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두정치
1. 개요
1차 삼두정치는 공인된 국가기구나 법제가 아니었으며 그냥 세 사람 사이에 집정관을 돌려막는 협정에 불과했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에 집정관으로 당선되었고, 이후로는 갈리아-일리리아 등 3개의 속주 총독으로 갈리아 원정을 10년간 지휘하였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에 공동 집정관을 지냈으며 폼페이우스는 재해권을 전담하고(!), 크라수스는 동부지역 속주 총독을 지냈다.
2차 삼두정치는 형식적으로는 3인 위원회로 집정관를 나눠먹은 거지만 실질적으로는 호민관과 원로원의 업무까지 대부분 실행했기 때문에, 사실상 견제 불가능한 최고 통수권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2. 두 삼두정치의 비교
- 제1차 삼두정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제2차 삼두정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1~2차 삼두정치 모두 외형적 형태와 결과가 거의 똑같이 나왔기 때문에 각각의 구성 인물들의 능력이나 성격, 그리고 사건의 진행 과정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두 사건의 상세한 진행 과정과 인물들은 서로 다른 측면이 많다. 대표적으로, 1차 삼두정치는 원로원과 대립했을지언정 비공식적인 연합으로 남았고 원로원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던 반면, 2차 삼두정치는 결성 직후 원로원을 숙청해버린 후 공식적인 직함을 가진 위원회로 활동했다. 이는 1차와 2차 삼두의 이름값과 상황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인데 1차의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는 다들 로마의 거물급 정치가라서 원로원이라 해도 이들과 직접 맞설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2차의 경우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것만 제외하면 아직 어린 소년이었고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절대적 1인자 카이사르의 부하 중 주요 인물일 뿐이었으며[1] 당장 카이사르의 암살자들과 키케로 등 공화주의자 세력이 원로원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이를 숙청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 1차 삼두정치는 초반에는 폼페이우스만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2차 삼두정치 때는 셋 다 자신의 사병이 있었다. 그리고 1차 삼두정치는 크라수스가 죽을 때까지 셋 다 로마의 최고 유력자 지위를 잃지 않았고 비교적 신참인 카이사르가 앙숙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지만, 2차 삼두정치는 보노니아 협정을 주선했던 레피두스가 필리피 전투를 기점으로 권력구도에서 사실상 배제되면서 일찌감치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의 양자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1차 삼두정치는 폼페이우스에 비해서는 세력이나 명성이 모자라던 카이사르에 그의 후원자 격이었던 크라수스가 더해져 결성되었지만, 카이사르는 집정관 선출 이후 갈리아에서의 군공으로 군사적 명성에서 크라수스를 금방 추월했고 폼페이우스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크라수스의 경우는 시작될 당시엔 본인은 물론이고 당시 로마인들 대다수가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의 중요인물로 여겼지만[2] , 점차 곁다리로 밀려났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한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다 스스로 자멸했다. 이들의 관계가 결렬된 건 크라수스가 사망하면서 셋이 서로를 견제하던 구도가 1대1로 변질된 한편,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의 사망으로 두 사람 사이의 인척관계가 끊어지고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와 접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2차 삼두정치는 결성 과정에서는 레피두스가 주도권을 잡았지만 삼두정 결성의 고작 1년 뒤인 필리피 전투 이후로는 옥타비아누스의 부하나 마찬가지로 전락하였다. 레피두스는 처음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보다 강력한 세력이었고 다른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해 삼두체제 성립을 주도했으며 삼두체제가 출범한 직후에도 갈리아 지역 노른자위 땅을 차지한 안토니우스와 비슷한 세력에 자신에게 분배된 시칠리아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지배하에 있었던 옥타비아누스보단 훨씬 강력했다. 그러나 군대를 이끌고 브루투스, 카시우스 세력과 싸우는 대신 본토 방위를 맡은 것이 패착이 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단을 전부 빼앗겨 실권을 잃었다. 페루시아 전쟁에서는 로마 방어를 맡았다가 쫓겨나 옥타비아누스에게 도망치는 등 굴욕을 당하다가 군단 몇 개를 받아 아프리카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최고 권력을 노릴 만한 위치에서는 일찌감치 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필리피 이후로 삼두정치는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립 구도였고 거기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레피두스를 끼워넣은 것에 불과했다. 레피두스는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토벌에 적극적으로 참전, 승리했지만 직후 팽당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영역인 아프리카[3] 에 더해 레피두스에게 약속된 적이 있었던 시칠리아를 요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당당히 레피두스의 캠프로 가서 레피두스의 눈 앞에서 레피두스의 부하에게 직접 배반을 권유'''하여 레피두스 부하 모두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가버린 것이다.
삼두가 각자 군대를 보유하고 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은 카이사르 파였고 이들이 가진 군대도 본질적으로는 카이사르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레피두스의 부하들을 회유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카이사르 파의 헤게모니를 옥타비아누스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의 일개 부하였던 데다 이미 권력 투쟁에서 한참 밀려났던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받은 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데 더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일소하고 서방의 지배권을 확고히 한 상태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회유하자 금세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3. 현대 민주주의의 삼권분립과 비교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의 정치체제인 삼두정치가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본인 삼권분립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이는 몽테스키외의 업적이기도 한데 몽테스키외는 오랫동안 삼두정치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했고 삼두정치를 변형시킨 이른바 '''삼권분립'''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여 1인 독재의 출현을 방지하려 했다.
몽테스키외는 집정관이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어났는데 왜 로마의 공화정은 몰락하고 오히려 제정이 되었는가를 진지하게 연구했다. 몽테스키외는 세 명이든 네 명이든 권력자가 입법, 행정, 사법 등 국가의 모든 기능을 틀어쥐면 결국 민의는 무너지고 권력자들끼리의 암투가 벌어져 누가 이기든 최후의 1인에 의한 독재는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설령 권력자가 한 명만 남지 않고 계속 두 명 이상이라 해도 그들 모두가 국가의 모든 기능을 틀어쥐면 1인 독재보다 더 심각한 군벌들의 암투로 시민이 고통받게 된다고 결론지었다.[4]
결국 삼두정치를 연구한 몽테스키외가 내린 결론은 단순히 권력자가 둘 이상이라는 것만으로 시민의 권익이 보호될 수는 없으며 아예 권력의 기능을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이렇게 셋으로 분산시켜서 각각의 권력자에게 따로따로, 그리고 독점적으로 나눠주고 그 대신 서로의 권력 기능은 침해하지 않고 견제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면 로마의 공화정은 붕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각각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중 어느 하나씩만 행사했다면 한 명의 황제가 모든 권한을 휘두르는 정치체제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려면 단순히 복수의 권력자가 아니라 아예 국가의 권력 기능을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셋으로 나눈 구조적 정치 체제로 정치판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몽테스키외는 로마의 삼두정치를 진지하게 연구해서 삼두정치의 업그레이드(?)판인 삼권분립이라는 개념을 창안하게 된다. 즉 삼두정치는 일종의 반면교사로써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본인 삼권분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4. 가공 매체에서
현실과 마찬가지로 셋 중 실질적인 리더가 있는 경우가 많다.
- Warhammer 40,000 - 고대 네크론티르 제국이 삼두정 체제였다. 그리고 호루스 헤러시 당시 인류 제국이 멸망한 걸로 착각한 로버트 길리먼이 세쿤두스 임페리움(제2제국)을 선포하고 그의 주도 하에, 생귀니우스가 황제에 즉위하고 라이온 엘 존슨과 함께 삼두정치를 할 예정이었다.
- 리그 오브 레전드 - 녹서스 제국은 원래 황제 1인이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는 전제군주제였으나, 제리코 스웨인의 쿠데타로 보람 다크윌 황제가 처형되고 '트리파릭스(힘의 3원칙)'라고 불리는 녹서스 특유의 사상을 하나씩 대표하는 3인의 지도자가 제국을 이끌게 되었다.
- 스티븐 유니버스 - 젬들의 고향인 홈월드가 옐로 다이아몬드, 블루 다이아몬드, 화이트 다이아몬드가 다스리는 삼두정 체제다.
- 스타워즈 레전드 - 시스 삼두정은 다스 트레이야, 다스 니힐러스, 다스 사이온이 이끄는 삼두정 체제의 시스 군단이다.
- 얼음과 불의 노래 - 삼두정, 볼란티스
- 워크래프트 시리즈 - 아르거스의 에레다르. 살게라스가 오기 전에 킬제덴, 벨렌, 아키몬드가 이끄는 삼두정이었다. 원래는 킬제덴과 벨렌의 쌍두정이었다가 후에 아키몬드가 지도자로 인정을 받아 삼두정이 완성된 경우.
- 헤일로 시리즈 - 코버넌트(헤일로 시리즈)를 진실의 사제, 비탄의 사제, 자비의 사제 3인방의 삼두정이 다스린다. 선대 인류 문명도 삼두정치였다.
- 파이브 스타 스토리 - 가마샨
[1] 사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었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으로 정통성을 얻었고, 카이사르 암살 당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와 공동 집정관, 레피두스는 독재관 카이사르의 2인자인 기병대장을 맡고 있어서 충분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다.[2] 초창기엔 오히려 카이사르가 곁다리로 여겨졌다. 군사적 전공도 비교적 적었고 크라수스와의 채무로 엮여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것이 당시의 카이사르였다.[3]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아프리카 대륙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중 지중해와 맞닿은 북아프리카 지역을 말한다. 과거 카르타고나 누미디아 등의 나라를 정복하고 그 곳을 아프리카로 불렀다.[4] 이는 오늘날 군벌이 난립해 내전 중인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나타난다.