무굴 제국이다.
그렇다고 오스만은 터키, 사파비 왕조는 이란, 무굴 제국은 인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해선 곤란하다. 물론 오스만과 사파비 왕조와 무굴 제국이 현대 터키, 이란, 인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국들인 것은 맞는다. 특히 터키의 경우는 아예 직계 국가니까. 하지만 오스만 제국만 해도 제국 내 40%가 비무슬림이었고, 튀르크인 비율은 더욱 적었으며, 제국의 관료들과 장교들 대부분은 발칸의 데브시르메로 징집된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이었다.[9] 사파비만 하더라도 페르시아에 기반한 제국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사파비 왕조의 기반은 현재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튀르크인[10] 이었고, 지금도 이란 인구는 약 30%가 튀르크인이다. 무굴 제국도 인도에 있었지만 공식 문서는 이슬람 세계의 학술 용어인 페르시아어로 작성되었고, 창건자인 바부르는 튀르크화된 몽골계였으며 지배층 가운데에는 튀르크인이 많았다. 세 국가 모두 페르시아화된 튀르크인을 지배층으로 받아들였지만, 각자의 제국을 통치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선택한 종파와 문화에 따라 수니파에 아나톨리아의 동로마 문화를 이슬람화한 오스만 제국, 유일한 시아파 교법 국가로서 페르시아 문화를 선택한 사파비조, 그리고 인도 방면으로 내려가 페르시아 문화와 인도 문화의 조화를 추구한 무굴 제국으로 갈라졌다. 전근대 국가가 바로 뒤의 근대 국민 국가로 이어졌던 것은 국가적 강역이 지리적인 격리로 인해 일찍부터 엄격히 분리된 동아시아에서는 나름은 익숙한 일이지만, 이 동네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아니, 사실 이런 측면에서는 동아시아가 세계사적으로 예외적인 경우라 봐야 한다.
3. 근세의 상징들
3.1. 유럽
- 계몽주의: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18세기에 주류로 자리잡은 사조로 유럽을 근대사회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 대항해시대의 선박들
- 르네상스: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 종교개혁
- 바로크: 17세기 미술 양식.
- 로코코: 18세기 미술 양식.
- 머스킷
- 사브르
- 근세의 서양작가들과 문학: 이를테면 작가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문학 걸리버 여행기, 삼총사, 베니스의 상인 등이다. 확장된 세계관으로 인해 시행착오를 겪은 인간들에 대한 풍부한 고찰이 특징이다. 다양한 세계상, 다양한 인간상에 대한 동경과 풍자가 들어가 있다.]
- 성형 요새: 캐논의 등장으로 중세식의 공성전이 소용없어지자 이에 대비하여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 사략선
- 전열보병: 18세기 초반에 처음 등장하여 18세기 중후반의 미국 독립전쟁,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등의 주역으로 활약한 병종이다.
- 증기기관: 증기기관이 사회 전반에 보급되어 산업혁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된 것은 근대의 일이지만, 이 근대식 증기기관의 기원은 계몽주의 시대인 1705년에 토머스 뉴커먼이 개발한 증기기관이며, 제임스 와트가 1765년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개량하면서 근대식 증기기관이 등장했다.
- 해적
- 콩키스타도르
- 트리코른(삼각모)
- 마녀사냥: 보통 중세 기독교의 광신이니 어쩌고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 집중된 관료제적 현상으로서 마녀 사냥이 본격적으로 물이 오른 건 16세기 중반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지방, 그것도 개신교와 카톨릭 제후국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 이전에는 오히려 마녀를 현대인들과 비슷하게 환상적인 가상의 존재로 취급하거나, 권력 당국이 의도적으로 계획하여 집행한게 아닌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마녀 '폭동'이 잠시 일어나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다.
- 가발: 퍼루크라고도 한다. 17-19세기 유행한 남자 가발. 유럽의 왕이나 귀족들을 비롯한 여러 직업군들이 이 가발을 착용하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세대들의 초상화에서 이 가발을 쓰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 담배, 감자, 고구마, 옥수수, 토마토를 비롯한 신대륙의 작물들
3.2. 한국
한국사에 있어서 근세의 시작은 조선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 이념이 정착되면서 중앙 집권 관료 국가를 완비하였으며 강력한 공권력을 내세워 근대에 등장하게 될 대중 문화와 화폐 경제, 민족주의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는 한국사에서 가장 안정된 왕권을 구비하였던 시대이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이었다고해도 이 권한 행사에는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민생 안정이나 관료제를 통한 치안 유지 등이다.
한편 서양사에서 근세의 특징은 중상주의와 절대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사에서는 절대 왕정 시대 중상주의 정책은 간단히 표현하면 국내에서 국가 권력의 확장과 대외 전쟁의 수행을 위한 정책이었다. 이를 위해 절대 왕정 시대에 성장한 강력한 중앙 정부는 지방의 봉건 세력을 억누르고 지방 간의 소통과 무역의 장벽을 제거하여 국민 경제를 탄생시켰으며, 이는 상업 혁명, 나아가 근대의 산업 혁명 시대로 발전하는 초석이 되어 주었다.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보면 조선시대의 공권력의 안정은 결과적으로 근대에 나타나게 될 국민의식과 국민경제에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에 파묻혀 후에 나타날 자본주의 시대에 대응하지 못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자세히 알고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성리학이 지향했던 것은 안정된 중앙집권이며 경제개혁은 중앙집권의 개혁정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례로 조선말에 등장한 호포법은 조선후기 경제 개혁인 대동법을 기반으로 나타났다. 대동법은 조선전기에 과전법에서 직전법까지의 세제개혁이 완수되었기에 가능했던 개혁이다.
- 양반: 조선 시대의 양반 사대부들을 귀족 계층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이들은 정치인을 배출하는 공무원 관료 집단들이다. 양반은 봉건 귀족들처럼 나라에서 보장해주는 혈통으로 세습되는 게 아니며, 봉건제처럼 자기 강역에 멋대로 조세권으로 벌어먹는 귀족이 아니었다. 조선의 양반의 “혈통” 상 신분은 서민과 똑같이 “양인”이었지, 그 외의 권리와 혜택은 사대부라는 공무원/관료 직책에 따라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주와 소작농은 민간인들의 계약이지 그렇다고 소작농이 혈통으로 세습되는 신분은 아니다, 그리고 지주=양반은 더더욱 아니다) 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귀족 계층은 직위를 세습하였으나 조선 건국 이후로 국가의 중앙 집권화로 인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양반 사대부들은 과거제나 능력으로 선발된 전통 관료제 문화의 상징이다. 음서제가 있어도 그리 많지 않고 요직에 못 앉히며, 그 개념이나 과정에 있어서 삼국과 고려의 귀족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당연히 돈과 연줄 있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았지만 그게 귀족처럼 혈통빨로 정부가 주는 혜택이 아니다. 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한적인 개념이 아니라 특권을 집단적으로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학술 용어다. 좀 알고 쓰기 바란다.
- 주막: 현대 사극에 등장하는 주막은 조선 후기 화폐 경제 발달의 산물로 등장, 보편화된다. 이전 시대는 드물었다고 보면 된다.
- 포수
- 판소리
- 수원화성: 왕의 특명하에 계획적으로 건설한 요새이다. 서양의 건축 서적인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제작하였으며, 근세의 상징인 벽돌과 포진지, 무엇보다 성을제작하는 과정이 들어간 서적과 동원된 노동자들의 임금내역까지 기술되었다는 게 놀랍다. 이 문헌만 있으면 화성이 소실되어도 그대로 복원할 수 있을 정도. 수원화성은 명목상 군사시설이지만 본래의 목적은 왕권의 강화와 소상공인의 육성이라는 실제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민화
- 지도: 조선 시대 이후 지도의 제작이 활발하기 시작했다.
- 엽전
- 곰방대: 현대에는 궐련, 전자담배가 있으면 근대에는 시가가 있었다. 그럼 그 이전인 근세에는 이것이 있었다. 곰방대는 동아시아식 일종의 파이프 담배이다.
- 암행어사: 관료제가 자리잡은 근세의 상징. 일본의 미토 고몬과 비슷한 포지션이다.
- 환도: 냉병기와 화약 무기가 공존하던 한국 근세 전쟁사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다. 조선의 환도는 기본적으로 활이나 총과 같은 무기의 보조 무기로 사용되기 위해 띠돈 형식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착용하였다.
- 훈민정음: 오늘날 한글의 옛 이름.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성장하는 서민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 하멜 표류기: 중국에 동방견문록이 있으면 조선에는 이 서적이 있다. 서양인이 전통시대 한국을 방문하여 기술한 책으로 실은 하멜이 네덜란드 정부에 배상금을 타내기 위해 기록해둔 청구서이다...
- 연행사, 조선 통신사: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두 사절단이다. 각각 중국과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소중화사상에 얽메여 오랑케라고 무시한 조선인들이 청나라와 일본을 방문하면서 자기보다 발달된 문명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는 건 공통점. 즉, 이 시대는 중화사상 중심의 세계관이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들이 활동했던 17~19세기는 동아시아사를 통틀어 가장 번영하고 안정된 시기였다. 참고로 조선후기는 조선전기와 달리 유목민족이나 왜구의 침략 때문에 고생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3.3. 중국
중국사에서의 근세는 송~청대까지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기존 시대와는 달리 송대 이르러서부터는 춘추 전국시대나 5호 16국 시대, 5대 10국과 같은 장기적인 권력의 공백이 나타나지 않고 바로바로 통일 왕조로 교체되어 나갔다. 이에 대한 비결은 송나라 때 이룩했던 문치주의와 서민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송원명청 왕조를 거치면서 한족과 이민족들은 번갈아 중원의 주인이 되었고 이는 중국사의 권력 이동 과정이 굉장히 안정적이고 유동적으로 공유되었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다.[11] 즉 중국 고대사가 열국의 혼란과 통일 왕조의 등장. 중세사가 호한의 대립과 분열과 재통합이라면 근세사는 호한의 통일 왕조의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 성리학: 송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문치주의는 이후 중국사에서 더이상 거대 혼란기 를 볼 수 없던 중요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을 필두로 한 이 사상은 이후 한국과 일본의 중앙 집권화에 영향을 끼친다. 비슷한 시기 유럽이 종교를 내치고 국왕이 친정을 선포했듯이, 동북 아시아는 비대해진 중세 불교계의 정치 참여를 제한시키고 유교를 기반으로 한 관료 사회를 완성하였다.
- 변발
- 정화의 함대: 서양의 대항해시대(콜럼버스)와 비교되기도 한다.
- 서양 선교사
- 은화
- 관료제: 송나라부터 근세로 평가되는 이유는 관료제에 의한 안정을 들 수 있다. 포청천의 배경이 송대인 이유 중 하나.
- 조총, 홍이포 총포와 더불어 전장에서 활약한 화약 병기.둘 모두 유럽에서 도입되어 전쟁사를 바꿔놓았다. 명대까지 고전하곤 했던 유목민족과의 전투에서 확실히 우위를 점하게 된다. 북방 유목 민족들이 창궐하여 중원을 위협했던 시대는 청대에 이르러 일망타진 된다.
- 중국 4대기서 송나라 때 연극에서 시작하여 문학으로 정착되었다. 역사서에서 출발했지만 여기에 서민들의 욕구가 반영되어 창작된 중국 대중 문화의 시초격이다. 중국 4대 기서의 종류로는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로 나열되지만 금병매 대신에 홍루몽이 들어가기도 한다.
- 북경 원나라, 명나라 이래로 현재까지 중국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한반도의 서울과 더불어 행정 중심적인 성격을 가진 도시이다.
- 경극: 한국에는 판소리, 일본에는 가부키가 있으면 중국에는 경극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연극 모두 근세 서민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 유네스코 무형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3.4. 일본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열도는 사실상 열국 시대나 다름 없었다. 일본 원주민들과의 사투, 해적과 도적의 창궐, 다이묘들의 잦은 반란 등으로 성숙한 치안과 중앙 집권이 보장되지 못햇다. 하지만 도쿠가와 시대 이르러 전란이 종결되고 성리학 이념을 내세워 전례없는 태평성대를 완성시킨다. 에도 막부는 중국의 송나라와 더불어 동북아 역사에서 화폐 경제와 서민 문화가 발달된 시기로 꼽히고 있다.[12]
- 일본도: 촌마개에 검 두자루를 차고 있는 흔한 사무라이의 모습은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로부터 정립되었다. 대중매체로 인해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무라이들이 본격적으로 전장에 활약했던 전국시대, 남북조 시대, 겐페이 전쟁 시기에는 사실 일본도보다는 창이나 활이 더 실용적인 무기였다. 칼은 보조무기 혹은 예장용이라고 봐도 될 정도.. 전란이 종결된 에도 시대에 들어서 일본도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 맥락에 변한 상위 계급의 상징이다. 에도시대의 일본도는 계급의 상징이었을 뿐 그만큼 부시 계급이 무력을 휘두르는 일은 엄하게 통제되었다.
- 난학
- 덴푸라
- 후미에: 에도 시대 크리스트교 신자를 박해했던 수법이다. 일본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천주교 신자가 나타나 세력을 키우는 등 공권력과 대립하는 장면이 보이면 거의 동북아의 근세사라고 보면 된다. 동시대 중국 청나라나 조선 후기에서도 천주교가 포교되고 교세가 성장하는 일은 형태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하게 일어났다.
- 은화
- 우키요에
- 가부키
- 다도
- 도자기
- 국학[13]
- 카케코미
- 추신구라: 일본 에도 시대의 대의명분이나 도덕관념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연극이다. 에도 시대 막번체제의 시대상과 중앙정부의 힘, 서민문화가 모두 들어간 일본의 삼강행실도라고 할 수 있다.
- 미토 고몬: 일본판 암행어사. 중앙 권력과 서민의 욕구가 반영되어 부패한 관리들을 처단하는 이야기. 일본 사극의 단골 소재라고 할 수 있다.
[1] 한국의 경우 1392년 8월 5일부터 1897년 10월 11일까지.[2]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을 필두로 한 교토대 계열 학파에서 두드러진 성향이다. 도쿄대 학파는 초기에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 다만 명심해야 할 점은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구분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닌 것이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이 시대 구분 방식에 '생산력'과 '생산 수단'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다.[4] 특히 임진왜란 이후.[5] 사실 유럽 기준으로 근세를 정의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유럽식 시대 구분론 자체가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형태로 이뤄졌고, 이것이 현시점에 와서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면 근대, 그 이전이면 중세'''라는 쌈박하고 심플한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르네상스는 대부분 중세로 취급된다. 다만 예술사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를 따로 구분한다.[6] 특히 일부 연구자들 가운데서는 '장기 중세'라고 하여 18세기까지도 중세로 간주하는 시각이 존재한다.[7] 대체적으로 산업 혁명, 프랑스 혁명을 시점으로 보고 있다.[8] 조선시대의 시기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초기와 중기의 분기점은 연산군의 재위기간이었다. 연산군은 왕권을 무리하게 남용하다가 신권에 의해 퇴위된 조선시대 첫 사례이다. 현재, 중종반정이 발생한 이후가 조선중기로 평가되고 있으며, 실재로 지방 사림들의 정계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형세는 조선후기 숙종대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숙종 재위 이후에는 강력한 왕권으로 다시 왕권이 신권을 압도하게 됐다.[9] 제국 초창기에는 '지배층 = 튀르크인'이라는 공식이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에는 제국의 지배층에서 튀르크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서서히 감소하고, 쉴레이만 대제 시대가 되면서 튀르크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다만 이것은 인종적인 이야기지, 공용어는 여전히 페르시아어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오스만 터키어였고, 지금 터키인을 터키에 사는 터키어를 쓰는 사람으로 정의함을 생각해보면 이들도 어찌보면 터키인으로도 볼수 있다.[10] 이들을 일컬어 키질바시(Qizilbash, '붉은 머리')라 한다. 머리에 붉은 모자를 쓰는 것이 특징이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아바스 1세 때까지 지배층의 대다수를 이루었다.[11] 송나라 이전의 중국사를 공부해보면 알겠지만 가지각색의 왕조들과 지방 정권의 할거 등으로 인해 국가명 외우는데도 매우 벅찬 수준이다. 통일 왕조들마저도 단명하거나 장수한 왕조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중간에 한번 계통이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12] 재밌는 사실은 한국에서 상업경제가 활발한 시기는 아무래도 고려 시대와 조선 후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고려 시대는 당시 송나라와 대치하고 있었으며 조선 후기는 이웃에 도쿠가와씨가 자리잡고 있었다.[13] 링크에 쓰여 있는 국학 말고 17세기 일본에서 나온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