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성

 


병풍 그림에 남아있는 에도 성 천수각
(((じょう
1. 개요
2. 역사
3. 구성
4. 관광


1. 개요


에도에 있던 . 현재는 천황의 거처로, 고쿄라고 불린다.

2. 역사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씨의 가신인 오타 도칸이 1457년에 쌓은 요새가 에도 성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지만 헤이안 시대 말부터 에도 씨가 거성을 축조했다는 설도 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후호조씨를 멸망시킨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간토를 영지로 받으면서 에도 성은 도쿠가와 가문의 거성이 되었다.[1] 그때까지도 에도 성은 변변치 못한 성이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후 에도 성은 천하보청으로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거대한 규모로 탈바꿈했다.
칸다 산을 통째로 해체하고, 해안 부분을 매립해 광장을 만드는 등 기초 공사부터 대단했다. 이 공사는 2대 히데타다, 3대 이에미츠 치세까지 계속되었다. 유력 다이묘들도 에도 성 수리에 동원되었는데 그 명단이 화려하다.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테루마사, 다테 마사무네[2], 우에스기 카게카츠, 호소카와 타다오키[3].. 도중에 재난도 많아 천수각도 두 번이나 재건되었다. 1657년에는 메이레키 대화재로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이듬해 재건에 착수했지만 천수각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후로 에도 성에는 천수각이 없는 채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후에도 지진과 낙뢰 등으로 여러 번 피해를 입었는데 짐작하다시피 다이묘들이 일제히 복원을 도왔다.
[image]
대정봉환 이후 메이지 시대부터 천황의 거처가 되었는데, 이후로도 1923년 관동 대지진, 1945년의 도쿄 대공습으로 피해를 입었다. 현재 에도 성의 모습은 많이 사라진 상태. 고쿄의 히가시교엔이 과거 혼마루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흔히 알려진 에도성+고쿄만이 진짜 에도성의 전부가 아니라 현재 에도성과 고쿄는 내성에 해당되며 내성 밖 일부 지역들[4]이 사실상 외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외성 밖에는 소토보리(外濠)라는 이름의 해자[5]를 두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하여 일부가 매립되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참고로 도쿄도 405호 도로의 별명인 소토보리도리는 이 소토보리를 둘러싸듯 지나가기에 붙여진 명칭이기도 하다.
에도성은 석조 부분도 있지만 토성 부분도 적절하게 섞여있는 것이 특징.
대신 모형으로 공개하였다.#

3. 구성


  • 천수각 (天守閣): 위에서 서술했듯 17세기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쇼군의 거처인 에도 성이 천수각이 재건되지 않은 것은 도쿠가와 쇼군가의 지위가 튼튼해지고 전쟁이 사라져 천수각의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에도 막부는 위의 명분을 들어 각지의 성을 폐쇄하고 다이묘가 천수각을 가지는 것을 막으려 했는데, 에도 성에 천수각을 다시 세우면 이 주장의 설득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까닭이기도 하다. 현재는 건물을 떠받치던 돌 기단만 남아 있는 상태. 일각에서는 재건 운동도 벌이는 모양이다.여기
  • 오오쿠 (大奥): 쇼군가의 자녀와 여인들이 머무르던 공간.
  • 나카오쿠 (中奥): 쇼군이 머무르면서 정무를 보던 공간.
  • 오쿠다이도코로 (奥台所): 에도 성의 수라간.
  • 오모테무키 (表向): 쇼군 알현 의식을 치르던 공간.

4. 관광


에도성 천수각 터는 고쿄 히가시교엔을 방문함으로써 직접 가볼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휴관일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1] 호조가 관동을 지배하던 시절의 호조의 본거지는 관동 서쪽 입구에 해당하는 오다와라였다. 에도는 이에야스가 새로 정한 중심지였다.[2] 다스리던 센다이번의 인력 42만명, 2만7천량(현재 돈으로 36억엔)을 제공해야 했다[3] 열거된 다이묘들은 죄다 도자마 다이묘들이다. 에도막부는 도자마 다이묘들의 세력 약화도 꽤할 겸 큰 공사 등이 있으면 도자마측 들을 동원했다. [4] 현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치요다구,미나토구,신주쿠구,주오구 등의 일대에 해당된다고 한다.[5] 내성 역시도 해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